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호

캐디는 당신이 지난밤 한 일을 알고 있다

  • 글: 김재화 코미디 작가

    입력2003-04-28 16: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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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디는 당신이 지난밤 한 일을 알고 있다

    지난해 10월 권오철 프로와 함께한 필자(왼쪽)

    내가 처음 머리를 올린 것은 13년 전 늦여름 서울 근교 남성대CC에서였다. ‘첫경험’에 어찌나 흥분이 됐던지 전날 밤에는 초야를 앞둔 신부마냥 안절부절못한 채 밤을 꼬박 새웠다. 뭔가 아주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아 끝내 잠이 오지 않았다. 연습장 고참들이 가르쳐준 품목 중 빠진 것은 없을까 싶어 수도 없이 가방을 풀었다 쌌다 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었다.

    아침이 되어 드디어 난생 처음 클럽을 쥐고 필드에 올라섰다. 코미디언들과 함께한 라운드였기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지만, 어이없게도 그날 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형이 생각나서였다. ‘이 좋은것도 못하고 서둘러 가다니!’

    셔틀콕 여왕 방수현의 아버지인 코미디언 방일수씨가 긴장을 풀어준다며 조크를 건넨다. 포르투갈까지 골프 원정을 간 사나이가 있었단다. 이 사내, 게임 전날 밤의 두근거림을 술과 여자로 진정시키는 습관이 있었다. 원정 라운딩 전야에도 어김없이 현지 홍등가에서 여자를 샀다. 그런데 이 여자, 한참 고지가 눈앞에 보일 때마다 “누인 뜨레! 누인 뜨레!”를 외쳐대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사내는 절정의 순간에 외치는 포르투갈 말이 ‘누인 뜨레’라고 생각했단다.

    술이 덜 깬 상태로 다음날 플레이에 나섰으니, 골프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내기로 상당한 돈을 잃어 주머니가 너덜너덜해지는 와중에 어느새 18홀은 막바지에 이르러 마지막 파3홀에 섰다. 사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 티샷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린 위에 떨어진 볼이 또르르 구르더니 홀에 꽂은 깃대에 맞고 쏙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프로들도 그 확률이 30만분의 1밖에 안 된다는, 대다수 아마추어들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채 인생을 마감한다는 홀인원이었다.

    기쁨에 넘친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팔짝팔짝 뛰면서 어젯밤 여자에게서 들었던 “누인 뜨레!”를 외쳤다. 그런데, 같은 조의 포르투갈인들은 사내의 오도방정을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목소리가 좀 작았나 싶어서 더 크게 외쳤다. “누인 뜨레!!” 그렇지만 썰렁한 분위기에 변화가 없었다. 도리어 잠시 후 같은 조의 친구가 슬며시 다가와 뒤통수를 냅다 치는 게 아닌가. “야 임마, 들어갔는데 왜 안 들어갔다고 난리 블루스냐?”



    말이 난 김에 진정한 골프 마니아가 라운딩 전날밤에 가져야 하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언젠가 “노련한 캐디는 골퍼의 전날 밤 행적을 마치 함께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훤히 안다”는 얘기를 들었다. ‘흥, 덩치에 비해 몽둥이(드라이버) 내지르는 것이 짧은 걸 보니 늦게까지 꽤나 퍼 마셨군.’ ‘다리가 후들거려 짧은 퍼팅도 놓치는 것을 보니, 어젯밤에는 마누라 아닌 다른 여자랑 미리 신나게 ‘퍼팅’을 하고 왔군.’ 비록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아도 다 보인다는 얘기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망신당하기 싫은 골퍼라면 라운딩 전날 밤에 해야 할 일과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 따로 있는 셈이다.

    한때 국내에서는 적수가 없었던 최상호 선수는 큰 대회 전날 밤에는 퍼터를 가슴에 안고 푹 잤다고 한다. 타이거 우즈는 골프와는 전혀 관계없는 전자오락을 하거나 가벼운 잡지를 읽으며 밤을 보내고, 필드의 악동 존 델리는 술집에서 골프장으로 직접 간단다.

    우리 같은 주말 골퍼들은 대개 공을 두어 박스 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간혹 존 델리보다 더 통이 큰 아마추어들도 볼 수 있다. 늦게까지 술을 퍼 마시고 낯 모르는 여자와 ‘침대 위 퍼팅’을 갖는 간 부은 이들이다. 이쯤 되면 다음날 좋은 스코어를 기록할 마음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게 아닐까. 어떤 운동도 마찬가지지만 골프 전야에 술이나 섹스, 포커, 고스톱을 한대서야 성적이 좋을 리 없다.

    골프에 입문한 지 10여 년, 필자도 이제는 적잖이 여유가 생겨서, 전날 밤에 잠을 푹 자는 것은 물론이요 때로는 이글이나 10m 이상 되는 ‘제주도 퍼팅’을 성공시키는 꿈까지 꾼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골프 전날 밤이면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경건(?)해지는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다. 지나간 옛일을 떠올리기도 하고 모처럼 친구에게 전화를 걸게도 된다. 가끔은 7번 아이언 하나지만 석 달씩이나 부지런히 연습을 하시고도 필드에 나가보지 못한 채 인생을 마감하신 아버지가 생각나기도 한다.

    라운드를 앞둔 전날 밤인 지금, 나는 보석을 손질하듯 클럽을 닦고 있다. 칫솔과 카메라렌즈 세척용 천으로 아이언 클럽을 다듬고 있는 나를 보고 지나친 궁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클럽을 준비하는 내 심정은 여배우가 카메라 앞에 나서기 전에 지극정성으로 얼굴 화장을 고치고 또 고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최고의 성적을 위해 도 닦는 마음으로 마지막 한 올의 정성까지!’ 이 정도 마음가짐이면 홀인원이나 언더파가 나올 때도 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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