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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에세이

구두 한 짝

  • 일러스트·박진영

구두 한 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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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한 짝
사람들은 저마다 눈부십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정신없이 일을 하고 점심 때가 되면 어김없이 무엇을 먹을까 메뉴를 기억해 내니까요. 신은 그 살아 있음을 미워하거나 부끄러워할 아무런 이유도 없으므로 그것은 당당한 눈부심이지요.

그러나 저녁이 서서히 다가올수록 신들은 피리를 불며 사람들의 혼령을 악마의 근처에 묶어두려 합니다. 사람들이 정체 모를 힘에 이끌려 막연한 생각에 붙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갑자기 찾아온 불안감에 몸서리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불안과 고독감에 선뜻 일어설 힘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바로 이때 휴대전화를 붙잡게 되는 것이지요.

밤이 깊을수록 혼자라는 사실은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집에 돌아와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움직이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혹독한 자기 확인과 맞닥뜨립니다.

그들은 밤에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상처 속에 들어앉아 있거나 흐릿한 앞날에 대한 걱정에 잠겨 있자면 저도 모르게 자신의 초라함을 자학하게 됩니다. 곧이어 어쩔 수 없이 악령에 몸을 허락하고 마는 것이겠지요.

뒤축이 다 닳고 해어진 구두 한 짝이 있었습니다. 먼지가 뿌옇게 가라앉은 선반 위에서 가쁜 숨을 쉬고 있을 때면 창 밖에서 세상의 소식들이 들려올 뿐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는 굉장히 많이 걸어 다녔습니다. 그러나 요 몇 해 동안 구두 한 짝은 세탁실 선반 위에서 아주 힘겨운 시간을 보냈으며 그의 친구들조차 그를 잊은 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힘이 다 빠져버렸지만 마지막으로 바깥세상이 한번 보고 싶어졌습니다.

구두 한 짝은 열린 문을 나와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밖은 이른 오후. 아이들은 스케이트보드를 탄 채 아파트 공원 쪽으로 내려가고, 그는 후진하는 차량을 피해 슈퍼마켓 앞을 지납니다.

그쯤이지만 그는 벌써 숨이 가쁩니다. 그러나 그는 가슴이 두근두근 터질 듯한 기쁨으로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집니다. 사람들은 남루한 구두 한 짝이 걷는 것에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지나쳐 가는 할아버지와 아이들이 가끔 남루한 행색에 관심을 주다가도 곧바로 자신의 일로 돌아갔습니다.

구두 한 짝은 도로를 횡단해 지금은 프랜시스코라는 카페로 변해버린 건물 입구로 들어갔습니다. 이 건물의 이층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키가 작아 밖을 볼 수 없었습니다. 구두 한 짝은 끈을 풀어 로프처럼 매달린 채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아래에 있던 한 차에서 ‘쿠르릉’ 소리가 났습니다. 베이지색 차량 안에서 젊은 남자는 계속 옆에 있는 늙고 예쁜 여자에게 말을 걸었고 그녀는 무표정하게 유리 차창을 열었습니다. 다시 남자가 힘겹게 말을 붙였고 여자는 자동차의 키를 꽂고 시동을 걸었습니다. 여자는 백미러로 차가 오는 것을 살피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습니다.

구두 한 짝은 두 손으로 매달린 채 오랜 시간을 보내 더는 매달려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왼쪽 복도로 힘차게 몸을 꺾어 돌았는데 그곳에는 큼지막한 간판이 붙어 있는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문이 열린 사무실 테이블 위에는 버려진 메모지와 길게 꼬인 전화선, 스테이플러로 묶인 업무보고서가 널려 있어 사무실 안은 너저분하고도 바쁜 느낌이었습니다.

구두 한 짝은 벽에 무표정하게 걸린 액자 아래 등을 기대고 앉았습니다. 그는 너무 바쁜 곳에 들어왔다는 후회의 잎사귀가 온통 몸을 덮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잎은 무성하게 돋아나 결국 구두 한 짝을 덮어버렸습니다. 그 와중에도 구두 한 짝은 어디론가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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