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6월17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 특사로 방한한 덜레스(가운데 양복 입은 키 큰 사람)가 38선을 시찰하고 있다. 오른쪽 옆은 신성모 국방장관.
1949년 1월부터 7월까지 남한은 38선에서 주도적으로 공격했으며 북한은 비교적 소극적으로 응전했다. 1월부터 4월까지는 소규모 병력이 충돌했으나 5월부터 7월 사이에는 연대급 전투도 발생했다. 이 시기 공세의 바탕이 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자신감이었다.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하자 북한은 같은 해 7월 남조선인민유격대를 조직해 7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이른바 7월 공세와 9월 공세라는 대규모 무장유격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무장유격전은 민중봉기를 유도하는 한편 정부병력을 공비 준동 지역에 고정 배치함으로써 38선지역의 국군병력을 약화하려는 목적을 띠고 있었다.
1949년 8월 병력 및 장비 면에서 대한민국과 대등한 수준에 이른 북한은 38선 부근에서 주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8월4일 북한은 3개 대대 병력을 동원해 옹진을 공격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이 전투에서 궤멸 직전까지 몰렸다.
소련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한 김일성의 8월12일자 개전(開戰) 동의 요청에 대해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차원에서 심각하게 검토했다. 9월24일 소련공산당 중앙위 정치국은 현 시점에서 남침을 승낙하지 않으면서 북한 인민군을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평양 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는 10월4일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전면적 대남전쟁 불가 결정을 통보했으며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은파산 탈환에 나서는 등 이 지시에 완전히 복종하지는 않았으나 1949년 12월부터 1950년 5월까지 중대급 이상이 동원된 충돌은 없었다.
중대급 이상의 38선 충돌이 잠시 주춤해 전쟁으로 직결되지는 않았지만, 북한은 소규모의 38선 충돌을 지속함으로써 병력 증강, 실전급 훈련, 무장 강화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옹진반도에서 쌓은 전투 경험을 토대로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이라는 개전형식을 창출하는 등 핵심적인 전쟁계획과 전쟁관(觀)을 수립했다. 따라서 6월25일 북의 공격은 38선 충돌과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내전론자들은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은 전쟁의 시작이 아니라 이전에 지속된 남북갈등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새로운 상황으로 국면이 전환되는 계기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6·25 이전 남북갈등은 전쟁의 서막이었나.
내전이 격화돼 6·25전쟁으로 상승된 측면도 있지만 1949년 말부터 1950년 6·25 직전까지 ‘정찰시 발생한 소규모의 충돌’이 아닌 대규모의 국경 분쟁이 없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국경출동이 6·25전쟁으로 직접 비화한 것은 아니다. 스탈린이 1949년 말 이후 국경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김일성을 통제한 것이 그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