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안기부 vs 노동당, 프락치 역공작 그리고 송두율

베를린의 남북첩보전쟁 4반세기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3-10-27 15: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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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두율은 과연 누구인가.
    • 베를린에 머문 37년 동안 그는 어떤 일을 했으며 北에서의 그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나.
    • 남과 북의 접점이었던 냉전시대의 베를린에서 대한민국 안기부와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가 벌인 치열한 세력다툼과 그 속에서 혼돈을 거듭한 베를린 교민사회를 통해 ‘송두율 파문’의 진실을 들여다보았다.
    안기부 vs 노동당, 프락치 역공작 그리고 송두율
    1985년 11월 말의 어느 늦은 저녁, 서베를린의 한 기차역 구내 레스토랑. 창밖에는 하염없이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풍경은 평화로웠지만 창가 테이블에 마주앉은 중년부부 두 쌍의 표정은 심각했다.

    “○○○에게서 이야기는 이미 들었지만, 나의 권유를 받아주어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통일이 되자면 북도 좀 변해야 하는데, 가시거든 경제학자로서 의의있는 활약을 해 민족자주통일을 앞당기는 일을 열심히 해주기 바랍니다.”

    말을 마치고 송두율 교수는 눈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평소 그를 ‘탁월한 좌파 지식인’으로 존경해왔다는 오길남씨도 시선을 돌렸다. 쏟아지기 시작한 눈을 강아지마냥 반기며 뛰어나간 오씨의 두 딸 혜원과 규원, 송교수의 두 아들 준과 린이 눈싸움을 하며 뒹굴고 있었다.

    1992년 5월 오길남씨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이하 안기부)에서 작성한 진술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송두율 교수 부부와 오씨 부부의 만남 장면이다. 진술서에 따르면 송교수 가족과의 식사를 마친 오씨 가족은 그날 저녁 전차를 타고 동·서베를린의 경계 지점인 프리드리히 거리로 가서 기다리고 있던 조선 노동당 통일전선부 공작원들의 벤츠를 타고 북한 대사관으로 향한다. 불과 5km 남짓의 짧은 여행.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그의 가족은 북을 택했다.

    이후 모스크바를 거쳐 입북해 대남방송요원으로 활동하던 오씨는 1986년 12월 가족을 남겨두고 독일로 탈출해 망명한 뒤 1992년 끝내 한국으로 귀순했다. 이미 공소시효가 끝난 이 사건에 대해 송교수측은 “적극적인 입북 권유를 한 사실은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냉전기간 동안 남한과 북한이 만나는 지구상 유일의 경계도시였던 베를린.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다른 한 쪽을 택할 수 있는 이 ‘불안정한 도시’에서 북한의 노동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와 남한의 안기부는 지난 사반세기 동안 치열한 세력다툼을 펼쳤다. 그런 가운데 군사독재 시기 ‘한국의 비민주적인 상황을 국제사회에 폭로한다’는 목적으로 결성된 재독 운동단체와 관련인사들은 북에는 입북회유와 포섭공작, 남에는 견제와 와해공작의 목표물이었다. 때로는 인맥과 친분을, 때로는 거짓과 속임수를 동원하며 전개된 이 격랑의 한켠에 송두율 교수가 있었다.

    북한 이익대표부 vs 한국 총영사관

    통일 이후 옛 동베를린 지역이었던 브란덴부르크문 주변 거리는 베를린의 새로운 중심가로 떠올랐다. 이 거리에 있는 연건평 5400m2의 거대한 건물이 바로 ‘주 도이칠란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이다. 통독 직후인 1990년 독-북 수교가 단절되면서 이익대표부(북한식 용어로는 ‘리권사무소’)로 격하되었다가 지난 2001년 복교에 따라 다시 대사관이 되었다.

    북한 이익대표부는 공식적으로 비자발급, 무역 및 투자촉진 등의 업무를 담당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노동당 통일전선부 소속 공작원들이 파견되어 첩보활동과 교민포섭작업을 펼친 ‘독일내 북한 정보활동의 총본산’이었다.

    그로부터 자동차로 10분 남짓 걸리는 서베를린의 중심가 아데나워 광장. 1999년 ‘주 독일 대한민국 대사관’이 본에서 이전하기 전까지, 베를린 지역의 남한 정보기관 활동을 지휘했던 ‘주 베를린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자리잡았던 거리다. 중앙정보부와 그 후신인 안기부의 백색요원(일명 화이트·재외공관에 소속되어 외교관 신분으로 활동하는 정보기관 요원)들은 이 영사관을 근거지로 공작을 펼쳤다.

    시대에 따라 유동적이었지만 1980년대 대략 세 명의 요원이 근무했다는 베를린 영사관에는 중정 해외파트 가운데서도 정예요원이 선발됐다. 언제 일이 터질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유지하며 북한측 공작원들과 365일 어깨를 부딪혀야 하는 상황을 감안해 “강한 성격의 전투적인 요원들이 많이 배치됐다”고 전직 국정원 중간간부는 전한다.

    양측의 다툼이 격할 수 밖에 없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재독 교민사회의 강력한 활동력. 1960년대 중반부터 박정희 정권의 정책에 따라 서독에 온 광부와 간호사가 1970년대 초반까지 무려 3만명을 헤아렸다. 유럽 어느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교포사회였다. 특히 이민 초기 가혹한 노동조건과 잦은 사고에 시달려야 했던 이들은 유학생들의 힘을 빌어 개선운동을 벌여나가며 사회참여적 분위기를 체득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전통이 강한 독일의 분위기는 유학생들로 하여금 북한 인사들과의 접촉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교민사회, 특히 젊은 지식인 계층은 친남한 인사들과 친북한 인사들로 분화되어갔다.

    1967년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백림 간첩단 사건’은 이 무렵 젊은 유학생들을 반한 분위기로 돌려놓은 결정적인 계기였다. 윤이상, 이응로 등 예술가·학자 16명이 독일로 급파된 중정 요원들에 의해 서울로 연행된 이 사건은 서독정부와의 외교마찰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따라 1969년 한국정부는 관련자들을 서독으로 ‘추방’했다. 이 사건 이후 한동안 중앙정보부는 독일내 공작활동에서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고, 젊은 유학생들은 돌아온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을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운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송두율 교수가 독일에 발을 디딘 것은 정확하게 이 무렵이었다. 1944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1967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서독으로 유학을 왔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 ‘수재형 학자’가 중앙정보부의 레이더에 처음 포착된 것은 1974년 무렵. 은퇴한 옛 중정 대공수사국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독일에 나가 있던 요원으로부터 송두율에 대한 첫 SRI(Special Request Information·특정사안에 대해 긴급한 조사가 필요할 때 사용되는 지시문)가 온 것은 그가 독일에서 결성된 운동단체 ‘민주사회건설협의회(이하 민건)’의 회장을 맡았다는 사실이 확인된 직후였다. 당시의 SRI는 송두율의 대학 재학 중 이적활동 여부를 조사해보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1972년 유신체제 선포 이후 술렁거리던 서독 교민사회는 1974년 3월1일 3·1절 55주년을 기념해 수도 본의 베토벤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민건을 출범시킨다. ‘동백림 사건’의 관련 인사들을 중심으로 젊은 유학생들이 결합했던 이 단체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만큼 그 지향점에 대해서도 입장이 엇갈리곤 했다는 것이 당시 관계자들의 말이다. 서른의 젊은 나이였던 송두율 교수가 ‘쟁쟁한 선배’들을 놔두고 회장이 될 수 있었던 것 또한 이와 관련이 있었다고 민건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설명한다.

    “초기 민건의 오피니언 리더 그룹은 서울대 철학과 출신 유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중정 요원들의 감시가 집중될 것이 뻔한 회장 자리를 선뜻 맡으려 하는 이는 없었다. 송교수는 이 서울대 철학과 출신 그룹의 막내 격이었다. 흔한 말로 ‘총대를 메는’ 식이었다.

    한편으로는 민건 내부의 입장 차이 탓도 있었다. 크게 나누면 ‘선 통일 후 민주’와 ‘선 민주 후 통일’의 차이, 한마디로 북한에 대한 입장의 차이였다. 송교수는 비교적 중간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큰 반대 없이 회장이 되었다.”

    ‘간첩두목’과 ‘영웅’

    그러나 최근 국정원 조사에서 확인된 것처럼 송교수는 민건 회장을 맡기 이전인 1973년 이미 평양을 방문해 조선노동당에 가입했다. 중앙정보부와 후신인 안기부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주요 조직사건을 터뜨릴 때마다 윤이상과 송두율이 그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고 발표했다. 한 전직 안기부 대공수사요원은 “솔직히 분명한 증거가 없어도 윤이상이나 송두율을 끌어다 붙이는 경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전했다.

    한국 정부가 그를 ‘간첩 두목’으로 지목할수록 북한에서의 그의 위상은 점점 상승했다. 송교수가 ‘김일성 주석과 한 시간 넘게 독대한 인사’였던 까닭에 북한 관계자들은 존경해 마지않는 분위기였다고 오길남씨는 전한다. 이후 노동당 통일전선부는 그를 ‘유럽에서 북한의 의사를 공개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창구’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1999년 9월 서울지법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송교수는 1993년 무렵 서울의 모 월간지에서 요청한 주체사상 관련원고 청탁을 황 전 비서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자신이 원고지 100매 분량의 원고를 작성해 송교수에게 건네주었다고 황 전 비서는 증언했다.

    그러나 독일 현지 교민들은 “주체사상이나 통일을 주제로 한 원고를 작성하는 일을 제외하면 송교수가 운동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1980년대 이후 결성된 ‘재유럽 민족민주운동협의회(이하 유럽민협)’나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 등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간혹 강연이나 기고요청에 응하거나, 술자리 등에 마지못해 참석해 충고하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1987년 6·29 선언을 거치며 한국에서의 사회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재독 교민단체의 운동 역시 탄력을 받았다. 특히 1990년 11월 결성된 범민련은 통일운동을 표방하며 공식적으로 북한 인사들과 접촉했다. 또한 1989년 임수경씨의 방북, 1992년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이하 범청학련)의 결성 등이 맞물리면서 운동단체 인사들에게 북한은 더 이상 경계대상이 아니었다.

    거꾸로 보면 이 시기는 북한측의 포섭공작 또한 절정에 이른 시점이기도 했다. 이 무렵 북한 이익대표부 공작원들은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교포들을 접촉해 입북을 권유하곤 했다. 또한 교포인사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는 공공연히 친북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고 교민들은 말한다.

    안기부 vs 노동당, 프락치 역공작 그리고 송두율

    지난 9월30일 친북활동 여부를 조사받기 위해 국정원으로 향하는 송두율 교수 부부.

    반면 영사관의 안기부 요원들은 주로 한국에서의 인맥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운동단체에 접근했다. 고향이나 출신학교 등 지연과 학연을 통해 운동권 인사들을 접촉해 활동상황이나 정보를 캐내는 ‘가장 한국적인 방식’이었던 셈이다. 물론 운동단체 입장에서 안기부의 이러한 활동방식은 곧 ‘프락치 심기’였다.

    한편 1980년대 초반부터 안기부 요원들은 ‘조선노동당 구주위원회 위원장 김철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1982년 귀순한 김정일 위원장의 처조카 이한영씨가 “조선노동당 구라파위원회가 있는데 위원장은 김철수고 부위원장은 윤이상이라는 말을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들었다”고 진술한 바에 따른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재유럽 운동권 인사들 몇몇을 주시하던 안기부 요원들이 ‘○○○가 김철수인 것 같다’는 보고서를 심심찮게 보내오곤 했지만, 번번이 잘못된 정보로 확인되곤 했다고 전직 안기부 관계자들은 전한다.

    국정원측 자료에 따르면 이후 귀순자들의 추가 증언에 따라 ‘조선노동당 구주위원회는 1970년대 후반에 재독 운동단체 회원들 중 친북인물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는 정보가 파악되었고, 이에 따라 베를린 주재 영사관에는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구체적인 활동내용은 전혀 확인하지 못해 ‘김철수 미스터리’는 십수 년간 안기부의 주요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다.

    훔볼트대 교수임용 방해공작

    한편 베를린 영사관의 안기부 요원들은, 송교수의 서울대 사회학과 초빙교수 임용이 좌절된 이듬해인 1992년 송교수의 훔볼트대 정교수 초빙 심사과정에 개입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옛 동베를린에 위치해 있던 훔볼트대 한국학과의 당시 교수진은 북한과 가까운 독일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독일 통일 이후 이러한 교수들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훔볼트 대학과 베를린 주정부 교육부는 한국 출신 인사들을 주 초빙대상으로 검토했고, 그 중 한 사람이 송두율 교수였다.

    관련자들에 따르면 송교수는 대학당국의 1차 심사를 통과해 베를린 주정부의 2차 심사에 올랐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곧 베를린 안기부 요원들에게 알려졌고, 이들은 심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사들을 상대로 강력한 로비를 펼쳤다. 이때는 안기부가 귀순한 오길남씨를 통해 “송교수가 나에게 입북을 권유했으며, 평양 체류시 그가 비밀당원으로 대남공작망의 거물임을 확인했다”는 증언을 확보하고 ‘송두율이 김철수가 아닐까’고 추측하던 시점이었다.

    “송두율이 훔볼트대 정교수가 되면 한국학과는 친북 세력의 온상이 된다”는 안기부 요원들의 집요한 설득은 성공을 거뒀고, ‘한국 출신의 친한인사’를 원했던 베를린 주정부는 결국 송교수를 탈락시켰다. 눈여겨볼 것은 이 과정에서 안기부 요원들이 초빙 심사에 영향력을 갖고 있던 인물들에게 제공한 정보. 일련의 상황에 직접 개입했던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기부 요원들이 전달한 문서자료는 대개 송교수의 그간 활동내역, 논문 등 주로 그의 ‘친북 시각’을 문제삼는 공개 정보였다. 그러나 구두로 전달된 내용에는 이와는 사뭇 다른 구체적인 팩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민감했던 것은 송교수가 1989년 베를린을 거쳐 평양에 들어간 임수경씨의 북한행 과정에 개입했다는 이야기였다. 임씨의 입북 과정을 안내한 북한 이익대표부와 임수경씨의 연결고리가 송교수였고, 임씨가 독일에 오기 전의 준비작업에도 상당부분 관여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안기부의 정보는 사실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임수경씨의 방북과정에 깊숙이 참여했던 한 인사는 “임수경씨의 입북은 통일운동단체에서 활동하던 20~30대 젊은 유학생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며 송교수 개입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당시 사건수사에 간여했던 안기부 대공수사국 관계자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임씨가 베를린을 통해 입북했으므로 당연히 송두율 교수도 수사대상에 올랐지만 확인한 혐의는 없었다는 것. 백색요원으로 유럽에서 근무했던 한 전직 안기부 관계자 또한 “송교수가 임수경 방북에 관여했다는 얘기는 그의 활동범위를 제약하기 위한 작전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범민련 간부 C씨는 프락치였나

    3년 뒤인 1995년 베를린 북한 이익대표부에는 대민업무담당으로 위장한 통일전선부 소속 공작원 한 명이 새로 부임한다. 바로 김경필 2등서기관이었다. 1997년 황장엽 전 비서의 망명 직후 송교수가 “내가 김철수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상의했다는 그 공작원이다. 김경필 서기관은 송교수 등의 친북인사들이 평양에 의사를 전달하는 창구이자, 범민련·범청학련 구성원들이 제반 문제를 협의하는 상대자 역할을 맡았다.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베를린의 범민련 유럽본부 활동에 참가한 인물이 C씨였다. 한국에서 지방대 법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그는 국내에서 진보단체 간부를 역임하기도 했었다. 1994년 독일에 건너온 C씨는 범민련에서 활동하겠다고 자원했고, 한국에서의 활동과 명성 덕분에 곧 범민련 유럽본부 사무국장에 임명되어 김경필 서기관과의 연락업무를 맡았다.

    당시 범민련에서 활동했던 관계자들은 “이후 C씨가 범민련을 급격히 친북노선으로 이끌었다”고 전한다. 중도적인 입장을 가진 인사들을 가차없이 공격하거나 친북적인 색채가 지나친 글을 기관지에 실어 반감을 사기도 했다는 것. 그의 이러한 활동에 불만을 품은 적지않은 중도파 인사들이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러던 1999년 1월 김경필 서기관은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와 동시에 김서기관의 연락 파트너였던 C씨 또한 범민련 내부문서와 디스켓을 들고 사라졌다는 것. 범민련 관계자들은 “C씨는 사실 범민련의 세력약화와 핵심인사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파견된 안기부의 프락치였으며, 독일내 친북인사들과 북한을 연결하는 고리였던 김서기관을 설득해 미국으로 망명시킨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망명사실이 알려진 직후 노동당 통일전선부 산하기관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안기부에서 파견된 C가 김서기관 부부를 납치했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안기부는 바로 대변인 논평을 통해 “안기부는 이 사건에 일절 관여한 바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문제의 C씨는 곧 이어 한국으로 귀국했고, 이적단체로 규정돼 있던 범민련의 간부를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형사처벌을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무렵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이 바뀐 안기부에게 김경필의 망명은 엄청난 수확이었다. 송두율 교수를 비롯한 재독인사들의 성향과 활동에 대해 그만큼 정통한 정보원은 없었기 때문. 한편 귀국한 C씨 또한 송교수와 관련해 적잖은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전직 국정원 대공수사 관계자들은 “C씨가 안기부의 공작에 따라 범민련에서 활동한 것이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 부분만큼은 확인해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지만, 한 관계자는 “C씨가 제공한 정보가 상당히 유용하게 활용됐던 것은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DJ정부 국정원의 ‘조용한 개입’

    김경필 서기관의 진술로 황 전 비서의 증언 이외에 추가 증거를 확보한 국정원은 내부적으로 송교수를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서열 23위 김철수’로 확신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한 정보수집을 중단하거나 약화시키지는 않았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들은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대공수사사건의 진전속도가 더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된 측면이 있다”고 전한다. 퇴직한 국정원 중간간부의 말을 들어보자.

    “충분히 터뜨릴 만한 사건인 데도 조금 더 파보라는 지시가 많았다. 남북관계를 의식해 시기를 조절하는 것 아니냐며 반발하는 직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묵묵히 파일을 늘려갔다. 국정원이 검찰에 송교수에 관한 자료를 2000페이지 넘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러한 분위기 덕분이었다.”

    국정원의 ‘조용한 개입’은 송교수를 매개로 이루어진 남북학자들 사이의 공동행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식적으로는 어렵지 않게 승인이 났지만, 국정원 관계자들은 행사를 준비하는 남한 학자들에게 “송두율을 조심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난 2000년 간암으로 사망한 엄익준 국정원 차장. 한 국내학자의 회고다.

    “남북 학술행사를 준비할 때면 엄차장에게서 연락이 오곤 했고, 만나면 송두율 교수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근거자료를 밝힐 수는 없지만 분명히 김철수가 맞다는 얘기였다. 자신의 직을 걸고 이야기한다는 데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평양도 그를 버렸다

    1990년대에 이르러 평양도 송두율 교수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8년 황장엽 전 비서는 자신의 저서인 ‘북한의 진실과 허위’에서 “송두율은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주장했고, 송교수는 이에 대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1999년 황 전 비서는 재판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노동당 대남사업담당 고위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김용순 통일전선부장(노동당 중앙위 대남사업담당 비서 겸임)이 나에게 ‘송두율을 교양시켜달라’고 한 일이 있었다.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미치광이여서 상대하기 어려우니 황비서가 좀 영향을 주어 그의 머리를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주체사상 연구나 해석에 관해서도 평양은 송교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설명한 명예훼손 재판과정에서 송두율 교수측 변호인은 황 전 비서에게 신문하면서 1994년 3월 송교수가 방북했을 당시의 에피소드를 설명한다. 송교수가 서울의 모 출판사에서 출간할 계획이었던 ‘한국사 전집’에 실릴 ‘북한의 이데올로기와 주체사상’이라는 논문을 작성해 황 전 비서를 비롯한 주체사상 전문가들에게 열람시켰고, 이에 대해 북한측 인사들이 “주체사상을 주관적으로 해석한 것 같다”고 비판하자 송교수가 반박했다는 것. 이를 두고 김용순 부장이 “송두율이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고 나더니 건방져져서 통일전선부 사람들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황 전 비서는 증언한 바 있다.

    특히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옛 ‘반체제 인사’들을 통일전선대상에서 점차 제외시켜나가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대신 서울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 정보가치나 활용도가 높은 옛 ‘친정부 인사’들을 주로 접촉하고 있다는 것. 남한 인사들도 부담없이 평양을 방문하는 시대다보니 ‘중간 고리’가 불필요해진 측면도 있다.

    이러한 추세와 맞물려 최근 평양이 송교수에 대해 기대를 접었다는 점은 송교수 본인도 모르지 않았던 듯하다. 그가 서울에 도착하기 수 개월 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북한의 한 고위관계자가 나에게 ‘송두율이 지난 봄 다녀갔는데 당신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남겼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미 CIA의 첩자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송교수 본인은 민감하게 생각했을 경고가 다시 내 귀에 들어왔다는 것은 그에 대한 평양의 신뢰가 얼마나 낮은 수준인지 보여주는 징표가 아닌가 한다.”

    그런가 하면 송교수에 대한 재독 한인사회의 시선 역시 그다지 곱지 못하다는 것이 현지 교민들의 전언이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앞서 설명한 황장엽 전 비서와의 명예훼손 소송과정에서 불거졌다. 당시 송교수측에서 제시한 반박근거 가운데는 “김철수는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고 있는 김성수라는 인물”이라고 명시돼 있는 1989년 주서독 한국대사관의 영사증명서가 있었다. 이 증명서는 그해 9월 안기부가 검찰에 송치한 ‘홍성담 사건’에서 유죄증거로 사용된 자료였다.

    문제의 김성수씨는 송교수와 함께 초기 민건에서 활동했던 인물. 또한 문제의 ‘홍성담 사건’은 재독 운동권 인사들 사이에서는 ‘조작사건의 대명사’로 악명높았다. 현지 운동단체 관계자들은 “송교수가 자신이 살기 위해 조작된 증거를 들이밀어 동료를 무고하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었다”고 전한다. 현재 한독문화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성수씨는 지난 9월19일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의 노력으로 정부 허가 하에 귀국했다. 그는 기자에게 “송교수와의 옛 친분을 생각해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주위의 친구들은 송교수에게 몇 차례 전화를 걸어 항의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송교수 사건 소식이 전해지면서 독일 교민사회는 한번 더 술렁이는 분위기다. 특히 북한에서 본인을 김철수로 지칭하곤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김철수는 김성수”라고 주장했다는 점에 놀라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교포인사는 “노동당 입당사실보다 무관한 사람에게 화살을 돌리려 했다는 것이 더 실망스럽다”고 전했다.

    ‘승리한 게임’의 마무리

    1998년 소송 이후 송교수를 바라보는 교포사회의 시선이 점점 냉정해져 간 것과 달리 서울에서의 그의 이름은 날이 갈수록 높아갔다. 국내 언론들과 진보단체 관계자들이 송교수를 ‘위르겐 하버마스로부터 사사받은 세계적 석학’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독인사들은 이러한 평가가 독일 내에서의 학문적 위상이나 교민 운동단체에서의 활동과는 사뭇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1980년대 후반 유럽민협에 참여했다가 귀국한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울에서의 ‘송두율 신드롬’은 일종의 허상이었다. 그는 어느새 송두율 개인이 아니라 해외 민주인사의 상징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그 허상은 깨졌고 해외인사들과 진보진영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를 과연 송교수 본인만을 탓한다고 해결될 일인가. 송교수 못지않게 서울의 진보진영에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반세기 동안 경계도시 베를린을 무대로 벌어졌던 국가정보원과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대결은 국가정보원의 압승으로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김경필 서기관의 망명과 C씨 사건을 거치면서 범민련은 구성원들 사이의 불신으로 인해 무너졌고, 교민사회에 대한 이익대표부의 포섭활동 또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줄어들었다는 것이 현지 교민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이러한 분석에는 국정원 관계자들 또한 “베를린은 이제 ‘안정화’ 지역으로 분류된다”고 전하며 동의했다.

    특히 송두율 교수 사건은 이러한 분위기에 쐐기를 박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승리한 게임’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의 문제. 1990년대 독일에서 통일운동에 참여했던 한 교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송두율 교수 파문은 베를린에 남아있던 ‘옛 반체제 운동가들’의 마지막 저항감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서울만 바라보며 입국허락을 기다리고 있다. 어찌 보면 이들은 남북 정보기관들이 벌인 ‘베를린 싸움’의 부산물일 수도 있다. 이겼다는 승리감에 취해 또 다른 송두율을 찾아 헤맬 것인가, 아니면 승자의 아량으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영향권 안에 둘 것인가. 어느 쪽이 나은지는 서울에서 현명하게 판단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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