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우리 문학을 위한 하소연

  • 입력2004-01-30 15: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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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문학을 위한 하소연
    지난해 출판계의 키워드는 ‘불안’이었다. 북핵 문제에다 이라크전쟁, 불안한 정국, 심각한 불경기, 청년실업, 가정파탄으로 인한 자살 급증, 게다가 전국을 강타한 태풍 ‘매미’까지 우리 국민은 일년 내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은 인생의 ‘제2막’에서 행복해지고 싶어했고, ‘인생대역전’을 바라는 심정으로 책을 찾았다. ‘10억 만들기’와 ‘아침형 인간’ 등의 책이 대중의 큰 호응을 받으면서 중요한 코드가 되었다. 때문에 ‘절박한 개인의 부각’이 지난해 연말 발표한 ‘출판계 10대 뉴스’의 첫 번째 뉴스로 꼽혔다.

    그 다음 출판계 뉴스로는 ‘문학시장의 침체와 인터넷 소설의 유행’을 들 수 있다. 몇몇 인기작가의 질 낮은 작품에 ‘주례사 비평’을 달고 과다 광고해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던 소설시장은 지난해 상업적으로는 거덜난 꼴이 됐다.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꼽은 소설은 판매부수 5000부를 간신히 넘겼을 뿐이고, 거의 모든 일간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책마저 시장에서는 초판 3000부도 팔리지 않았다. 책 대여점에 책을 공급하는 총판시장에서조차 명망 작가들의 소설은 완전히 외면 당했다.

    귀여니의 ‘그 놈은 멋있었다’(황매)를 비롯한 인터넷 소설, 새로 출간된 ‘해리포터’ 5권 시리즈(문학수첩), 요시모토 바나나, 무라카미 하루키나 에쿠리 가오리 등 일본소설, 황석영의 ‘삼국지’(창비)나 장편소설 ‘심청’(문학동네) 정도가 그나마 화제를 불러일으킨 책들이다.

    이러한 출판계 10대 뉴스를 발표하고 나서 나는 한 문학출판사 대표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시인이기도 한 그는 ‘출판시장을 객관적으로 다루면서 왜 유독 문학시장만을 심하게 다루느냐’고 질책했다. 그는 ‘출판계 10대 뉴스를 접하고 나자 눈앞이 아득해지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항의를 받고 나서 나 또한 순간 아찔했다.



    나는 유신말기인 19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다. 신동엽과 김수영, 정지용, 김기림의 시를 남몰래 읽으며 수없이 울음을 삼켰다. 백낙청의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염무웅의 ‘민중시대의 문학’ 등의 평론집을 읽으며 세계관을 형성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문학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던 시절이었다.

    내가 출판계에 입문해 처음 기획한 책은 ‘농민문학론’(신경림 편)과 ‘신동엽-그의 삶과 문학’(구중서 편)이다. 당시만 해도 저작권 개념이 확실하던 때가 아니라, 필자 동의만 있다면 재수록하는 것이 관례로 통했다. 두 책은 그런대로 반응이 좋았고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책에 실린 적지 않은 글들이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출판물에 실려 있었기 때문에 뒤가 구린 바가 없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어느 날 창비에서 내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짐짓 모른 체하고 넘어갈 순 없었다. 창비는 내게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문학 지망생이던 나는 ‘문학사상’이나 ‘현대문학’을 주로 구독하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통학버스에서 낯선 대학생으로부터 ‘창작과비평’을 읽어보라는 권유를 들은 후 내내 ‘창작과비평’을 읽어왔다. 이 잡지에 실린 글들은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오죽했으면 1980년 계엄령 위반 혐의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 내가 들고 있었던 것은 달랑 ‘창작과비평’ 56호 한 권뿐이었을까.

    처음 만난 창비 사장 김윤수 선생은 뜻밖에도 내게 창비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창비에서 일하게 된 나는 여러문인을 만났다. 이메일은커녕 팩스도 없던 때라 문인들은 원고를 직접 들고 회사를 찾아왔다. 원고료도 직접 수령해갔다. 그러다 보니 술자리가 많을 수밖에 없었고, 술자리에서는 언제나 진지한 토론이 이뤄졌다.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문학이 곧 언론의 역할을 자임하던 시절이라 술자리에서는 언제나 울분과 우국충정이 토로되었다. 따라서 책 광고니 판매부수니 하는 이야기가 술자리에서 나왔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 즈음 나는 지방의 문학 동인들로부터 함께 활동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기도 했고, 어느 문학잡지로부터는 등단시켜주겠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모두 거부했다. 문인이란 타이틀이 평생 출판 종사자로 일하다 정년 퇴직하겠다는 나의 오랜 꿈에 부담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내내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던 창비의 사정은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1990년 펴낸 ‘소설 동의보감’이 대형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살림이 트이기 시작했다. 이후 창비는 해마다 베스트셀러를 탄생시키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면서 창비는 세상으로부터 ‘상업 출판’이라는 혐의를 얻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출판의 논리’로 자신을 변명한 적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문학의 미래를 위해 유망 신진작가에 대한 배려가 필요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우여곡절 끝에 1998년 외환위기 직후 창비를 퇴사하고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매년 조사한 출판통계를 통해 본 문학시장은 정말 한심했다. 문학시장은 나날이 ‘죽어가고’ 있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작가들은 ‘계약금’이란 이름으로 출판사에 작품을 입도선매한 다음 질 낮은 작품을 써냈다. 출판사는 그렇게 생산된 작품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대대적으로 광고를 해댔다. 평론가들은 장사에 도움을 주는 ‘주례사 비평’을 써내기 바빴고, 그것은 언론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었다.

    일부 문학출판사들은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행동했지만 갈수록 거침없는 모습을 보였다. 광고문구도 자극적으로 변해갔다. 문학은 점차 ‘말기암’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이러한 출판사의 행태에 대해 심하게 비판했다가 한 문학출판사의 고발로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일은 어설픈 타협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나는 좀처럼 마음을 삭일 수 없었다. 그래서 몇몇 문학평론가들에게 요구해 2001년에는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김명인 외)란 책을 직접 펴내기도 했다.

    반성을 모르던 문학시장은 결국 여기에 이른 셈이다. ‘출판계 10대 뉴스’를 접하고 내게 항의한 사람에게 나는 ‘앞으로 애정을 갖고 문학을 열심히 살펴보겠노라’고 다짐하고는 최근 언론에 크게 다뤄진 한 작가의 소설을 읽어보았다. 1990년대 초반 공격적 페미니즘 소설로 재미를 보았던 작가는 여전히 자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소설을 읽는 일은 내겐 고문과도 같았다. 구조와 스토리가 조금 바뀌었지만, 그야말로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나중에 한 문학담당 기자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또한 요즈음의 문학작품을 읽는 일이 너무도 힘들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언론은 ‘일방적 찬사’를 늘어놓는 데 급급하기만 하다.



    이런 소설을 읽은 독자가 다시 소설을 찾을까? 이 악순환이 소설 시장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문학은 비타민과 같아 문학 없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말해왔고, 문학으로 세계관을 형성했고, 우국충정과 울분을 가슴에 품은 문인들의 아픔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아무나 붙잡고 한없이 하소연하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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