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3년 10월14일 독도에 상륙한 한국산악회가 인부들을 시켜 뽑아내는 일본 영토 표주(標柱).
이러한 사실은 당시 독도에 갔던 박병주(朴炳柱·83, 홍익대 공대 명예교수, 도시계획 전공) 선생이 2008년 7월 국회 독도자료실에 기증한 자료와 그의 증언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패망한 일본이 미군정을 받다 1952년 4월28일 독립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국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식민지로 삼았던 한국을 상대로 국교를 회복하기 위한 회담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다케시마(竹島)는 그들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일본을 상대로 군정을 펼친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1946년 6월22일, 지령 제1033호로 일본 어민과 일본 어선의 조업한계선을 설정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이름을 따서 ‘맥아더 라인’으로 불린 이 선 안에 독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지령 제3항에는 ‘일본 선박과 승무원은 다케시마 12해리 이내에 접근하지 못한다’고 돼 있었으므로 일본인들은 독도에 접근할 수 없었다.

박병주 홍익대 공대 명예교수<br>한양대 건축학과 졸업, 홍익대 명예공학박사<br>부산공고 토목과 교사, 홍익대 도시계획학과 교수, 홍익대 공대 학장, 홍익공업전문대학장, 홍익대 대학원장 역임<br>중앙도시계획위원, 측량협회회장, 국토개발연구원 이사장 역임
이런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체제를 끝내고 평화체제로 들어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 발효일인 1952년 4월28일 미국은 일본에 대한 군정을 끝내니 이로써 맥아더 라인의 효력도 상실된다. 일본인들은 독도에 상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이 대응책을 마련했다.
일본 독립 3개월 전인 1952년 1월28일 일본 어선이 절대로 넘어와서는 안 되는 ‘평화선(일명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고, 이 선 안에 독도를 집어넣은 것이다. 그로 인해 한일회담이 열리면 독도는 대일(對日)청구권 등과 함께 뜨거운 감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독도를 갖고 입씨름을 하려면 독도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부산으로 수도를 옮겨놓고 6·25전쟁을 치르느라 독도 정보가 전무했다.
최초로 영토 표지 설치
미군정을 받던 시절 한국은, 당대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던 조선산악회를 통해 독도 영유권을 밝힌 적이 있었다. 조선산악회 회원 63명이 조선해안경비대에서 제공한 군함 ‘대전호(大田號)’를 타고 1947년 8월20일 독도에 상륙해, 한자로 ‘조선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독도’라고 쓴 나무말뚝을 박아놓고 돌아온 것이다.
1년 후 한국은 독립 정부를 세우고 그로부터 3년 후 6·25라는 큰 전쟁을 맞았다. 전쟁 초기 서울을 뺏긴 한국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되찾아 9월28일 환도(還都)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1951년 1월4일 서울을 내주고 다시 부산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리고 3개월 뒤인 3월15일 한국 육군 1사단이 서울을 재수복했으나 인근 지역에서 공방전이 계속돼, 1953년 7월27일 휴전할 때까지 계속 부산을 수도로 사용했다. 서울로 수도를 다시 옮긴 것은 1953년 8월15일이었다.
부산을 수도 삼아 전쟁을 치르던 때 독립 일본은 한국의‘뒤통수’를 때렸다. 1952년 6월 일본은 수산청과 해상보안청 공무원을 독도에 상륙시켜 조업 중이던 우리 어민들을 내쫓고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표주(標柱·말뚝)를 박아놓고 돌아간 것이다. 그로 인해 울릉도가 발칵 뒤집혔다. 어민들은 일본의 영토 표주를 뽑아, 당시 울릉도에서 가장 큰 정부기관이던 울릉경찰서 앞에 갖다놓고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