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같은 상임위에서 여야 의원으로 나뉘어 활동하며 때론 정책대립을 하기도 하지만, 이재오 선생님은 내겐 영원한 스승이시다. 고등학교 시절 내게 문학의 즐거움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일깨워주셨을 뿐 아니라 지금은 정치인으로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신다.
사제지간에서 여야 국회의원으로 30년 만에 다시 만난 이재오 의원(왼쪽)과 노웅래 의원.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재오 선생님이셨다. 17대 국회에 입성하고 며칠 되지 않아 정신없이 분주하던 차에 선생님께서 먼저 내 사무실을 들르신 것이다.
“아이고, 선생님….”
나는 어쩔 줄 몰라 두 손만 마주잡고 쩔쩔맸다. 제자 된 도리로서 먼저 찾아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서 무척이나 죄송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만큼 선생님은 격식을 싫어하고 속 보이는 체면치레보다 있는 그대로를 좋아하셨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올바로 사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고 계시기 때문이리라.
선생님과의 인연은 32년 전인 1974년, 내가 대성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을이 막 시작되는 새 학기 무렵으로 기억하는데, 국어를 담당할 새 선생님이 오신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실 나는 국어 과목에는 별 취미가 없었다. 요즘 학생들은 그래도 ‘청소년권장도서’ 등 다양한 정보가 있고, 입시 문제도 그런 데서 출제되기 때문에 책을 읽을 기회가 많지만, 우리 때만 해도 그다지 읽을 만한 책도 없었고 설령 있다 한들 돈이 없어 사 읽을 형편이 못 됐다.
“국어책이 푸석푸석해서 그래”
선생님의 첫 수업 시간. 한마디로 첫인상은 ‘별로’였다. 마른 체형인데다 전체적으로 풍기는 느낌이 무미건조했다. 학생들은 어떻게 하면 선생님 눈을 피해 잠을 잘까 하는 생각만 했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채셨는지 선생님은 우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졸립지? 수업시간에 조는 것은 학생들 죄지만, 더 큰 죄는 재미없는 수업을 하는 선생님에게 있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책을 덮고 그 위에 손을 얹어봐라. 따뜻하냐? 따뜻하지 않다면 너희들 감정이 메마르거나 국어책이 너희들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국어책이 더 문제인 것 같다. 이렇듯 재미없는 책을 억지로 읽으라고 던져준 국가가 잘못됐다”고 하셨다. 어느 선생님도 국어책을 두고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기에 우리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했다. 그저 열심히 읽고, 달달 외고, 빨간 볼펜으로 줄 긋고…, 이게 국어 공부의 전부이던 시절이었다.
선생님은 국어를 배우는 이유부터 설명하셨다.
“옛말에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어.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 중엔 입 비뚤어진 사람은 별로 없는데 말은 참으로 엉망이야.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해대. 그런가 하면 입은 뚫렸는데 자기 생각은 없고 그저 남의 말을 대신 옮기기에 바쁜 사람이 있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입을 막아 아무 말 못하게 하는 사람도 있어. 그 이유가 뭔지 알아? 바로 국어책이 그렇게 만들고 있어.”
선생님은 국어책이 정부의 지침이나 규격에 맞춰 획일적으로 만들어져서 재미도 없고 무미건조하다고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라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콘텐츠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하셨다.
“과자가 좀 촉촉해야 어린 학생들 먹기에 좋은데 그저 푸석푸석하기만 해. 이래가지고 문학이 뭔지, 국어가 얼마나 아름다운 언어인지 어떻게 알겠어.”
허걱! 감옥까지 갔다 오셨다고?
얼마 안 가 우리는 선생님이 감옥에도 갔다 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성고등학교로 오기 전에 장훈고등학교에 국어 교사로 있으셨는데, 그때 1년간 옥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동료 교사들조차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차츰 친해지면서 술자리에서 과거를 털어놓게 됐다고 한다. 6·3한일회담반대운동을 주동하면서 대학에서 제적당했고, 1971년 민주수호청년협의회 회장을 맡으면서 10월유신 반대 데모에 참여했다가 투옥됐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선생님을 상당히 경계했다. 감옥에 갔다 왔다는 선생님을 좋아할 학생은 없었다.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에 무슨 말을 하셔도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됐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이라 TV에서도 민주화운동 하는 사람을 나쁘게만 비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존경심을 갖고 선생님을 바라보게 됐다. 어린 나이였지만 차츰 선생님이 하신 일이 옳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학교에서는 대한민국이 민주국가라고 가르쳤는데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우리는 이제 막 세상에 대한 생각을 가지기 시작할 무렵이라 머릿속이 무척 복잡했다. 세상을 무작정 비판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도 서지 않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음이 따뜻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해.”
선생님은 가끔씩 정치현실에 대해 개탄하셨지만, 그때는 그 의미를 잘 몰랐다. “우리 국민 대부분은 거듭된 민주화운동으로 정치의식은 앞서 있을지 몰라도 참여의식은 없다”고 하셨다. 우리의 정치의식이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굳어져 ‘비판을 통한 참여’에 냉담하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데모를 한다고 하고, 부정한 정치인이 뇌물 거래를 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가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한번 들어봐. 입 달린 사람치고 분노하고 흥분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 그런데 같이 참여하자고 하면 다들 어디 가고 없어. 거리에 몽둥이와 최루탄이 난무할 때 그 많던 비판의 목소리는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잘 모르지만 정권이 뭔가 잘못하고 있는데 아무 말도 못하고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하는 어른들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MBC 기자로 일하면서 노조위원장 제의를 받았을 때 내가 선뜻 응한 것도 “제대로 비판하려면 참여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뇌리에 또렷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함께 우리는 ‘극단체험’이라는 것을 했다. 우리들이 진정한 참여정신을 갖기에는 물러터졌다고 판단하셨는지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그런 기획을 하셨다. 극단체험이란 모든 학교생활을 극기와 수련의 과정으로 간주해 평소보다 배 이상의 노력을 들이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가령 우리들은 등교할 때마다 20。 넘는 경사에 150m쯤 되는 학교 앞길을 전력질주해야 했고, 며칠 동안 학교에서, 그것도 차디찬 맨바닥에서 자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시간은 교련 시간이었다. 낮은 포복을 하도 많이 해서 당시 전교생이 교련복의 팔꿈치와 무릎 부분에 헝겊을 덧대어 깁고 다녔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극단상황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항상 우리들과 함께 뛰셨고, 어린 우리들이 힘들어하면 때때로 간식도 사주시며 자상하게 위로도 해주셨다.
선생님은 우리들과 함께 연극도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사회 참여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우리를 지도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장관, 최근에 영화 본 거 있어요?”
선생님의 어투는 그때나 지금이나 재밌다. 느릿느릿 조용히 말씀하시는데 뒤끝을 약간 길게 끄는 경상도 사투리에 친근감이 넘친다. 야당 국회의원 후보로서 탄핵정국이라는 어려움을 헤치고 서울에서 당선된 데도 그 말투가 큰 도움이 됐을 것 같다.
17대 국회 첫 임시국회가 열리던 2004년 6월로 기억한다. 선생님과 나는 공교롭게도 국회 상임위 문화관광위원회에서 함께 의정생활을 하게 됐는데, 선생님은 한나라당이고 나는 열린우리당이라 서로 반대편 좌석에 앉게 됐다.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문화정책에 대한 여러 의원의 질의가 이어졌고, 이윽고 선생님의 질의 순서가 됐다. 그런데 선생님 말 한마디에 엄숙하고 딱딱하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1970년대 교직생활을 할 때 이재오 의원. 노웅래 의원은 “당시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셨다”고 한다.
“네? 최근에는 좀 바빠서….”
“뒤에 있는 실장, 국장들은 봤어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본 게 마지막입니다.”
“문제 많네~. 아무리 바빠도 영화 좀 보세요. 문화정책을 만든다는 사람들이 영화 한 편 안 보고 무슨 정책이 나와요~? 그럼 연극은 봤어요~?”
다음날, ‘저격수, 영화표 사다’라는 제하의 신문기사가 실렸다. 선생님께선 그동안 당에서 총대를 메고 여당을 혼쭐내는 역할을 많이 하셨는데, 17대 국회 들어 부드럽게 변신한 것을 두고 한 기자가 쓴 기사다.
나는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옛날 생각이 나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경상도 사투리에 뒤끝을 약간 늘이는 말투였는데, 어찌 들으면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다. 국어시간에도 그러셨다. “숙제 낸 거 해왔어~. 일일이 검사 안 할 테니까 안 한 사람 자수해서 광명 찾아~.” 한번은 한 학생이 선생님 말투를 흉내내고 다니다 걸린 적이 있었다. 그걸 보고 선생님은 “하나도 안 비슷해~. 연습 좀 해~” 하셨다.
2004년 신문법 개정 당시의 일이다. 문화관광위원회 상임위장에서 한 야당 의원이 위원장 좌석을 가로막고 의사진행을 물리적으로 막으려 했다. 나는 국회 본연의 활동인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것에 화가 나 “당신 자리로 돌아가!” 하며 반말투로 격하게 고함을 질러댔다. 이를 받아쳐 야당측에서도 “왜 반말이냐”며 들고 일어섰고, 그 말에 나는 더욱 화가 치밀어 큰소리를 내는 등 험악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눈짓으로 나를 밖으로 부르시더니 귀엣말로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미 합의된 사항이지만 야당도 입법과정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거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리게. 곧 정상적으로 회의가 진행될 테니 너무 오버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자리에 돌아와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의원님들~, 잠시만 저 좀 보세요~. 우리 문화관광위원회는 다른 상임위와는 달리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전통이에요~. 하나하나 차근차근 이야기하면서 해요~. 우리가 싸울 이유가 없어요~.”
그러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의원들은 모두 옷매무새를 고치고 제자리에 앉았고 상임위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평화로워졌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선생님이 나를 불러내 귀띔을 하신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여야의 문제를 떠나 ‘제자가 동료나 선배 의원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지나 않을까’ 걱정하신 나머지 야당의 입장을 설명하며 나를 진정시키고자 하신 것이었다.
구수한 말투, 그것은 아마도 선생님이 쌓으신 문학에 대한 깊은 내공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물론 국어선생님이시니까 그렇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른 어떤 국어선생님보다도 문학적이셨다.
遠山與雪暮今年 獄中之心恒常靑獄門開日何時矣 無常歲月恨疊疊
먼 산에 눈과 함께 금년도 저무는구나옥중의 마음은 항상 푸르지만옥문이 열릴 날은 어느 때인가덧없는 것은 세월인데 한만 첩첩이 쌓이는 구나
걸어 다니는 시인
얼마나 멋진 시인가! 선생님께서 1980년 광주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쓰신 시다. 부인에게 전하는 편지에 시를 써서 보내는 남편…. 사모님은 분명 행복하신 분이리라.
아마도 농촌에 대한 사랑과 짙은 향수가 문학적 소양을 갖게 해주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선생님은 수업시간마다 고향 얘기를 해주셨다. 선생님의 고향은 경북 영양(실제 출생지는 강원도 묵호)인데, 평화롭고 목가적이던 보리밭과 밀밭 가득한 고향의 정경을 자주 그리곤 하셨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그러한 평화가 깨진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선생님은 농촌을 다시 아름답게 가꾸겠다는 일념으로 농촌진흥운동인 4H클럽 활동도 하셨고, 훌륭한 농부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당시 영양군수가 군서기 자리를 준 것도 마다하고 농대를 지원했다고 한다. 지금은 국회의원 신분이지만 나이 들어 정계를 은퇴하면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한 선생님께 나는 ‘걸어다니는 시인’이라는 애칭을 붙였다.
1983년, 선생님께서 문학도의 길을 걷고 싶어하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문구가 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작품을 남겨야 한다. 그것도 백 편의 졸작(拙作)보다 한 편의 불후의 명작을 남겨야 한다. 그 명작이란 그 시대 인간의 삶을 얼마만큼 충실히 그리는가에 달려 있다. 문학은 단순한 미의 추구가 아니라 삶의 추구임을 명심해라.’
“정치인이 자리욕심 내서야…”
같은 문화관광위원회 소속이기 때문에 선생님과 나는 만날 기회가 많다. 더구나 선생님은 현재 한나라당 원내대표이고, 나는 열린우리당 원내 공보부대표 일을 맡고 있으니 만날 기회가 더 많아지게 됐다. 얼마 전 선생님을 만나 정치 선배로서 좋은 말씀 하나 해달라고 하자 의외의 말씀을 해주셨다.
“정치인은 자리에 욕심내면 오래 못 가~.”
사실 요즘 동료의원들을 보면 하나도 제대로 하기 버거울 텐데 여러 자리를 동시에 맡은 경우가 있다. 선생님은 그걸 두고 “하나만 제대로 해도 높은 평가를 받을 텐데, 자리 욕심에 무조건 맡다 보면 의원 개인에 대한 평가가 낮아질 수밖에 없어~. 그러면 다음엔 아무것도 못해~”라고 하신다.
맞는 말씀이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국회나 당에서 그다지 눈에 띄는 직책을 맡지 않았다. 국회에 처음 들어왔을 때 선생님이 “충분히 공부하고 준비가 된 다음에 해도 늦지 않고, 또 그것이 정치인을 오래가게 하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마음 깊이 담아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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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선생님은 ‘무욕(無慾)이 대욕(大慾)이다’ ‘국회의원 되고 나서 몸가짐이 달라지면 안 된다’ ‘돈 밝히지 마라, 필요한 만큼 생기게 마련이다’ 등 정치인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자세를 가르쳐주셨고, 나는 지금도 그 말씀을 금과옥조로 간직하고 있다.
국회의원으로서 신분은 같아졌지만 ‘이재오 의원’은 내게 영원한 선생님이시다. 제자를 올곧게 가르치는 참교육의 의미를 나는 학교가 아닌 국회에서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