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는 얼마나 할 예정입니까?” 양초에 불을 붙이며 왕년의 대스타 강신성일(72)이 점잖게 묻는다. 피곤한지 눈밑 그늘이 짙다. 눈치껏 지금 오후 2시니 6시면 끝날 것 같다고 하자 말린 보이차 잎을 떼내며 다시 묻는다. “그럼 어떤 주제로 얘기하고 싶습니까?” 영천 생활을 듣고 싶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보이차를 건네곤 말문을 연다. 질문 하나에 답변 한 시간. 기둥(주제)에서 줄기를 뻗어내곤 잎을 피운다.
- 기둥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잎 보듬느라 여념이 없다. 저녁때가 되자 달력을 짚으며 말한다. “미쓰 리, 시리즈로 하는 건 어때요? 내 얘기는 한 번 해서 끝낼 게 아닌데…. 어제 일을 오래해서 오늘은 더 못하겠는데, 그럼 낼 모레나 다시 내려오는 건 어때요?” 칠순 열정이 ‘미쓰 리’ 발목을 잡는다. 인터뷰는 이튿날 밤 8시까지 계속됐다.
신성일 보러 온 사람 네댓이 빨랫줄 한 자 뒤 울타리 너머에 서선 쑥덕댄다.
“어머, 천하의 신성일이 빨래를 다 개네, 많이 해본 솜씬데.”
“그러게, 밥은 혼자 어찌 해먹나 몰라. 여자가 같이 사는 거 아냐?”
담 대신 무릎 높이 대나무울타리를 쳐놓은 탓일까. 속닥이는 말이 그에게도 들린다.
왕년의 스타가 자못 퉁명스럽게 말한다.
“관람하는 데도 시간 넘으면 문 닫아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이만들 가세요.”
코끼리 보듯 강신성일 보던 사람들이 툴툴대며 발길을 돌린다.
“뭐야, 방송에선 언제든 오라고 해놓고, 오니까 차도 한잔 안 주고. 지가 뭐 대수야?”
강신성일은 미간을 찌푸린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여기 오는 사람마다 남자가 밥을 어떻게 해먹고 사는지 궁금해들 하는데, 왜 못해요, 왜. 아궁이에 불 땔 때야 남자가 부엌일하면 체면이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은 얼마나 편해. 봉지 카레 봉지 미역국 등 데워 먹는 것도 많고. 요즘엔 쌀에 돌도 없어. 세상 바뀌면 적응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난 음식은 안 가려도 사람은 가려. 매일같이 오는 사람들 보면 화가 나. 왔으면 인사나 하지, 얘기하는 것 들었지요? 내가 듣는 거 뻔히 알면서 신성일, 신성일 막 부르고. 난 무식이 가장 큰 죄라고 봐요….”
사람들이 배려심이 부족하다 열을 내다 난데없이 베드신 얘기를 꺼낸다.
“난 베드신 찍을 때마다 바지 안에 수영복 입고 갔어. 상대 배우에게 ‘그냥 수영복 입었다 생각하고 편안하게 연기하라’ 한 거지요. 그렇게 상대 배우를 배려해서 그랬는지 영화 찍을 기회가 많이 왔어요. 요즘은 우리 때하고 달리 전라(全裸)로 한다는데 부럽긴 부럽지.(웃음)
93.1 MHz
배려가 중요한 건 영화 찍다 알게 됐지요. 촬영하는데 상대방 생각 안 해주면 힘들어지거든.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걸 몰라. 일 보는 사람 뒤에 바짝 붙어선 지퍼 열고 있질 않나, 식당에서 시끄럽게 소리 지르질 않나…. 우선 교통질서부터 잘 지켜 버릇해야 해요. 그거 잘 지키면 다른 법 지키는 건 문제도 아니야. 법 잘 지키는 사람들이 배려 안 하고 살겠어요?”
영화는 현실보다 아름답다. 배경음악이 있어서다. 그의 현재가 영화처럼 빛나는 것도 그 배경음악 덕분이다.
빨래 걷고 있는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음악 얘기를 하니 싱글벙글 웃는다. 원조 꽃미남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다.
‘星一家 ’라고 씌어 있는 사람만한 바위가 입구에 놓인 집은 이렇게 생겼다. 집이 정 중앙에 있다면 집 바로 아래엔 작은 연못이 있다. 집 왼편 잔디밭 원두막 옆에는 묘목이 자라고 있고, 개울 흐르는 돌다리를 건너 오른편으로 가면 황금붕어가 사는 큰 연못이 보인다. 눈을 더 오른쪽으로 돌리면 원을 그리며 걷는 말 두 필이 보인다. 풍산개 세 마리도 보인다. 순한 두 마리는 볕 쬐며 낮잠 자고 있고, 집 기둥에 묶인 개는 애달프게 주인만 바라본다.
더 그림 같은 건 한옥이다. 그가 자랑, 자랑, 자랑하는 한옥이다.
“이 집 참 곱지 않아요? 단아한 여인네 같아. 다른 데 가 봐도 이렇게 좋은 집이 없어. 앞에는 강이 있고 뒤에는 산이 있고. 나무도 좋잖우. 이 집 지을 때 쓴 나무가 오대산 금강송이에요. 옹이 있는 것 보이지요? 풍수명리학 하는 사람이 보고는 그러대요. 실로 귀한 소나무가 기를 쏟아주고 있다고.”
직사각형으로 생긴 한옥 좌우에는 각각 안방과 손님방이 있다. 안방 뒤에는 부엌이, 손님방 뒤에는 손님용 화장실이 있다. 부엌은 혼자 사용하기에 딱 알맞아 보인다. 외진 데 살아 적적하겠다 물으니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한다. 그래도 씩씩대는 소리가 난다.
“난 너무너무 바빠. 개, 말 밥 주고 똥 치우면 시간이 후딱 지나가요. 정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아 손이 많이 가거든. 바위도 나르고 해야 하니 일이 많죠. 게다가 난 여기 주변 쓰레기도 다 줍거든. 아무도 안 치우니 누가 하겠어요 내가 하지. 한옥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한옥, 그게 참 손이 많이 가요. 하루라도 안 치우면 무당벌레들이 막 나오거든.”
그는 대화 도중 불쑥불쑥 나갔다 들어왔다. 쉬러 가는가 싶었는데 말똥 치러, 개 뼈다귀탕 주러, 빨래 개러, 전화 받으러, 그렇게도 바쁘게 돌아다녔다.
트위스트 김의 순정
“애들(강아지들)이 참 순해. 저거 봐, 철수하고 백두가 싸우면 딤프가 백두 보고 막 뭐라고 짖잖아, 싸우지 말라고. 자기네끼린 오누이라 통하거든. 백두랑 철수 콧등 봐요. 싸움 많이 하는 놈들이라 콧등이 성할 날이 없어. 허허”
주인이 자기 얘기 하는 걸 아는지 딤프가 와선 주인 어깨에 얼굴을 비빈다. 그러곤 베자루를 들여다보곤 입맛을 다시려던 찰라, 굵은 바리톤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손으로 개 등짝을 철썩 때리며) 이 눔아! 먹지 마! 이 눔, 저리 가! ”
그는 주변에 사람이 많다. 이렇게 전원에서 한가로이 살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집은 내 힘으로, 아니, 내 친구들 힘으로 지었지. 감옥에서 갓 나온 내가 돈이 어디 있겠어요. 추징금도 친구들이 다 내줬는데. 친구들이 후원금 내줘서 이 땅도 살 수 있었지. 그래서 이 집이 더 고맙죠,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저 원두막도 누가 와선 뚝딱 지어줬고, 개하고 말도 누가 다 줬어요. 백두는 김정일 위원장이 고(故) 정주영 회장에게 준 걸 정몽준 회장이 새끼 받아 다시 그 새끼를 내게 준 거고. 흙 모자라 고민이었는데 마침 집 앞 공장에서 흙 처분을 고민하고 있기에 싸게 해결 봤어요.
한 10여 년 전부터 나하고 엄앵란이 하고는 주머니 간섭 안 하고 살아. 절대 서로 피해 안 주기로 했거든요. 내가 정치를 해서 그런지 엄앵란은 ‘중국 때년(되년)’이야. 이 집 지을 때도 10원 한 장 안 보태더라고. 내가 장난으로 그럽니다, 돈 3억 가져오면 대문 열어주겠다고.”
그를 13년간 보좌해온‘비서실장’도 그들 가운데 하나다. ‘라디오스타’에서 박중훈을 떠받드는 안성기보다 한 수 위다. 말이 끝날 때마다 “네, 의원님, 네 의원님” 하며 깍듯하게 대한다. 출소를 묵묵히 기다렸던 그는 요즘에는 신문 챙기기, 사료조달, 음식배달, 청소 같은 살림을 도울 뿐 아니라 대구국제뮤직페스티벌(DIMF) 비서실장 업무도 한다. 그에게서 언뜻 신성일을 닮고 싶어하던 트위스트 김의 순정(영화 ‘맨발의 청춘’)이 보인다.
“감옥에 있을 때 윤정희 백건우 부부가 와선 ‘베토벤의 삶과 음악세계’란 책을 주더라고요. 베토벤의 삶을 보면 견디는 데 도움이 될까 싶다면서 읽다 보니 베토벤 멋지데요. 그래서 일단 머리 스타일부터 닮자 싶어, 경아(딸)한테 엄 여사 자주 가는 이촌동 미용실 예약해두라 했어요. 출소한 날 그렇게 가서 파마한 거고.
사실 동양 사람한테는 생머리가 안 어울려요. 생머리는 막 갈라져. 뒷머리 숱이 없어서 뒷모습도 영 안 살고. 그런데 파마는 머리만 감으면 바로 스타일이 사니 얼마나 좋아요. 난 여자도 굵게 웨이브 넣은 게 좋아 보여. 정치 할 때는 젊어 보이라고 나흘에 한 번씩 염색했는데, 요즘은 얼마나 자유롭고 편한지 몰라. 흰머리가 얼마나 멋져.”
백발의 파마머리, 대구국제뮤직페스티벌 이사장이라는 요즘 직함에 잘 어울리는 외양이다.
“뭘 해서든 너는 넘어설 거야”
신성일은 데뷔작 ‘로맨스빠빠’에서 막내아들 바른이로 나와 “내게 돈과 시간과 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말이 씨가 됐는지 바람은 현실이 됐다. “영화에서 그 대사를 몇 번이나 하시더니 결국 소원 이루셨네요” 하자, 강한 눈매가 순식간에 초콜릿처럼 부드러워진다.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는 미소다. 시간은 영화 데뷔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난 그저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이었어요.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믿질 않는데, 수창초등학교 다닐 때는 갑을병(수우미) 중 갑만 받았어요. 어머니가 그 덕에 자모회장도 하셨고. 그러니 명문인 경북중, 경북고를 수월하게 다녔지. 딱지 치고 구슬치기 같은 건 관심 없었어요. 학교에 남아서 공부하다 가는 게 좋았지. 그때도 자존심이 엄청 세서 아무리 추워도 외할머니가 기워주신 양말을 아예 벗고 다녔어요. 창피한 것보단 추운 게 나았거든. 공부도 그랬어요, 자존심 때문이었단 말이지.”
그랬던 그가 변했다. 어머니의 가출이 신문1면에 보도된 뒤부터다. 얼마 전 계주가 도망 가 세간의 화제가 됐던 강남 부유층들의 계모임 다복회처럼 큰 ‘산통’(계)의 계주였던 어머니는 자금이 돌지 않자 홀로 야반도주했다.
영천에서 근사한 한옥 짓고 즐거이 산다.
불현듯 어머니가 곗돈 대신 받아 운영하던 약국하고 책방이 생각나데요. 사람들이 이거 있는 줄은 모르니 돈 되는 것만 처분하면 먹고살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비싼 책들 챙겨서는 동네에서 병원 하시는 의사 선생님한테 사주십사 부탁드렸어요. 흔쾌히 도와주시는데, 어찌나 고마운지. 그걸로 어렵게 1학기를 버틴 거라….”
등록금 걱정하다 공부에 손을 놓게 됐으면서도 서울대 상대를 가겠다는 꿈은 놓지 않았다. 당시에 뚜렷한 꿈은 없었다. 법대 가면 판사, 건축과 가면 건축도, 의대 가면 정형외과 의사를 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그땐 돈 벌고 싶은 마음에 거푸 2년간 서울대 상대에 원서를 냈다. 결과는 불합격. 그는 공군소위인 형의 수원 관사와 서울을 오가며 살길을 찾는다. 그때의 그는, 룸펜처럼 이렇게 되뇌지 않았을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 분명히 알고 있는 게 있어, 난 바보다, 바보.”(영화 ‘휴일’ 중에서)
“3개월 정도 종로에서 호떡장사를 했는데, 잘 안돼 바로 접었어요. 그러곤 먹고살 궁리하며 서울 여기저기를 어슬렁댔죠. 돈 없어 못 가는 재수학원 주변도 기웃대고. 그러다 충무로1가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 손시향을 만났어요. 이 친구가 ‘검은 장갑 낀 손’이란 노래로 막 스타가 된 때였는데, 내 등을 툭툭 치고 지나가데요. 정말 기분 나빴지요. 별일 아닐 수도 있는데 위축됐던 때라 그런지 오기가 납디다. ‘넌 노래 잘해서 가수 됐지? 난 사람들에게 얼굴 잘났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으니 뭘 해서든 너 이상으로는 돼볼 테니 두고 봐라.’다짐하고 고개를 드는데 마침 한국배우전문학원 간판이 보입디다.”
배우 학원비는 재수학원비보다 쌌다. 이 길밖에 없다 싶어 그랬는지 예전처럼 열심히 공부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김기영, 이진순, 양광남 같은 거장들에게 “배역을 맡으면 그 인물에 철저히 동화돼라”는 스타니슬라프스키 배우수업을 받았고, 팬터마임을 익혔다.
그때 배운 사람 관찰하는 태도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구부리고 가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지, 저 옷을 입은 사람의 직업은 뭘지 늘 관찰하던 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고 연기하는 자양분이 됐다. 학원에 다니는 동안 엑스트라 자리가 여럿 들어왔지만 생애 첫 데뷔를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언젠가 뭘 하긴 할 거야. 해내긴 할 거야.” (영화 ‘5인의건달’ 중에서)
新 星 一
신필름에서 첫 배우생활을 시작한 건 크나큰 행운이었다. 원서도 내지 않고, 신필름 신인배우를 뽑는 국제방송국 주변을 어슬렁대다 발탁된 것이다.
“솔직히 범상치는 않은 인물이지. 야망에 불타는 눈이고.”
스스로도 인정하나 보다. 하긴 지나치게 겸손하면 비호감이다. 신필름 대표 신상옥 감독이 “너, 나하고 5년 고생해볼래? 그럼 내일 아침부터 나와” 한마디 하자, 다음날 사무실 사람들이 모여 이름 짓기에 골몰했다. 새로울 신(新), 별 성(星), 한 일(一). 새로운 별 하나. 그날부터 강신영은 신성일이 됐다.
별다른 역할이 없던 그는 전화 받는 일을 자처한다. 당시 영화사에는 내로라는 기자, 평론가, 시나리오 작가가 건 전화도 시큰둥하게 받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달랐다. 한 통을 받아도 깍듯하게 받았다.
“한마디로 애살이 많았지. 그래서 그랬는지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을 때 기자들이 호평해줬어요. 출연진 중 제일 막내인 나를 도리어 비중 있게 다뤄줬습니다. 전화 안내한 덕을 좀 봤지요.(웃음)”
신필름을 그만두는 건 모험이었다. 초짜가 과장급 월급인 5만원을 받기란 쉽지 않은 때였다. 월급을 제대로 주는 건 신필름이 유일했을 때다. 그러나 그그에게 어울릴 만한 청춘물이 없었다. 영화를 못 찍으니 갈증이 났다.
“그때 안 나왔더라면 이지고잉(easygoing)한 놈이 됐을 거예요. 다행히 나오자마자 다른 회사가 같은 금액으로 월급을 맞춰 주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연기 잘한다면서 곱절을 주기도 하고. 그때 연기 잘하려고 출연 예정이 잡힌 드라마하고 비슷한 ‘굿바이 어게인’을 얼마나 봤는지 몰라. 앤터니 파킨스하고 잉그리드 버그만 나오는 거였는데.”
그렇게 하나둘 청춘물을 찍자 인기가 올라갔다. 영화 ‘맨발의 청춘’이 정점이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몰렸다. 엄앵란과 약혼을 발표한 뒤에는 호텔에 머물 수가 없을 정도였다. 팬레터도 많이 왔지만 관심이 없어 제대로 읽지도 않았단다. 예쁜 배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물론 팬레터에 답장한 적도 없다. 미국에 머물던 애인에게 안부를 전할 때만 편지를 썼다. 그래도 또렷이 기억나는 건 ‘신성일 아이’를 업고 왔다는 여인과 ‘한번 털자(한번 싸움 붙자)’고 이리에서부터 올라온 청년이다.
“여인은 엄 여사한테 된통 혼나서 갔고, 청년은 나를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하곤 갔어요. (웃음) 내가 가장 감동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팬은 고은아씨예요. 나랑 영화 찍으며 그러대요. 학창시절에 책 보다 선생님들한테 많이 혼났다고. 왜냐 물으니 그 안에 제 사진을 두곤 그렇게 아껴 보고 그랬대요. 아마 그 정도가 우리 시절의 가장 애틋한 애정표현일 것 같은데….”
‘무비 스타’
영화는 신나는 놀이였다. 촬영장에 애인을 데리고 가면 더 재미있었다. 애인을 여배우의 친구라고 하곤 앉혀놓고 그랬다.
“난 영화가 좋았어요. 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말에 동의해요. 영화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재미예요. 재미있는 영화를 재미있게 찍던 시절이니 행복했지. 재미있게 찍으려면 일에 열중해야 해요. 배우는 자기자신에게 열중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스타일에 신경 써야 해요. 난 ‘맨발의청춘’ 찍을 때도 검은 점퍼 입은 트위스트 김하고 대비돼야 한다 싶어 흰색 가죽점퍼를 입었어요. 그거 찾느라 이태원시장을 얼마나 뒤졌는지 몰라. 물론 영화 개봉된 후에 그 옷이 엄청 히트 했지.”
결혼하고부터는 미군부대에서 물건 빼오는 아줌마 물건을 고르곤 했다. 이것도 모자라면 미국 쇼핑몰 책자 600쪽을 샅샅이 뒤져 주문해 우편으로 받았다. 화장도 잊지 않았다. 배우를 가리키는 수많은 단어가 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무비스타’다. 그는, 그러니까 무비스타라는 말에 걸맞은 스타일로 살고 싶었다.
“영화가 뜨는 건 스타 때문이잖아요. 난 엄앵란 신성일이 무비스타의 시초라고 보는데, 그래서인지 무비스타로 불리는 게 좋아요.”
영화배우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관찰력으로 먹고사는 건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인기를 얻는다는 것 정도가 특이하달까. 다만 멜로영화의 정석이 권선징악이다 보니 그 역시 ‘정의롭고 솔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몸에 뱄다. 영화에서처럼 삶에서도 사랑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그의 인생이 채워졌다. 갑자기 그에게 배우란 무엇인지가 궁금해졌다.
“내게 배우란 하늘에서 준 기회였어요. 한국에서 가장 주인공을 많이 한 배우고, 수십만 관객도 동원하고. 그렇지만 누구나 인생에 굴곡은 있지 않겠어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고, 책임을 미룰 수도 없으니 누구를 탓해. 힘들어도 내 자리 지키는 게 최선이라 봐요.”
후배들의 존경을 받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런 후배 본 적 없다”고 답한다. 참, 솔직한 남자다. ‘무비스타’라는 존재감에 대한 애정. 그건 어쩌면 개명(改名)까지 하며 국회의원이 됐지만 2년간의 감옥 생활을 거치면서 생각이 바뀐 탓도 있을 것이다.
“난 정치가 싫어요. 72년 인생에서 4년 정치 한 사람을 정치인이라 부를 수 있나? 나는 문화예술인으로서 정치 물에 잠시 들어갔다 왔을 뿐이에요. 그런데 (정치)해 보고나니 예술 하길 잘했다 싶어. 예술가는 사람에게 기쁨을 줘서 그런지 많은 사랑을 받는데, 정치인들 중에는 사랑받는 사람이 별로 없잖우. 정치는 속여야 하지만 예술은 진실해야 성공하지.”
그에게 말 두 필은 더없이 소중한 친구다.
정치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다. “정치는 교도소 담장을 넘나드는 거라더니, 정말 아찔한 순간이 있더라”고 한다. 자신에게 주어졌던 굴레를 그는 여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듯했다.
“면회 온 사람들 보기 좋으라고 가까스로 화를 눌렀지, 왜 치밀어 오르는 게 없겠어요. 내가 무슨 죄를 졌나 싶기만 하고. 난 분명 정치후원금을 받았는데 저쪽에선 뇌물로 본 거잖아. 다 해석상의 차이야. 난 분명 기금 만들려고 영수증 써가면서 받은 돈인데, 그걸 갖고 5년형을 때리니 화가 안 나나. 그래도 2년만 살고 나온 걸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해준 게 아닌가 싶어.
교도소를 옮길 때마다 수감자들에게 앙케트 조사를 해요. ‘검사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 있나, 판사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든 적 있나’, 그런 걸 물어. 감옥에서 그 생각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교도관이 하도 사정사정하니까 다들 아니라고 체크하는 거지. 그래도 난 그 칸 보곤 그냥 비워뒀어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래도 짧지 않은 수감생활은 그에게 상당한 마음의 여유를 허락한 모양이다. 휴식이랄 수는 없는 시간이지만 책도 많이 읽었단다. 스타일 빼면 시체인 왕년의 대배우는 교도소 안에서도 운동에 힘을 쏟았다고. 그래서 50대 초반 정도로밖에 안 보였다고 자랑을 이어나간다.
“주먹들도 나한테 와서는 ‘존경합니다 형님’ 그럽디다. 난 뭐 오는 사람은 항시 거부하지 않으니까. 성격이 워낙 긍정적이라 어딜 가나 최고로 적응 잘해요. 독방은 내가 자처해서 간 거였거든, 교도소장이 필요한 게 뭐냐고 묻기에 ‘여자’라고 답해줬지. 껄껄 웃으면서 그건 안 된대.
암만 그래도 1.31평짜리 독방에 혼자 앉아 있으면 당연히 고생스럽지. 그 추운데서 자면 뼛속까지 시렵더라고요. 그래도 마음 다스릴 수 있었던 건 아침마다 ‘반야심경’을 읽은 덕이지 싶어요. 그러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화도 누그러지고. 그렇게 편하게 마음먹으니 사람들이 ‘죄수복을 입어도 멋지다’고 하더라고.”
“나, 한나라당에서는 진보였어요”
돌이켜보면, 그의 기억 속에서 정치와의 첫 인연은 1970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평소 영화계와 친분이 두터웠던 김상현 전 의원이 DJ와 함께 신성일 엄앵란 부부를 찾아와 정치를 하자고 설득했다. 전성기가 끝나가던 영화시장에서 탈출할 방법을 꿈꾸던 그는 선뜻 응했지만, 아내는 생각이 달랐다. 아내는 친분있는 군 고위인사에게 부탁해 그를 겁주게 했다.
“정치 하면 공군에 있던 형님, 사업하는 형님, 다 다칠 수 있다는 거요. 가족들한테 해가 갈 수 있다는데 덜컥 겁이 났지. 그때 정치 했으면 아마도 얼마 못 가 감옥에 갔을 거예요. 10월 유신이 그 직후였으니까. 김상현 전 의원이 ‘그럼 기자회견 때 화환이나 보내달라’고 청하기에 보내줬더니, DJ가 미국 워싱턴을 돌며 모금활동 하러 갔을 때 엽서를 보냈습디다, ‘신 동지 화환 고마웠소.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오’ 라고요.”
수십 년 시간이 지나 국회의원이 된 것은, 앞서도 얘기했지만 ‘문화계 인사’ 자격으로서였다. 그런데 막상 정치를 해보니 국회의원은 간단한 자리가 아니었다. 항상 손님이 들끓었고, 전화가 끊이지 않고, 현장에 내려가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바빴다. 그렇게 전혀 다른 환경에서 헉헉대며 4년을 보낸 뒤, 그는 2004년 선거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이 ‘한나라당은 노인당’이라고 한다고 해서 60세 이상은 공천에서 배제한다는 가이드라인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내가 그때 67세였거든. 물리적인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그 무렵 강재섭 대표는 나만 보면 피해다녔어요.
나는 한나라당에서는 진보적인 편이었어요. 철저하게 보수적인 사람들만 모인 한국예총 같은 데는 그전부터도 행사에 잘 안 나갔어요. 예총이 뭐예요, 예전 공화당 시절에 정치 행사장에 사람들 동원할 필요가 있을 때나 모이던 사람들 아니요? 그래서 민예총이 만들어진 거고.나도 예총이 더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난 대구 국회의원으로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운영기금 조성법’ 만들고 그랬어요. 당시 대구는 부채만 3조였거든. 그때 그법안 안 만들었으면 대회 못 치렀어. 그만하면 잘한 거 아니요?”
뒤늦은 이야기지만,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열국지와 삼국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전기를 읽었다. 그리고 정치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과정에서 희생됐는지, 위에서 던진 돌 하나에 얼마나 많은 이가 다치는지도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지역구를 관리하는 것과 공천을 유지하는 것은 별개라는 한국 정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했고, 찍을 사람이 없으면 무효표를 찍어야 할 텐데 정당만 보고 무조건 도장을 내미는 현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 모든 생각이 부질없다 느껴졌다. 그렇게 그는 멀고 먼 길을 돌았다. “정순이는 의당 내게로 돌아와야지. 내가 그리워한 만큼 정순이도 나를 그리워했던 거야”를 되뇌던 ‘삼일천하’ 주인공처럼.
열정적으로 인터뷰에 응해준 무비스타.
영화에 다시 도전할 생각은 없느냐 묻자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영화 접은 지 오래됐다는 것이다.
“바라기는 하지만 자리가 없어요. 희망사항만으로 다시 영화를 한다면 만용이에요. 난 지독한 실리주의잡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요즘 영화계에 대한 평을 한마디 청했다. 일말의 고심도 없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높은 개런티를 요구하는 배우, 필름 낭비하는 감독, 배우 보호하지 않는 제작사가 도마에 오른다. 그래도 후배들 얘기할 땐 표정이 한결 편하다.
“전지현도 괜찮고, 이미숙은 농염한 연기를 잘하지. 문소리는 성장과정을 눈여겨봐야 하고. 전도연도 좋고. 설경구도 정말 괜찮은 배우라고 봐요. 배우인 척 않는, 진짜 배우인 사람이 많아져야 해요. ‘척’ 하는 사람들은 오래 못 버티거든.”
그는 워낙 여배우를 좋아하는 듯했다. 정확히 말하면 여자를 좋아하는 듯했다. “아내는 애인하고 캐릭터가 완전히 달라. 어떻게 다른지는 설명할 수 없는데 달라”하고 말을 또 이어나간다. “아내는 푸근하고 애인은 섹시한가” 물으니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정확한 말이라 답한다.
“애인은 농염한 빨간 장미 같아요. 여인은 40대 초반부터 50대 초반까지가 가장 아름답잖아요. 꽃잎도 여자의 S라인처럼 육감적이고. 꽃봉오리도 그렇고. 그 향기 하며. 난 육감적인 여자가 좋아요. 감옥 독방에 있을 때도 샤라포바, 이신바예바 사진 붙여놓고 토요일마다 야릇한 상상에 빠지곤 했지. 그동안 살아오면서 애인이 대여섯 명 있었는데, 다 S라인이요. 그것도 아주 완벽한 S라인. 섹스파트너로서의 애인은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존재라 봐요. 그래서 난 홀로 있는 이 밤이 좋아요. 애인한테 마음껏 전화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주책이라 말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노배우, 은근히 귀엽다. 그렇지 않은가. 나이가 들어도 이만큼 귀여울 수 있는 건 분명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난 나이 든 게 좋아요. 박완서 선생도 그러셨다는데, 나이 먹은 게 자산이라고. 청춘을 잘 지냈기 때문에 노년도 이만큼 살 수 있는 거겠지. 젊을 때 잘난 체를 해도 좋지. 크게 각성하고 인간 되면 되니까. 젊어서 점잖으면 안 돼요. 젊은이가 ‘젊지 않다’는 건 잘못된 거니까. 그러니 그때 열심히 살면 노년도 즐거울 겁니다. 난 스스로도 내가 잘살았다 싶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난 행복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