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前) 작가’ 될까 하는 두려움 커
- 시골집에는 귀신들이 두런거리는 것 같아
- 고향 내려왔지만 뭘 써야 할지 지금도 모르겠어
- SNS? 적과 아군만 있다는 격앙된 태도는 좋지 않아
- 네 번 자살 기도는 너무 이기적인 선택이었지
- 문학은 인생의 방부제…다시 태어나면 목수 하고파
“8개월 동안 소설 한 줄을 쓰지 못했고 극심한 무력감에 시달렸어요. 뭔가 내 안에 있고 그 신호를 강경하게 받지만 그게 뭔지 모르겠더라고. 내 마지막 시기가 시작되는 느낌입니다. 내려가 겨울을 보내면 무언가 여명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요.”
그만큼 그는 올해 나올 작품에 공을 들인다. 그도 그럴 것이 2012년은 그의 등단 40년이 되는 해다. 40번째 작품은 그의 작품세계의 결정체가 될 것이라는 주변의 기대도 크다.
작가 박범신의 문학활동은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등단한 1973년부터 1979년까지 계급갈등을 중심으로 글을 쓰던 ‘청년작가’ 시기다. 1979년부터 절필을 선언한 1993년까지는 세태소설을 쓰던 ‘인기작가’ 시기였고, 문단 복귀 후 2000년대는 뿌리에 대한 욕망을 그린 ‘갈망의 시기’였다. 이제 박범신은 4기 시대를 열려고 한다.
2월 6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내 안에 늙지 않는 짐승이 하나 있어 글을 쓰지 않으면 그 짐승이 생살을 뚫고 나오기 때문에 안 쓸 수 없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둘레가 30㎞가 넘는 탑정호(湖)가 보이는 고향집(논산시 가야곡면 조정리)에서 조용히 글을 쓰고 있어야 할 그가 서울 집(평창동 소재)으로 잠시 올라온 것은 강추위 때문이었다. 고향집에 보일러가 작동하지 않아 현재 집수리 중이란다.
세속 욕망 버리니 근원에 대한 욕망이 꿈틀
▼ 4기 시대를 여는데 추위가 발목을 잡았군요.
“그렇군요(웃음). 돌이켜보면 청년작가 시절은 참 가난했습니다. 그땐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운 시절이었죠. 인기작가 시기에는 독자들 사랑도 많이 받았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원고청탁도 많이 들어와 행복했지만, 어쩌면 그때가 가장 고통스러운 때이기도 했어요. 찬사와 비난의 가파른 경계에 서 있었거든요. 절필 이후 갈망의 시기에는 나이가 자꾸 드니까 ‘시간을 이길 수 없구나’하는 생각에 좀 쓸쓸하던 때였어요. 스스로 깊어졌다는 느낌? 그때부터 근원적인 것에 대한 갈망과 영원성에 대한 욕망이 생살을 뚫고 나오면서 신성(神聖)에 가까워지고 싶었어요. 그동안 세속에 대한 욕망을 잘 이겨낸 것 같아요. 대견스러울 정도로(웃음). 그런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니까 근원에 대한 욕망이 더욱 커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땐 쓰고 싶은 것만 썼기 때문에 자부심이 충만했어요.”
▼ 최근에는요?
“지금은 1년 정도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어요. 그전 2년 동안은 ‘은교’ ‘비즈니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3편의 장편소설을 썼어요. 지금 장편소설을 못 쓰고 있는 것은 그런 탓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 이제 한 시기가 끝나고 새로운 한 시기가 시작되는 때인 것 같아 쉽지 않네요.”
▼ 지난해 등단 39년을 맞아 서른아홉 번째 소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를 펴냈어요. 등단연도와 장편소설집 권수가 딱 맞아 떨어집니다.
“등단 39년에 장편소설 39권을 냈다는 것은 정말 쉬지 않고 열심히 썼다는 거죠. 거기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싶어요. 저는 ‘전(前)’ 작가가 될까 두렵습니다. ‘영원한 청년작가’로 늙고 현역작가로 죽는 게 꿈이죠.”
▼ 올해 구상 중인 소설은 어떻습니까.
“지금 많은 소설이 머릿속에 흘러가고 있어요.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희한하게도 몸은 고향에 가 있고 마음은 평택이나 천안쯤 와 있는 것 같아요. 사실, 고향으로 내려가 글을 쓰겠다는 그런 생각은 예전엔 해보지 않았어요. 그래서인지 고향에 있으면서도 ‘작가로서 나는 왜 고향으로 왔을까?’하고 자문하고 있어요. 고향에서 그렇게 서너 달 지내다 보니까 어떤 날 밤에는 귀신들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제가 살고 있는 집 앞에는 큰 호수가 하나 있는데, 낮이면 경치가 참 아름답지만 밤이 되면 캄캄해져요. 그래서 그런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주술적인 기분도 들지요.”
패배의 역사 간직한 고향 논산
▼ 고향 논산은 어떤 곳입니까?
“논산은 금강문화권을 중심으로 수천 년 동안 그 역사가 이어져왔지만 승리의 역사보다 패배의 역사가 더 많았습니다. 제가 사는 집 주변이 황산벌이에요. 황산벌은 계백장군이 전사하면서 백제가 망한 곳이자 후백제가 망한 곳이잖아요? 고려 태조 왕건이 만든 ‘훈요 10조’ 가운데 훈요 8조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차현(車峴·현재의 차령산맥) 이남, 공주강(公州江·현재의 금강) 밖의 산형지세가 모두 본주(本主)를 배역(背逆·금강의 유역이 남에서 북으로 역류함)해 인심도 또한 그러하니, 저 아랫녘의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王侯), 국척(國戚)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혹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통합(후백제의 합병)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감행할 것이다.’ 고려 광종 때에는 호족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는 자가 줄을 이었고, 임진왜란 때에도 왜군 침략으로 해를 많이 입은 곳이죠. 조선 중기에는 기호학파 중심지로 회덕에는 송시열, 논산에는 김장생·윤증 등 사대부들이 지배했죠. 동학 때도 우금치 전투에 앞서 남북 접주들이 마지막 회의를 한 장소였고요. 고향 논산에는 그런 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어요.”
▼ ‘귀신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여기나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겠어요. 가끔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혹시 그분들이 저를 매개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하는. 저는 그래도 살아 고향에 돌아왔잖습니까? ”
작가 박범신은 “글을 안쓰면 손이 말굽으로 변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아, 그렇죠. 고향얘기만 했네요. 사실, 지금도 뭘 쓸지는 모르겠어요. 작가로서 이런 아픈 역사를 지닌 논산으로 귀향한 게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뭘 써야 하나’하고 고민할 때마다 특히 어둠 속에서 이상한 말소리가 많이 들려요. 제가 새로운 글을 쓴다면 아마 그런 것들을 쓰게 되지 않을까요? 역사이야기만 쓸 생각은 없어요. 역사는 명분에 따라 기록되지만, 소설은 명분 너머 이면에 있는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코드에 따라 쓰는 것이니까요.”
▼ 생활은 불편하지 않으세요?
“논산문화원에서 논산 이야기를 담아 만든 아주 작은 책인 ‘논산의 어제 이야기’를 읽고 있어요. 고향에 관한 책도 여러 권 보고 있고요. 지난해 11월 끝자락에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생활하기가 힘들어요. 보통 오전 10시에 일어나는데, 보일러가 작동되지 않아 몹시 춥고, 부엌에서 음식 챙겨 먹는 것도 불편해요. 식사를 대충 챙겨 먹고는 차를 몰고 계룡산 등 논산 곳곳으로 떠돌아다니지요.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저녁에는 주로 책을 읽는데 책이 잘 안 읽혀요. 캄캄한 어둠이 감싸고 있는 외딴집에 혼자 있자니 너무 적적하고, 글쓰기 또한 과도기에 있으니까 마음이 산란해요. 밤 10시 이후 혼자 술을 마셔요. 너무 외로우니까. 그리고 새벽 1, 2시에 술에 취해서 잠을 잔답니다. 사실, 내 손은 글을 안 쓰면 손에 가시가 돋는 느낌이 들면서 말굽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아직은 어쩔 수 없지요.”
▼ 논산으로 내려간 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을 올리고 있죠?
“네 .‘페이스북’에 ‘논산일기’라는, 일종의 단상집을 올려요. 안 쓰면 병이 되니까. ‘페북 일기’는 서울에서도 쓰고 있어요. 몇 달 그렇게 쓰다 보니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그래요. 그래서 ‘논산일기’를 올해 한 권 내고, 그걸 시작 삼아 해마다 한 권씩 내려고 합니다.”
▼ 그렇군요. SNS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인터넷이나 SNS에 익숙하지 않아요.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연재한 ‘촐라체’가 처음 인터넷을 활용한 소설이었죠. 저는 SNS를 건강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작가는 자기 작품과 타협할 수 없지만 독자에게는 늘 열려 있어야 해요. SNS는 바로 그런 점에서 새로운 문명이지요.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은 그동안 목소리 센 놈이 제 입맛대로 이끌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SNS는 그런 점에서 발언의 균형을 맞출 수 있어요. 우리 사회도 이제 스스로 정화하고, 스스로 그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 있다고 봅니다.”
“목소리 센 놈이 제 입맛대로 이끌어왔다”
▼ SNS는 자본에서 비교적 자유로운데요,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장단점은 무엇이라고 보나요?
“사람들은 정치를 욕하는데, 핵심은 정치가 아니라고 봐요. 정치가 자본의 지배를 받는 시대니까요. 정치적 독재시절엔 싸워야 할 타깃이 분명히 보였잖아요? 그런데 자본의 독재는 너무 교묘해서 전선조차 뚜렷하지 않아요. 자본이 모든 분야에서 반인간 반문화를 부추겨요. 우리 스스로 굴복당하고 노예가 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엉뚱한 헛발질만 하고 있어요. 자본의 교묘한 독재를 알면서도, 자본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딜레마입니다. 어쩌면 내 자신이 전쟁터라고 봐야지요.”
▼ 전쟁터라.
“자본이 이끄는 욕망으로 가고 싶은 나와 그 욕망을 부정하는 나 사이에 전선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자본이 주는 안락함을 누리고 싶은 것도 사실이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도 우리 자신이니까 전선이 따로 없다고 봐야죠. 오지여행을 하다보면 한창 잘나가던 중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배낭 하나 메고 떠나온 미국인을 많이 만나요. 자본주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 사람들까지 대체 왜 그러겠습니까? 자본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생명가치 중심의 삶을 실천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그렇고, ‘조화로운 삶’의 저자인 스콧 니어링 역시 미국인들이 20세기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하나예요. 자본주의 욕망의 노예로 살면 근원적으로 자유로운 삶, 의미 있는 인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보다 근원적인 것, 예컨대 사랑, 신성, 충만, 영원성 같은, 자본보다 높은 욕망에 이끌리는 거지요. 자본이 지배하는 문명인의 삶은 부자가 되든, 출세를 하든, 어쨌든 불안해요. 자본주의가 주는 안락함을 일부 희생해서라도 마음의 충만함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어요? 새로운 패러다임의 삶을 찾아나서는 거라고 봐요, 희망을요. 우리가 역사에 대해, 미래에 대해 그나마 가질 수 있는 희망이 여기 있어요. 사람이죠.”
▼ 요즈음 작가들은 SNS를 이용해 짧은 위트나 풍자 글을 자주 올립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많지만 뭐, 저는 그들 삶의 방식을 따라갈 생각은 없습니다. 내 방식대로 발언하고 싶고, 나의 세계관을 나이에 걸맞게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죠. 목소리 큰 사람이 있으면 가만가만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야죠. 작가로서 발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창을 치켜들고 광장으로 나서서 전사처럼 외칠 생각은 없어요. 왜냐? 우리의 토론문화는 중간지대가 없다는 게 문제예요. 풍속과 제도가 충돌할 때, 풍속이 타락했으니 더 엄히 다스리자 하면 보수이고, 풍속이 변했으니 제도를 바꾸자 하면 진보예요. 100% 보수, 100% 진보가 있다면 맹목적인 정파주의자이거나 광신도겠지요. 광신도에게 신이 머물겠습니까? 그런데도 보수적인 진보, 진보적인 보수, 혹은 경계인, 회색인, 중간자의 발언은 무시되거나 억압당해요. 그런 사람이 많지만 대부분 침묵하고 있는 게 우리 사회 문제라고 봐요. 문학은 경계에 놓인 것이니 작가 역시 경계에 서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지요. 저는 그 자리에서 작품을 쓰려고 해요. 작품으로 발언하겠다, 뭐 그런 태도라 할 수 있죠. 일상에서 나이의 권위를 내세울 생각은 없지만요, 작품에서만은 작가다운 품격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작가였고, 여전히 작가이며,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여겨요. 평생 뭐랄까요, 소셜미디어는 충분히 의미 있는 새로운 방식의 소통이지만, 적과 아군만 있다는 식의 격앙된 태도는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죠.”
“문학으로 수신제가? 우스운 소리”
▼ 작가 김훈은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한다’라며 문학은 맨 하위에 있는 거라고 했는데요.
“좀 거칠지만 그 말이 함의하는 속뜻을 생각하면, 이런 점이 있어요. 문학으로 ‘수신제가(修身齊家)’한다는 건 우스운 소리지요.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이중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분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아요. 저 또한 문학은 모든 예술장르의 최하층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문학은 쌀농사 같은 거예요. 쌀이 생산돼야 떡도 빚고 술도 담그죠. 그렇다고 해도 문학이 최종적으로 인간에 대해 말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어요. 인간을 구원하는 것까지야 너무 앞서나간 거지만, 문학은 인간의 오욕칠정을 소상히 기록함으로써 삶의 근원적인 의미를 생각하게 만들고 마침내 ‘내 삶이 이래도 좋은가’ 하는 반성을 불러일으킨다고 봐요. 물론 어떤 쾌락적 감동이 목표가 되는 수도 있고요. 결국은 같은 말이 되겠지만요. 그런 점에서 문학이, 사회 안에서, 독자에게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 독자 스스로 반성한다? 결국은 인간중심주의군요.
“그런가요? 인간 중심 하니까 북한 얘기를 빼놓을 수 없네요. 저는 햇볕정책 지지자입니다. 정파주의적 발언은 아니고요, 문학은 근원적으로 결핍된 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어요. 북한 정권과 상관없이, 북한 주민들은 현 단계 한반도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자 우리 민족입니다. 우리 이웃, 우리 민족이 고통 받고 있는데 우리가 어찌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만 잘 먹고 잘산다고 행복해집니까. 그들에게 도움이 될 일부터 과감히 해야 된다고 봐요. 사랑과 분노가 없으면 작가라 할 수 없겠지요. 언뜻 제가 ‘좌파적’으로 보일 수 있을 거예요. 소외된 자, 가난하고 상처 받은 자 편에만 서도 좌파라고 하는 이상한 세상이니까요. 저는 어떤 정파주의나 집단주의를 싫어합니다. 거기에 소속될 생각도 없어요. 작가는 결국 ‘독고다이’죠. 작가는 단독자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어요. 저는 문학이 한국식의 편협한 좌우를 넘어선 곳에 존재한다고 여겨요. 좌우 너머에 인간 중심주의가 있다고 믿고요.”
德治하는 사람이 정치 이끌어야
▼ 정파주의를 싫어하는 국민으로서 올해 총선과 대선에도 관심이 없나요?
“그건 아니고요. 우리 시대는 애써 이룩한 선진화와 민주화, 잘 먹고 잘살게 된 부의 가치와 혜택을 알뜰히 분배해야 할 시기예요. 민주화, 경제 선진화를 우리가 성취했는데, 소수 일부 자본가에게 그 밥상을 다 바친 꼴이 됐어요. 농사는 함께 지었는데 일부가 그 과실을 독점한다면 되겠습니까. ‘보편적 복지’라는 말도 웃겨요. 치사하고요. 누가 누구에게 은혜롭게 베풀라는 말처럼 들릴 때가 많아요. 복지는 시혜가 아니잖아요? 복지는 함께 일한 만큼 그 과실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의 환경을 만들어가자는 거지 시혜가 아닙니다. 이번 총선과 대선에서는 그런 것들을 합리적으로 타파할 수 있는 이들을 뽑아낼지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밥만 먹는다고 이 경쟁사회가 주는 불안이 다 해소되겠어요? 이제 ‘덕성’이 있는 정치, 곧 ‘덕치(德治)’를 하는 분들이 우리 정치를 이끌었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너무 센 싸움닭들만 뽑은 거 같아요. ‘덕(德)’은 부동심이고, 그러니 어떤 면에선 타고나는 것입니다. (정치)‘꾼들’은 저희들끼리 딴 데 가서 놀라고, 좀 내보냅시다. 안철수(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가 수면으로 불쑥 떠오른 것도, 싸움닭들이 판치는 상황에서 그 닭쌈 같은 정파주의, 또는 독식주의를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논리로만 풀고자 하면 곤란해요. 안철수 현상은 문화적으로 봐야 해요.”
▼ 자살 기도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박범신은 고등학생 때 2회, 대학생 때 1회, 작가 활동 당시 1회 등 모두 네 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가만히 생각하면 자살 시도 그거,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막내이자 외아들이었는데, 세상과의 불화가 너무 많아 제대로 성숙하지 않았던 때 그런 일을 저질렀어요. 세상은 미쳐 있는데 나는 정상이라고 생각하거나, 나는 미쳤는데 세상은 정상이라거나, 그런 생각에 둘러싸여 지냈어요. 예술가적 감수성에 다치고 있었던 거죠. ‘자기 죽음’이 유일한 ‘자유의지’라는 식의 섣부른 말에 치우쳐서요. 1980년 마지막 자살 기도를 할 때는 그 시대상황이 저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었어요. 이를테면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작가로서 나는 겨우 연재소설 써서 밥 먹고 사는구나’하는, 그런 자괴감이 날 너무 괴롭혔어요. 그때는 인기작가로 불리며 살 때였고, 아이가 셋이나 있는데 그 짓을 벌였어요. 경기 안양시에 살 때였는데, 더러운 안양천변에서 팔 동맥을 긋고 누웠는데 낌새를 느꼈던지 아내가 아파트 경비원을 총동원해서 피 흘리면서 실신해 있는 나를 찾아내 병원으로 옮겼어요. 아내가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은 후회하고 있어요. 고등학생 때 한 자살 기도 이야기는 자전소설 ‘더러운 책상’에 자세히 나와 있어요. 자식들에게는 좀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머지 자살 기도 이야기는 조만간 속편으로 쓸 생각입니다.”
▼ 작가 박범신에게 큰 영향을 준 책이 있나요?
“생텍쥐페리가 쓴 ‘인간의 대지’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제가 쓴 ‘촐라체’도 가만히 생각하면 생텍쥐페리 작품을 반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학에 들어갈 무렵 습작기에는 정음사에서 펴낸 ‘세계문학전집’과 민중서관에서 펴낸 ‘한국문학전집’, 동아출판공사에서 펴낸 ‘세계문학전집’ 등을 열심히 읽었어요. 특히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10권짜리 ‘세계전후문학전집’은 나를 작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어요. 그때는 다들 클래식한 고전문학작품을 통해 문학공부를 했지요. 좋아하는 작가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스탕달, 최인훈, 김승옥 등입니다.”
오욕칠정 교수법
▼ 명지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작가 50여 명을 배출했는데요. 제자들에게도 박 작가의 문학세계를 전수했습니까(그는 1992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했다)?
“정말 뜨겁게 가르쳤어요. 제가 처음 명지대에 갔을 땐 그 학교 출신 작가가 한 명도 없었어요. 저는 ‘오욕칠정 교수법’으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싸우는 게 제가 말하는 ‘오욕칠정의 교수법’입니다. 저는 함께 술 마셔주는 교수였죠(웃음). 문학은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다고 여기고, 그게 아주 좋은 방식이라고 믿고 있어요. 젊은이는 전망 부재로 늘 외로운 존재니까요. 젊지만 속은 캄캄한 게 젊음이잖아요?”
▼ 소설가 이기호, 백가흠과 가까이 지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명지대 제자들이죠. 동아일보에 그렇게 보도돼 그런 질문을 하는 거죠? 하지만 여러 제자가 있는데 그 친구들만 뭐 특별하겠어요? 내가 외로울 때 툭하면 놀아달라고 전화하기 편한 친구들이죠. 소설가 이기호는 지금 광주에 있고, 백가흠은 (경기 고양시) 일산에 있는데요, 논산에 이사한 첫날에 처량한 기분이 들어 전화했더니 두 시간 만에 광주, 일산에서 달려왔더라고요. 이만하면 ‘우기호 좌가흠’이라고 할 만한가.”
동아일보는 지난해 11월 27일 그가 서울 평창동을 떠나 논산 시골집으로 이사하는 모습을 동행 취재했다. 밤늦게 제자들에게 전화를 했는데 이기호, 백가흠 씨가 곧장 달려와 오전 4시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고 보도했다.
▼ 인간적인 사람이 인기작가가 되는가보군요.
“제 소설은 요즈음 몇 만 부 나가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문학 독자는 2만 명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몇 만 독자가 몇 십만, 몇 백만 독자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예전처럼 인기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인기작가로 불릴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니까요. 1993년, 절필을 통해 시장에 기득권을 스스로 반납했잖아요? 소설이 특별히 잘 팔리면 사회학적 이유를 고찰해볼 필요가 있어요.”
▼ 논산에 혼자 있으면 식사가 걱정일 텐데요. 좋아하는 음식은 뭔가요?
“김치찌개를 가장 좋아해요. 그 다음이 나물과 국, 밥이 나오는 가정식 백반인데, 맨날 그런 음식만 먹으니까 아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요. 싫어하는 음식은 튀김 등 기름진 것과 무거운 음식이에요. 저는 음식 욕심은 없어요. 일부러 소식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많이 먹지도 못해요. 저는 식도락가들이 몇 시간씩 차를 타고 기름값 들여가며 음식점을 찾아가는 걸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혼자 있어도 대충….”
▼ 그렇군요.
“내 안에는 늙지 않는 짐승 한 마리가 사는 것 같아요. 창조적 자아라고 해도 좋을 그 짐승은 나이도 없고, 시간도 가리지 않아요. 그런데 제가 글을 쓰지 않으면 생살을 뚫고 나와요. (글을) 안 쓸 수가 없죠. 저는 살려고 글을 써요. 스스로 그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제게 절대적인 가치입니다. 오죽했으면 신춘문예 당선소감에 ‘문학,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라고 썼겠어요? 요즘 트렌드로 보면 이런 문예반 학생 같은 태도는 매우 촌스러운데요, 스스로 좀 민망하고 부끄러울 때도 있어요. 요즘 세상에 절대적 가치가 어디 있겠어요? 니체는 ‘절대성은 병이다’라고 말했죠. 하지만 뭐랄까, 평생 일관되게 내 삶을 떠받쳐온 것이 있다면 하나는 인간중심주의 가치이고, 또 하나는 일종의 문학순정주의, 문학제일주의 가치라고 생각해요. 이젠 그런 순혈주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슬슬 농담하듯이, 문학을 즐겁게 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네요.”
▼ 그래서 ‘영원한 청년작가’라고 불리잖아요?
“어쨌든 저는 문학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열렬히 지향해요. 나이는 상관없어요. 나이 들었어도 괄호 안에 묶이는 작가는 되고 싶지 않아요. 여전히 사람들이 나를 미완성작가로 생각해주길 바라고요. 그렇게 살 생각이에요. 청년의 감성으로, 죽을 때까지 아주 불온하고 위험한 현역작가로 살고 싶어요. 돌이켜보면 그동안 39권의 장편소설을 썼는데, ‘문학’이라는 단 한 명과 짧은 연애를 한 것처럼 시간이 금방 지나간 것 같아요(웃음). 그렇다고 습관에 따라 글을 쓴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문학은 제 인생의 방부제입니다. 제가 이 나이에 정신이 나태해지거나 썩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문학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문학과 연애를 하고 싶지는 않아요. 경계에 서 있지 않아도 되는, 내출혈이 좀 적은, 그냥 유순하게 내 감수성을 따라가도 되는 그런 직업을 갖고 싶습니다. 목수 같은 거요.”
작가 박범신은 194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전주교대, 원광대 국문과와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다녔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9년에는 장편소설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물의 나라’ 등이 잇따라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1970~80년대 인기작가로 떠올랐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중 1993년에 갑자기 절필선언을 한 뒤 3년여 동안 경기 용인시의 외딴집에서 은거하며 세상과 삶, 문학, 스스로를 되짚는 고통스러운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1996년 오랜 고행을 끝내고 중편소설 ‘흰소가 끄는 수레’를 발표하고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대한민국문학상’(1981), ‘김동리문학상’(2001), ‘만해문학상’(2003), ‘대산문학상’(2009) ‘최우수예술가상’(2010)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