“항우연에는 활주로가 없어서 시험비행을 하려면 기체를 모두 분해해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한국항공대학교까지 가야 했습니다. 쓰지 않는 격납고를 한 칸 빌려 며칠간 재조립을 한 다음에야 비로소 비행기를 띄울 수 있었죠.”
2001년 9월 반디호가 처음으로 하늘을 날 때(사진은 당시의 기념촬영)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소형기그룹을 이끌었던 김응태 책임연구원(47·뒷줄 왼쪽에서 여섯번째)의 소회. 연구초기, “성과가 있겠냐”며 개발사업을 백지화하려 했던 몇몇 정부 관계자의 우려를 극복하고 이룬 성공이라 더욱 뜻 깊다고 한다.
김연구원은 “이제 제작기술을 산업화해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일만 남았다”며 활짝 웃어 보인다. 남·북극점 왕복비행은 이를 위한 디딤돌이라는 것.
“이공계 기피다 뭐다 말이 많잖아요. 요즘 어린 친구들은 영악해 이익만 따지지만, 우리가 자랄 땐 꿈이 있었어요. 반디호도 그 꿈이 이뤄낸 열맵니다. 꿈이 없으면 경제도, 미래도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