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호

한 글자로 본 중국 | 마지막 회 |

蒙 말발굽 소리 사라진 칭기즈칸의 고향

《네이멍구자치구》

  • 글·사진 김용한|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7-10-1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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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하무적의 맹장 여포와 그의 적토마가 달리던 땅. 세계 최대 정복자 칭기즈칸을 배출한 땅. 그러나 오늘날의 내몽골은 ‘사람은 늘고 가축은 줄어든’ 흔한 현대 도시일 뿐이다. 서투른 개발로 초원은 사막이 되고, 지하자원을 캐내 간 현장엔 지독한 오염만 남았다. 몽골 전사의 후예들은 말한다. 돈 벌어 아파트 사고 싶다고.
    여행 중 내몽골 출신 중국인을 만났을 때, 나는 물었다. “와~ 그러면 너도 어릴 때 말 타고 다녔어?”

    그는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아니거든?! 내몽골도 이제 차 타고 다니거든!”

    훗날 내몽골의 구도(區都)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 가보니 높은 빌딩이 줄지어 서 있고 넓은 차도에 차들이 달리는 평범한 도시였다. 말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아 내몽골의 흥취를 느낄 수 없었다.

    한 남자가 차도를 무단횡단해 중앙선 가드레일을 넘는 모습이 그나마 가장 내몽골다웠다고 할까? 그는 가슴 높이의 가드레일을 매우 날렵하게 뛰어넘었다. 한달음에 말 위에 올라타는 몽골 전사 같았다.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약칭은 ‘어리석을 몽(蒙)’자다. 몽골어로 ‘몽골’은 ‘세상의 중심’이란 뜻이다. 그러나 중원의 한족은 몽골족에 ‘몽고(蒙古)’라는 이름을 붙였다. ‘무지몽매하고[蒙] 고루한[古] 것들’이라는 이미지를 덮어씌운 것이다. 한족에게 몽골족은 무지함을 일깨워줘야 할, 즉 계몽(啓蒙)의 대상이었다.



    이 같은 편견은 몽골의 조상, 흉노 때부터 시작됐다. ‘흉노’는 흉노어로 ‘사람’이라는 뜻인데, 중원은 ‘흉악한 노예’를 떠올리게끔 ‘흉노(匈奴)’라고 음차했다. 사마천은 비교적 점잖게 하(夏)나라 하후(夏侯)씨의 후예가 북방으로 가서 흉노족이 되었다고 설명했지만, 전국시대 중원의 노예들이 혼란을 틈타 북방으로 도망쳐 흉노족이 되었다는 속설이 횡행했다. 중원의 떨거지들이 북방 오지에 가서 야만스럽게 산다는 멸시가 깔려 있다.



    ‘황소 꼬리가 부러지는 추위’

    그러나 흉노는 중원의 편견에 휘둘리지 않았다. 중원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자부했듯이, 흉노 역시 자신의 터전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겼다.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가 중원을 다스리듯이, 역시 하늘(Tengri)의 아들인 탱리호도선우가 북방을 다스렸다.
     
    북방 초원은 매우 거친 땅이다. 북쪽인 데다 고원지대라 겨울은 매우 길고 여름은 매우 짧다. 몽골국의 관공서는 매년 9월 중순 난방을 틀기 시작해 5월 중순에야 멈춘다. 몽골어는 추위를 구분하는 말이 발달했는데, ‘양이 잠자는 바닥이 어는 추위’ ‘3살 된 황소의 뿔이 얼어 부러지는 추위’ ‘4살 된 황소의 꼬리가 얼어 부러지는 추위’ 등 추위의 이름도 매우 살벌하고 다양하다.

    초원은 일조량과 물이 적고 건조해 풀만 자랄 수 있을 뿐 농사에 부적합하다. 풀조차 가축이 다 뜯어먹으면 초원은 금세 황무지와 사막으로 변한다. 따라서 몽골 고원에 사는 이들은 가축을 데리고 목초지를 옮기며 살아가는 유목민이 되었다.

    유목은 초원에 가장 적합한 생활양식이었지만, 그 삶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정성껏 가축을 길러도 벼락 한 번, 폭설과 홍수 한 번에 몰살당하기도 한다. ‘장군도 화살 한 대면 끝장나고, 삼대 부자도 폭설 한 번이면 망한다’는 몽골 속담은 초원 생활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유목민이라 해도 유목만으로 생활하기란 힘들었다. 사냥, 약탈, 장사 등 여러 활동을 병행해야 했다. 이런 유목민에게 전사(戰士)는 매우 중요했다. 목초지와 가축을 지키고, 사냥을 이끌며, 전쟁·약탈을 수행하는 일은 부족의 생존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방 유목민들은 용사를 존경했고, 지도자를 뽑을 때에도 능력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초원의 戰士들

    여러 부족이 모여 회의를 통해 우수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은 평등하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회의 결정에 불복하고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며 부족 연맹 간 전쟁을 치르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탁월한 영웅이 유목민족을 규합해 위세를 떨치다가도, 순식간에 분열해 사라지는 일은 유목민족 역사의 전형적인 패턴이 되었다.

    춘추전국시대 말에 진시황이 중국 천하를 통일했을 때, 흉노의 영웅 두만선우는 북방의 여러 부족을 병합했다. 남방의 진나라와 북방의 흉노가 팽팽히 겨루는 국면이 형성됐다. “진나라를 망하게 할 사람은 호(亡秦者胡也)”라는 점괘를 들은 진시황은 ‘호(胡)’를 오랑캐, 그중에서도 북방의 흉노라 여겼다. 그만큼 흉노는 진나라에도 위협적인 존재였다.

    기원전 215년 몽염 장군은 30만 대군으로 흉노를 쳐서 오르도스를 빼앗고 44개의 성을 이어 쌓아 만리장성을 만들었다. 그러나 진시황이 죽자 차남 호해(胡亥)는 간신 조고와 함께 국정을 농단했다. 진나라는 연이은 반란으로 안에서부터 무너졌다. ‘망진자호야’의 ‘호(胡)’는 바로 진시황의 아들 호해다.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 이후부터 기원전 202년 유방의 천하 통일까지 장장 7년이 걸렸다. 천하 통일 이후에도 한나라가 제후의 반란을 평정하고 전란의 상처를 수습하는 데에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했다.

    중국의 견제가 사라진 사이 흉노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두만선우가 영웅이라면 그의 아들 묵돌은 대영웅이었다. 두만은 총애하던 후궁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고 싶어서, 묵돌을 경쟁국인 월지에 인질로 보내놓고 월지를 공격했다. 월지의 손으로 묵돌을 제거하려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묵돌은 혼란한 틈을 타서 월지의 명마를 훔쳐 타고 흉노로 돌아왔다. 영웅을 숭상하는 흉노인에게 묵돌의 인기는 한껏 높아졌다.

    묵돌은 자신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친위대를 양성했다. 묵돌이 소리 나는 화살인 명적(鳴鏑)을 날리면 1만 명의 친위대도 무조건 일제히 화살을 쏘도록 했다. 묵돌은 애마를 향해 명적을 날린 다음, 주군의 애마가 다칠까봐 주저하고 화살을 쏘지 않은 이들을 죽였다. 다음으로 애첩을 향해 명적을 날리고, 역시 화살을 쏘지 않은 이들을 죽였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두만선우에게 명적을 쏘았을 때는 화살을 쏘지 않은 이가 아무도 없었다.



    한나라 위 흉노

    흉노를 장악한 묵돌은 숙적 월지를 격파하고 인근의 26국을 평정했다. 다시 한 번 남중국과 북흉노가 대립하는 시기가 되었다. 항우를 꺾은 유방도 흉노에게 여지없이 완패했다. 한나라는 흉노와 형제의 맹약을 맺고 휴전한다. 한나라는 매년 솜 비단 쌀 술 등의 물품을 지급하며 황실의 여자를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했다.

    이후 흉노는 한나라 위에 군림하는 태도를 보였다. 묵돌은 유방이 죽자 홀몸이 된 여태후에게 “내게 있는 것으로 그대에게 없는 것을 채워주겠다”는 음담패설을 국서로 보냈다. 여태후는 성질이 고약해 황제 유방도 그녀를 꺼렸었다. 그녀는 묵돌의 모욕적인 편지를 받고 “피를 토할 지경이 되었지만”, 흉노군의 위력 앞에서는 성질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여태후는 “저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쇠하고 머리카락과 이도 다 빠져버려 대왕의 마음에 드시지 않을 것”이라고 겸양하며 묵돌에게 수레 두 대와 말 여덟 필을 보냈다.

    한문제(漢文帝)가 1척 1촌 목간(木簡)의 국서를 보내자 노상계죽선우는 그보다 큰 1척 2촌의 목간에 형처럼 으스대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천지가 생겨난 곳, 해와 달이 머무는 곳의 흉노 대선우, 삼가 한의 황제에게 묻노니 안녕하신가?”

    이 시기 흉노가 자부한 대로 “여러 활을 쏘는 민족은 합쳐져 일가가 되고, 북방의 고을은 모두 안정되었다.” 흉노는 동서교역로의 상권을 장악해 재원을 확보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한나라 문제·경제는 2대에 걸쳐 와신상담하는 자세로 부지런히 힘을 길렀고, 한무제는 반세기나 흉노와 집요하게 싸웠다. 결국 흉노는 한나라의 힘에 밀려 세력이 꺾인다. 동시에 권력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여기에 더해 악천후로 흉노의 살림살이가 큰 피해를 입자 흉노에 복속되었던 여러 유목민족(정령 오환 오손 등)이 만만해진 흉노를 공격한다. 한나라는 이들 유목민족을 후원한다.

    한서(漢書) 흉노전은 전한다. “수개월에 걸쳐서 눈이 그치지 않아 가축은 죽고, 백성은 병에 걸리고, 곡식은 열리지 않았다.” “정령은 흉노의 쇠약함에 힘입어 그 북쪽을 공격하고, 오환은 그 동쪽을 치고, 오손은 그 서쪽을 공격하였다. 이들 세 나라는 수만 명의 백성과 수만 필의 말과 그 밖에 수많은 소와 양을 죽였다. 더욱이 기아에 따른 사망도 이어져 백성의 10분의 3, 가축의 10분의 5가 죽었다.”

    흉노는 내분 끝에 남흉노와 북흉노로 갈라졌다. 한편 한나라는 왕망의 찬탈로 멸망했다가 광무제 유수가 후한을 열었다. 이때 광무제는 오환족 기병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이후 북방 유목민과 곧잘 제휴했다. 남흉노가 북흉노에게 밀리자, 광무제는 남흉노의 8부락을 병주(幷州)에 살게 했다. 남흉노로 북흉노를 견제하는 전략이었다.

    후한 말 병주는 산시(山西)성과 내몽골 일부 지역을 합친 지역이다. 이곳은 유목민과 한족이 섞여 살며 독특한 기풍을 지니게 됐고, 유목민족이 중국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여포의 영웅담은 ‘사실’

    ‘삼국지연의’는 한족 중심의 역사소설이라 이민족은 조연일 뿐이다. 그런데 삼국지를 읽었건 읽지 않았건 누구나 다 아는 내몽골 출신의 용사가 있다. 천하무적의 맹장 여포다. 여포는 병주 오원군 구원현(并州 五原郡 九原縣) 출신이다. 이 곳은 오늘날 내몽골의 바오터우(包頭)시 주위안(九原)구다.

    삼국지연의는 사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배합된 소설이다. ‘이건 사실이겠지’라고 여긴 것은 허구이고, ‘이건 뻥이겠지’라고 여긴 것은 사실인 경우가 종종 있다. 여포와 관련된 삼국지연의의 기록은 의외로 사실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여포가 멀찍이 세워둔 화극(畵戟)의 창날을 활로 쏴 맞춰 유비와 원술의 싸움을 중재한 ‘원문사극(轅門射戟)’ 이야기는 창작이라 여겼지만,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에도 버젓이 기록된 사실이다. 이처럼 여포는 활쏘기와 말타기에 매우 뛰어나 스스로 ‘비장(飛將)’이라 자부했다. 여포의 고향이 내몽골임을 감안하면 그가 활 쏘고 말 타는 법을 어디서 배웠을지 짐작이 간다.

    여포에게 명마 ‘적토(赤兎)’가 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삼국지연의의 3대 명마는 여포의 적토마, 조조의 절영, 유비의 적로마지만, 실제로 정사에 기록된 말은 적토마가 유일하다. “세상에 말은 많지만 그중 단 한 마리뿐인 적토마야, 천하에 사람은 많지만 그중 단 하나뿐인 여포 봉선(馬中赤兎 人中呂布)”이라는 말도 당대에 실제로 회자되었다.

    적토마는 아할테케(Akhal-Teke)로 추측된다.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기념물이며, 크고 늘씬한 체구에 황금빛 털로 빛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는 찬사를 받는 명마다. 말을 중시하는 내몽골 현지인들이 초원 실크로드 교역을 통해 투르크메니스탄의 명마를 입수했던 것이리라.

    여포가 유비를 동생으로 여겼다는 것도 사실이다. 여포는 유비를 만나자 매우 반가워했다. “나와 그대는 모두 변변치 못한 변방 출신이오.” 그러고는 ‘유비를 장막 안에 있는 부인의 침대에 앉히고 아내에게 술잔을 따르게 하고는 동생으로 삼았다.’

    여포의 이와 같은 기행(?)은 중원의 예법으로는 매우 무례하게 비쳤지만, 북방의 풍습으로는 엄청난 친근감을 보인 것이 아니었을까? 여포가 유비에게 변방 출신으로서의 동질감을 강조한 것도 변방에 대한 중원의 싸늘한 시선에 서러웠는데, 같은 변방의 무장을 만나 반가웠던 때문이리라. 다만 역시 북방 출신인 유비가 여포의 태도를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이 모두가 여포 개인의 기행이었던 듯하다. 같은 북방이라도 유비의 허베이성과 여포의 내몽골 풍습이 크게 다른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칭기즈칸, 고귀한 왕의 이름

    여포는 조조에게 사로잡혔을 때도 호언장담했다. “명공이 보병을 거느리고 나 여포로 하여금 기병을 거느리게 한다면 천하를 쉽게 평정할 수 있을 것이오.”

    조조도 그 말에 마음이 흔들릴 만큼 여포의 무용은 뛰어났다. 조조는 배신을 일삼은 여포 개인은 처단했지만, 여포 휘하의 장수인 장료·장패 등은 중용했다. 위나라 기병이 삼국 최강이었던 것도 오환·선비 등 북방 유목민의 기병을 고용했기 때문이다.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는 이들 북방 유목민들을 잘 제어했다. 그러나 내부에서 팔왕의 난이 일어나고 북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자 곧 5호16국시대가 열렸다. 한화(漢化)한 선비족의 수·당이 중국을 통일했고, 당태종 이세민은 북방 유목민들에게서 ‘천가한(天可汗·칸 중의 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당나라 이후 송나라가 중원을 통일했지만, 북방의 주도권만큼은 유목제국인 요나라에 고스란히 내어주어야 했다.

    몽골 고원에서는 오랫동안 여러 소부족이 각축전을 벌였다. 유목제국 요나라, 금나라는 유목민들이 한번 결집하면 걷잡을 수 없도록 강해진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요·금은 군소 유목민 집단이 성장하는 것을 방해했다. 한 세력이 제법 커지면 다른 소부족을 키워서 그 세력을 없앴고, 이 부족이 다시 커지면 또 다른 부족을 키워 없애버렸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니 몽골의 모든 부족이 저마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원한 관계를 맺었다.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도 한창 떠오르는 유망주였으나 적대 부족에게 독살됐다. 몽골은 쇠로 된 말 등자 하나만 있어도 부자라 할 만큼 가난한 지역이었는데, 칭기즈칸 부족은 그중에서도 더욱 가난했다. 칭기즈칸 일가를 먹여 살리기 힘들었던 부족은 일가의 재산을 빼앗고 밖으로 내쫓았다. 칭기즈칸 일가는 유목민의 생계수단인 가축 한 마리 없이, 허허벌판에서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훗날 ‘세계 최대의 정복자’라는 칭호를 얻은 칭기즈칸은 의외로 ‘타고난 영웅’이 아니었다. 어릴 때에는 몽골인 최고의 친구인 개를 무서워했고, 활쏘기나 힘은 동생보다 못했으며, 용병술은 의형제 자무카만 못했다.

    자무카가 용병의 천재 조조 같았다면, 칭기즈칸은 인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유비와 같았다. 칭기즈칸은 자신이 배반당할지라도 상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이익에 흔들리지 않고 대의명분을 따랐다. 칭기즈칸을 이긴 자들은 작은 이익을 얻었지만, 칭기즈칸 자신은 패배하면서도 몽골인들의 마음을 샀다. 그래서 칭기즈칸은 몰락해 도망 다니는 상황에서도 끝끝내 다시 일어섰고,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였다.

    또한 칭기즈칸은 총명하지는 않았지만 고난과 실패 속에서 배운 교훈을 잊지 않았다. 자무카에게 참패를 당한 칭기즈칸은 최후의 결전에서 압승을 거뒀다. 결과적으로 전술의 귀재 자무카는 칭기즈칸을 ‘전쟁의 신’으로 만들어준 스승이 되었다.

    이렇게 초원의 격전 속에서 대기만성의 영웅으로 성장한 칭기즈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 몽골 말들의 발굽은 어디든 간다. 하늘을 오르기도 하고 바다에 뛰어들기도 한다”고 몽골인들이 자부할 만큼 몽골의 말은 탁월했다. 몽골인들은 어떤가? “한가할 때 한족은 이를 잡고, 우리는 칼을 간다”고 할 만큼 거친 용사들이다. 게다가 칭기즈칸을 깊이 흠모한 몽골의 용사들은 맹세했다. “그가 나를 불로 보내건 물로 보내건 나는 간다. 그를 위해 간다.” 뛰어난 용사와 뛰어난 말, 그리고 이 모두를 규합하는 대영웅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몽골군은 중국, 중동, 동유럽 일대를 휩쓸었다. 중국인들은 몽골군이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나타났다가 번개처럼 사라졌다”고 두려워했고, 영문학의 아버지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노래했다. “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기즈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없었다”.


    신이 손가락을 여럿 주신 이유

    그러나 몽골이 세계제국으로 발전한 것은 단지 군사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몽골은 상업을 진흥하고 열린 자세로 여러 문화와 민족을 수용했다.

    우구데이칸은 상인이 부르는 값의 두 배를 주며 상품을 사들였고, ‘상인이 얼마를 요구하든 거기에 10%를 얹어 사겠다’고 포고했다. 몽골제국의 수도 상도(上都)는 일확천금이 보장되는 땅, 따라서 상인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땅이었다. 곧 상도는 유럽 상인들에게 ‘재나두(Xanadu·이상향)’로 불렸다.

    몽골의 관용적 자세는 종교 수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유럽에서 온 선교사가 천주교의 절대성을 주장하자, 뭉케칸은 종교대회를 열었다. 대결을 좋아하는 몽골인들은 종교대회를 씨름대회처럼 진행했다. 천주교 이슬람교 불교 대표들을 뽑아 선수단과 심판단을 구성했고, 각자 자신이 믿는 종교의 우수성에 대해 논증하면 심판단이 제일 우수한 논증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한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선수들은 마유주를 벌컥벌컥 들이켜야 했다.

    처음에는 제법 논리적으로 흘러갔지만, 선수들은 곧 술에 잔뜩 취했다. 천주교도가 목청 높여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자, 이슬람교도는 코란을 큰소리로 암송했다. 불교도는 명상에 빠져 ‘고요함으로 격렬함을 제압(以靜制動)’하고자 했다.

    결국 대회는 최종 승자 없이 모두 비긴 것으로 끝났다. 뭉케칸은 말했다. “신이 손에 여러 손가락을 주셨듯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 길을 주셨소.” 하나의 종교만을 고집하지 않고, 여러 사상과 종교를 모두 인정하는 관용의 자세였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는 남송을 정복하고 대원(大元)의 건국을 선포했다. 천하에서 ‘으뜸[元]’가고, 위대한 ‘시작[元]’을 여는 ‘텡그리[乾元]’의 나라라는 뜻이다.

    ‘원사 지리지’는 말한다. “봉건이 변하여 군현이 된 이후로, 천하를 가진 자 가운데 한·수·당·송 등이 강성하였다. 그러나 그 강역의 넓이는 모두 원에 미치지 못하였다. 한은 북적(北狄·흉노)에 괴로움을 당하였고, 수는 동이(東夷·고구려)를 굴복시키지 못하였으며, 당은 서융(西戎·위구르) 때문에 환란을 겪었고, 송의 걱정거리는 언제나 서북에 있었다. 그러나 원은 삭막(朔漠)에서 일어나 서역을 병합하고 서하를 평정하였으며, 여진을 멸하고 고려를 신속시켰고 남조(南朝·대리국)를 평정하고 마침내 강남(江南·남송)을 떨어뜨려 천하가 하나가 되었다.”



    분할된 몽골

    훗날 몽골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몽골이 중국의 주인이었음을 시인했다. “몽골이 비록 오랑캐이긴 하나 100년 동안이나 중국을 지배했으니, 짐과 경들의 부모는 모두 그들에 기대어 자란 것이다.” 명나라는 중국 전통의 천명사상에 입각해, 원나라를 정통 왕조로 인정하고 그 천명이 명나라에 계승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청태종 홍타이지는 1632년 몽골의 릭단칸을 격파하고 칭기즈칸의 옥새를 손에 넣은 뒤 청나라가 대원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음을 천명했다. 몽골과 관련 없는 한족의 명나라도, 만주족의 청나라도 모두 원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그만큼 세계제국 원나라의 위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한편 북방으로 쫓겨 간 몽골족은 여전히 강력했다. 군사적 재능이 탁월했던 명나라 영락제도 여섯 번이나 대대적으로 몽골 원정에 나섰지만 끝내 몽골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그 후손 정통제는 50만 명을 거느리고 원정에 나섰지만, 몽골의 일개 부족인 오이라트에게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했다. 청나라가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산해관을 넘을 때에도 몽골 기병은 중요한 파트너였다.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한 동안 잠잠하던 몽골 고원에 또 하나의 영웅이 등장해 선풍을 일으켰다. 준가르 부족의 지도자 갈단은 광활한 초원을 장악하고 청나라를 위협하는 패자로 떠올랐다. 강희제는 세 차례나 몸소 친정(1696~1697)한 끝에 결국 갈단을 처치했다.

    강희제는 일생일대의 숙제를 끝낸 기분으로 말했다. “2년 동안 나는 세 차례나 친정을 하면서 바람에 쓸리고 비에 젖은 사막을 건넜고, 황량하고 사람도 없는 벌판에서 하루걸러 식사를 했다. … 끊임없는 이동과 고난이 이 같은 위업을 이끌어낸 것이며, 갈단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런 일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족의 생명력은 실로 질겼다. 건륭제 때 준가르는 중앙아시아와 신장성 일대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자랐다. 건륭제는 한 지역을 점령할 때마다 주민을 몰살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훗날 자신의 십전무공(十全武功·건륭제의 10대 원정) 중 준가르 박멸을 으뜸 공로로 꼽았다.

    근대적 제국인 청나라와 러시아는 몽골의 활동 영역을 크게 잠식해갔다. 결국 20세기에 이르러 몽골은 몽골국(외몽골)과 내몽골로 분할된다. 몽골국은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고, 내몽골은 중국의 네이멍구자치구가 되었다. 한때 자신이 지배했던 세력에 양분된 것이다.

    언어는 집단적 정체성과 공감대의 기초다. 소련은 몽골어를 억압하고 키릴 문자와 러시아어 사용을 강요한 반면, 중국은 몽골어 사용을 허가하며 네이멍구자치구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는 척했다. 그러나 몽골을 근대 사회로 개조하려 한 점은 양국 모두 마찬가지였다.


    자연의 ‘복수’

    신중국이 출범했을 때 재건을 위해 건축 자재나 공장 설비 등을 옮기는 동력 수요가 높았다. 그러나 자동차가 부족했다. 이에 정부는 몽골의 말을 운송 동력으로 이용하기 위해 몽골에 말을 대대적으로 키우도록 했다.

    초원은 매우 취약한 땅이다. 유목민들은 가축이 풀을 먹어도 뿌리까지 먹지 않도록 목초지를 옮겨가며 초원을 세심히 보호해왔다. 그러나 정착 농경 사회인 중국은 유목민들의 목초지에 울타리를 두르고 정착생활을 강요했다. 더욱이 ‘과학적인 생산방식’으로 매년 몇 퍼센트씩 생산량을 향상시키도록 목표치를 할당했다. 자연의 운행에 맞추어 풀이 잘 자랄 때는 가축을 늘리고, 못 자랄 때는 가축을 줄인 전통적 유목 방식과 상극되는 조치였다. 초원은 곧 황폐해져 사막이 되었다.

    정부는 가축을 해치는 늑대를 초원의 적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사냥했다. 처음에는 늑대가 줄어들어 가축 생산량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천적이 사라지자 쥐와 토끼, 가젤 등이 폭증해 초원의 풀을 죄다 뜯어먹었다. 결국 초원은 사막이 되었고, 가축 역시 전보다 더 키우기 힘들어졌다. 한족 이주민들은 초원을 개간해 농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물이 부족하고 지력이 약한 땅에서 농사가 잘될 리 없었다. 개간 농지 역시 곧 사막이 되었다. 세상만사는 돌고 도는 것. 파괴자 베이징도 자연의 복수를 피할 수 없었다. 몽골의 사막은 베이징에 도시 전체를 뒤덮는 황사를 보냈다.

    장룽의 소설 ‘늑대 토템’은 문화대혁명 시대에 한족이 어떻게 내몽골을 잠식해가는지, 어떻게 몽골 초원이 파괴되어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주인공은 트랙터가 초원을 갈아엎고 농지로 개간하는 모습을 보며 상념에 잠긴다.

    “트랙터 시대가 옴으로써 풀을 생명처럼 여기는 민족과 풀을 제거해야 살아남는 민족 간의 깊은 갈등이 결국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 눈에 뻔히 보였다. 동남쪽에서 불어오는 새로운 농경 바람이 마침내 서북의 유목 바람을 압도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결국 서북쪽에서 황사라는 거대한 폭풍이 일어나게 되면 동남쪽 모두를 덮어버리고 말 테지….”

    몽골이 중국의 한 주로 편입된 지 어언 70년. 몽골은 이제 완전히 변했다. 한족이 내몽골 인구(약 2500만 명)의 80%를 차지하고, 몽골족(약 400만 명)은 ‘소수민족’이 되어버렸다. 내몽골 박물관 광장에는 ‘민족단결보정(民族團結寶鼎)’이 놓여 있다. 한족, 몽골족 구분 없이 ‘중화민족’으로 단결하자는 취지에서 세운 상징물이다. 그런데 정작 그것은 유목민의 상징인 말이 아니라 중원의 상징인 청동솥[鼎]이다. 한족과 몽골족의 역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네이멍구자치구는 가축 생산기지이자 광업기지가 되었다. 초원의 생태계는 파괴되어 이제는 온갖 동물이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곳곳에 밭이 들어섰고, 풍차와 태양전지가 즐비하게 놓여 있다.



    소수민족 된 몽골인

    유목민은 정착생활을 한다. 게르는 체험용 관광상품이 되었다. 아니, 게르조차 온전하지 않다. 희한한 데서 비상한 창조력을 발휘하는 중국인은 콘크리트 게르를 지었다. 기왕 내몽골까지 왔으니 게르 체험은 하고 싶지만 현대 건축물의 편리함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 모순된 욕망이 찾아낸 기묘한 타협책이다. 여행서 론리 플래닛 기자가 만난 몽골인은 내몽골의 변화를 한 마디로 표현했다. “사람은 늘고, 가축은 줄었어요.”

    유목민들도 21세기 속에 살고 있다. 말 대신 오토바이를 타고 양을 친다. SNS로 가축을 매매한다. 어린 소녀는 소박한 꿈을 꾼다. “여성 사업가로 성공해서 TV, 냉장고, 차, 아파트를 사고 싶어요.”

    한족과 몽골족 구분 없이 같은 꿈을 꾸니 이제 같은 민족이 된 것일까? 중국 정부는 내몽골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인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 것을 자신의 공적이라 자랑한다. 내몽골 경제 발전은 석탄 천연가스 희토류 등 내몽골의 풍부한 자원 덕분이다. 그러나 그 자원은 대체로 내몽골 외부의 경제 발전에 쓰이고, 광업 개발과 관련한 권리는 대부분 한족이 차지한다. 몽골족 유목민은 공해, 오염, 환경 파괴로 인해 생계를 위협받는다. 소수민족 자치구 중에서는 꽤 안정되고 민족 통합이 꽤 진행된 내몽골이지만, 민족 갈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2011년 5월 10일 몽골 유목민 메르겐은 20여 명의 동료와 함께 석탄 트럭이 목초지에 난입하는 것을 막으려다가 트럭에 치여 150m나 끌려간 끝에 죽었다. 불과 닷새 후, 한 탄광의 한족 노동자가 탄광 공해에 항의하던 몽골 유목민 옌원룽을 지게차로 고의로 쳐서 죽였다. 연달아 일어난 사건으로 수천 명이 시위에 나서는 등 내몽골 분위기가 악화되자 후진타오 정부는 사건의 주범인 두 명의 한족 노동자를 신속하게 사형시켰다. 그러나 겨우 넉 달 뒤인 10월, 석유 트럭이 목초지에 난입하는 것을 막으려던 몽골 유목민이 죽는 사건이 또 일어났다.

    초원은 황폐화되고 사막은 넓어져간다. 황사가 베이징을 덮치자, 방목지를 초원으로 돌리고[退牧還草], 농지를 초원으로 돌리는[退耕還草] 프로젝트를 개시했지만, 초원의 복원력은 한없이 약하다. 기업들은 내몽골 자원을 캐내는 데 혈안이 돼 있을 뿐, 그 뒤처리에는 무관심하다. 어느새 절대 다수를 차지한 한족은 ‘소수민족’ 몽골족을 존중하지 않는다. 몽골족 역시 현대 문명의 세례를 받아 목가적 생활 대신 도시의 삶을 꿈꾼다. 그리고 돈벌이에 열중하지만 쉽지는 않다.

    난마처럼 얽힌 숙제가 내몽골을 짓누른다. 열악한 환경을 딛고 세계제국을 만들었던 몽골의 영광을 다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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