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제 동아일보 기자]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최영미, ‘황해문화’, 2017 겨울
시인 최영미(57)를 엿보는 글은 시(詩)로 시작해야 마땅하다. 그는 말(言)보다는 글(文)로 세상을 사유한다. 그의 문장은 ‘투명하고 단단한 금속성 울림’(방민호 서울대 교수)이다. 시인 황인숙은 그를 두고 이렇게 썼다.
“소설에서와 달리 시에서는 시인과 화자가 겹치기 일쑤다. 시인의 일상이나 몸과 마음의 형편과 동태가 작품에서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최영미는 그걸 꺼리지 않는다. 거침없고 서슴없다. 그 대범함에는 자부심도 한몫했으리라. 자신의 명민함에 대한 자부심, 젊은 날 수많은 독자의 아이돌 시인이었던 데 대한 자부심, 내가 설핏 엿본 최영미는 그런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시인에게 ‘다 털어놓는 민망함’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시는,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 좋은 글이 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답이었다.
‘괴물’은 위선 꼬집은 풍자시
그는 젊은 날 또래에게 ‘아이돌’이었다. 서른셋에 펴낸, 50만 부 넘게 팔린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 배우 못지않은 셀레브리티가 됐다. 첫 시집은 86세대 운동권을 들끓게 했다. “위선 그만 떨고 공부나 하라”는 냉소로 읽혀서다. 진보 성향이 강한 문단에서 그는 평가를 올바르게 받지 못했다.그는 1980년 서울대 인문대에 입학했다. 2학년 때 시위에 참여했다 체포돼 무기정학을 맞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하던 고전연구회에서 활동했다. 고전연구회는 나중에 주사파의 산실이 된다. ‘강철서신’ 김영환 씨가 고전연구회 2년 후배다. 그는 졸업 후 운동 조직 외곽에서 ‘자본론’ 번역에도 참여했다.
‘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에 실린 ‘괴물’은 풍자시다. 시인은 이따금 내놓은 풍자시를 통해 지식인의 위선과 가식, 거짓과 속임수를 꼬집어왔다. 가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돼지, 여우에 빗댄다. ‘여우짓’ ‘돼지짓’을 못마땅해하는 쪽이다. ‘화장한 얼굴’로만 살아가는 이를 체질적으로 버거워한다.
‘왼손이 하는 일은 반드시 오른손이 알게 하고/ 보도되지 않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여우들’(시 ‘정치인’), ‘북조선에서는 잘 우는 사람이 출세하고/ 남한에서는 적당한 웃음이 성공의 비결’(시 ‘닮은꼴’)이라고 차갑게 웃으면서 ‘얼굴에 1억짜리 미소를 바르고/ 장애 아동의 몸을 씻기며/ 향수를 뿌린 목소리로/ 고통을 말하며/ 너는 어쩜 그렇게 편안할 수 있니?’(시 ‘정치인’)라고 묻는다.
풍자시 ‘괴물’ 속에서 “이 교활한 늙은이야!”라는 외침을 들은 ‘En선생’은 그조차도 정곡을 찌르면서 까발리기가 어려운 ‘어떤 것’을 풍자라는 문학적 장치를 이용해 비틀어 묘파한 것이다. 30대 초반 겪은 상처를 50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풍자시를 통해 세상에 알렸으니 젊은 날 겪은 상처의 무게를 짐작해볼 수 있다.
“시가 실릴지 걱정했어요”
“황해문화가 그 시를 실을 수 있을지 걱정했어요.”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괴물’은 ‘황해문화’라는 문예잡지사의 청탁을 받고 쓴 시다. 황해문화는 시를 청하면서 “페미니즘 특집이니 페미니즘과 관련한 시를 써달라”고 단서를 달았다. 그는 ‘문단의 중요한 문제를 써야겠다’고 결심하고 ‘En선생’을 풍자시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은 “작품을 받았을 때 논란거리가 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게재 여부를 전체 편집위원이 참여한 편집회의 안건으로 올렸고, 작품을 읽은 편집위원들은 이번 호에서 ‘황해문화’가 지향하는 바는 물론, 그간 ‘황해문화’가 걸어온 길에 비춰 게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 만장일치로 게재를 결정했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세상에 나온 시는 두 달이 지나 주목받는다.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MeToo·나도 겪었다)가 한국을 포함한 세계로 퍼지는 와중에 눈 밝은 독자들이 ‘괴물’을 호출해 퍼 나르면서 온라인을 달궜다.
그가 JTBC에 출연해 고은(85) 시인의 성추행을 앞장서 ‘폭로’한 것으로 잘못 아는 이가 많은데 ‘괴물’이 화제가 된 후 오해(誤解)를 막고자 인터뷰에 응한 것이다. JTBC에서도 ‘En선생’을 애기했을 뿐 ‘고은’이라는 이름은 내뱉지 않았다.
작심했다기보다는 상황이 그를 나서게 했다. #MeToo가 없었다면 칼을 뽑아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월 30일 그가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알린 글은 이렇다.
‘서지현 검사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뉴스 보며 착잡한 심경. 문단에서도 성추행 성희롱 문화가 만연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지금 할 수 없다. 이미 나는 문단의 왕따인데, 내가 그 사건들을 터뜨리면 완전히 매장당할 것이기 때문에? 아니, 이미 거의 죽은 목숨인데 매장당하는 게 두렵지는 않다. 다만 귀찮다. 저들과 싸우는 게. 힘없는 시인인 내가 진실을 말해도 사람들이 믿을까? 확신이 서지 않아서다. 내 뒤에 아무런 조직도 지원군도 없는데 어떻게? 쓸데없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 무시무시한 조직이 문단.’
#MeToo 마중물 구실 해
#MeToo가 한국 사회의 젠더 인식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박해윤 기자]
그가 아무리 자유와 평등을 외쳐도
세상의 절반인 여성을 짖밟는다면
그의 자유는 공허한 말잔치.
그가 아무리 인류를 노래해도
세상의 절반인 여성을 비하한다면
그의 휴머니즘은 가짜다.
그의 시도 그럴듯하게 포장된 상품.
휴머니즘을 포장해 팔아먹는 문학은 이제 그만!
그는 ‘#MeToo 운동’의 마중물 구실을 했다. 그가 ‘문단의 권력’인 고은씨를 고발한 후 각계에서 #MeToo가 봇물 터지듯 이어졌으나 그는 방송 출현 후 온갖 구설에 시달렸으며 2차 피해를 겪었다.
‘문단의 권력’을 두둔하는 인사들은 다른 성폭력 사건의 전례처럼 행동, 성격을 거론하는 방식으로 피해자를 음해하고 가해자를 비호했다. 어느 시인은 ‘피해자 코스프레’ 운운하며 가당치 않은 논리를 내세웠다. “미투 운동은 진보진영에 대한 정치적 공작”이라는 헛소리마저 나왔다.
일부 인터넷 언론은 방송에서 한 말 중 자극적인 대목을 뽑아 어뷰징(abusing·검색을 통한 클릭 수를 늘리기 위한 기사)에 나섰다. 그의 발언을 토막 내 왜곡 보도함으로써 명예를 훼손한 기사도 있다.
“반성은커녕 괴물 비호한 문학인”
그가 2월 17일 쓴 글에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괴물’을 포함해 제 시 3편이 실린 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가 나온 뒤 12월 초에 인천에서 발행되는 모 신문에서 전화가 와 괴물에 대해 묻기에, 덜컥 겁이 나 인터뷰를 거절했습니다. ‘누가 나를 건드리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말하지 않겠다’고 저는 말했지요. 괴물과 괴물을 키운 문단권력의 보복이 두려웠고, 그들을 건드려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힘든데…. 일부러 문제를 키우고 싶지 않았지요. 그리고 한참 잊고 있었는데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에 제 시가 트위터, sns에 돌아다니다 기자들의 눈에 포착돼 여기저기서 기사가 나왔습니다. 문단 내 성폭력이 더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가 겪은 슬픔과 좌절을 젊은 여성 문인들이 경험하지 않기를 바라며 저는 방송에 나갔습니다.
(…)
여러분의 격려와 응원 덕분에, 이제 제게 괴물과 괴물을 비호하는 세력들과 싸울 약간의 힘이 생겼습니다. 문단 내 성폭력이 구시대의 유물로 남기를 바라며, 저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입니다. 더 많은 여성들이 #Metoo를 외치면, 세상이 변하지 않을까요.”
칼을 뽑았으니 끝장을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2월 27일 ‘동아일보’에 직접 작성한 글을 보냈다. 1000자 분량이다. “반성은커녕 여전히 괴물을 비호하는 문학인들을 보고 이 글을 쓴다”면서 ‘그때’ 목격한 장면을 적었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근처의 한 술집.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인들이 자주 찾던 곳이다. 선후배 문인과 술자리에 참석했다. 그때 ‘원로시인 En’이 들어왔다. 그가 의자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그리고 갑자기 바지 지퍼를 내리고 자신의 아랫도리를 손으로 만졌다. 잠시 후 그는 최 시인과 다른 젊은 여성시인을 향해 “니들이 여기 좀 만져줘”라고 명령하듯 말했다.
‘20년도 더 된 일이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처치 곤란한 민망함이 가슴에 차오른다. 나도 한때 꿈 많은 문학소녀였는데, 내게 문단과 문학인에 대한 불신과 배반감을 심어준 원로시인은 그 뒤 승승장구 온갖 권력과 명예를 누리고 있다.(…) 공개된 장소에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물건’을 주무르는 게 그의 예술혼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는 묻고 싶다. ‘돌출적 존재’인 그 뛰어난(?) 시인을 위해, 그보다 덜 뛰어난 여성들의 인격과 존엄이 무시되어도 좋은지(동아일보 2월 28일 자 참조).’
“딱하다”
3월 2일 고은 씨는 영국의 한 출판사를 통해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일부 인사들이 나에게 제기하는 상습적 성추행에 대해서 단호하게 부인한다. 시간이 지나 한국에서 진실이 밝혀지고 논란이 잠재워지기를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사실과 맥락을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의 친구들에겐 아내와 나 자신에게 부끄러울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다는 점을 밝힌다.”
그는 3월 4일 “그(En)는 이제 그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를 날려 보낸 것 같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국민들에게 용서받을 수 있었는데 딱하다”고 했다.
‘도도한 차도녀’ 이미지가 있으나 시인은 수줍음 많으며 사교적이지 않은 성격이다. 스물셋에 결혼해 스물셋에 이혼했다. ‘이혼녀’라는 낱말이 주는 느낌이 지금과 다를 때다. 30대 초반에 유명인이 됐다. 지금껏 혼자 살았다. 마흔 살 무렵 문단 풍토에 환멸을 느끼고는 발을 끊다시피 했다. 딱히 보지 않더라도 TV를 켜놓아야 마음이 놓였다. 축구와 야구가 헛헛한 마음을 달래줬다. 문자메시지 쓰는 것도 서툴렀다. 스마트폰도 남들이 다 산 뒤에 샀다. 어울릴 것 같지 않던 SNS를 시작하면서 세상 밖으로 목소리를 냈다.
글이 아닌 말로 그의 심정을 듣고 싶었다. 근황 얘기를 주고받은 후 호흡이 긴 인터뷰 기사를 쓰고 싶다고 청했으나 그는 단박에 거절했다. ‘튀려고 그런 게 아니냐’는 일부의 비딱한 시각을 특히 걱정했다.
“1주일 동안 외부 전화를 딱 2개만 받았어요. 생방송에만 나갔잖아요. ‘글’로는 할 수도 있지만 인터뷰는 안 할 거예요.”
경과를 짧게 얘기한 후 그가 거꾸로 물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해요?”
“다들 응원하죠.”
“그래요?”
“세대별로 젠더 감수성이 다른 것 같기는 해요.”
“세대별로 다르고, 지역별로 다르고?”
“지역별로 다르진 않겠죠. 다들 응원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다들 응원한다”는 말에 반가워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문화예술계 성폭력을 조사하는 공식 기구가 출범하면 그곳에 나가 자세하게 다 말할 거예요. 올해 시집이 나오거든요. 그때는 인터뷰할게요.”
그는 통화 내용도 기사에 쓰지 말기를 바랐으나 그중 일부를 옮겼다. #MeToo가 시대를 바꾸고 있다. #MeToo를 마뜩잖게 여기는 이들도 마음을 바꿔 #WithYou를 외쳤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