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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라이벌 와인

로마네콩티 vs 페트뤼스

부르고뉴 벨벳 여인 vs 보르도 성골 백작

  • 조정용│와인평론가 고려대 강사 cliffcho@hanmail.net│

로마네콩티 vs 페트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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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와인의 중심지인 프랑스에는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귀족 와인이 많다. 그중에서도 로마네콩티와 페트뤼스는 최고 중 최고다. 피노누아와 메를로의 참 맛이 각각 그대로 드러나는 로마네콩티와 페트뤼스는 태생적으로 다르지만 감각적으로 닮았다. 한 병에 수백만원 하는 이들 럭셔리 와인의 비밀은 무엇일까. 와인평론가 조정용씨가 신년호부터 와인 세계의 흥미로운 뒷얘기를 담은 ‘라이벌 와인’을 연재한다.
로마네콩티 vs 페트뤼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대표적 포도밭인 ‘라 로마네’

점과 선을 사용한 화법으로 유명한 미술가 이우환은 세 자녀로부터 진주혼식 기념 선물로 로마네콩티(Roman′ee-Conti) 1990년산 한 병을 받았다. 자녀들은 그 와인을 사기 위해 돈을 모았다. 와인 심미주의자인 화가는 최상의 와인을 받아 들고는 그 정성에 감복한 나머지 그것을 결코 딸 수 없었다고 저서 ‘시간의 여울’에서 고백했다.

로마네콩티는 지구상에서 가장 열망받는 와인이다. 누구에게 물어도 오직 하나의 와인만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로마네콩티를 말한다. 그 맛의 특징은 벨벳, 고혹, 미스터리로 요약된다.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우아한 질감이 무척이나 매혹적이라서 도대체 이런 맛과 향의 근원이 무엇일까 하는 지적 호기심을 유발한다.

로마네콩티는 지역이나 마을 이름을 와인 이름으로 삼는 부르고뉴의 평범한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포도밭 이름을 와인 이름으로 쓴다. 마을 최고의 와인에만 적용되는 원칙이다. 그래서 라벨에는 포도밭 이름이 표시된다. 로마네콩티, 그것은 바로 포도밭 이름이다.

로마네콩티 vs 페트뤼스
라 로마네 포도밭과 콩티 왕자

로마네콩티는 어떻게 생겼을까. 원래 ‘로마네’라는 포도밭이 있었고, 그 남쪽 상단 부분을 콩티란 사람이 사들여 그 구역 이름을 로마네콩티로 바꾸었다. 콩티는 콩티 왕자(Prince de Conti·1717~1776)로,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장조카다. 그는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고 열 살 나이에 왕자 칭호를 얻어 이후 49년간 왕자로 지냈다. 그 선조의 고향인 콩티-쉬르-셀르(Conti-Sur-Selles)의 콩티를 따서 왕자 칭호를 붙였다. 풀어쓰면 콩티 마을 출신의 왕자인 것이다.

루이 15세의 애첩으로 베르사유를 휘저었던 마담 퐁파두르는 콩티 왕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절대 권력을 탐한 그녀에게 왕의 장조카는 항상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왕자는 이 포도밭을 구매할 때 퐁파두르에게는 철저하게 비밀로 했다. 사사건건 트집 잡는 그녀가 무슨 떼를 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 그녀의 모함으로 콩티는 베르사유를 떠나게 되지만, 대신 그는 자신의 이름이 최고의 와인에 붙는 영광을 누렸다. 1760년 왕자는 당시 주변 포도밭의 11배에 해당하는 액수인 9만2400리브르를 주고 이 포도밭을 사들였다. 포도밭을 구매한 정황은 미국 음식 평론가 리처드 올네의 저서 ‘로마네콩티’에 상세히 기술돼 있다.

이 포도밭의 피노누아 품종은 1584년에 심었는데, 콩티 왕자가 밭을 차지했을 때에도 그대로 유지됐고 이후 1945 빈티지까지 같은 포도로 양조돼 왔다. 16세기의 포도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져왔다니 참 놀라운 일이다. 뿌리도 프랑스산, 줄기도 프랑스산으로, 즉 360년 동안 순수 프랑스 토종 피노누아로 전해 내려왔다. 그러나 왕자의 식탁에 오른 로마네콩티는 오늘날과는 좀 달랐다. 그 당시에는 피노누아 외에도 피노블랑을 같이 심어 혼합해 만들었다.

188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기승을 부린 필록세라(포도뿌리 혹벌레) 영향으로 프랑스 포도밭 생태계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 이때 포도나무 뿌리가 거의 시들어 죽었다. 작지만 생명력이 질긴 진드기에 유서 깊은 포도밭들이 맥을 추지 못했다. 필록세라에 내성이 있는 미국산 대목에 프랑스산 줄기를 접붙이는 방법이 유일한 타개책이었다. 그러나 로마네콩티는 미국산 대목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대신 포도나무 번식의 방법을 달리하거나, 이산화황을 밭에 뿌려서 상당 기간 피노누아의 순수성을 지켰다.

그럼에도 필록세라를 이길 수 없었다. 결국 1946년 로마네콩티 양조장도 백기를 들고, 포도나무를 모조리 뽑아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1946년부터 1951년까지는 와인이 생산되지 못했다. 땅을 완전히 갈아엎고 이듬해인 1947년에 다시 포도를 심었다. 이렇게 해서 2008년 기준으로 로마네콩티의 나이는 거의 환갑이 된다.

최초의 거라지 와인

오늘날의 밭 면적은 왕자가 살아 있던 시대 그대로다. 1.8헥타르( 135m2 내외의 면적)의 ‘손톱만한’ 밭에서 매년 평균 약 500상자(6200병)가 나온다. 거라지 와인(창고를 뜻하는 garage에서 온 말로 소량 생산 와인을 일컬음), 컬트 와인(숭배의 뜻을 지닌 cult에서 온 말로 이 역시 소량 생산된 고급 와인을 일컬음)이란 말은 1990년대 프랑스와 미국에서 생긴 신조어이지만, 따지고 보면 로마네콩티가 이들의 원조다.

로마네콩티의 생산량은 보르도의 샤토무통로쉴드의 5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연평균 4000상자를 병입(甁入)하는 보르도의 최고가 와인 샤토 페트뤼스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로마네콩티를 최초의 거라지 와인, 최상의 컬트 와인이라고도 한다. 생테밀리옹의 발란드로(연간 약 1000상자 생산), 라 몽도트(약 800상자 생산) 혹은 미국 나파밸리의 스크리밍 이글(약 600상자 생산)보다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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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용│와인평론가 고려대 강사 cliff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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