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붓다필드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소희입니다. 붓다필드는 지난호 ‘신동아’ 지면에서 김종업님이 ‘게이트 파문으로 본 사이비 수련행태’라는 글을 통해 비판했던 단체이지요.
우선 붓다필드에 관심을 보여줬던 ‘신동아’ 측에서 이번 사태로 겪었을 곤혹에 대해 송구스러운 마음을 전합니다.
저희 회원들은 필자(김종업씨)가 지적한 우려 사항들에 대해 마땅히 경계하고 살펴야 할 면이라고 받아들이면서 비교적 침착하게 현 사태를 관망하고 있습니다만, 거론된 사안들이 부정확하거나 논란의 소지가 크다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유사한 주장이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여러 달 동안 난폭하게 유포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그분들은 게이트님은 물론이고 그 부인과 어린 자녀들, 저를 포함한 잔류 회원들의 신상과 사생활, 실명과 직장 등을 거론하며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언사로 위협하고 인격적인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설사 누군가가 어떤 명백한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문가들이 법에 의거해 조심스럽게 가릴 일이지, 이렇게 맹목적인 사이버 테러를 통해 공개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사형(私刑)을 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으며 실정법상으로도 중대한 범죄행위에 해당한다는 고언으로 붓다필드 회원들의 견해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다만 ‘사이비’ 논란과 관련하여 독자들께서 받았을 충격을 감안하면, 최소한 마음공부에 대한 사회적 오해를 풀어 줄 필요는 있다고 판단합니다.
저희는 김종업님의 관점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종업님은 마음공부나 깨달음을 신비주의적인 수련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로 단순화해 설명합니다. 물론 인간의 마음속에는 신비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있고, 붓다필드 회원들 중에도 신비 능력을 추구하거나 갖춘 사람들이 드물지만 존재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신비주의를 ‘교리’로 만들고 그러한 능력을 사칭하는 자를 ‘교주’로 신봉하는 ‘신도’들이 존재하는지 여부일 것입니다.
붓다필드 회원이라면 예외 없이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마음공부는 백인백색으로 다양하게 진행되는 사적인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게이트님은 본인의 수련 경험과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신비한 현상이란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에 포함되는 것으로 누구나 계발할 수 있는 특기에 지나지 않다고 누누이 말해왔습니다. 그런 까닭에 게이트님과 소수의 회원이 전생을 비롯해서 차원과 시공간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대화를 나눌 때도 대다수는 ‘전설 따라 삼천리’를 듣는 듯한 태도를 취하거나, 진지하게는 과학과 이성이 해명하지 못하는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으로 남겨둘 뿐입니다.
다만 자신의 경험과 다르다고 해서 사이비로 매도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남아 있는 회원들이 신비주의에 현혹된 환자이거나 사회무능력자들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에 대해서는 수긍하기 어려우며, 회원들의 실상과도 명백히 다릅니다.
회원들이 시종일관 추구한 공부의 핵심은 외부로 향해 있는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각’이라고 부릅니다. 굳이 수련이라고 한다면, 결국 그 모든 것이 ‘나’의 선택에 기반한 창조행위임을 인식하고 그와 같은 창조적 본성을 가진 ‘나’에 대해 거듭 자각하는 것이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수련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육체와 감정, 생각과 이성이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실체가 아님을 깨우치는 것이며, 이러한 깨우침을 철저히 본인의 내면에 적용하도록 권유받습니다.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에 걸친 노력을 통해 회원들은 각자의 내면에 쌓여 있던 고통이나 번뇌의 원인을 재구성하게 되고 자신을 무한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을 키우게 됩니다. 그 결과는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정신적인 치유, 불화하던 이들과의 화해, 내면의 억압이나 강박관념 털어내기, 사회생활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 세속에 대한 초연, 혹은 반대로 세속에 대한 도전적인 정열, 고급 수행에 대한 관심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