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해 때문에 성격 바꿨어요”
- 배우는 운명, “안약눈물? 있을 수 없죠”
- 웃는 모습이 예쁜 남자가 좋아
- “김윤석 선배님과 연기하고파”
- 운동으로 최악의 슬럼프 극복
- “추억·여행·작은 것의 소중함 놓치지 않아요”
어느 모로 보나 판이한 두 작품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김하늘의 상대역이 연하의 아역배우 출신 스타라는 사실이다. ‘블라인드’에서는 ‘국민 남동생’ 유승호를, ‘너는 펫’에선 ‘신 한류왕자’ 장근석을 연기 파트너로 만난 그는 대한민국 누나 팬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래서 짓궂게 물었다. “이성으로 보면 누가 더 매력적이냐”고. 이쯤에서 그의 참한 인상이 살짝 일그러지거나 동공이 커질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간다.
“둘 다 매력이 있지만 이성으로 보긴 어렵네요. 워낙 잘 자라서 누나 팬들이 굉장히 좋아하던데 내 눈엔 그저 어리게만 보이거든요. 하하하.”
그를 만난 건 2월 8일 오후. ‘너는 펫’ 프로모션을 위한 일본 출국을 이틀 앞두고서다. 지난해 11월 국내에서 개봉했지만 흥행하지 못한 이 영화는 현재 일본에서 선전 중이다. 1월 21일 개봉 첫 주부터 일본 박스오피스 5위를 기록하며 꾸준한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 1월에도 영화 홍보차 일본을 다녀온 김하늘은 “장근석 씨 팬이 워낙 많은 데다 영화에 대한 반응이 좋아 몇 번씩 보는 분들도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멜로와 ‘로코’ 사이
▼ 장근석 씨의 일본 팬들이 질투하진 않던가요?
“안 하더라고요, 다행히(웃음). 비슷한 연배가 아니라서 그런 건지, 제가 근석 씨를 털털하게 대해선지 질투하는 사람은 없어요.”
▼ ‘1박2일’에서도 털털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실제 성격도 그런가요?
“요즘 좀 혼란스럽긴 한데 ‘1박2일’에 비친 것처럼 평소에도 밝고, 재미있는 것 좋아하고,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것 좋아하고 그래요. 원래는 내성적이었는데 연기하면서 많이 변했어요. 상대방이 불편해하거나 오해하니까.”
▼ 오해를 받은 적이 있나요?
“많죠. 하하하. 사람들이 저에 대해 선입관을 갖고 있더라고요. 예전엔 오해를 사면 저 혼자 끙끙 앓았는데 팬도 많아지고 제 이름에 책임질 나이가 되면서 오해하게 만든 나한테도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굳이 ‘오해하지 마라’고 말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오해하게 만들지는 말자’고 다짐했죠. 우선 주변사람들부터 편하게 만들어줬어요. 나로 인해 즐겁게 일할 수 있게요. 예전에는 챙김을 받는 쪽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먼저 챙기는 편이에요. 근데 올 들어 생각이 많아졌어요. 밖에 나가면 깔깔거리고 다니니까 항상 활기차고 즐거운데 집에 있을 땐 간혹 멍하거든요.”
▼ 성격을 바꿔보려는 노력이 버거웠던가 보네요.
“억지로 즐거운 척한 건 아니에요. 그게 훨씬 편하고 좋았어요. 한 번 웃을 것을 세 번 웃으면 진짜 웃어지잖아요. 가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 그렇게 했는데 어느 순간 그조차 지치더라고요. 너무나 밝게 살려다 보니 지친다는 걸 지난 연말부터 느끼기 시작했어요. 아무튼 요새 좀 변하긴 했지만 가까운 친구들과 엄마 앞에선 여전히 많이 웃어요.”
한동안 슬픈 멜로드라마의 섭외 1순위였던 그에겐 어느새 ‘로맨틱코미디의 여왕’이라는 애칭이 생겼다. 팬들은 이를 줄여 ‘로코퀸’이라 한다. ‘너는 펫’ 외에도 ‘동갑내기 과외하기’ ‘그녀를 잊지 마세요’ ‘7급 공무원’ 같은 로맨틱코미디 영화에서 유독 좋은 반응을 얻어서다. 이들 작품에서 그와 짝을 이뤘던 권상우, 강동원, 강지환도 이후 주가가 껑충 뛰었다. 남자배우들 사이에서 ‘김하늘과 로맨틱코미디를 찍으면 잘 풀린다’는 말이 떠도는 이유다.
▼ 가장 잘 맞는 장르가 로맨틱코미디인가요?
“딱 잘라 그렇다고 확언할 순 없지만 즐겁게 촬영하는 건 맞아요. 연기할 때도 내 안에 잠재돼 있던 밝은 성격이 나오더라고요. 제법 유머감각이 있거든요. 멜로 연기를 할 땐 슬픈 감정에 완전히 몰입해야 하니까 힘들 수밖에 없죠.”
▼ 몰입을 심하게 해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던 적도 있나요?
“첫 영화 ‘바이준’이나 ‘로드넘버원’을 끝내고 나서 많이 힘들었어요. ‘로드넘버원’이라는 드라마는 시대상황이 암울하고 무거운 작품이어서 캐릭터에 깊이 빠졌던 것 같아요. ‘블라인드’가 끝난 뒤에도 감정 정리가 쉽지 않았는데 바로 ‘너는 펫’ 촬영에 들어가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내 사랑이 제일 예뻐요”
어느덧 그도 30대로 접어들었다. 독신주의가 아니라면 한 번쯤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만한 나이다. 사랑 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현재 사귀는 남자친구는 없다”는 김하늘. 지금부터 진실게임을 통해 그의 애정관을 살펴보자.
▼ 사랑한다면 상대가 연하라도 상관없다?
“연애 상대로는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결혼은 연하와 하고 싶지 않아요.”
▼ 연애 따로, 결혼 따로?
“그게 가능한가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다만 연하보다는 연상이나 동갑이 좋아요.”
▼ 동화 속 왕자님 같은 남자와의 운명적인 사랑을 꿈꾼다?
“아니요. 지금까지 첫눈에 반한 남자는 없어요. 중·고등학교 때 빼놓고요. 원래 전 첫눈에 반하지 않아요. 오래 지켜보다가 좋아지면 그때 표현해요. 좋아한다는 말을 대놓고 하진 않아도 어떤 식으로든 내 마음을 표현해요. 그 사람과 잘 되든, 안 되든 그래야 후회가 없죠.”
▼ 그렇게 표현하면 사랑이 이뤄지던가요?
“잘 안 됐어요(웃음).”
▼ 남자에게 차인 적이 있다?
“차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적은 없어요.”
▼ 먼저 이별을 통보한다?
“그랬던 적도 있는데 헤어지자고 해도 바로 헤어지게는 안 되더라고요.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으니까 몇 번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가 결국 서로 합의하에 헤어지게 되는 것 같아요.”
▼ 사랑 경험이 연기에 도움이 된다?
“그렇지 않던데요. 하하하. 그냥 그 작품에 빠지는 거지 내 연애담은 아니잖아요. 촬영하는 동안 깊이 몰입하다 보니 쉬는 시간에 밥 먹다가 상대역을 보고 화들짝 놀라기도 해요. ‘이 사람, 이 작품의 주인공과 다르잖아’ 하면서요. 하하하.”
▼ 공개 연애하는 커플이 부럽다?
“공개해서가 아니라 연애하는 그 자체가 부러워요.”
▼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가요?
“상황이나 방식은 다를지라도 모든 사랑은 닮은꼴이죠. 그래도 내 사랑이 가장 예쁜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작품 안에서 특이한 사랑을 많이 해서 그런 사랑은 원치 않아요. 연애를 해보니 치열한 사랑보다는 성숙한 사랑이 좋을 것 같아요. 끊임없이 서로 신뢰하는 느낌이 드는 그런 사랑이요.”
▼ 이상형이 있나요?
“있죠. 웃는 모습이 예쁘고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좋아요.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자기 중심이 있어서 제자리로 돌아올 줄 아는 사람, 그만큼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 함께 여행하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여행을 무척 좋아해서 자연 안에서 느끼는 행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그걸 못 느끼는 사람이 참 많더라고요. 너무 치열하게 살아서 그런가 봐요.”
여우주연상 2관왕
그도 지난해 치열한 경쟁을 뚫었다. 제48회 대종상영화제와 제32회 청룡영화제에서 연거푸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 두 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은 ‘블라인드’에서 그가 기존의 청순한 이미지를 벗고 시각장애인의 심리를 완벽하게 묘사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쉽사리 넘보기 힘든 ‘여우주연상 2관왕’에 오른 소감을 묻자 그는 “상을 염두에 두고 연기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내 이름이 후보로 노미네이트될 때마다 다른 분들이 상 받는 걸 보면 부러웠다”며 가슴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언젠가 나도 모두가 박수 쳐줄 수 있는 순간에 상을 받고 싶었어요. 다행히도 영화 ‘블라인드’로 상을 탄 다음 정말 많은 분이 축하해주셨고, 하나같이 덕담을 해주셔서 뿌듯했어요. 일찍 받았다면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요? 깨끗하게 기분 좋은 느낌이었는데 청룡영화제 때는 많이 부담되더라고요.”
▼ 수상을 예상했나요.
“기대는 했죠. 많은 분이 이번에도 제가 받을 것 같다고 하셔서요. 수상 여부를 떠나 그런 관심과 기대가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청룡영화제 때는 훨씬 긴장했는데 상까지 받으니 완전히 녹초가 되더군요. 대종상 때는 뒤풀이를 거하게 했는데 청룡 때는 그냥 집에 가서 부모님께 축하받았고 이튿날 아침까지 잠을 못 잤어요. 대종상 때는 기분이 방방 떴다면 청룡영화제 때는 되레 차분해지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상이나 어떤 이슈에 흔들리지 말자가 제 신조여서 ‘더 잘해야지’ ‘터닝 포인트로 삼아야지’라는 식으로 제게 부담을 주진 않았어요. 한 해를 정리하면서 앞으로도 변치 말자고 생각했죠.”
그는 1996년 의류브랜드 ‘스톰’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했고, 1998년 영화 ‘바이준’으로 연기에 입문했다. 이후 스크린과 브라운관의 주연 자리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 대중적인 인기도 꾸준했다.
“정말 평탄하게 살아왔어요. 운이 좋았어요. 어릴 때부터 배우의 꿈을 품고 열심히 오디션 보고 연기 수업 받으면서 이 길로 들어선 게 아니거든요. 정말 우연한 기회에 의류 광고를 찍었고 바로 영화 오디션을 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이 와서 갔는데 그날 밤 캐스팅됐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그 작품이 ‘바이준’이에요.”
▼ 주연감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나 보네요.
“오랫동안 여주인공을 못 찾고 있다가 제가 마지막에 캐스팅됐어요. 연기를 해본 적이 없는데 순전히 이미지만 보고 절 주인공으로 뽑은 거였고, 그 영화 덕에 생각지도 않던 드라마 주인공으로 픽업됐죠. 돌아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고 이것이 운명이구나 싶어요.”
▼ 어릴 때는 연기에 관심이 없었나요?
“전혀요. 연기자 중에 내성적이고 낯가리는 분이 많다고 하던데 전 굉장히 심했어요. 어릴 때부터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걸어본 적이 없어요. 학교에 가도 짝꿍에게 단 한 번도 먼저 말을 건 적이 없어요. 늘 제게 가장 먼저 말을 건 사람이 제 친구가 됐어요. 친구가 한 명 생기면 그 친구의 친구들과 친해진다든지 그런 식이었죠. 수업시간에도 발표 한 번 안 해봤어요. 초등학교 때까진 그러다가 중·고등학교 때 자아가 생기고 친한 친구들이 생기면서 성격도 좀 더 쾌활해졌는데 그때도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진 못했어요. 친구들 덕에 밝아지고 수다를 떨고 경쾌했지, 본성은 좀 많이 내성적인 것 같아요.”
고 김성재의 선물
고교시절 김하늘이 의류광고 모델이 된 것도 친구들의 공이 크다. 당시 그는 남성듀오 ‘듀스’의 멤버였던 고 김성재를 좋아했다. 그것을 알고 친구들이 어느 날 김성재의 사진을 가져와 그에게 보여줬다. 김성재가 전속모델인 스톰 광고사진이었다. 친구들은 사진 하단에 난 한 줄짜리 모델 모집공고를 가리키며 한번 도전해보라고 부추겼고, 그도 자신의 우상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모델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사람(김성재)이 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겠단 생각으로 사진을 보냈는데 1년 뒤 재수할 때 연락이 왔어요. 원래 여자모델을 뽑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뽑으니 오디션 보러 오라고요. 알고 보니 오디션 담당자가 제 사진을 버리지 않고 금고에 보관하고 계셨더라고요(웃음).”
오디션에 당당히 합격해 스톰 2기 모델로 선발됐지만 그가 바라던 김성재와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김성재가 그 사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탓이다. 그때까지 진로를 정하지 못한 그는 모델이 돼서야 자신의 길을 찾아 서울예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그해 그는 수천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바이준’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됐다.
▼ 연기를 막상 해보니 몸에 잘 맞던가요?
“처음에는 너무 괴로웠어요. 연기를 못해서 혼나도 저 자신을 탓하기보단 남을 원망했어요. ‘당신들이 원했잖아. 근데 난 힘들어. 난 모르겠어’ 하고요. 하지만 연기 경험이 없는데도 내 이미지와 가능성을 보고 캐스팅한 사람들의 기대치에 못 미치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자존심이 상하더라고요. 당시에는 여려서 상처도 많이 받았어요. 그 작품만 하고 그만두려고 했을 정도로요.”
▼ 정말 많이 힘들었나 보네요.
“그때는 매니저도 없었고 겨울에 촬영해서 무척 고생스러웠거든요. 차가 없어서 새벽 대여섯 시까지 스태프가 집합하는 영화사 앞으로 달려가서 같이 밥을 먹고 촬영장으로 갔어요. 이동할 때마다 스태프들 차를 타고 다녔고요. 첫 신이든 아니든 무조건 새벽 6시까지 가야 하니까 적응이 안 되고 너무 힘들어서 남모르게 두 번을 엉엉 울었어요. 우는 모습을 들키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요.”
▼ 그리 힘들었는데 어떻게 극복한 거죠?
“힘든 와중에도 슬슬 재미가 붙더군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재미를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모르는 사람 60, 70명이 한 작품을 위해 모였는데 그 안에서 내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는 현장 분위기가 싫지 않았어요. 힘들었지만 작품을 무사히 끝내고 나니 광고 제의도 많이 들어오고 매니저들한테서도 연락이 많이 왔어요. 그때 매니저가 생기면서 ‘해피투게더’를 시작으로 드라마에도 출연하게 됐죠.”
마음을 움직이는 눈물
지금까지 그는 영화 13편과 드라마 11편을 찍었다. 작품 편수는 영화가 더 많지만 궁합으로 치면 드라마가 한 수 위다. 영화 흥행성적은 작품에 따라 기복을 보였지만 드라마는 예외 없이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김하늘도 그것을 신기해했다. 작품 고르는 안목이 남다른 것일까.
“글쎄요. 매니저랑 같이 고르는데 그저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을 선택할 뿐이에요. 제 마음에 깊이 와 닿는 작품이요.”
▼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자신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바이준’ 촬영 초반에는 만날 혼났지만 나중엔 감독님에게 칭찬을 들었어요. 말하기가 좀 쑥스러운데, 순수함에서 나오는 순발력이 저의 장점이라고 하셨어요. 너무 깨끗해서 진짜처럼 느껴진다고요. 처음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지나고 나니 조금은 알 것 같더라고요. 연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저의 가능성에 대해 칭찬해주신 거였어요.”
누군가 “김하늘의 눈물 연기는 가식이 아니라 진짜처럼 느껴진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전하자 그는 첫 드라마인 ‘해피투게더’ 촬영 당시의 눈물에 얽힌 일화를 들려줬다. 다섯 남매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이 작품은 이병헌, 송승헌, 차태현, 전지현, 조재현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 제작 전부터 화제를 모았으며 방영 후에는 40% 넘는 시청률을 올렸다.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는 못하겠다고 했어요. 그때까진 연기에 한 발만 담그고 언제든 도망갈 생각이었거든요. 드라마를 해본 적이 없어서 너무 겁난다고 했더니 오종록 감독님이 직접 4시간 넘게 설득하시더라고요. 이렇게 좋은 카드를 내미는데 마다할 이유가 뭐냐, 내가 있고 남자배우들도 다 연기를 잘하니 넌 그냥 따라가면 된다고요. 하도 간곡히 말씀하시니까 뭔가에 휩쓸리듯 출연을 결정했어요. 그렇게 드라마를 시작했는데 영화를 할 때보다 분위기가 더 험악하더라고요. 절 설득할 땐 한없이 자상하던 감독님이 고함을 지르고 엄청 무섭게 돌변하니까 적응이 안 됐어요. 더구나 제 대사 처리도 문제였고, 가장 힘들었던 게 눈물이 안 나오는 거였어요. 그러면 안약을 넣을 수도 있는데 감독님은 진짜 눈물이 나올 때까지 3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렸어요. 카메라와 조명 세팅 다 해놓고요. 원래 잘 우는데 연기로 눈물 흘려본 적도 없고, 카메라며 스태프들이 전부 나만 쳐다보고 있는데 감정이 잡히겠어요. 뒤에서 한숨 푹푹 쉬지, 감독님은 안약을 못 넣게 하지, 정말 죽을 맛이었어요. 그게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중후반쯤에는 눈물 신이 있으면 눈물이 나더라고요. 처음 눈물이 터졌을 때는 컷이 됐는데도 멈춰지지가 않았어요. 한번 터지니 눈물 연기가 다섯 번 중 세 번은 바로 되더라고요. 그 드라마에서 감정 몰입하는 법을 배운 덕에 여태까지 감정 잡을 때 안약을 써본 적이 없어요. 오종록 감독님에게 늘 감사하고 있어요.”
배우로 산다는 것
데뷔 후 줄곧 탄탄대로를 걸어왔지만 늘 행복했던 건 아니다. 30대가 되기 직전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는 “그때가 인간으로서나 배우로서나 최대 위기였다”며 “사생활도, 인간관계도, 일적으로도 다 최악이었다”고 고백했다.
▼ 계기가 있었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좋은 일이 한꺼번에 오는 것처럼 힘든 일도 한꺼번에 오더라고요. 그런 시기였어요.”
▼ 어떻게 극복했나요.
“종교(천주교, 세례명 세실리아)의 도움을 받으면서 운동으로 극복했어요. 트레이너 선생님이 운동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 시간 동안 선생님과 대화하면서 운동하니까 많은 도움이 되더라고요. 처음 슬럼프가 왔을 때는 작업 끝나면 집에만 있었어요. 집에 있으면 자꾸 생각이 많아지고 약간 심각해졌어요. 기운이 없어서 사람들 만나기도 싫고 나가는 것도 귀찮고 자꾸만 구석으로 가려고 했어요. 근데 운동하면서부터 에너지가 나오고 성취욕이 생기더라고요. 몸에서 도파민이 나와서 그렇다는데, 나 자신과 싸우는 방법도 운동하면서 터득했어요.”
▼ 운동 중독인가요?
“하루라도 운동 못하면 못 견디는 정도는 아니에요. 선생님이 잘 쉬는 것도 운동의 연장이라고 해서 적절히 쉬고 잘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하려고 노력해요. 길게는 안 해요. 한 시간 반 정도 하죠.”
▼ 땀 흘리고 나서 씻을 때 쾌감을 느끼나요?
“그때 말고 혼자 러닝머신에서 걸을 때가 가장 좋아요. 가장 행복할 때가 그때와 운전할 때예요. 오로지 그것만 신경 쓰면 되고 저 혼자만의 공간이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이어폰 꽂고 걸을 때마다 살아 있다는 걸 느껴요.”
▼ 날씬한 사람은 다르군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여자들은 대체로 먹는 걸로 풀잖아요.
“저도 되게 많이 먹어요. 운동하니까 식욕이 돋아요.”
▼ 무슨 일이든 익숙해지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십상인데 그런 경험은 없나요.
“매너리즘에 빠진 적은 없어요. 작품마다 상황과 캐릭터가 다르니까요. 간혹 표정이나 눈빛 같은 것들이 전에 한 작품과 겹치긴 하겠지만 연기 공식은 없어요.”
▼ 연기자로서 자신을 색깔에 비유하면 어떤 색인가요?
“하얀색은 아닌 것 같고 하늘색? 하하하. 하얀 백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러 색깔이 물들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하늘처럼 맑은 것 같으나 비올 땐 흐려지고 노을 질 땐 붉어지고 그러거든요.”
▼ 다시 연기해보고 싶은 배우가 있나요?
“여러 작품을 하다 보니 두 번씩 같이 한 배우가 꽤 되는데 전 매번 새로운 사람과 연기하고 싶어요. 편하고 익숙한 것도 좋지만 새로운 경험을 쌓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 새로운 파트너라면 누구요?
“연하나 또래와는 많이 해서 연상의 남자선배들과 연기하고 싶어요. 김윤석 선배님처럼 연기에서 연륜과 깊이가 묻어나는 분들을 만나 혼나기도 하면서 연기로 열심히 한번 붙어보고 싶어요. 그럼 에너지가 더 많이 나올 것 같아요.”
자연인의 삶
그의 다음 파트너는 장동건이다. 두 사람은 최근 5월에 방영하는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남녀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미중년의 로맨스를 그린 이 작품은 ‘시크릿 가든’의 명콤비인 김은숙 작가와 신우철 PD가 만든다. 드라마 ‘온에어’에서 김 작가와 인연을 맺은 그는 “촬영이 언제 시작될진 모르겠다”며 “내용도 재미있고 장동건 선배가 오랜만에 출연하는 드라마여서 몹시 기대된다”고 했다.
▼ 다시 태어나도 배우가 되고 싶은가요?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사랑받는 일이고, 다른 인생을 살아볼 수 있잖아요.”
▼ 사람들이 알아보는 게 불편하지 않나요?
“예전에는 불편했는데 이젠 제법 편해졌어요. 사람 많은 데 안가고, 밖에선 모자 쓰고 다니거든요. 여행도 사람이 북적대지 않는 시골로 가요. 전 외국보다 국내 여행이 좋아요.”
▼ 연예인 중에 누구와 친한가요?
“연예인 중엔 없어요. 학창시절 친구들과 지금도 친해요. 같이 여행도 많이 갔고, 집에 모여 놀 때도 많아요. 친구들이 음식을 잘해서 같이 밥 먹고 술도 마시고 그래요.”
▼ 술을 잘하나요?
“좋아하진 않는데 빼지도 않아요. 술을 거의 안 마시는데 마셔야 할 땐 와인 마셔요. 맥주는 배불러서 싫고, 와인은 기분 좋게 적당히 마실 수 있으니까.”
▼ 잘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 있나요?
“술 마시고 기분 좋아지면 친구들한테 전화 걸거나 사진 찍어요. 술 취한 제 얼굴을. 술 깨고 보면 재미있어요. 그러면서 혼자 웃다가 지워요.”
그는 1남1녀 중 맏딸이다. 집에서는 몇 점짜리 딸이냐고 물었더니 “90점은 넘을 것”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 말에 매니저가 한술 더 뜬다. “부모님을 챙겨드리고 정겹게 지내는 걸 보면 100점에서 120점은 줘야 한다”며.
“인생을 살면서 작은 것의 소중함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순간순간 느끼는 고마움이 있잖아요. 부모님에게도 그래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언젠간 헤어져야 하잖아요. 그게 안 될 때도 있지만 그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저 자신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 결혼은 언제 할 건가요?
“독신주의는 아니니 언젠가 하겠죠. 근데 결혼하면 엄마가 섭섭해하실 것 같아요. 지금은 ‘우리 딸은 언제 갈까?’ 하고 물어보시지만 1~2년 전까지만 해도 보내고 싶어하지 않으셨어요. 잘 키운 딸 주려면 얼마나 아까우시겠어요. 하하하.”
▼ 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가치는 뭔가요?
“행복이나 믿음보다 더 소중한 건 추억 같아요. 그게 바로 저니까요. 추억이 있어 지난날을 돌아보고, 날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좋은 거든 나쁜 거든 기억하고, 좋은 것들을 추억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