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5500명을 명퇴시킨 KT 본사.
둘째, 준비된 명퇴가 늘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전에 시행된 명퇴는 짧은 시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바람직하다는 풍조였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 간의 갈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나갈 사람은 빨리 나가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명퇴 이후에 대한 훈련이나 준비 없이 무조건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떠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므로 전직(轉職)훈련(outplacement)을 통해 재취업이나 창업에 대한 준비를 하고 떠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최근 공개적으로 전직훈련을 실시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으며 아웃플레이스먼트 관련 컨설턴트가 새롭게 뜨는 직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셋째, 대상자들이 명퇴 신청에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1990년대 명퇴자들은 그래도 소망이 있었다. 명퇴금과 퇴직금으로 구멍가게라도 차려서 샐러리맨의 서러움을 벗어나겠다는 열정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퇴직 보상금을 은행에 맡기면 높은 이자 덕택에 상당부분 생활이 가능해 큰 두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장사를 하는 것도 쉽지 않은 데다가 금리가 낮아 그 돈으로 생활비를 감당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직장인들이 명퇴 신청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최근 명퇴 신청을 실시한 시중의 한 은행은 예상인원의 10%에 불과한 20명만이 신청해 담당자를 애태우고 있을 정도이다.
넷째, 명퇴가 상시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다. KT의 경우 예상 밖으로 많은 직원들이 명퇴를 신청하는 바람에 담당자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파격적인 명퇴 조건이 직원들의 마음을 바쁘게 만든 까닭이다. 명퇴 신청자들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앞으로 명퇴 위로금은 자취를 감추고 상시구조조정이 자리를 잡으면 선진국처럼 감원에 따른 보상금은 더이상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한다. 이는 우리 근로자들 사이에서도 명퇴금을 지급하는 관행이 점점 사라지고 정리해고가 보편화되리라는 의식 변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몸값’ 높이면 명퇴 두렵지 않다
이제 실업문제는 우리 사회 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한국경제가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시절에는 실업률이 2%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이미 저성장시대에 들어섰다. 잠재성장률이 7%대에서 4∼5%대로 떨어졌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95년에 1만달러를 기록한 이후 8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고도성장 덕택에 실업문제를 강 건너 불처럼 여겼으나 이제는 정책 우선순위의 맨 앞을 차지하고 있다. 2003년 8월 현재 실업률은 3.3%이지만 기업들이 대량감원을 실시하게 되면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실업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근로자와 노사정의 공동노력이 요구된다. 근로자는 노동시장의 흐름을 주시해야 한다. 한국 기업에서는 해고가 어렵기 때문에 경기변동이 실업률과 직접 연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경기변화가 실업률에 즉시 반영되고 있어서 근로자들이 노동시장의 흐름에 민감하게 움직이게 된다. 앞으로 우리나라 근로자들도 노동시장 변동과 경기변동이 함께 간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노동시장의 흐름을 주시하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몸값’의 개념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몸값은 자신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노동시장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값은 현재 받고 있는 급여가 아니라 현재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곳에 가면 받을 수 있는 급여가 된다. 이를 기회임금(opportunity wage)이라고 한다. 기회임금이 높은 사람은 명퇴가 두렵지 않다.
노조는 노동운동의 목표를 고용보장에서 능력개발로 바꾸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노동운동은 임금 극대화와 고용보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투쟁으로 임금과 고용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