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호

‘표적수사’ 논란 최열의 눈물

“미안하다. 구속될지 모른다. 하지만 아빠는 죄가 없다.”

  •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9-01-07 14: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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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격 받은 딸, 두 달 동안 아빠와 말 안 해
    • 수사 문제로 임채진 검찰총장, 정정길 대통령실장과 통화
    • 환경센터 건립시 환경련에 빌려준 3억원, 순차적으로 돌려받았을 뿐
    • 딸 유학비·주식투자 다 사실, 하지만 환경련 공금 아닌 내 돈
    • 대차대조표, 차용증, 확인서, 증인… ‘무죄’ 뒷받침 증거 많아
    • 광우병 촛불시위 나선 건 반미 아닌 식품환경 문제이기 때문
    • 최고경영진 생각 바꾸는 게 환경운동 지름길이라 기업 사외이사 맡아
    • ‘환경 동지’ 이명박 대통령, 대선 때 곽승준 보내 대운하 지지 요청
    • 돈 많이 벌지만 자가용 없고 골프 안 해
    • 검찰, “최 대표 3억원 변제는 허구”
    ‘표적수사’ 논란 최열의 눈물

    ● 1949년 대구 출생 <br>● 춘천고, 강원대 농화학과 졸업 <br>● 1979년 민주청년협의회 부회장 <br>● 1982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설립 <br>● 1993년 환경운동연합 창립, 사무총장·대표 역임 <br>● 2000년 총선시민연대 상임공동대표 <br>● 2002년 환경재단 설립 <br>● 現 환경재단 대표, 기후변화센터 공동대표

    사람들의 마음만큼이나 가파른 날씨였다. 실내에 들어서자 목에 달라붙었던 추위가 시나브로 떨어져 나갔다. 서울 도심의 호텔치고는 규모가 작은 편인 N호텔의 레스토랑은 점심때가 지나서인지 한갓졌다. 흘낏거리는 여종업원의 무뚝뚝한 태도가 인상적이다. 창가 좌석에 앉아 밖을 보니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사람들보다 바람의 발걸음이 빠르다.

    이윽고 점퍼 차림의 키 작은 사내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최열(60) 환경재단 대표다. 세 번째 만남이다. 우리는 하우스와인 한 잔씩과 치즈 몇 조각으로 한 시간 반을 버티며 묻고 답하는 각자의 임무를 덤덤하게 수행했다. 그의 목소리가 레스토랑 어느 자리에서도 들릴 정도로 컸기 때문에 나는 목소리를 낮췄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틀 전 법원은 검찰이 최 대표에 대해 청구한 사전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수고를 덜었을 것이다. 더 물어볼 얘기가 있어도 만날 수 없을 테니까. 구속영장이 청구되기 전날인 2008년 11월30일 오후, 일요일이라 썰렁하기 짝이 없는 환경재단 사무실에서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는 꼿꼿했다. “영장이 떨어지면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라는 내 질문에 “구속되면 돼야죠”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검찰의 공로

    도덕성이 생명인 시민운동의 대부(代父)가 공금횡령 혐의로 수사를 받다니. 진실이야 어쨌든 구속영장이 청구된 사실 자체만으로 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진 셈이다. 시민단체의 구조적 문제점과 그의 혐의를 한통속으로 간주한 언론의 비판적인 논조도 한몫했다. 나는 내심 그가 인터뷰에서 분노하거나 격정적이거나 울분에 찬 모습을 보이기를 기대했으나 그는 대체로 침착한 편이었다. 그의 의연한 태도에 대한 나의 ‘불만’은 세 번째 만남에서 다소 누그러졌다. 그가 인터뷰 막판에 눈물을 쏟았기 때문이다. 기어이.



    그가 2009년부터 ‘신동아’에 새롭게 연재되는 ‘조성식 기자의 Face to Face’의 첫 대상으로 선택된 데는 검찰의 공이 크다. 그에 대한 검찰 수사는 그와 그가 이끌어온 환경운동의 사회적 기여도를 깎아내리고 시민단체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반면 검찰의 구속영장이 기각된 것은 그가 표적수사의 희생양일지 모른다는, 혹은 검찰 수사가 공정하지 않거니와 치밀하지도 못하다는 일부의 신중한 시각에 일리가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물론 검찰 수사의 긍정적인 면을 못 본 체하려는 건 아니다. 비록 최 대표 수사를 앞둔 ‘군불 때기’가 아니었느냐는 의심을 받긴 했지만, 아시아 최대의 환경운동단체라는 환경운동연합의 일부 간부들이 정부지원금 등 공금을 유용한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보수진영으로부터 이데올로기적으로 불온하다는 비난을 받아온 시민단체의 도덕성 문제를 공론화하고 그들의 ‘참회’를 이끌어낸 검찰의 공로는 기억될 만하다.

    최 대표의 혐의는 환경련 사무총장과 대표 시절 공금 2억여 원을 빼돌려 주식투자, 자녀 유학비 따위의 개인적 용도로 사용한 것이다. 검찰이 80일 가까이 수사해 찾아낸 혐의다. 이에 대해 그는 1996년 환경련이 환경센터 건물을 구입할 때 자신이 보탰던 3억원을 순차적으로 돌려받은 것이라고 반박했다. 법원은 “최열씨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빌려준 돈을 변제받았다는 주장에 대해 (유무죄를) 다툴 여지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인터뷰는 세 차례에 걸쳐 6시간 동안 진행됐다. 첫 인터뷰를 한 2008년 11월28일은 금요일이었는데, 검찰이 주말에는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힌 터라 최 대표는 한숨 돌린 상태였다. 환경재단 직원들은 언제 압수수색을 당했느냐는 듯 평온한 분위기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검찰은 11월7일 “환경연합과 관련해 제기된 의혹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며 이곳을 압수수색한 바 있다.

    ‘표적수사’ 논란 최열의 눈물

    회계자료를 보여주며 검찰 수사내용을 반박하는 최열 대표.

    감색 양복에 줄무늬 셔츠를 입은 동안(童顔)의 최 대표가 밝은 표정으로 맞았다. 그는 할 말이 많은 듯싶었다.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한다는데, 심정이 어떤가”라고, 짧은 답변이 예상되는 질문을 던졌는데 중간에 제동을 걸어야 할 정도로 길게 답변했다.

    “그동안 쉬지 않고 살아왔거든요. 내년 1월19일이 회갑입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했습니다. 아, 내가 너무 뛰기만 했구나. 가정에 등한하고 환경문제에만 매달렸구나. 이번 사건이 환경운동을 시작할 때의 정신을 되찾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돈 중심이 아니라 가치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가치는 생명이고 생명은 환경입니다. 저한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노자와 장자입니다. 노장 사상의 핵심은 ‘생명을 중시하고 이익을 가볍게 여긴다’예요.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 사회는 이익을 중시해요. 이익을 중시하면 생명이 가벼워져요. 많은 사건이 터지고 환경이 파괴되는 것도 사회가 이익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거든요.

    저의 활동, 이를테면 민주화운동 하다가 옥고를 치렀다든지 낙선운동으로 벌금을 냈다든지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은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하지 않은 행위에 대한 비판은 참기 어렵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환경운동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입니다. 1976년 옥중에서 환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한 이후 한번도 외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한길을 걸어온 것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하기는커녕 이렇게 매도하다니요? 검찰이 그토록 오랫동안 조사해 과연 횡령을 찾아냈습니까.”

    그가 골드만환경상 상금 7만5000달러 기부, 상근자 자녀 장학금 조성 등 그간 자신이 환경련에 기여한 일들을 설명하기에 “그 얘기는 이따가 하자”며 제지했다.

    “환경련 압수수색은 최열을 겨냥한 것”

    ▼ 검찰에서 저렇게 나오니 두렵지 않으십니까?

    “횡령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 잠이 잘 안 올 것 같은데요.

    “제 개인적 문제보다도 딸 때문에. 딸이 지금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논문을 쓰고 있거든요. 그런데 언론이 (환경련에서) 횡령한 돈 2000만원으로 해외유학을 갔다고 보도했잖아요. 그러니 딸이 충격을 받았을 것 아닙니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집에 들어가면 문 딱 닫고 저를 안 봅니다. 두 달 됐어요.”

    ▼ 그게 가장 가슴 아프시겠네요.

    “다른 거야 뭐, 두렵지 않아요.”

    최 대표는 “내가 좀 뚱뚱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살을 빼고 있다”고 생뚱맞은 얘기를 했다. 한 10년 전부터 새해를 맞을 때마다 운동을 해서 살을 빼겠다고 다짐하곤 했는데, 한 번도 실천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사건이 발생한 후 두 달 동안 4㎏을 뺐다는 것이다.

    ▼ 마음고생을 하시니….

    “아니, 그런 것보다는 절제된 생활을 하려고요. 절제하면서 환경운동을 해야지, 먹을 것 다 먹으면서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죠. 그런 점에서는 이번 일이 도움이 됐어요.”

    ▼ 검찰 수사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억울하다는 거죠?

    “그렇죠. 저처럼 꽤 알려진 사람도 이렇게 당하니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참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정상참작 정도가 아니라 100% 억울하다는 거죠?

    “그렇죠. 저는 조금이라도 잘못한 게 있다면 잘못했다고 하지 변명하지 않습니다.”

    ▼ 표적수사라고 판단하는 구체적인 근거가 있습니까?

    “검찰이 수사에 착수할 무렵 저는 기후변화 문제로 해외시찰을 하고 있었어요. 며칠 후 귀국했는데, 검찰 출입기자가 ‘환경련 압수수색은 최열씨를 겨냥한 것’이라고 알려주더라고요. 그런 얘기를 몇 군데서 들었어요. 제가 2000년에 총선시민연대 상임공동대표를 지내면서 (부적격 후보) 낙선운동을 펼쳤잖아요. 그때 낙선된 사람들 중에 현 정부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제가 대운하 건설에 반대해왔잖습니까. 지난해 대선 당시 한나라당 쪽 모 인사가 저에게 하는 말이, ‘한나라당에선 최열씨가 대운하 건설 반대운동의 두목으로 알고 있다’는 거예요. 절친한 사이인 문국현 후보를 대선 때 도운 것도 밉보였다고 들었습니다. 또 이번에 검찰에 가보니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국민행동에 대해 물어보더라고요. 탄핵반대국민행동의 모금계좌도 제 명의로 개설됐거든요.”

    ▼ 환경운동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입니까.

    “제가 절대 안 쓰는 단어가 ‘바쁘다’ ‘힘들다’ ‘죽겠다’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 단어들 안 쓸 겁니다. 힘들었다기보다 가장 가슴 아팠던 순간은 온산병이 발생했을 때입니다. 1985년 온산 주민 1만여 명 중에 700여 명이 그 지역 공장들 때문에 뼈마디가 아픈 병을 앓았어요. 그래서 온산병이에요. 현지에 내려갔다가 온산초등학교에 가보니 교정의 아름드리나무가 죽어 있고 풀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교장 선생을 찾아가니 견딜 만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직접 6학년 1반 교실에 들어가 담임선생한테 찾아온 이유를 말하고, 아이들한테 물었어요. 뼈마디가 아프거나 피부병이 있거나 눈병이 있는 사람 손들라고 하자 52명 중 26명이 손을 들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많이 울었어요. 이후 제가 온산병을 주제로 곳곳에서 강연을 했는데, 그때마다 경찰이 연금을 시키더라고요. 당시 신문에도 제가 연금된 사건이 보도됐어요.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현장입니다. 저는 머리띠 두르고 머리 깎고 단식하는 것 반대해요. 그런 거 하면 국민의 절반이 싫어합니다. 환경운동은 모든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거든요.”

    ▼ 비판론자들은 시민운동단체가 권력화됐다고 말합니다. 최 대표님과 같은 명망가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은데요.

    “권력은 결재에서 나옵니다. 결재를 하고 인허가권을 가질 때 권력이 생기는 거죠. 우리는 권력을 가진 게 아니라 대중에게 알려진 것뿐이에요.”

    ▼ 정치·사회적 이슈가 발생했을 때 시민운동의 대표자들이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권력현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권력이 아니라 파급효과지요. 저 개인에게 무슨 권력이 있습니까.”

    ▼ 검찰 기소를 앞두고 있는데, 혹시 검찰에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편견 없이 수사하면 좋겠어요.”

    마무리 질문 몇 개 한다고 만났는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하긴 한 사람의 삶과 생각을 몇 시간 얘기해서 어찌 알 수 있으랴. 나는 새삼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일의 고단함을 느끼고 진저리를 쳤다.

    “아빠가 혹시 못 돌아오더라도…”

    ▼ 마지막 질문입니다. 환경운동에 매진한 최 대표님 삶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저와 동년배인 전태일은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노동자도 인간이라고 외치며 몸에 불을 질렀습니다. 역시 나이가 같은 서울대생 김상진은 제가 4학년 때 유신 반대하면서 할복을 했어요. 그 친구가 죽어가면서 ‘나는 지하에서 동료들이 하는 일을 지켜볼 것’이라고 말한 게 지금도 기억납니다. 해마다 그가 죽은 4월12일이 되면 제가 꼭 단식을 합니다. 그들이 지하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데 제가 어떻게 편하게 살겠습니까. 진짜 올바른 길로 가겠습니다. 약속합니다. 저, 자가용도 없고 골프도 안 합니다.”

    ▼ 부인께서도 차가 없나요?

    “없습니다. 우리 집엔 차라는 게 없어요.”

    ▼ 따님도요?

    “없어요.”

    그는 “이번에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많은 사람한테 도움을 받았다”며 “겸허한 자세로 그들에게 진 빚을 갚겠다”고 밝혔다.

    그의 휴대전화기에서 울리는 진동음이 잦아졌다. 아마도 또 약속시간에 늦은 모양이다. 취재수첩을 덮으며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그런데 따님과는 좀 풀렸나요?”

    “제가, 아침에요. 영장실질심사 하는 날 아침에 딸한테 편지를 썼어요. 아빠가 미안하다고…. 미안하다. 그렇지만 아빠는 죄가 없다. 하지만 구속될지도 모른다. 모레가 딸 생일이거든요….”

    그의 눈가가 벌게졌다. 목이 멘 그가 안간힘을 쓰며 젖은 말을 이어갔다.

    “이불…(그의 얼굴에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가 이불을 선물로 샀어요. 이불이 엉성해 딸이 감기에 걸렸거든요. 이불을 잠든 딸 옆에 놓고는…(그의 말이 진창에 빠진 듯 허우적거렸다) ‘아빠가 혹시 못 돌아오더라도 이불 잘 덮고 자라’고 말하고 집을 나섰어요…. 내가 울면 안 되는데, 딸 생각을 하니까…. 딸이 제가 내는 책마다 추천사를 써줬거든요.”

    나는 눈물을 훔치는 그의 둔탁한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현장의 거친 기운이 느껴지는 짧고 굵은 손가락을.

    “밥도 집에서 안 먹으니”

    ‘표적수사’ 논란 최열의 눈물

    1994년 출간된 ‘최열 아저씨의 우리 환경 이야기’. 최 대표의 딸이 추천사를 썼다.

    ▼ 딸이 아빠를 몹시 사랑하고 존경하나 보네요.

    “좋아했지요. 한번은 책이 출간되고 나서 방송국에서 특집 만든다고 집으로 찾아왔어요. 여자 PD였는데, 딸에게 ‘너도 아빠처럼 환경운동가가 되고 싶지?’ 물었어요. 딸이 ‘싫어요’하더라고요. 이유를 묻자 ‘우리 아빠가요, 매일 새벽에 나가 나 잘 때 들어오고요. 환경운동을 그렇게 오래 했는데 환경이 더 나빠졌어요. 엄마는 농민운동을 했는데, 농민이 가장 못살아요’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대통령을 하겠다는 거예요. 대통령을 해야 환경문제도 해결하고 농민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면서. 그래서 정치학을 선택한 거예요.”

    ▼ 영장이 기각된 후 아빠한테 뭐라 얘기하지 않던가요?

    “아니요. 내가 늘 집에 늦게 들어가니. 딸은 요즘 논문 쓰느라 정신없어요. 딸 얼굴을 아직 못 봤어요. 며칠 동안 계속 새벽에 들어갔다 아침 일찍 나왔으니. 내가 밥도 집에서 안 먹으니.”

    ▼ 딸 하나인가요?

    “예. 어릴 때는 저하고 많이 돌아다녔어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는 함께 배 타고 세계일주도 했어요.”

    1994년 초등학교 6학년이던 최윤영은 ‘최열 아저씨의 우리 환경 이야기’ 추천사에 이렇게 썼다.

    “너희도 그렇겠지만, 나는 아빠가 정말 자랑스러워. 우리 아빠는 환경운동을 아주 오래 하셨어. 이번에는 영국에서 유엔이 주는 환경상인 ‘글로벌 500’을 타 오셨어. 그리고 그전에는 시민인권상도 타셨단다. 내가 아빠 자랑을 너무 늘어놓는구나.”

    인터뷰가 끝나고 내가 가방을 챙기는 동안 그가 부리나케 계산대로 달려갔다. 호텔 정문 앞에서 악수를 하는 그와 나 사이로 매운바람이 파고들었다.

    핵심 증인 전 환경련 총무팀장 추모씨, “최열 대표 돈, 내가 받아 처리했다”

    전 환경련 간부 추모씨는 회계학을 전공했다. 환경련을 그만둔 뒤 서울시의원을 지냈는데, 현재 경기도 과천에 산다. 추씨는 전화통화에서 “환경센터를 지을 때 최열 대표가 낸 3억원을 내가 받아 처리했다”고 밝혔다.

    ▼ 1996년 환경센터 건물을 구입할 때 최 대표가 3억원을 낸 게 사실인가.

    “사실이다. 대표님이 갖고 온 돈을 내가 받아 처리했다. 검찰에 가서도 그렇게 진술했다. 그런데 검찰은 안 믿더라.”

    ▼ 입증자료가 있나.

    “당시 센터 모금과 관련한 손익계산서, 대차대조표를 내가 작성했다. 거기에 다 나와 있다. 그리고 잔금 치를 때 최 대표가 가져온 1억3000만원에 대한 차용증이 남아 있다. 최 대표가 3억원을 냈다는 사실은 당시 근무했던 임직원들이 다 안다. 임직원들도 몇백만원씩 대여금 형태로 보탰다. 나도 냈다.”

    ▼ 최 대표가 언제 돈을 갖고 왔는지 기억하나.

    “계약금과 중도금, 잔금을 치르는 날 갖고 왔다.”

    ▼ 수표였나.

    “대부분 수표였다.”

    ▼ 최 대표 돈을 받아 통장에 입금했나.

    “아니다. 통장에 넣지 않고 바로 건물주에게 건넸다.”

    ▼ 건물주는 어떤 사람이었나.

    “중소기업 사장이었는데, 대금의 일부를 현금으로 달라고 요구했다.”

    ▼ 최 대표가 3억원을 어떻게 마련했는지는 모르나.

    “어디서 빌려왔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공금 횡령이냐 채무 변제냐

    ‘표적수사’ 논란 최열의 눈물

    1996년 환경센터 대차대조표. 최열 대표에게서 3억원을 빌렸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환경운동연합은 2001년 10월 삼성SDI로부터 ‘솔라하우스 건립’ 명목으로 받은 후원금 3억원 중 쓰고 남은 1억8000만원을 우리은행 계좌에 입금했다. 당시 최열 대표는 삼성SDI의 사외이사였다.

    구속영장에 따르면 최 대표는 2002~ 2003년 5회에 걸쳐 이 돈을 인출해 동생에게 5000만원을 건네는 등 사적인 용도로 썼다. 특히 2002년 4월 인출한 7000만원은 우리은행 예금계좌에 넣어뒀다가 5년 뒤 찾아 딸 유학자금 등으로 사용했다. 최 대표도 이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받을 돈을 받아 쓴 것이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고 반박한다. 환경련 자료와 관계자들에 따르면 환경련이 최 대표에게 3억원을 빚진 경위는 이렇다.

    1995년 환경련은 환경센터를 마련해 입주하기로 하고 건물주와 13억9500만원에 계약했다. 1995년 10월 계약금 1억원을 지급했는데 이때 최 대표가 5000만원을 댔다. 그해 12월 중도금 4억1500만원이 건물주에게 넘어갔다. 최 대표는 이때도 1억2000만원을 보탰다. 이듬해 3월 환경련은 센터 건립을 위한 모금을 시작했고, 한 달 뒤 잔금 8억8000만원을 치렀다. 그중 1억3000만원은 최 대표가 마련해온 돈이었다.

    최 대표는 어떻게 3억원을 마련했을까. 사재 1억7000만원의 명세는 소장하고 있던 그림 판매대금 7000만원, 이전 건물 보증금 5000만원(보증금이 1억원인데 그중 반이 최 대표 돈이라고 한다), 인세 5000만원이다. 나머지 1억3000만원은 사업가인 동생한테 5000만원, 지인 5명한테 8000만원을 빌려 마련한 것이다.

    1996년 환경센터 대차대조표의 차입금 명세를 보면 ‘최열 3억원’이라고 적혀 있다. 환경련은 1997년 최 대표에게 1억2000만원을 갚았다. 그해 대차대조표 차입금 명세에는 ‘최열 1억8000만원’이라고 적혀 있다. 환경련 측은 구속영장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2001년 10월에 입금된 1억8000만원은 SDI 후원금 잔액이 아니라 후원의 밤 행사를 통해 별도로 조성한 돈이라는 것이다.

    2000년 9월에 입금된 SDI 후원금 3억원은 2001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전액 인출돼 공사비 등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후원행사로 마련한 1억8000만원이 입금된 통장과 SDI 후원금이 들어 있던 통장이 같아 검찰이 오해(?)를 했다는 게 최 대표 주장이다. 말하자면 후원의 밤 행사를 통해 모은 1억8000만원으로 최 대표에 대한 채무를 정리한 셈이다.

    이제 최 대표가 내세우는 증거를 살펴보자. 먼저 그림 판매대금과 관련해선 당시 최 대표한테 김기창 화백의 그림을 구입했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법정에 증인으로 설 예정이다. 건물 보증금에 대해선 당시 그것이 최 대표의 돈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환경련 전·현직 직원의 증언이 확보돼 있다.

    인세 5000만원에 대해선 출판사 관계자의 진술이 있다. 이 관계자는 검찰에 가서도 당시 최 대표에게 그 액수의 인세를 지급했다고 진술했다. 검찰에 불려간 최 대표의 동생도 최 대표에게 5000만원을 빌려줬다가 나중에 되돌려받았다고 진술했다.

    8000만원과 관련해선 최 대표에게 돈을 빌려줬다는 지인 5명 중 4명이 법원에 확인서를 제출했다. 나머지 한 명은 사망했다. 게다가 1996년 4월 환경센터 잔금을 치를 때 최 대표가 환경련에 빌려준 1억3000만원에 대한 차용증까지 있다. 이 차용증은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기 직전 검찰에 제출됐다.

    상환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는 통장기록이다. 환경련이 1997년 최 대표에게 갚은 1억2000만원과 관련된 통장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2002년 이후 환경련이 5차례에 걸쳐 최 대표에게 돈을 갚은 기록은 환경련 통장에 남아 있다. 검찰 설명대로라면 환경련이 갚은 게 아니라 최 대표가 임의로 빼낸 것이지만.

    검찰은 구속영장에 환경련을 ‘피해자’라고 표현했다. 최 대표가 공금을 횡령했기 때문에 환경련이 피해를 봤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환경련은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한 다음날 법원에 확인서를 제출했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1996년 환경센터 건립을 위해 금전을 조달하는 과정에 최 대표한테 3억원을 차용한 것은 사실이다. ▲1997년 차용금 중 1억2000만원을 변제한 것을 비롯해 2003년 무렵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나머지 돈을 최열 대표에게 변제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환경운동연합은 그로 인해 어떠한 피해도 본바 없다.



    ‘표적수사’ 논란 최열의 눈물
    대통령실장에게 소명자료 보내

    최 대표에 따르면 검찰은 탄핵반대국민행동 계좌를 비롯해 그의 이름으로 개설된 여러 계좌를 조사했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앞장섰던 사람들의 모임인 6월 사랑방, 1971년 대학생군사교육반대투쟁에 앞장섰던 71동지회의 계좌도 다 그의 이름으로 개설된 것이다. 검찰수사로 드러난 최 대표 명의의 계좌는 80여 개나 된다. 대부분 환경련 관련 계좌다. 최 대표는 그중 자신이 사적으로 쓰는 계좌는 4개뿐이며 나머지는 자신의 이름을 빌린 공적인 계좌라고 말했다.

    ▼ 검찰이 환경련 간부들의 공금 유용 혐의를 수사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최 대표의 혐의를 찾아낸 것으로도 보이는데요.

    “제가 환경연합 사무총장을 그만둔 게 2003년입니다. 그때부터는 아무런 결재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2005년까지) 대표로 있었지만 결재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검찰 수사가 저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죠. 막상 검찰에 들어가니, 1996년 환경센터 건립할 때 누구한테 돈을 빌렸느냐고 물어요. 10년도 더 지난 일을 물어보니 기억이 잘 안 날 수밖에요. 당시 자금이 모자라 제가 환경련에 3억원을 빌려줬고, 나중에 그 돈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검찰은 빌려준 돈에 대해선 묻지도 않고 받은 것만 문제를 삼더라고요.”

    환경련 수사의 표면적인 계기는 언론 보도다. 2008년 2월 조선일보가 처음 환경련 내부의 공금유용 사건을 보도했고, 7월엔 주간동아가 관련 녹취록을 입수해 심층보도했다. 두 달 뒤 검찰은 환경련이 올 초 자체 감사를 벌여 당사자들을 징계한 이 사건에 대해 수사에 착수했다.

    ▼ 수사가 한창 진행되던 10월 중순 임채진 검찰총장과 통화하셨지요?

    “예.”

    ▼ 임채진 총장이 뭐라 하던가요?

    “내가 ‘횡령한 사실이 없다’고 하니까 ‘알아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환경재단이 2008년 5월 개설한 기후변화리더십 과정 1기 동기생인 두 사람은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의 검찰 출두 문제와 관련해서도 통화를 했다.

    “임 총장이 전화를 걸어와 ‘최 대표가 문 대표와 친하니 잘 얘기해서 자진출두하게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권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문 대표를 만나 그 뜻을 전달했어요. 나중에 문 대표 말이, 내부 회의를 거쳤는데 곤란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얘기를 총장에게 전해줬지요. 몇 달 전 일이에요.”

    최 대표는 검찰 수사와 관련해 정정길 대통령실장과도 통화했다고 밝혔다.

    “정 실장과는 함께 서울시개혁위원으로 활동했던 인연이 있습니다. 그분이 울산대 총장을 지내셨잖아요. 제가 울산대에 가서 강연할 때마다 찾아뵙곤 했죠. ‘전혀 사실이 아닌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고 말씀드리자 ‘근거자료를 정리해 보내주면 그쪽에 전달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 검찰 쪽에 말이죠?

    “검찰 쪽이겠죠. 그래서 몇 장짜리 자료를 보내드렸어요.”

    ▼ 임채진 총장과 통화하기 전에요?

    “아니, 그 후입니다.”

    ▼ 그 후 정 실장 쪽에서 다시 연락을 해왔나요?

    “아니요. 그걸로 끝났습니다.”

    환경련 계좌에서 6차례 인출

    검찰이 주로 문제 삼은 것은 최 대표가 2002년 환경련에서 받은 7000만원이다. 검찰에 따르면 환경련 계좌에 들어 있던 돈을 빼낸 것이니 횡령이다. 그러나 최 대표는 자신이 환경련에서 받아야 할 돈 중 일부를 받은 것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반박한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최 대표가 환경련에서 받은 돈을 또 다른 환경련 계좌를 만들어 입금했다가 5년 뒤 인출했다는 점이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사정은 이렇다. 2002년 4월22일 환경련은 그에게 7000만원을 수표로 지급했다. 그 돈은 1996년 환경련이 사옥으로 쓸 건물(환경센터)을 구입하는 과정에 그가 빌려준 3억원의 일부다. 그는 다음날 환경련 명의의 새 계좌를 만들어 그 돈을 입금했다. 우리은행 정기예금 계좌였다. 자신의 돈임에도 자신 명의의 계좌로 입금하지 않은 이유는 나중에 환경련 상근자 자녀를 위한 장학금용도로 쓰기 위해서였다.

    5년 뒤 최 대표는 이 계좌에 들어 있던 돈을 빼냈다. 5년간의 이자가 800만원밖에 되지 않아 예금보다는 주식투자가 낫다고 판단해서였다. 7800만원 중 5800만원은 자신의 계좌로 입금했고, 2000만원은 딸 계좌로 송금했다. 5800만원 중 3000만원은 새로 만든 신한은행 개인펀드에 넣었고 나머지는 미래창조연대 사무실 임대보증금으로 빌려줬다가 나중에 되돌려받았다.

    2000만원을 딸 계좌로 넣은 것은 유학비로 쓰기 위해서였다. 이 돈은 최 대표 부인의 통장을 거쳐 미국으로 송금됐다. 현재 그의 주식통장엔 1억원이 넘는 돈이 들어 있다. 환경련을 위해 쓰기로 했던 7000만원을 개인 용도로 써버린 만큼 주식투자로 불린 돈으로 이를 대체한다는 게 그의 계획이다.

    애초 자신의 돈을 환경련 명의 계좌로 입금한 점과 공적인 용도로 쓰기로 작정하고는 개인 용도로 사용한 점이 혼란스럽긴 하지만, 7000만원이 최 대표의 돈이 맞다면 그 쓰임새에 대해 검찰 아니라 누구라도 시비 걸 이유가 없을 것이다. 자기 돈이라면 딸 유학비로 쓰든 주식에 투자하든 무슨 상관이랴.

    논란의 핵심은 과연 최 대표가 환경련에서 받을 돈이 있었는지다. 최 대표와 환경련 측은 채권채무 관계가 있었다며 그 금액이 3억원이라고 주장하지만 검찰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법원이 구속영장을 내주지 않은 것은 최 대표의 해명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검찰은 3억원 변제에 대해 말이 안 된다고 보는 거죠?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고 뒷받침하는 증거도 없다고….

    “오래된 일이라 자료가 충분치는 않아요. 다만 내가 3억원을 빌려줬다는 것을 입증하는 회계자료는 찾아냈어요. 거기에 보면 다 나와 있어요.”

    최 대표는 미리 준비해둔 증거자료들을 내밀며 소상히 설명했다. 나는 이날 인터뷰 시간의 대부분을 3억원의 실체를 따지는 데 소비했다. 국가수사기관의 실력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법정에서 검찰이 고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대표의 무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자료(대차대조표, 차용증, 확인서 등)가 있고 증인도 있기 때문이다.

    요지는 이렇다(자세한 내용은 상자기사 참조). 1996년 환경련이 환경센터 건물을 매입할 때 최 대표는 3억원을 빌려줬다. 그중 자기 돈은 1억7000만원이고 나머지는 동생과 지인 등으로부터 빌린 돈이다. 뒷날 환경련은 6차례에 걸쳐 최 대표에게 3억원을 갚았다. 그중엔 앞서 언급한, 2002년 4월 최 대표에게 건네진 7000만원도 포함된다.

    하지만 검찰은 애초 이 같은 주장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구속영장 청구를 강행한 것도 최 대표와 환경련이 주장하는 3억원 변제를 허구로 봤기 때문이다. 환경련 계좌의 돈이 인출돼 최 대표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점, 그것이 개인적 용도로 쓰였다는 점에만 주목한 것이다. 말하자면 판단의 출발점 자체가 다른 것이다. 최 대표가 거짓말을 하거나 검찰이 오해(?)하거나 둘 중 하나다.

    ▼ 3억원을 환경련 계좌로 넣었나요?

    “계좌에 넣은 건 하나도 없어요. 대부분 수표로 (환경련) 실무자한테 갖다줬어요.”

    ▼ 검찰에서는 당시 그 돈을 받아 처리한 실무자가 없다고 말하던데요.

    “왜 없어요? 추OO씨라고 있어요. 당시 총무팀장으로 회계를 담당했어요.”

    ▼ 최 대표 명의로 80개가 넘는 계좌가 개설됐던 이유가 뭡니까?

    “환경운동연합을 1993년에 만들었잖아요. 그때만 해도 환경연합이 임의단체라 은행계좌를 개설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사무총장인 제 이름으로 통장을 만든 겁니다. 그런데 환경연합에 부서가 많거든요. 부서별로 사업용도에 따라 자꾸 새로운 통장을 만들다 보니 제 이름의 계좌가 계속 늘어난 거죠.”

    ▼ 왜 그렇게 따로 만들어야 하죠?

    “들어오는 돈의 성격이 다르니까요. 그걸 뒤섞어놓으면 나중에 뭐가 뭔지 몰라요.”

    ▼ 어느 시점부터 환경련 이름으로 계좌를 개설하는 게 가능해졌습니까?

    “2000년쯤인가….”

    ▼ 그때 정리를 잘 해놓았다면 오늘날의 사태를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제가 계속 얘기했어요. 제 것(계좌) 정리하라고. 화도 몇 번 내고요.”

    ▼ 2003년 환경련 사무총장을 그만두고 난 다음에 그랬다는 거죠?

    “그렇죠.”

    ▼ 그전에는 왜 정리할 생각을 안 했습니까?

    “제가 있는 상태에서는 굳이 바꿀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 데 관심 둘 상황도 아니었고요. 매일 일이 터지는데다 툭하면 지방과 해외를 돌아다녔으니. 또 정리하는 데 손도 많이 가고요.”

    최 대표에 따르면 지금도 그의 명의로 된 환경련 계좌가 수십개 남아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주먹구구식이 아닐 수 없다.

    ▼ 환경련 간부들이 공금을 유용한 사실이 드러났는데요. 최 대표께서 사무총장 할 때는 그런 일이 없었나요?

    “단 한 번도 없었어요. 10년 동안. 간부 개인이 자신의 통장에 공금을 넣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그만둔 뒤 일부 간부들이 공금을 건드린 것 같아요.”

    ▼ 왜 그렇게 됐죠?

    “외부 프로젝트 수행하면서…. 회비가 잘 안 걷히니.”

    ▼ 환경련 비리 사건에 대해 책임을 안 느끼십니까?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설립자로서 국민께 사과드립니다. 다들 백의종군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 최 대표께서 사무총장 할 때 환경련 재정구조는 어땠습니까? 회비와 후원금 비중이.

    “저는 인건비는 회비로 대고 모자라는 활동비와 운영비는 기업체 후원금으로 충당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당시 회비 비중이 70%쯤 됐을 거예요. 제가 물러날 때 한 달에 7000만원 정도의 회비가 걷혔어요. 회원이 한때 8만5000명에 달했습니다.”

    ▼ 정부 보조금은 안 받았나요?

    “아주 조금. 한 400만원 정도.”

    그의 변호사가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이날 인터뷰는 이쯤에서 끝냈다. 이틀 뒤인 일요일 오후 5시, 같은 장소에서 인터뷰를 재개했다. 텅 빈 사무실은 적막했다. 다음날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한다고 알려진 터라 긴장할 법도 하건만 그의 표정엔 별 동요가 없었다. 그는 낮에 대전의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강연하고 올라온 길이었다.

    “조선일보 사장과 내가 이데올로기가 맞나”

    ▼ 이번 사건으로 취소된 강연이 없나요?

    “코레일 강연 하나가 연기됐어요. 그쪽에서 취소가 아니라 연기라고. 그밖엔 없어요.”

    ▼ 카이스트 학생들이 이번 사건에 대해 묻지 않던가요?

    “안 묻던데요.”

    ▼ 기업체 후원금 받고 사외이사 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있는데요.

    “제가 1980년대 운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기업은 환경문제에 진짜 관심이 없었어요. 울산의 온산에서 오염물질이 나와 그 지역 농작물이 다 죽고 주민들이 병에 걸려 있는데도, 공해를 유발한 기업들은 자기네 공장 앞에 빨간 글씨의 ‘접근금지’팻말을 세워놓고 우리를 막았어요. ‘접근하면 쏜다’고…(웃음).

    국내 환경사고 중 가장 큰 것이 1992년에 일어난 페놀사건입니다. 오염물질 잘못 배출하면 기업(두산그룹)이 망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 최초의 사건이지요. 그때 제가 OB맥주 불매운동 해서 그해 매출이 1000억원 줄었습니다. 그 다음엔 골프장 건설 반대운동을 집중적으로 했어요. 생태계를 파괴하는 골프장 건설은 안 된다고. 그 후 핵폐기물의 위험성을 알리는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걸로 1995년에 골드만환경상도 받았지요.

    기업의 환경오염을 고발하는 운동을 계속하면서 제가 느낀 것이 뭐냐 하면, 이렇게 공격만 한다고 기업이 바뀌는 게 아니다, 최고경영진의 생각이 바뀌어야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아자동차가 망하기 직전 처음으로 기업의 사외이사라는 걸 맡았어요. 현대차로 넘어간 후에도 이사회 때마다 환경문제와 관련해 많은 제안을 했어요. 정몽구 회장이 제 의견을 많이 수렴해줬죠. 그 다음에 삼성SDI 사외이사를 맡았어요. 거기 가서는 에너지 줄이는 기술개발을 강조해 국내 처음으로 휴대전화 배터리를 개발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환경경영보고서를 낸 기업이 기아자동차와 삼성SDI입니다. 현대산업개발 사외이사를 맡아서는 친환경 건축에 관한 아이디어를 내고 있어요.

    결론은 뭐냐. 사외이사가 공돈이나 받는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밖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고경영진의 생각을 바꾸는 게 더 빠른 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기후변화센터 만들어 가장 먼저 한 일도 기후변화리더십 과정을 개설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각계 인사들을 참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어느 모임에서 그만한 유명인사들을 볼 수 있습니까.”

    ▼ 저도 수강생 명단 보고 놀랐습니다.

    “제가 다 오라고 했어요.”

    ▼ 오라면 다 옵니까?

    “오지요. 개인적인 친분 때문이기도 하지만, 환경문제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 때문이지요. 사실 조선일보 사장과 제가 이데올로기가 맞습니까. 그렇지만 환경 분야에선 최열이 최고라고 인정해주니까….”

    “행사할 때만 기업체 후원받아”

    ▼ 기업체 후원금 받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 여론이 있죠?

    “아니, 그냥 막 달라고 하면 안 되죠. 환경음악회나 환경영화제 같은 행사를 할 때만 후원받는 거죠. 자연환경을 그토록 오염시켰으면 좀 내야지. 다만 환경문제가 걸린 기업, 예컨대 담배회사 같은 데서 돈 받는 건 안 되죠. 원칙을 세워서….”

    ‘표적수사’ 논란 최열의 눈물

    2007년 7월 ‘스톱 CO2’를 주제로 한 라디오 공익광고에 출연한 안성기· 정은아씨가 수입금을 환경재단에 기부했다.

    ▼ 기업체는 잠재적으로 다 환경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잖아요?

    “그런 문제가 있을 때는 안 받죠. 그리고 기업이 막 주지 않아요. 아니, NGO가 무슨 힘이 있다고 기업이 막 돈을 줍니까. 사람들이 잘못 알고 하는 소리예요. 확실한 근거와 실력과 전문성, 그리고 설득력 있는 내용을 제시해야 후원금을 냅니다.”

    ▼ 환경재단이 기업체에 후원금을 강요한다는 언론보도가 있었죠?

    “재단은 운동단체와 다릅니다. 환경운동을 지원하는 돈을 모으는 곳이에요.”

    ▼ 후원금 액수를 정해 기업체에 공문을 보내는 이유는 뭔가요?

    “어떤 행사를 하는데 막연히 후원해달라고 하면 기업들이 얼마를 내야 할지 판단을 못하잖아요. 그래서 기업 수준에 맞춰 적당한 금액을 제시하는 거죠.”

    ▼ 환경단체가 기업의 약점을 잡아 등쳐먹는다는 비난도 있죠.

    “그런 건 10원도 없어요. 환경단체도 종류가 많아요. 일부 단체와 일부 환경 관련 주간지들이 그런 짓을 하죠.”

    ▼ 환경단체가 감시대상이라 할 만한 정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이른바 공익 프로젝트를 받아 수행하는 것도 문제의 소지가 있죠?

    “김대중 정부 때부터 그런 게 시작됐는데, 많지는 않았어요. 정부가 하면 효율성이 떨어지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을 NGO가 대행하는 거죠. 해당분야에 대해 NGO가 공무원보다 더 전문성이 뛰어나니. 환경연합 산하에 8개의 부설전문기관이 있어요. 그러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거죠.”

    ▼ 그게 재정적으로 좀 도움이 되나요?

    “약간은 됩니다만, 인건비를 책정하지 않고 사업비만 주기 때문에 문제가 많아요.”

    ▼ 최 대표께서 환경련에서 활동할 때는 얼마나 했습니까.

    “제가 그런 걸 반기지 않아 별로 안 했어요. 형태도 조금 달랐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면 그쪽의 간섭을 받아야 하고 무슨 보고서도 내야 하고, 시간도 많이 뺏겨요. 원래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되죠.”

    ▼ 외국에서는 NGO가 정부지원금을 얼마나 받나요?

    “많이 받죠. 특히 선진국은 제3세계 NGO까지 지원해요.”

    ▼ 환경련 직원들 보수 수준이 어떤가요?

    “매우 열악하죠. 15년 정도 한 사람이 150만원이고요. 처음 들어오면 100만원도 안 되고. 빈곤층이죠. 그런데도 주변에서는 늘 괴롭히죠.”

    시종 차분하던 그가 조금 격앙된 목소리를 토해냈다.

    “지금 이 정도로 공기와 물이 좋아진 게 다 정부보다는 NGO 덕분 아닙니까. 정부가 할 일을 우리가 대신 했는데, 이제 와서, ‘야, 이 새끼들아. 너희가 뭘 했느냐. 횡령한 것 아니냐’ 하고….”

    한국시민단체네트워크가 NGO 담당기자와 활동가 200명을 대상으로 시민단체 신뢰도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시민단체의 위기를 불러온 가장 큰 이유로 꼽힌 것이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다. 두 번째가 정파적·이념적 편향성, 그 다음이 시민단체의 권력화다.

    “나를 좌파라고 하면 딸이 웃는다”

    ▼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는 얘기예요. 시민과 밀착하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해왔습니다. 환경연합 처음 만들 때 회원이 6000명이었어요. 제가 10년간 이끌면서 8만5000명까지 늘었습니다. 이게 그냥 된 게 아닙니다. 길거리, 버스터미널, 극장 앞에서 행사하고, 시민의 피부에 닿는 현장운동을 벌인 결과입니다. 제가 10년간 매일 2000리를 다녔어요. 제가 프로젝트 맡는 걸 반대하는 것도 그걸 하면 회원이나 시민과 함께하는 운동의 범위가 좁아지기 때문입니다. 돈도 별로 안 되고 힘은 힘대로 들고. 앞으론 안 할 겁니다.”

    ▼ 정파적·이념적 편향성 시비도 만만찮지요?

    “외국 환경단체는 환경을 중심으로 운동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달라요. 과거 민주화운동 했던 사람들이 NGO의 뿌리입니다. 외국의 NGO는 환경, 소비자, 인권 등 활동분야가 구분돼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런 체계가 안 잡혀 있기 때문에 중요한 사안이 발생한 경우, 예를 들어 ‘부패한 정치를 몰아내자’ 하면 그런 걸 전문적으로 하는 단체가 따로 없으니 시민사회 전체가 힘을 합해 나서게 되는 겁니다. 2000년의 총선시민연대도 그래서 만들어진 거지요.”

    ▼ 한쪽으로 치우친 게 아니냐는 지적이죠. 보편적인 시민의 관점에서 볼 때. 광우병 촛불시위만 해도….

    “광우병 문제는 식품과 관련된 것이니 당연히 환경련이 앞장서야 해요.”

    ▼ 보수 쪽에서는 그 바탕이 반미(反美)라고 보니까.

    “다 자신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거죠. 극우세력이 볼 때는 다 좌(左)죠. 환경은 좌우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문제입니다. 이데올로기는 20세기의 잣대입니다. 그런데 자꾸 과거의 잣대로 재단하려 해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좌파입니다. 저보고 좌파라고 하는데, 제 딸이 웃어요. 아빠야말로 친미주의자 아니냐고. 미국이 물론 잘못한 게 많지요. 하지만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전문가가 많은 점 등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 2000년 총선 때 낙선운동을 펼쳤고, 2004년엔 노무현탄핵반대운동에 앞장섰죠? 정치적 사건에 환경단체가 나서야 할 이유가 뭐죠?

    “그게 두부모 자르듯 딱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환경 따로, 정치 따로. 개발을 자꾸 하면 공해가 심해지고 산업구조가 왜곡되면 환경문제가 발생합니다. 끊임없이 개발하려는 세력을 누군가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개발세력은 정치권력과 유착돼 있어요. 그래서 환경문제를 풀려면 정치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겁니다. 그럼 정치를 바꾸는 방법이 뭐냐. 선거밖에 없거든요. 저는 국민이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잣대를 만들어주는 게 시민단체가 할 일이라고 봐요. 미국에서도 환경단체가 국회의원 후보자들을 평가해 낙선운동과 당선운동을 합니다.”

    ▼ 노무현 탄핵반대운동은 어떻게 봐야지요?

    “노무현씨가 돌출행동하고 말을 함부로 한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탄핵감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반대한 거예요. 당시 수십만명이 모였잖아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외면한 채 환경운동만 해서는 환경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너무 가난하면 시민운동 못해”

    국내에서 손꼽히는 시민운동가인 그의 재산은 얼마쯤 될까. 최 대표는 서울 용산의 42평짜리 삼성아파트에서 부인과 딸과 함께 산다. 환경재단에서 받는 월급은 400만원. 부수입이 훨씬 많다.

    기아자동차와 현대산업개발 사외이사로서 매월 받는 급여가 합쳐서 약 700만원이다. 책 인세도 만만찮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최열 아저씨의 우리 환경 이야기’ ‘최열 아저씨의 지구촌 환경 이야기’ ‘최열 아저씨의 지구온난화 이야기’ 등 ‘최열 아저씨’ 시리즈가 지금까지 다 합해 100만부쯤 나갔다. 연간 인세 수입이 3000만원이다. 그뿐 아니다. 그는 한 달 평균 10번 강연을 한다. 강연료는 보통 50만원이지만 100만원을 받을 때도 있다. 50만원씩만 잡아도 월 500만원, 연 6000만원이다.

    최 대표는 2012년까지 10억원을 모아 환경운동가 상근자 자녀 장학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돈을 많이 버는 건 사실이지만, 중산층 이상의 생활은 하지 않습니다. 우선 골프를 안 합니다. 그리고 자가용도 없습니다. 다른 스포츠 활동도 하지 않아요. 유일한 취미라면 여행입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합니다. 환경운동 하다 보니 전세계로 돌아다니게 됐죠.”

    ‘표적수사’ 논란 최열의 눈물

    2006년 9월 ‘지구환경대통령’으로 불리는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자신이 출연한 영화 ‘불편한 진실’을 홍보하기 위해 홍콩에 들렀을 때 최열 대표를 초청해 대담을 나눴다.

    ▼ 시민운동가는 가난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죠. 엄격한 도덕성도 갖춰야 하고.

    “엄격한 도덕성은 중요하죠. 하지만 너무 가난하면 시민운동 못합니다. 시민운동이라는 건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거든요. 앞서가려면 다양한 체험을 해야죠. YMCA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시민단체잖아요. 그 YMCA 상근자들이 환경재단에 석·박사 과정을 신청합니다(환경재단은 대학원 진학을 원하는 시민단체 상근자들을 선발해 그들이 석·박사 과정에 합격하면 장학금을 지급한다). 이게 우리나라 시민단체의 수준입니다. 시민운동의 덕을 보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녀는 좋은 학교에 보내면서 정작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한테는, 너희는 자녀를 학교에도 보내지 말고 무조건 나라를 위해 봉사만 하다가 생을 마쳐라. 이래서야 누가 시민운동을 하겠습니까. NGO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환경재단에서 대학 설립을 준비하고 있어요. 인증기관도 만들 예정이고. 해외연수 프로그램도 계획하고. 상근자 몇 명이 앉아 컴퓨터만 두드려서야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사과상자로 돈 받았다?’

    ▼ 환경운동가로는 가장 성공한 분인데….

    “아니, 저는 성공이라는 말 아주 싫어합니다. 김영삼 정부 때 황산성씨가 환경부 장관이 된 후 한 번 만났어요. 첫마디가 ‘최열씨, 그랜저 타고 다닌다면서요?’였어요. ‘전 차가 없는데요’ 했죠. 누구한테 들었냐니까 국장이 그런 보고를 올렸다는 겁니다. 또 ‘돈 많이 벌어 좋은 집 장만했다면서요?’ 묻기에 ‘계속 살던 집에서 사는데요’ 했죠. 동강댐 백지화운동을 벌일 때는 제가 사과상자로 돈을 받았다는 소문이 났어요. 그런 소문 누가 냈는지 알아요. 한국 사회가 좁기 때문에.”

    ▼ 누굽니까?

    “이해관계가 걸린 사람들이죠. 정치적인 세력도 있고, 건설 쪽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 환경련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네요.

    “그럼요. 그런데 싫어하는 사람은 소수예요. 예전에 제가 매일 방송을 했거든요. 택시를 타면 요금을 안 받아요. 길 가다 보면 사람들이 알아보고 인사하고 악수하고 사인 요청하고. 오늘도 대학교(카이스트)에 가서 강연했는데 학생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저를 지탄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면, 저, 이 운동 안 합니다.”

    ▼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주변에서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검찰 고위간부를 만났는데, ‘최열씨가 다른 건 모르겠는데, 돈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하더군요. 왜 이런 얘기가 나올까요?

    “아니, 인세 들어오는 걸 막을 수는 없잖아요. 강연하고 강사료 안 받습니까. 사외이사도 그렇고. 저는 직접 확인하지 않은 건 절대 남한테 전달하지 않습니다.”

    ▼ 언론계에서도 최 대표님이나 환경단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많아요.

    “저도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아니, 골프도 안 하고 자동차도 없고. 그렇다고 오락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돈을 굴려서 무슨 빌딩을 산 것도 아니고. 집 한 채밖에 없는 사람한테 흥청망청한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건 맞지 않죠.”

    ▼ 어쨌든 환경련 횡령 사건과 최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가 전체 시민단체에 대한 비난여론이 조성되는 데 이바지한 셈이 됐죠?

    “이바지라는 표현은 좀….”

    ▼ 그런 분위기가 조성된 건 맞지요.

    “제가 환경연합을 정리하고 나온 게 2003년인데….”

    ▼ 일반사람들은 환경련과 최열을 떼어 생각하지 않거든요.

    “조 차장님이 만나는 사람과 제가 만나는 사람이 완전히 다릅니다. 저는 각계 인사도 많이 만나지만 서민, 학생, 어린이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만납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를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면 내가 이 운동 안 합니다. 저 때문에 환경을 공부하는 학생들, 생각보다 많아요. 서민을 대상으로 강연 하면 500명, 1000명씩 몰려들어요.”

    목소리와 표정으로 미뤄 약간 화가 난 듯싶었다.

    ‘표적수사’ 논란 최열의 눈물
    “가정에 소홀했던 건 사실”

    ▼ 최 대표께선 시민운동가로서 상당히 성공적인 삶을 살아오셨는데, 그렇게 자부하십니까?

    “저는 성공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니까요.”

    ▼ 아, 죄송합니다. 통속적인 의미의 성공이 아니라 많은 일을 성취했다는 뜻에서….

    “운동하다가 정치권으로 간 사람 많잖아요. 하지만 저는 한길을 갑니다. 정치권에서 여러 차례 불렀지만 안 갔습니다. 왜냐? 이게 정치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정권은 5년 단위로 바뀝니다. 정치인은 권력을 잃으면 할 일이 없죠. 하지만 환경운동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할 일도 많습니다. 특히 기후변화 문제는 2015년쯤 되면 세계적으로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겁니다. 그에 맞춰 산업구조도 재편될 겁니다. 정부나 기업이 이런 문제를 대비하지는 않으면서 자기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 뒷다리나 잡아서야 국제 경쟁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 최 대표님의 개인적 삶은 어떤 것인가요?

    “저는 낙관적으로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즐겨 쓰던 표현이 ‘인간이 자연을 버리면 자연이 인간을 버린다’예요. 그런데 3년 전부터 그 말을 바꿨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살리면 자연이 인간을 살린다’로.”

    ▼ 스포츠 활동도 안 하고 별다른 취미도 없다고 하시니….

    “그래서 제가 여행을 좋아합니다. 환경운동가에게는 현장이 중요해요. 새로운 것을 보고 체험을 해야 자꾸 아이디어가 생기거든요.”

    ▼ 가족이 소외감을 갖지는 않나요? 그렇게 밖으로만 돌면.

    “뭐 원래 그랬으니까. 아내는 예전에 농민운동을 했어요.”

    ▼ 이해는 해주시겠네요.

    “하는 일에 대해선 이해하지만….”

    ▼ 아무래도 가정에 충실하지는 못하죠?

    “가정은 무슨. 집에서 밥 먹는 일이 거의 없으니. 새벽에 나가 출장 가고…. 요즘은 덜하지만 환경연합 일 할 때는 정말 출장 많이 갔습니다. 국내외로. 현장도 많이 가고. 가정에 소홀했던 건 사실이죠.”

    ▼ 내일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한다는데, 만약 구속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거기에 대응할 어떤 계획이 있습니까?

    “구속되면 돼야죠. 어떡하겠습니까.”

    오후 7시에 다른 약속이 잡혀 있던 그는 늦었다며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다음날인 12월1일 검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최 대표는 영장실질심사를 신청했다. 같은 날 환경련은 기자회견을 열고 쇄신안을 발표했다. 요지는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사업비 명목으로 돈을 받지 않고 회비와 소액 후원금만으로 운영하겠다는 것. 아울러 결산내역 공개 등 회계 투명성을 제도화하고 환경센터를 시민에게 개방하겠다고 밝혔다. 또 반성의 뜻으로 간부의 급여를 삭감했다. 평균 130만원이었는데 60만원으로 줄였다.

    12월3일 법원은 최 대표에 대한 영장을 기각했고 이틀 뒤 나는 그와 세 번째로 만났다. 환경재단이 있는 프레스센터 근처 호텔의 레스토랑에서였다. 그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다만 얼굴이 며칠 새 더 야위어 보였다. 그는 “살을 빼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 영장이 기각됐네요. 예상하셨나요?

    “사법부가 올바른 판단을 하면 기각될 거라고 확신했죠. 정치적 외압이 작용하면 구속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판사께서 제 얘기를 진지하게 듣더라고요. 그날 아침에 자필로 쓴 7장짜리 글을 판사에게 드렸습니다. 환경연합이 보관하고 있던 차용증 등 증거자료도 제출했지요. 무죄 증거가 거의 다 나왔다고 봅니다.”

    “대운하 안 하면 돕고 싶다”

    최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과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 복원을 추진할 때 그는 청계천복원화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위원장은 이명박 시장이었다. 서울숲을 만들 때도 힘을 합쳤다. 서울숲 조성은 최 대표와 문국현 당시 유한킴벌리 사장이 주도했는데, 이 시장의 적극적인 지지로 서울시에서 예산을 지원했다.

    이 시장은 또 최 대표가 간사인 그린시티21 모임의 회원이었다. 그린시티21은 ‘주5일 중 하루 자가용 안 타기 운동’에 앞장선 유력인사들의 모임이다.

    “지하철 운행시간 연장도 제가 제안한 겁니다. 당시 지하철이 밤 11시면 끊겼어요. 그래서 제가 이 시장에게 ‘밤 12시에 종로통에서 택시 잡느라 다들 길거리에 나오는데, 교통사고 위험이 크다. 그러니 지하철 운행시간을 한 시간만 늘리자’고 제안했어요. 이 시장이 ‘해봅시다’ 해서 성사된 겁니다. 고건 시장 때도 제가 제안했는데, 그때는 안 됐어요. 노조에서 인원을 늘려달라는 둥 여러 가지를 요구한 탓에. 이 대통령의 장점이 뭐냐. 뭐 할 때 좋다 싶으면 곧바로 결정하는 거죠. 그건 제 성격과 비슷해요. 시장 시절 우리 사무실에도 자주 들렀어요. 실무자들과 악수하면서 고생한다고 격려하고. 하여튼 환경 문제와 관련해서는 ‘최열씨가 하고 싶은 건 다 하자’고 했지요.”

    ▼ 그러다 대운하를 두고 사이가 틀어졌군요.

    “저는 국민소득 2만달러인 나라에서 토목공사를 해서 국가 수준을 높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터널을 뚫고 물길을 돌려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것은 자연의 흐름에 맞지 않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운하가 매우 길고 수량이 늘 일정한 유럽에서는 괜찮아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여름에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고 다른 때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환경이거든요. 대운하를 건설해도 배가 나가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어요. 한국사람들 성질이 급해 한강유람선 한시간 타는 것도 지루해하는데 이틀씩 배를 타고 볼거리도 없는 운하를 돌아다니겠어요? 그래서 이건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한 겁니다.”

    ▼ 대선 당시 이 대통령을 만난 적은 없습니까.

    “부산영화제에서 한 번 만났어요. ‘최열씨, 요즘 보기 힘드네요. 한번 봅시다’ 하더라고요. 그 후 곽승준 교수를 저한테 보냈어요. 곽 교수한테 내가 그랬죠. 대운하만 안 하면 돕고 싶다고. 환경운동 하는 사람으로 대운하는 찬성할 수 없다고. 그 후 제가 대운하 반대를 내걸고 출마한 문국현 후보를 지지했잖아요. 나중에 이 대통령께서 저에 대해 섭섭해 한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 전해 들었어요. 대통령 취임 직전 김상협 미래비전비서관이 찾아왔어요. 지금 청와대에서 저탄소녹색성장을 추진하는 주무비서관이지요. 3시간 동안 환경문제와 기후변화 문제를 설명해줬더니, 자기들한테 도움이 되는 내용이라며 참조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최 대표가 환경운동을 꿈꾼 것은 1975년 6월 유신반대운동인 명동성당사건에 연루돼 긴급조치 9호위반으로 수감돼 있을 때였다.

    “1976년 7월 6년형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로 이감됐습니다. 한 방에 세 명씩 수감됐는데, 이부영 이호웅 이강철씨 등이 다른 사건으로 구속돼 들어와 있었어요. 매일 저녁 모여 토론을 했지요. 그런데 다들 밖에 나가면 노동운동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대학에서 농화학을 전공했거든요. 그래서 전공을 살려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게 뭔가 고민하다가 앞으로 산업화·도시화가 촉진되면 공해문제나 환경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지요. 그래서 ‘나는 한평생 환경운동 하겠다’고 선언했어요. 동료들이 ‘야, 임마. 공해라도 배불리 먹고 싶다’며 말리더라고요.

    그때부터 환경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국내에는 환경 책이 없더라고요. 일본앰네스티에서 책을 보내줬는데 제가 일본어를 모르잖아요. 그래서 교본을 사서 일어를 익혔습니다. 1977년 3월 대구교도소로 옮겨 갔는데, 독방에서 하루 12시간씩 공해공부를 했어요. 책 250권을 읽었지요. 한 3년 그렇게 공부하니 뭔가 잡히더라고요. 현장으로 달려가는 꿈도 꾸고. 정신분열 초기 증세인가 싶었어요.”

    온산초등학교에서의 눈물

    그가 출감한 것은 1979년 5월. 대통령 특사로 4년 만에 출소한 것이다.

    “환경 관련 연구소를 만들려고 했는데, 주변 동료들이 다 말리는 거예요. 유신치하에서 무슨 그런 걸 하느냐고. 민주화된 다음에 하라고.”

    1979년 6월 민주청년협의회 부회장을 맡은 그는 그해 11월24일 유신 종식을 촉구한 YWCA 위장결혼사건 주동자로 또다시 구속됐다.

    “옥중에서 할 일이 뭐 있습니까. 또 공해공부 했지요.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우연히 전두환씨를 봤어요. 그때 아, 저 사람이 대통령 되려나보다, 그런 느낌이 딱 들더라고요.”

    2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1981년 2월 1년4개월 만에 특사로 풀려났다.

    ▼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는 환경 문제에 관심이 없었나요?

    “대학 졸업논문이 ‘식품첨가물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관심이 많긴 했죠.”

    가장 보람을 느낀 일을 묻자 1회용 나무젓가락 폐지라고 했다. 쓰레기종량제 도입과 동강댐 백지화도 주요 성취로 꼽았다. ‘최열 아저씨’ 시리즈로 어린이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운 것도 큰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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