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국가에 살고 있는 오늘의 관점에선, 총독부 허가를 받아 발행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두 신문이 ‘총독부의 정책에 순응했다’고 매도할 수 있다. 동아·조선이 일제 통치를 전면 부인하는 비타협적인 항일투쟁을 벌인 게 아니라, 그들이 내준 ‘허가장’을 받아 신문사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동아·조선이 일제 치하에 존속했다는 것 자체가 씻을 수 없는 원죄’라는 극단적 비판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당시 언론통제의 주무관청이었던 총독부는 동아·조선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동아일보는 게재 기사가 문제가 되어 창간 보름째인 4월15일자 신문에 대해 처음으로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다. 이어 사흘이 멀다 하고 삭제·압수 처분을 받다가 창간 6개월을 맞기 전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총독부는 9월25일자로 동아일보에 정간처분을 내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간 이래 총독부는 누누이 주의를 환기시키고 8월에도 발행인을 소환하여 최후 경고를 전달한 바 있음에도 동아일보는 일제의 조선 정치를 부정하는 기사를 계속 실었다. 로마의 흥망을 거론하며 조선의 부흥을 말하고, 이집트 독립과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들어 조선의 인심을 자극하고, 영국에 맞선 반역자를 찬양하여 반역심을 자극하는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총독정치를 부정하여 일반의 오해를 깊게 함에 노력했다.”(동아일보 1921년 2월21일자)
강제 폐간을 당하던 1940년 8월에도 총독부의 눈에는 동아·조선의 근본적 태도가 바뀌지 않은 것으로 비쳐졌다. 총독부는 두 신문을 폐간시키려는 계획을 세우던 당시 극비문서 ‘언문신문통제안’에서 이렇게 말했다.
“두 신문은 전쟁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언론기관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려는 책임감과 열의가 부족하다. 적극적 불온성은 줄어들었지만 소극적 불온성을 여전히 지속하고 있어(기사를) 차압 또는 삭제당한 일이 여러 차례에 이른다. 나아가 동아·조선이 존재하는 한 언젠가는 민족의식이 넘쳐 흘러 매일신보를 복멸(覆滅)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에 두 신문을 폐간시킴으로써 민족의식을 잘라 없애고 매일신보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는 동아·조선과, 총독부가 감시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동아·조선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총독부, 제목 크기까지 문제삼아

동아일보를 창간한 仁村 김성수
총독부의 일관된 정책은 언론 탄압을 통해 항일의식을 억누르는 동시에 언론을 식민통치에 유리한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역대 조선총독들은 이같은 정책에 따라 ‘경성일보’(일본어) ‘매일신보’(한국어) ‘서울 프레스’(영어) 등 3개 기관지를 직접 관할하는 한편, 민간 신문에 대해서는 철저한 통제를 가했다. 이러한 일제 치하의 언론 상황은 크게 3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