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다 거리에서 카투사로 징집, K군번 달아
미국 정부 훈장만 4개
“제가 총알을 피한 게 아니라 총알이 저를 피했어요.”
삼수·갑산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 위생병 우드
중국인민지원군 공격 받아 얼어 죽은 장진호 전투 시체들
[+영상] “미군이 돕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행복하게 못 살아요”
“제 목숨은 하늘이 내린 것 같아요. 제가 총알을 피한 게 아니라 총알이 저를 피했어요.”
9월 8일 대구에서 만난 최초의 ‘카투사(KATUSA)’ 류영봉(91) 옹은 6·25전쟁에 참전해 큰 부상 없이 살아남은 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카투사는 말 그대로 ‘미군에 속한 한국군 요원(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이다. 1950년 7월 고전(苦戰)을 거듭하던 미군은 카투사를 창설해 한반도 지형을 잘 아는 한국인 청년들로 채웠다. 류영봉 옹은 그해 8월 15, 16일 미군이 대구에서 징집한 카투사 2000명 중 한 명이다.
류영봉 옹. [홍중식 기자]
형의 조언으로 배운 영어의 힘
“학교 가는 도중에 경찰관 아저씨가 길 가는 남자들을 무조건 검문하는 거예요. 나도 부르기에 ‘왜 부릅니까? 공부하러 가야 합니다’ 했죠. 뒤에 차가 서 있었는데 벌써 여덟 명가량이 타고 있었어요. ‘아이고 난 학생이고 나이도 안 됐습니다’ 카니까 ‘키가 커서 된다’며 트럭에 태웠어요. 길에서 징집돼 집에 연락도 못 하고 카투사가 됐죠.”고등학교 3학년이던 열여덟 살 때 징집된 류영봉 옹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3주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미 육군 7보병사단 17연대 의무부대에 배속돼 구호법, 응급치료법, 들것 드는 법 등을 배웠다. ‘K1101755’ 군번을 달고 카투사로 북한군,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과 싸웠다. K로 시작하는 군번은 카투사 1기에만 부여됐다. 미군은 부대에서 한국인을 구분하고자 군번에 K를 붙였다.
“전투 위생병이어서 환자를 수송하며 군의관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어요. 형님의 선견지명으로 영어를 미리 익혀둔 것이 큰 도움이 됐어요. 저보다 스무 살 위인 큰형님이 의사였어요. 형님은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 있으니 영어를 배워두면 요긴하게 쓰일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영어사전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모르는 단어를 외웠는데, 그 말이 딱 들어맞았어요. 카투사 중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거든요.”
지금은 토익 780점 이상만 카투사에 지원할 수 있지만 창설 초기에는 영어는커녕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무학자가 많았다. 카투사 병사들의 교육 수준 차이와 연령 격차도 컸다.
“카투사가 처음에는 6·25전쟁 때 급조된 군인인데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우고, 명령에 잘 따르며 일을 잘 처리하니까 오늘날까지 존속시키는 거예요. 전쟁이 났을 경우 미군 처지에서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전력에도 도움이 되니까요. 카투사는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주요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어요.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데 능했고, 민간인·포로를 상대로 많은 정보를 얻어 미군이 전략을 짜는 데도 도움을 줬죠.”
징집 당시 카투사 복무 기간은 1년 6개월이었지만 류영봉 옹은 1954년 7월까지 3년 11개월을 미군 부대에 있었다. 영어 실력이 출중하고 책임감 강한 면모를 미군이 높이 평가해서다.
류영봉 옹은 6·25전쟁이 끝난 뒤 기억을 되살려 참전한 전투와 이동 경로를 한 장의 지도 위에 기록했다. 얼마나 많은 전투에서 미군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는지 한눈에 보이는 지도다. 깨알 같은 점과 글씨가 섞인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그는 잊지 못할 전투와 전우를 떠올렸다.
류영봉 옹이 6·25전쟁이 끝난 뒤 기억을 되살려 참전한 전투와 이동 경로를 기록한 지도. [류영봉 제공]
전세 뒤집은 인천상륙작전
“매복한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났던 장진호 전투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이미 얼어 죽어 치료가 무색해진 아군 시체들을 보며 너무도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13만 중공군에게 포위됐다가 끊어진 황초령 다리를 복구해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일도 잊히지 않아요. 무엇보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함께한 인천상륙작전을 잊을 수 없어요.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 상륙에 성공한 덕에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되찾고 전세를 뒤집었어요. 그때 저와 함께 부상병을 돌본 미국인 위생병이 있어요. 우드라는 이름의 전우인데 압록강으로 진격하던 도중 함경남도 삼수·갑산 전투에서 전사했어요.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으려고 참전해 목숨을 바친 거예요. 참으로 고맙고 미안한 전우입니다. 저보다 한 살 많은 서재용 형도 몹시 그립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연락이 끊겼는데 살아 있다면 꼭 다시 만나 못다 한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1952년 류영봉(왼쪽) 옹이 카투사 동기인 서재용 전우와 중부전선에서 찍은 기념사진. [류영봉 제공]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서울을 탈환한 후 우리 부대가 대구로 돌아온 날이 1950년 10월 27일이에요. 그날 대구 역전 광장에서 우연히 어머니를 만났어요. 흰 옷을 입은 여자가 나를 찾는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군의관에게 말했더니 유일하게 영어를 하는 내가 달아날까 봐 처음엔 못 가게 했어요. 그래서 같이 가보자고 했죠. 어머니가 맞았어요. 서로 안고 펑펑 울었습니다.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부대로 돌아왔어요, 그때부터 어머니와 다시 연락이 됐죠.”
류영봉 옹은 1950년 8월 16일부터 1954년 7월 4일까지 3년 11개월 동안 카투사로 미군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많은 전투에 투입됐고 정전협정 당일(1953년 7월 27일) 새벽까지 교전을 치렀다. 휴전이 됐을 때 계급은 1등 중사였다. 1등 중사 이상은 시험을 거쳐 미군이 신설한 사단으로 갈 수 있었다.
미군 덕에 효도하고 네 자녀 교육시켜
“그 무렵 새로운 사단이 많이 창설됐어요. 통역관 시험에 합격해 미군에 계속 남으려고 했는데 어머니를 모실 사람이 집에 아무도 없었어요. 사령관에게 가정사를 말하고 사직했습니다. 카투사 제대 후 1년 남은 고교 학업을 마치고 취직할 곳을 알아봤어요. 학벌이 변변치 않은데다 기술도 없어서 받아주는 곳이 없었어요.”류영봉 옹은 그즈음 미군 부대에서 낸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해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영어 실력과 위생병으로 다양한 환자를 돌본 경험 덕에 대구에 위치한 주한미군 부대 캠프 워커의 병원에 취직했다. 남보다 10분 빨리 출근, 15분 늦게 귀가했다. 만 61세가 정년이지만 71세까지 46년을 근무했다.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계속 근무할 수 없는데 다행히 저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미군부대에서 간호 시험에 합격해 슈퍼바이저 수간호사 겸 응급실장으로 일했어요. 그 덕에 아들 둘, 딸 둘을 다 대학에 보내고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어요. 제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혼자 9남매를 키우셨어요. 세 명은 죽고 6남매가 살아남았는데 저 말고도 형님 두 분이 6·25전쟁에 참전했어요. 한 분은 전사하고, 다른 한 분은 부상을 당했죠. 큰형님은 시골에서 돌아가시고, 누님 두 분은 결혼하셨고요. 저까지 전사했으면 어머니가 어찌 사셨겠습니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어머니가 84세까지 사셨어요. ‘막내랑 같이 살면서 행복했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셨죠.”
류영봉 옹은 1958년 5월 25일부터 2004년 5월 25일까지 병원에서 일하며 미군을 도왔다. 미국 정부는 그에게 훈장 4개를 수여했다. 그중에서도 미군 의무사령관이 직접 들고 온 훈장을 받은 것이 특히 뿌듯하다.
류영봉(왼쪽) 옹이 1988년 10월 18일 미국 정부가 수여한 명예 훈장을 받고 있다. [류영봉 제공]
2004년 퇴직 후에도 미군과 연이 끊이지 않았다. 미국 적십자사 회원 자격으로 근무하던 병원에서 18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골절 환자에게 깁스를 해주고 있어요. 기술을 배워 자격증도 취득했습니다. 골절돼 부어 있을 때는 깁스를 못 합니다. 부목을 대고 있다가 부기가 빠진 다음에 조치합니다.”
18년 동안 그가 봉사한 시간은 무려 5974시간에 달한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시절 그에게 감사장을 보냈다.
“미군 아니었으면 월남처럼 됐을 것”
그는 윤석열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한미동맹 강화를 꼽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후 한미동맹이 더욱 굳건해졌어요. 미군이 이제 한국에서 안 나갈 겁니다. 나가면 안 돼요. 북한이 바로 쳐들어옵니다. 6·25전쟁 당시 압록강에 도착했을 때 중공군이 넘어왔어요. 그때 맥아더 장군이 핵폭탄을 터뜨리려 했는데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반대했어요. 핵폭탄이 그때 터졌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올해 10월 1일로 70주년을 맞았다. 6·25전쟁 당시 미군이 돕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됐을까. 그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며 “월남(남베트남)과 같은 일을 겪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월남이 공산화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희생됐어요. 군인 가족, 경찰 가족, 공무원 가족은 무조건 없앴습니다. 북한이 6·25전쟁에서 이겼다면 북에 있는 사람은 남으로, 남에 있는 사람은 북으로 보내 한반도를 완전히 공산당 세상으로 만들었을 거예요. 수백만 명을 처형했을 거예요. 미군이 돕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지금처럼 행복하게 못 살아요”
류영봉 옹은 대구 지역 초·중·고교에서 6·25전쟁 바로 알리기 강사로도 활동한다.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고 그 때문에 국토가 폐허가 됐다는 사실을 학생들도 알아야 한다”는 신념에서다. 카투사 후배들의 요청으로 카투사 1기로서 산 경험을 들려준 적도 있다.
“강의를 들으면서 가슴에 와닿았다는 사람이 많아요. 제 강의를 듣고 나서 초등학생들도 인사하러 달려옵니다. 우리는 미군의 도움을 잊어서는 안 돼요. 고마운 마음을 항상 갖고 있어야 합니다.”
[신동아 10월호 표지 B컷]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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