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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산책

고대 유럽 호령한 훈족 수장 아틸라는 한민족

유물·유적 통해 추적해본 한민족의 뿌리

  • 글: 이종호 과학국가박사 mystery123@korea.com

고대 유럽 호령한 훈족 수장 아틸라는 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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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유럽 호령한 훈족 수장 아틸라는 한민족

경주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기마인물상 토기. 북방 유목민족의 특성을 지녔다.

이 그림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말을 탄 채 활로 동물을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들과 똑같다. 고분벽화에 나오는 화살촉은 도끼날 화살촉인데, 이 화살촉은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목표물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훈족도 바로 이 도끼날 화살촉을 사용했다.

관습적인 공통점도 발견되고 있다. 훈족의 골상이 편두(扁頭, 납작머리)라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몽골지역부터 독일 튀링겐과 오덴발트, 프랑스 칼바도스 지방에 이르는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분묘에서 나온 훈족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 훈족은 관자놀이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 있었고 머리 둘레에 고랑 같은 주름이 팼으며,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편두라고 알아냈다. 그런데 가야국이 창립했던 경남 김해에서도 편두 두개골이 발견됐다. 또 법흥왕 등 신라의 왕들도 편두였다고 한다. 최치원은 신라의 국사 지증대사의 공덕비에 법흥왕이 편두라고 기록했다.

고대 인도에서 행해졌던 관습, 혹은 코카서스 북부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도 알려진 편두는 한민족과 연관성이 크다. ‘삼국지’의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는 ‘진한(辰韓) 사람은 모두 편두’라는 기록이 있다. 또 고조선에는 일찍부터 편두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편두는 중국인과는 구별되는, 동이(東夷)족 사이에 매우 오랫동안 성행했던 풍습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점은 훈족에게선 편두가 발견되지만, 흉노에게선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유럽을 공격한 훈족은 편두 습속을 가지고 있는 특수 부족으로,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및 신라 지역과 친연성(親緣性)이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한편 훈족의 이동경로에서는 대·소형의 동복(cup cauldrons)이 발견된다. 유목 부족장들에게 바쳐진 동복은 정화 의식(Purification rite)에서 고기를 제물로 바칠 때 쓰는 동제 용기로 대형 화분처럼 생겼다. 이러한 동복은 가야시대 고분인 경남 김해의 대성동과 양동리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동복은 가야국 등의 원류가 북방의 기마민족이라는 증거로 자주 거론되어 왔다. 훈족은 동복을 말 잔등에 싣고 다녔는데,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국보 91호) 토기에도 말 잔등에 동복을 싣고 다니는 모습이 발견된다. 게다가 이 기마인물상의 주인공들도 모두 편두이다.

또한 훈족의 동복 등에서 발견되는 문양은 한민족의 금관 등 머리 장식 양식과 유사하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에는 나무형상(출(出)자형 장식)과 녹각형상(사슴뿔 장식)이 많다. 이는 북방 민족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풍습으로 북방민족이 한반도로 이동해 정착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북방 유목민족의 전형적인 습속인 순장(殉葬) 또한 가야 지역의 고분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특히 금관가야 유적인 대성동 고분군 1호분에선 우마(牛馬)의 머리를 베어 곽 위에 얹어놓은 목곽(木槨)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훈족을 포함한 북방 유목민족의 동물 희생 행위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훈족이 나무에 빨간 헝겊을 달아 악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는 기록과 곰을 평화의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점은 우리 민족이 마을 어구에 장승이나 솟대를 세워 염원을 빌고 곰을 토템으로 삼은 점과 매우 유사하다. 대다수 유목민족들은 곰이 아닌 다른 동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토템 대상으로 가장 일반적인 순록과 수달 등은 지금까지도 몽골 지역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서쪽의 훈족, 동쪽의 한민족

그렇다면 고대 한민족의 원류는 어떤 과정을 통해 아시아 대륙의 훈족과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및 신라인으로 갈라서게 됐을까. 이는 진시황제 때부터 중국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흉노의 흥망성쇠와 연계된다.

흉노는 진나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한나라와 중원의 패권을 놓고 장기간에 걸쳐 혈투를 벌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57년 동과 서로 양분되어 서로 전쟁을 벌인다. 서흉노의 선우(흉노의 왕으로 ‘하늘의 아들’을 뜻함)인 질지(?支)가 동흉노의 호한야에게 패하자 일족을 이끌고 우랄산맥 너머 시르다리아강 중류에 당도한다. 이것이 흉노의 제1차 서천(西遷)이다. 질지는 견곤(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을 수도로 하는 ‘아정(牙庭)’이란 나라를 세웠다. 서유럽은 이때를 흉노 제국 출현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한편 중국에 후한(後漢)이 들어서면서 세가 불리함을 느낀 남흉노는 48년 고비사막 이남의 8개 집단을 이끌고 광무제(BC 6년∼AD 57년)를 찾아가 투항했다. 광무제는 남흉노에게 아예 내몽골 영토를 주어 투항하지 않은 북흉노를 견제하게 했다. 그리고 73년에 이르러 한나라는 남흉노와 연합해 북흉노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패배의 고배를 든 북흉노는 아시아의 북쪽 막북(漠北)으로 이동하는데, 이것이 흉노의 제2차 서천이다. 북흉노는 서역제국을 장악한 후 그 세력을 규합하면서 한나라와의 대결을 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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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종호 과학국가박사 mystery123@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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