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별 사업장, 산별노조 범위 뛰어넘는 문제에 나설 터
- ‘의식화 교사’들의 행동은 ‘전문직’의 소신에서 비롯된 것
- 교섭 중시해 노사정위 적극 활용할 생각
- 4·15 총선, 울산·창원·수도권에서 민주노동당 집중지원
- 노동귀족, 민주노총 산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 북한 인민들의 자존심과 자주성 지키기 역사적 의미 있다
그는 “우리 입장을 알리기 위해 언론매체가 요청하는 인터뷰를 되도록 사절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단병호씨가 이끌던 민주노총과 달리 국민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일까.
‘우리를 바꾸자, 세상을 바꾸자.’
이 위원장이 내걸었던 선거 구호다. 그는 운동기간 내내 대화와 타협을 강조했다. 단병호 전 위원장 체제에서 수석부위원장을 지낸 유덕상 후보는 이 후보의 온건노선이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고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조합원뿐만 아니라 국민으로부터도 고립되고 있는 위기의 민주노총을 바꿔야 한다”고 맞섰다.
민주노총 하면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강력한 거리 투쟁을 주도하던 단병호 위원장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과연 단 위원장이 떠난 민주노총은 이 위원장의 의도대로 변신에 성공할 수 있을까. 단 위원장은 퇴임을 앞두고 “변화와 혁신은 필요하지만 민주노총은 어디까지나 민주노총”이라며 “이 점을 새 집행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임 이 위원장의 노선에 대해 강경한 흐름을 주도하는 쪽의 우려를 대변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를 바꾸자, 세상을 바꾸자’
노동계는 물론 정부와 경제계가 전교조 위원장 출신의 신임 민주노총 위원장을 주목하고 있다. 그는 평생 ‘온건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아니다. 전교조의 산파로 10년 동안 해직의 고통을 겪었고 오랜 수배생활과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이 위원장은 서울 노원구 하계동 26평형 아파트에 산다. 1억3000만원짜리 전세다. 작은 방 3개를 5인 가족이 나눠 쓰는 전형적인 소시민 가정이다.
그의 집에 들어서니 응접실 벽에 ‘霜松常靑’이란 글씨가 걸려 있다. 서리를 맞아도 늘 푸른 소나무처럼 시련과 어려움이 닥쳐도 절개를 굽히지 말라는 뜻이다. 악필(握筆)을 하는 서예가가 그의 사주를 보고 써준 글씨라고 했다.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 당시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대결구도’라고 쓴 신문기사가 있더군요. 민주노총 안에서도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구분이 존재합니까.
“유덕상씨도 한국통신 소속이니까 블루칼라는 아닙니다. 뭐든 대비시키는 것을 좋아하는 언론이 공연히 만들어낸 말이죠. 민주노총은 노동자들의 계급성이라는 바탕 위에 서 있습니다. 노동자는 모두 평등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할 주체이기 때문에 차별이 있을 수 없죠. 초대 민주노총 위원장만 해도 언론인 출신인 권영길 현 민주노동당 대표가 맡아 무난하게 수행했습니다. 민주노총 안에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구분은 없어요.”
-언론이 ‘민주노총’ 혹은 ‘민노총’을 혼용해 쓰는데 어느 쪽이 듣기 좋습니까.
“공식적으론 ‘민주노총’입니다. 우리 이름이니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불러주는 게 좋죠.”
-민주노총 기관지 ‘노동과 세계’가 주최한 정책토론에서 유덕상 후보가 “저항의 시대가 끝났다느니 조합원이 지쳐 있다는 말 등은 노동운동을 혼란으로 몰아갈 수 있다”고 공격했던데요.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누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따졌더니 유 후보가 얼버무리고 넘어가더군요. 표현에 차이가 있습니다. 무리한 파업과 거리 투쟁으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힘들어한다는 말은 했죠. 근로자들이 내용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동의하지 않는 투쟁에 자주 동원돼 상당히 힘들어하고 있다고 한 적은 있습니다.”
-당선 후 여러 지면에 나온 인터뷰를 찾아 읽었습니다. 전임 민주노총 집행부가 싸움은 열심히 했지만 노동자들 손에 쥐어진 것이 없다고 말했더군요.
“한두 번 싸워 성과를 얻을 수 없는 거창한 이슈를 내걸고 총파업을 했습니다. 예컨대 신자유주의나 경제특구법 같은 것 말이죠. 그게 당장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조합원들이 필요성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경우도 있어요. 지나친 투쟁이라는 비판만 받고 구체적으로 쟁취한 것이 없습니다. 거대 담론 또는 큰 이슈를 갖고 무리하게, 그것도 최고의 싸움 수준인 총파업 투쟁을 벌이는 데 따른 조합원들의 불만이 컸습니다.”
-전교조 위원장을 하면서 상급단체인 민주노총이 무리한 총파업에 참여하라고 요구할 때는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전교조는 법률상 파업을 할 수 없는 조직입니다. 단체행동권에 제약을 받는 거죠. 민주노총이 발전노조 매각에 반대하며 총파업을 결정했을 때도 전교조는 학교 대표 한 사람이 파업하는 시간에 맞춰 조퇴해서 참여하는 정도였지요. 그렇게 했는데도 발전노조 파업하는 데 교사들이 왜 나서느냐고 비난받았죠.”
“화염병에 대해선 부정적”
-지난해 11월 민주노총이 전태일 열사 분신 33주기를 맞아 벌인 거리 투쟁에서 화염병과 쇠파이프가 등장하고 새총으로 볼트 너트를 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시민으로부터 욕을 먹을 게 뻔한 그런 거리 투쟁을 꼭 해야 했습니까.
“무리한 손해배상소송과 가압류로 인해 노동자들의 생존권 자체가 위협당하고 있었습니다. 두산중공업 배달호씨와 한진중공업 김주익씨가 그 문제로 자살하지 않았습니까. 노동운동 자체를 부정하고 생존권을 노골적으로 위협하는 현실 앞에서 상급단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거죠. 다만 화염병에 대해선 부정적입니다. 노동운동의 폭이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넓게 퍼져 있습니다. 그런 판을 이용해 구성원 일부가 그렇게 한 거죠. 그렇더라도 민주노총은 전체를 끌어안고 더 책임지는 태도로 나왔다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민주화가 이뤄졌고 민주노총과 전교조도 합법화됐습니다. 노동운동 방식도 과거 권위주의 시대와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위원장도 취임 인터뷰에서 건강한 상식에 의한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는 말을 했던데….
“선거 구호가 ‘우리를 바꾸자, 세상을 바꾸자’였습니다. 우리를 먼저 바꾸겠습니다. 사회변화 속에서 노동운동이 지향할 방향이 어디인지 바로 알고 올바르게 가자는 것입니다. 조합원들에게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우리를 바꾸자’고 해서 선택받았습니다.”
-선거공약 중에 전 산업이 참가하는 ‘준비된 총파업’이 들어 있더군요. 아까 단병호 위원장의 무리하고 과다한 총파업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했지만 국가경제와 민생에 엄청난 충격과 불편을 몰고오는 총파업은 되도록 자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싸움을 제대로 하자, 꼭 할 싸움이라면 준비해서 하자는 말입니다. 노동3권은 기본적으로 자본과 사용자 그리고 정권에 맞서 저항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총연맹은 단위노동조합 또는 여러 연맹의 상급단체로서 노동자들의 결집체입니다. 개별 사업장의 문제라면 그 곳 스스로 해결하면 됩니다. 그러나 한 사업장이나 산별노조의 범위를 뛰어넘는 물결과 정책에 대해서는 민주노총이 나서야 합니다.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자본의 세계화가 진행돼 경쟁을 부추기면서 노동자들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민주노총이 떠맡아야 할 전체 노동자의 문제이지요.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도 노동자의 생산력이 급격히 떨어지거나 노동자들이 잘못해서 생겨난 게 아닙니다. 한보 기아 등 몇 개의 큰 기업이 흔들리고 투기자본이 일시에 빠져나가면서 문제가 커진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 책임을 고스란히 노동자들이 졌어요. 민주노총은 전체 노동자와 민중의 이해를 지킬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전체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싸울 일이 발생하면 민주노총이 그 중심에 서겠습니다.”
“선생님 잡아가면 시험 거부하겠다”
그는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경북 울진군 근남면 제동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전체 3학급짜리 신설학교였는데 시골학교라 교사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이 학교의 교감은 이 위원장의 모교인 대구 계성고의 담임 교사였다. 은사가 제대하는 이수호 교사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이 교사는 이 학교 1회 학생들을 가르치며 “너희들은 시골에 처박혀 있으면 안 된다. 세상은 넓다. 도시로 나가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 제자들이 졸업할 무렵 이 교사는 서울의 신흥명문 신일고로 찾아갔다. 계성고 은사 두 분이 신일고 교감과 교무부장으로 있었다. 산골 중학교 교사는 구두가 없어 운동화를 신고 결혼식때 입었던 단벌 양복을 걸치고 은사들의 소개로 교장을 만났다. 교장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지금은 빈 자리가 없지만 자리가 나면 연락하겠다는 말을 했다. 인사치레의 빈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대구로 내려와 얼마 안 있어 국어교사 자리가 비었다는 연락이 왔다. 이 교사는 1977년 3월 첫학기부터 서울에서 교사생활을 하게 됐다. 그는 1989년 전교조 결성을 주도한 이유로 해직될 때까지 신일고에서 13년 동안 일했다.
집에 걸어둔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의 서예작품 ‘더불어 한길’을 바라보는 이수호 위원장 부부.
“다른 선생님과는 달랐습니다. 보통 선생님들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예뻐했죠. 그런대 이 선생님은 공부 못하고 말썽 피우는 학생들에게 더 신경을 썼습니다.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편이었습니다.”
이 교사는 담임을 맡아 1년 내내 결석자가 한 명도 없는 무결석 학급을 만들었다. 그는 “시골에서는 겨울에 20∼30리 걷거나 자전거 타고 다니는 학생들이 많다. 그런데도 결석하는 학생이 없는데 너희들은 뭐냐”고 서울 학생들을 다그쳤다.
당시 교사사회의 분위기는 어땠을까.
“신일고에 서울사대 출신 선생님들이 많았습니다. 낮엔 아이들 가르치고 밤엔 전부 과외를 하더라고요. 그때가 박정희 시대 말기인데, 교육투자가 소홀해 한 반에 60∼7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바글거렸죠. 학교에서 제대로 공부할 여건이 안 되니 여유로운 계층에서는 과외를 시켰습니다. 학교 수업시간에 열심히 가르치면 되지 부잣집 아이들을 뽑아 밤에 따로 가르치는 것을 나로선 받아들일 수 없었죠. 나는 과외를 안 하고 고려대 교육대학원에 등록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야학을 했습니다. 정릉교회 야학에서 만난 아이들과는 지금까지도 교류를 합니다.”
-YMCA교사회 활동을 시작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교과서 자체가 엉망이었습니다. 유신을 미화하고 박정희 대통령 찬양하는 글들이 그대로 실려 있었죠. 학교도 억압된 상황이었습니다. 교장 마음대로였으니까요. 내가 이런 환경을 고치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면 죄 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지요.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이 벌어졌고 그 정신이 사회 여러 분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에서 학생운동하던 친구들이 교사로 발령받아 나오고 그 친구들을 중심으로 젊은 교사들이 모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 모임도 잘못하면 범죄행위로 몰려 처벌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YMCA를 활용한 것이죠. 여러 지역의 YMCA교사회가 모여 전국 YMCA교사회를 만들었습니다. 당시는 교수 작가 종교인들이 잇따라 민주화선언을 할 때였어요. 1986년 5월10일 YMCA교사회를 중심으로 전국 교사 600여명 정도가 교육민주화선언을 했습니다.
내가 그 선언을 주동해 해직될 위기에 처했는데 신일고 학생들이 구해줬죠. 5월15일 스승의 날에 신일고 학생들이 전부 운동장에 나와 침묵시위를 벌이며 ‘우리 선생님 잡아가면 시험을 거부하겠다’고 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모두 사퇴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못 잘랐죠. 1987년 6월항쟁 후 8∼9월에 노동자들의 대진출이 있었습니다. 교사들도 자주적인 교사단체를 만들자고 해서 전국교사협의회를 결성했습니다. 도망 다니며 싸웠습니다. 1988년 한해 동안 계속 전교협을 중심으로 교육법 개정, 부정비리 척결운동을 벌였지요.”
해직, 수배, 도피, 수감…
전교협은 불법이 아니었지만 활동은 봉쇄당하기 일쑤였다. 법적 근거가 없는 임의단체였기 때문이다. 1988년말 활동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교섭을 통해 현안문제를 협상테이블에서 해결하자는 견해가 구체화돼 1989년 5월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결성됐다.
정부는 전교조가 결성되자 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문교부(현 교육인적자원부)는 전교조에서 탈퇴하지 않은 교사 1519명을 해직하고 42명을 구속했다. 전교조 사무처장이던 그는 가장 먼저 구속돼 6개월을 살고 집행유예로 출감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선공약이었던 전교조 교사 복직을 일부 실천해 1994년 3월 1000명 가량의 교사가 해직 5년 만에 교단으로 돌아왔다. 전교조 활동을 안 하겠다는 내용을 복직원서에 한 줄 써넣어야 복직이 허용됐는데 500명은 이것마저 거부하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 복직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복직됐다.
전교조가 합법화된 후인 1998년 9월 마지막 복직교사 이수호씨가 선린정보산업고에서 첫 수업을 하는 모습이 기사화됐다. 이 교사가 칠판에 ‘새로운 만남’이란 글을 써놓고 ‘반갑습니다’고 말하자 학생들이 박수로 화답했다고 당시 신문은 전하고 있다.
“학생들을 잘 가르쳐보자고 시작한 일 때문에 감옥에 갔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가정이 파탄날 상황이었습니다. 구치소에서 하루에 한 통씩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엽서를 보냈죠.”
그는 출소후 민주화운동 진영에 본격적으로 몸을 담았다. 1991년 6월에는 강경대군 고문치사 사건 때 시위를 벌이다 구속돼 1년9개월을 또 옥살이했다. 이 시절에 쓴 옥중서신 중에서 교육에 관한 글들을 모아 ‘사랑의 교육, 희망의 교육’이란 책을 펴냈다.
수배를 받고 도피중일 때는 형사들이 그가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드나드는 사람을 감시했다. 그의 아내가 외출을 해도 따라다녔다.
-해직, 수배, 도피, 수감…. 고통스러웠을 것 같은데요. 생활은 어떻게 꾸렸습니까.
“당시 대학교수들을 비롯해 일반 시민까지 참여해 서울해직교사 후원회를 만들어 지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해직교사 수가 너무 많아 20만~30만원 정도 보조해줬지요.”
-그 돈으로는 생활이 안 되잖아요.
“전교조 교사가 1000명 가량 복직한 후에는 한달에 100만원 가량 받았습니다. 집사람이 생계를 위해 직업을 갖진 않았죠. 13년 동안 벌어놓은 것 다 까먹고 집도 팔았어요. 두 형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큰형은 목회를 하고 있고 둘째형은 KBS에 근무했습니다. 친척들도 도와줬지요.”
-남자들은 큰 뜻을 품고 그런 고생을 자청했다고 하지만 아내들은 이해 못할 수도 있거든요. 부부싸움은 안 했나요.
“낙관주의라고 할까, 어떻게 보면 무책임하다고 할까 하는 면이 내게 있어요. 아내가 살림을 잘했습니다. 집을 사고 파는 일도 아내 혼자 하고 나는 아무 것도 몰랐거든요.”
전교조 결성은 잘한 일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교사를 노동자로 보지 않는 분위기가 남아 있지요. 선진국에선 교원노조가 오래 전부터 활동하고 있지만…. 수많은 교사들이 해직 구속되는 사태를 피해 전교협을 계속 이끌어가면서 점진적으로 해나갈 수는 없었습니까.
“전교협에서 전교조로 옮겨갈 때 그런 논의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조금 속도를 늦춰 전교협에 더 많은 교사들을 가입시켜 점진적으로 가자는 의견이었죠. 그러나 집중적인 토론을 거쳐 전교조로 가는 것이 옳다는 쪽이 대세를 이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한 거라고 봐요. 그때 제대로 조직을 만들지 못하고 느슨한 채로 왔더라면 결국 노동조합으로 못 갔거나 어용조직 비슷하게 됐을 겁니다.”
-일부 전교조 교사들이 나이 어린 학생들한테 의식화교육을 해 파문이 있었잖아요. 당국이 일부 교사의 문제를 의도적으로 오버랩시킨 측면도 있긴 했지만….
“크게 보면 우리 시대의 아픔이 교육계로까지 밀려온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보다 부풀려지고 잘못 보도된 측면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의식화 교사 사건이 대법원까지 가서 무죄판결을 받았잖아요. ‘민중교육’이란 잡지는 ‘민중’이란 단어 때문에 큰 난리를 겪었습니다. 관련자들이 다 해직되고 심지어 감옥까지 갔지만 결국 무죄판결이 난 뒤 다 복직됐죠.”
-소위 문제가 됐던 ‘의식화 교사’들의 행동이 범죄행위가 아니라는 측면에서는 무죄일지 모르지만 교육적으로 바람직했던 건 아니잖아요.
“교사는 전문직 아닙니까. 전문직 교사가 가르치는 범위 내에서 소신껏 자기 방법으로 가르치고 평가하고 책임지는 것입니다. 교사는 독자적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교조라는 거센 교육민주화운동, 사회민주화운동의 힘에 대해 보수진영과 공안세력에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거죠. 일부 언론은 센세이셔널한 걸 좋아하니까 크게 보도하고….”
-원영만 위원장 때의 일이긴 하지만 전교조의 NEIS 투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교육하는 입장에서 첫째는 교육입니다. 인권은 그 다음이죠. 네이스라는 것이 처음엔 어마어마했습니다. 병역, 재산, 부모의 학력 등 엄청난 정보를 전국적으로 한꺼번에 모아놓으려 했지요. 개인 차원의 접근도 쉽고….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육부는 NEIS를 ‘나이스’라 부르지만 전교조는 ‘네이스’라고 부른다. 나이스는 Nice와 발음이 같지만 네이스는 영어 Nay, 독일어 Nein과 스펠링이나 발음이 비슷해 부정의 뜻으로 들리기 쉽다. 이 위원장은 ‘네이스’라고 계속 말했다. ‘민노총’으로 하지 말고 ‘민주노총’으로 불러달라는 것처럼 NEIS도 교육부의 희망대로 ‘나이스’로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지자 NEIS는 교육부가 독점하는 시스템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불가피하게 정보를 모으더라도 그게 학교 울타리를 넘어서는 안 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전자정부, IT 최강국을 부르짖자 교육부가 너무 급하게 자기 성과로 가져가려고 무리한 거죠. 700억원 가량 들여 구축한 CS를 폐기하고 네이스라는 어마어마한 새 시스템을 일방적으로 도입하려 했습니다. 우리는 비교육적이었던 부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겁니다.”
“교장 중심 학교운영이 교육발전 걸림돌”
-민주노총 위원장이 됐지만 이수호라는 이름 석자는 전교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묻는 건데요. 전교조에서 교장 선출제를 주장하던데 일부 대학에서 폐해가 심한 대학 총학장 직선제를 점차 없애는 쪽으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일엔 양면이 있습니다. 보완책을 치밀히 만들었습니다. 초·중·고교 교육에서 교장 교감 승진 문제는 아주 심각합니다. 과도하게 교장 중심으로 돌아가는 학교 운영이 교육발전의 걸림돌입니다. 과거 장천감오(長千監五)란 말이 있었습니다. 교장 승진하려면 1000만원, 교감은 500만원 써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그 돈이 교육감한테 갔나요.
“물론이죠. 교육감이 인사권을 갖고 있으니. 잘 가르치고 유능한 선생님이 능력을 인정받아 교장이 되는 게 아니라 점수의 노예가 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에 잘 보여야 합니다. 30대 중반쯤 되면 아이들 가르치는 쪽으로 갈 건지, 교장 교감 되는 쪽을 택할 건지 결단을 내려야 하는 형편입니다.
이번에 말썽난 제주 교육감 선거를 보세요. 그런 제도를 그냥 두고는 교육 현장을 바꾸기 힘들다는 문제의식에서 교장 선출제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여러 보완책을 마련해 단계적으로 실시해 들어가면 큰 문제 없이 학교를 개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직 교장 교감들이 가로막고 있어 시행되기 어렵겠지요.”
전교조가 주장하는 교장 선출보직제는 교장 임기 2∼3년을 마치면 다시 평교사로 돌아가는 제도다. 대학을 제외한 초·중·고교 교원수는 대략 40만명 정도 되는데, 이 중 전교조 교사가 9만5000명이고 교총 소속은 15만명 가량 된다. 현직 교장 교감은 주로 교총에 가입하고 있다.
-전교조가 가끔 집단조퇴, 집단연가투쟁을 하는데 이것은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급료를 올려달라거나 근무조건을 좋게 하기 위해 그런 투쟁을 하는 게 아닙니다. 교육노동 즉 수업은 날짜를 옮겨 할 수도 있고 장소를 바꿔 할 수도 있습니다. 조퇴하거나 연가를 낼 때는 수업을 미리 하거나 뒤에 해서 시간을 다 채워줍니다. 염려하는 것처럼 수업 결손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전교조 위원장 시절 집단연가를 주도해 직위해제를 당했다 지난 1월6일자로 선린인터넷고등학교로 복직됐다.
이 위원장은 빈한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부친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지금은 대구시로 편입됐다)의 텅스텐(중석) 광산에서 광부로 일했다. 광산에서는 추락사고와 매몰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아버지는 광산에서 정년퇴직한 뒤 대구 변두리로 이사를 와서 노점상을 했다. 어려운 살림살이였지만 자녀 교육에는 열성이었다.
이 위원장은 고교 3학년 때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노점상을 하는 연로한 아버지에 기대 대학을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스스로 돈을 벌어 대학에 갈 생각에 3학년 2학기 때 국립기술원 양성소에 들어갔다. 인문계 고교생도 양성소 과정을 마치면 공고 졸업자격을 인정받아 기능공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그가 대입원서를 쓰지 않자 담임교사는 “야간대학에라도 가라”고 권유했다. 이 위원장은 낮에는 모교에서 사환 일을 하고 밤에는 영남대 야간 국문과에 다녔다.
그때는 컴퓨터가 없을 때라 모든 인쇄물을 ‘가리방’으로 긁어 등사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때는 일이 한꺼번에 몰렸다.
영남대 3학년 때였다. 시립합창단 지휘자로 있는 음악교사가 시립합창단 연습용 악보를 등사해달라고 했다. 학교의 공적 업무는 아니었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일정이 급한 시험지 등사부터 하느라 미뤄놓았다가 음악교사에게 마구 뺨을 맞았다. 그는 운동장 나무 밑으로 가서 펑펑 울었다. 그동안 응어리진 것들이 올라와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어려서 지켜본 아버지의 삶, 그리고 모교의 사환 생활이 그가 나중에 노동운동가로서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원체험이 됐을 법하다.
‘협조적 노사관’은 한국 현실에 안 맞아
-미국 기업들은 일감이 많을 때는 근로자를 늘리고 일감이 적으면 근로자를 줄여 적응하다가 경기가 확장 국면에 들면 다시 고용을 늘립니다. 우리나라는 노동시장이 경직돼 있기 때문에 기업들은 비정규직이 불가피하다고 말합니다.
“노동조합에 가입된 대기업 노동자들의 고용이 안정돼 있고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선거기간에 몇 군데 가봤지만 고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은 숙련된 고급 기술인력입니다. 그 정도 봉급을 받으려면 하루에 거의 맞교대로 12시간 정도 일해야 합니다.
외환카드를 봅시다. 아시는 것처럼 어느날 갑자기 70%가 정리해고됐습니다. 정작 정책실패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노동자들만 잘라낸 거지요. 조사해보면 알겠지만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외국에 비해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한편 대기업 노동자들도 사정이 어렵지만 양보 또는 자기 희생을 통해 더 열악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가야 합니다.”
-손배 가압류가 지나치다고 했지만 노동자들한테 파업 같은 투쟁수단이 있듯 사용자들한테도 불법파업이나 업무방해에 대응하는 수단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파업중에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업무방해로 기소하는 나라는 한국뿐입니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도 계속 그러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파업 자체가 이미 업무를 방해해 합법적으로 손해를 끼치는 행위 아닙니까.”
-조합원은 파업을 하더라도 비조합원은 작업할 수 있잖아요. 그걸 방해하면 안되죠.
“엄밀히 말해 우리나라에서 합법적인 파업을 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걸면 다 걸립니다. 사용자 대항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폐쇄를 할 수 있습니다. 손배 가압류도 법의 정신에 맞게 상식적으로 이뤄져야 된다는 거죠. 어떤 개인에게 몇십억 원, 작은 노동조합에 몇백억 원을 물리면 결국 씨를 말려버리는 겁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가압류당해 봉급을 한 달에 30%만 받고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렇게 무리하게 했던 것들이 결국 법원에서 다 깨지고 있습니다. 서로 대화하면서 상식적으로 해야지 보복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극심한 심적·물적 고통을 당한 노동자들이 자살하는 거죠.”
-노사정위의 틀이 바뀌는 것을 전제로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언제쯤 복귀할 예정입니까.
“노사정위가 더 책임 있고 독립성이 강한 조직이 돼야죠. 지금처럼 열심히 해놓아도 어디서 한번 틀어버리면 아무것도 안 되는 조직이어서는 곤란해요. 합의된 사항이 반드시 지켜질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합니다. 지금처럼 공익위원들 손에 좌지우지돼서는 안 됩니다. 나는 교섭을 중시하는 입장입니다. 노사정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입니다.”
-배일도 서울지하철공사 노조위원장과 1991년 안양교도소 바로 옆방에서 지냈다면서요.
“별걸 다 알아봤군요. 안양교도소 시절 토론도 하고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배일도씨는 1988년 전국 최초의 지하철 파업을 주도했고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의 산파 역할을 했다.
-배일도씨의 ‘협조적 노사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나라의 노사관계에서는 적용하기 어려워요. 노사가 대등한 관계를 이루지도 못했고 기업들이 투명하지도 않습니다. 노사관계는 기본적으로 갈등관계입니다. 그 갈등을 해소하고 관계를 회복하자는 건데, 처음부터 관계의 본질 자체를 무시하고 그렇게 하면 우선은 편안할지 몰라도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됩니다. 변질되거나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배씨를 어용이라 생각합니까.
“어용은 그것과는 다른 말이지요. 어용은 사용자와 밀약관계를 맺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요. 그분은 자기 나름대로 독특한 노동관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같이 일해봐서 잘 아는데, 자기 나름의 소신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 소신에 대해 내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건 아니죠. 그러나 원칙적인 부분은 잘못됐다고 봅니다.”
서울지하철공사는 민주노총 산하이지만 민주노총 결정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 행보를 한다.
-민주노총은 조합들로부터 분담금을 얼마나 받습니까.
“조합원 수에 따라서 일정액으로 합니다. 한 명당 대개 한 달 800원 정도입니다. 조합비를 압류당해 분담금을 제대로 못 내는 조합들이 많아요.”
“교육 의료 교통 주택 문제도 관심사”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이 정치세력화를 위해 만든 정당이다. 국회의원은 배출하지 못했지만 울산에는 2명의 단체장(구청장)이 민노당 소속이다. 민노당은 오는 4·15 총선에 50명 내외의 후보를 낼 계획이다. 이들 후보들은 민주노총의 재정적·인적 지원을 받게 된다.
“울산 창원 등 노동자 밀집지역 또는 수도권의 전략지역에 집중적으로 지원할 생각입니다. 노동자들은 계급투표를 해야 합니다. 노동자 후보들을 찍어서 우리를 대변하게 해야 합니다.”
-몇 석이나 얻으리라 전망합니까.
“전국적으로 15% 정도 나올 걸로 보고 있습니다. 전국구에서만 7∼8명의 의원을 기대합니다. 지역구·전국구 합해 두 자리 숫자 이상 될 겁니다.”
우리나라 노조 조직률은 2002년 말 현재 11.6%로 노조원은 160만여명. 1989년 말 19.8%를 기록한 뒤 해마다 낮아지고 있다. 이 가운데 민주노총 조합원은 70만명에 조금 못미친다. 나머지는 한국노총 소속이다.
-노조 조직률이 왜 이렇게 낮은 건가요.
“영세 사업장에서는 노동조합 만들기가 힘듭니다. 가족적인 분위기도 있구요. 노동조합 운동을 좌파적으로 보는 사회적 시각도 노조 조직률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전임 위원장인 단병호씨의 노선이 지나치게 투쟁 일변도여서 노동운동이 민심으로부터 멀어진 느낌이 있어요.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노동운동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국민 따로, 노동자 따로가 아닙니다. 교육 의료 교통 주택 문제도 우리가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대안과 의제를 만들어가려 합니다. 이들 문제들은 국민 전체의 삶과 직결돼 있는 문제들입니다. 노동자들이 파업하고 난리를 쳐 10% 임금인상을 달성했다고 합시다. 그래도 아이들 과외비와 학원비는 감당할 수 없잖아요. 우리가 사교육비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내 행동으로 나선다면 임금 올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경제적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 정책을 개발하고 구체적으로 추진해나가는 소위 사회개혁 또는 사회 공공성을 강화하려 합니다. 그렇게 하면 국민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식물과 꽃을 좋아한다는 이 위원장은 농대 원예과에 가고 싶었다고 한다.
“나는 생각이 다릅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정책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에서 노조는 비정부기구(NGO)와 확연히 구분됩니다. 노조는 NGO에 끼워주지도 않아요. 우리나라에서 민주노조 운동은 권위주의 시대를 거치며 민주화 자주화운동, 통일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NGO 운동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노총이 시민단체적 성격을 갖고 있는 거죠. 따라서 국가정책에 대해 나름대로 관점을 갖고 자기 방침을 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조직내 민주주의 절차 없이 몇 명이 해서는 안 되겠지요.”
-민주노총의 지난해 11월 총파업 투쟁에 대해서는 한겨레 빼놓고는 대개 비판적인 사설을 썼습니다. 나는 신문사에서 사설을 쓰는 논설위원입니다. 그래서 묻는 건데 민주노총에 대한 신문 사설의 논조가 불만스럽지 않습니까.
“근본적으로 불만이 많죠. 대체로 노동조합의 입장에 반대되는 시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그 언론기관의 정체성이라면 인정하려 합니다. 어떤 집단이나 단체, 언론기관마다 자기 정체성과 잣대를 갖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다양한 사회의 스펙트럼 속에서 전체의 균형이 잡혀나가는 거죠. 우리 사회가 한꺼번에 혁명하지 않을 바에는 그런 모든 것들이 하나로 녹아 역사의 흐름을 형성해가는 것이겠지요. 민주노총은 빠른 속도로 진보적 입장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거고 보수 우파 쪽에서는 천천히 가려고 하는 겁니다. 양쪽이 서로 힘을 미쳐 그 힘의 정도에 따라 우리 사회의 방향이 틀어진다고 봅니다.”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읽어본 적 있습니까. 당시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은 지금의 동남아 국가나 방글라데시 또는 파키스탄보다 열악했다고 봐야겠지요. 전태일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도 그 책을 읽어봤습니다. 묘하게도 전태일씨가 나하고 나이가 같습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그를 마음속의 푯대로 삼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바보회를 만들어 노동조건을 개선하려 끊임없이 노력하다 한계를 돌파하려는 생각에서 자기를 완전하게 희생시킨 거지요. 노동운동의 선구자로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인물입니다.”
-전태일이 선택한 분신이라는 방법에 동의합니까.
“다른 방법이 아무것도 없는 당시 상황에서 절대 희생을 한거죠. 전씨의 분신을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 정신이 결과적으로 나라 전체의 민주화와 노동운동에 기여한 바가 대단히 큽니다.”
-기업가들 중에 노동귀족에 대해 비판하는 말이 나옵니다. 일부 대기업에서는 노조 전담직원이 노조 간부들을 따라다니며 전부 카드로 계산해준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일하지 않고 호의호식하는 노동귀족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민주화된 노동조합이 아닌 경우 그런 일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민주노총 산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일종의 범죄행위죠. 정치인들이 돈 받고 부정비리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용납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정치판에 뛰어들 생각 없다”
-집에 차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운전할 줄 모릅니까.
“1986년 교육민주화 선언하면서 해직되면 먹고 살기 위해 운전면허를 땄어요. 감옥 가고 수배 당하는 사이에 5년이 돼 적성검사를 받아야 재발급받는데 그럴 수 없어 면허가 취소됐죠. 차를 안 모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가정 형편이 못미치고 두 번째는 환경을 위해서입니다. 세 번째 지하철 타면서 걸어다니면 건강에 좋아요.”
민주노총 사무실은 전교조와 함께 영등포로터리 12층 건물에 함께 들어 있다. 집 근처 석계역에서 신길역까지 지하철로 40분 가량 걸린다. 그는 특별한 운동을 안 하고 지하철역에서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닌다. 그게 운동의 전부인 데도 잔병을 앓아본 일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전교조 수석부위원장을 했던 김은형씨가 말해주던데요. 일부러 작은 교회에 다닌다지요.
“내가 살던 하계동에 돼지 키우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돈사마을이라고 했지요. 어려운 사람들이 몰려와 무허가로 판자집 짓고 사는 아주 가난한 동네였죠. 목사님 한 분이 가난한 사람을 위해 작은 교회를 열었어요. 이름이 영은교회입니다. 재개발이 돼 교회도 갈 데 없이 천막 치고 있다가 20평 건물을 지었습니다. 교인이 한 30명 모입니다.”
-정치쪽에서 출마 권유를 받아본 적이 더러 있지요. 1991년 제정구씨가 야당에 영입될 때도 신문지상에서 영입대상으로 거론되었던데요.
“정치판에 뛰어들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연초에도 출마자 명단에 올라 구설에 올랐는데, 이는 내 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입니다.”
-단병호 위원장은 이번에 민노당으로 출마합니까.
“본인이 아직 결단을 못 내렸다고 해요. 그동안 너무 힘들고 고생해 쉬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업들이 비자금을 조성해 대선자금을 차떼기로 제공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사용자들에게 투명성을 요구하면 그들은 금융실명제하에서 투명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곤 했습니다. 교섭할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실망이 큽니다. 그런 점에서 경제계가 일자리 창출과 관련해 임금동결 등 노동자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명분이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기업이 합리적 상식적으로 운영되고 최소한도의 투명성은 확보돼야죠. 기업의 윤리경영 없이는 국민소득 2만달러시대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전교조 합법화
여기서 조금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사회주의에 대한 이 위원장의 생각을 알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았다.
-함정을 파놓은 질문이 아닙니다. 그냥 정공법으로 던지는 질문이니 솔직히 답해주면 좋겠습니다. 혹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관심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합니까. 나는 생각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실험을 거친 사회주의의 교훈들이 많이 있죠. 타협의 산물로 사회민주주의라는 것도 있습니다.
한때는 동구와 소련의 사회주의 몰락을 보며 갈등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중국 사회주의와 북한 사회주의는 나름대로 버티고 있단 말이에요. 이런 데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느냐에 대한 고정된 사고의 틀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가장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해야죠. 그런 노력들이 합쳐져 결과적으로 어떤 사회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뭔가 미리 그림을 그려 거기에 맞춰가는 것은 아니라 생각해요. 나는 저기 조그마한 액자에도 걸려 있는 것처럼 ‘더불어 사는’ 평등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안방과 부엌 사이 벽에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의 ‘더불어 한길’이란 제목의 한글 서예작품이 걸려 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다.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중국 사회주의와 북한 사회주의도 나름대로 버티고 있다는 말을 했는데 중국의 정치체제는 공산당 일당독재 사회주의지만 경제는 한국 뺨치는 자본주의를 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버티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것 아닙니까. 백성의 기초 의식주도 해결 못하는 나라가 버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까.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겠지요. 나도 평양에 한번 가봤습니다. 구석구석까지는 못 돌아봤지만 구호를 많이 써놨더군요. 거기 분들 옷차림은 소박하지만 얼굴은 밝았어요. 행복해 보였습니다. 남한에서는 살빼기 전쟁을 하는데 저쪽에서는 그런 고통은 없는 것 같더라고요.”
-나도 북한에 갔을 때 1995∼97년 소위 ‘고난의 행군’ 기간에 평양 시민들도 초근목피를 했다는 이야기를 북한 관리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올 겨울에도 식량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쪽 체제는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글쎄요. 북한에는 내 잣대로 이렇게 저렇게 말하기 힘든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가 믿을 만하더라도 우리가 정말 얼마나 깊숙이 그 사회를 이해하고 있는지, 여기서 함부로 얘기할 일은 아닙니다. 어떻든 인민들이 우리가 보기에 힘들지만 그래도 같이 힘 모아 자존심과 자주성을 지키려고 하더군요. 그것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정말 역사적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냉혹한 현실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헤쳐나갈 것이냐 하는 데 대해 안타깝지만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이 대목에서 말을 아주 느리게 하며 조심하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북한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민주노총 위원장이 녹음기 두 대가 돌아가고 속기사가 받아 적는 상황에서 한 이야기이므로 그대로 옮기기로 했다. 그의 사고체계를 알아보려는 뜻에서 인터뷰를 하는 거니까.
-고통의 시간이 길었던 삶을 살아왔는데 인생에서 제일 기뻤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전교조 운동을 펼치면서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다 10년 만에 합법화가 됐을 때였죠. 내가 수석부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였는데 정말 감격스럽더라고요.”
-서울로 올라와 신일고 교사가 됐을 때는 기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끊임없이 나아가던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야간대학을 다녀 국어교사가 됐지만 제대로 주간에 대학을 다닐 수 있었으면 농대 원예과에 갔을 거예요. 식물과 꽃을 좋아합니다. 서울에 와서 1년 가량 매연과 소음에 시달리자두통과 스트레스가 생기더라구요. 여유가 생기면 시골로 가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이 師表
안방 책꽂이에는 1988년도 ‘신동아’를 비롯해 교육 노동 문학 기독교 관련서적이 대종을 이루었다. ‘교사와 교원단체’ ‘교육노동운동’ ‘이야기 성경’과 박완서씨를 비롯한 국내 작가의 몇몇 소설작품이 눈에 띄었다. 국어교사, 기독교신자, 노동운동가의 얼굴이 두 개의 책장 속에 섞여 있었다.
-국내 작가 중에서 어떤 작가를 제일 좋아합니까.
“박경리씨가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릅니다.”
-나남출판사에서 나온 토지 21권을 다 읽었습니까.
“다는 못 봤죠. ‘김약국의 딸들’ 같은 초기 작품에 매료됐습니다. 책도 감옥에 있을 때 빼놓고는 차분하게 읽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박경리씨의 소설에는 우리 삶의 진지함, 치열함이 독특하고 성실한 문장 속에 녹아 있습니다.”
-영남대에 진학할 때 왜 국문과를 갔습니까.
“원래는 농대에 가고 싶었는데 야간에는 그런 과가 없었습니다. 국문과는 고등학교 때부터 국어를 좋아해서 갔지요. 문학 취향이 있어 시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떤 시인의 작품을 좋아합니까.
“머리에 확 다가오는 분은 고은 시인입니다.”
-어떤 시가 제일 좋은가요.
“고 시인의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는 섬섬한 시입니다. 젊은 시절에 우리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화살이 되어 꽂혀서 변화시키며 가자라는 내용입니다. 서정적인 시도 많고 사회문제를 다루면서도 노골적으로 빠져들지 않습니다. 내가 몇 번 이런저런 자리에서 그분을 만났는데 소탈하더군요.”
-신동아 ‘황호택 기자가 만난 사람’에서 고 시인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문열씨의 소설 ‘사로잡힌 악령’을 읽어봤습니까.
“모르겠는데요.”
-고은씨를 모델로 한 소설이죠. 안 좋게 그렸습니다. 고은씨가 젊은 시절에 스스로의 표현대로 황음(荒淫)을 했나 봐요. 그런 이야기도 쓰고 민주화운동 경력도 폄하하고….
“이문열씨가 나와 동갑입니다. 그 사람 생각을 하면 안타까워요. 사실 소설을 얼마나 잘 씁니까. ‘황제를 위하여’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좋은 작품이 참 많지요. 그런데 책 반납운동에 휘말리고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하고….
작가는 한 시대의 지성인이잖아요.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처럼 저항정신과 시대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분을 존경합니다. 우리 지성의 주소는 어디인가요. 나는 함석헌 선생 같은 분을 사표(師表)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그런 분이 잘 안 떠올라요.”
3년간 매일 연애편지 보내
이 위원장의 큰 딸 꽃맘(26)은 홍익대 국문과, 아들 한맘(24)은 같은 대학 역사교육과에 다닌다. 막내딸 빛(21)은 성공회대 중국학과에 재학중이다. 자녀 이름을 순한글로 지은 것이 특이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 위원장의 부인 김이수(54)씨가 차려주는 저녁을 먹었다. 일요일 저녁 가족식사를 방해하는 것 같아 나가 먹을까도 생각했지만 민주노총 위원장 집에서 저녁을 먹어보는 것도 드문 기회였다. 손님이 왔다고 평소보다 잘 차린 것 같았다. 기독교 집안이라 그런지 반주는 내놓지 않았다. 예수님도 포도주를 드셨다는데….
부인은 이 위원장이 계성고에서 사환을 하며 영남대에 다닐 때 서무과 직원이었다. 이 위원장은 군에 입대한 후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김씨에게 연애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 편지가 지금까지 라면박스에 담겨 보관돼오고 있다.
“그때 변심했더라면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매일 편지가 오니 그럴 수가 없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