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발의에서 가결까지 65시간 막전막후

  • 글: 박성원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swpark@donga.com 부형권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bookum90@donga.com

    입력2004-03-26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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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탄핵정국의 출발점은 민주당의 분노였다. 민주당 수뇌부는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을 돕는 것”이라는 등 노 대통령의 잇따른 총선 관련 발언을 ‘민주당 죽이기’로 간주하고 생존 차원의 대응으로 탄핵을 거론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사과 거부’로 민주당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았고, 그 결과는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로 나타났다.
    발의에서 가결까지 65시간 막전막후

    3월12일 국회 본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환호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헌정사에서 한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16대 국회는 초헌법적 반(反)법치주의적 자세로 일관하면서 국법질서와 의회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최소한의 도덕적 기반마저 붕괴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을 탄핵하여 민주헌정을 수호하기 위한 헌법적 책무를 다해야 하는 역사적 기로에 서 있습니다.”

    3월12일 오전 11시22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회의장. 박관용(朴寬用) 국회의장이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의 상정을 선언하는 순간 민주당 조순형(趙舜衡) 대표는 눈을 지그시 감고 이같이 시작되는 탄핵안 제안설명서를 움켜쥐었다.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이 단상을 점거하고 있어 비록 낭독하지는 못했지만 조 대표의 제안설명서에는 애초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대통령 탄핵안의 국회 의결을 헌정사상 최초로 이끌어내기까지 넘어야 했던 고비고비가 배어 있었다.

    제안설명서에도 나타나 있듯 야권에서 ‘불법적 선거 개입’ 등을 이유로 노 대통령 탄핵을 추진할 수도 있음을 ‘경고’한 것은 수개월 전부터였다. ‘탄핵’이라는 말이 정치권에서 처음 나온 것은 지난해 10월10일 노 대통령이 측근비리 수사와 관련해 “수사결과가 나온 뒤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말한 직후였다. 다음날인 10월11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이규택(李揆澤) 의원은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비리를 덮고 재신임을 걸어 총선전략으로 활용하려는 정치적 술수”라며 “민주당 자민련과 연대해 탄핵소추로 몰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돕는 것”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탄핵은 노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위협용 카드’였을 뿐 실제 성사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야권이 탄핵을 사용 가능한 무기로 인식한 것은 지난해 12월4일 이후다.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 의원들은 노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측근비리 특검법을 무려 209명의 찬성으로 재의결하는 가공할 ‘반노(反盧) 결집력’을 발휘했다. 개헌안 처리나 대통령 탄핵에 필요한 재적의원(당시 3분의 2는 182명)을 훌쩍 뛰어넘은 숫자였다.

    야권이 본격적으로 탄핵추진을 검토하게 된 데는 노 대통령이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주축을 이룬 지지자들의 대선승리 1주년 기념행사인 ‘리멤버 1219’ 행사장에서 “시민혁명은 계속되고 있다, 다시 한번 뛰어달라”며 ‘친노’ 단체들에 적극적 활동을 주문한 것이 발단이 됐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즉각 “내년 총선을 겨냥한 명백한 사전선거운동”이라며 탄핵 추진의 불가피성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같은 해 12월24일 노 대통령과 총선출마를 위해 사표를 낸 박범계(朴範界) 전 대통령법무비서관 등 전직 비서관 행정관들과 함께한 오찬석상 발언도 말썽이 됐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을 찍는 것은 한나라당을 도와주는 것으로 인식될 것”이라며 “한나라당을 하나의 세력으로 하고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한 축으로 하는 구도로 가게 될 것이다”고 발언했다. 야당이 역시 이를 ‘사전선거운동’으로 맹비난한 데 대해 노 대통령은 “대통령이 선거와 관련해 할 수 있는 행위와 그 범위에 관해 선관위 유권해석을 요청하겠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해가 바뀌어 1월5일, 조순형 대표는 당 상임중앙위원회의에서 “역대 어느 대통령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선 적이 없다. 노 대통령의 선거 개입은 헌법과 법률 위반으로 탄핵사유라는 것을 분명히 경고한다”며 처음으로 ‘탄핵’을 거론했다.

    민주당이 특히 흥분한 대목은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돕는 것”이라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그야말로 ‘민주당 죽이기’를 노골화한 것이라는 것. 조 대표는 3월 탄핵 정국이 본격화된 뒤에도 이 발언을 계속 상기시키며, “노 대통령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적어도 ‘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능하면 민주당을 찍어달라’고 말하는 게 인간적인 도리이고, 순리 아니냐”며 여러 차례 배신감을 토로했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당을 쪼갠 것도 용서하기 힘든데 그나마 남은 민주당마저 짓밟으려 한다는 게 민주당의 인식이다. 사실 ‘친노파’들의 민주당 분당(分黨) 강행이야말로 노 대통령이 탄핵소추 사태를 맞게 된 근본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민주당 핵심당직자는 “노 대통령이 총지휘한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총선에서 생존을 위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하는 민주당으로서는 노 대통령의 노골적인 열린우리당 지지 행위를 좌시할 경우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될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이 “탄핵추진의 본질은 총선에서 몰락 위기에 처한 민주당과 ‘차떼기’로 코너에 몰린 한나라당이 야합해 대통령을 끌어내림으로써 물꼬를 되돌리려는 총선정략에 불과하다”고 단정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민주당의 이 같은 위기의식은 2월5일 조 대표의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조 대표는 “노 대통령이 주도하고 청와대 내각 시도지사 국회의원까지 총동원되는 ‘총선 올인 공작’과 불법 관권선거를 즉각 중단하라”며 “요구를 묵살한다면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사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2월18일에는 노 대통령이 “이번 총선에서 개헌저지선(국회 의석의 3분의 1)이 무너지면 어떤 일이 생길지 나도 정말 말할 수 없다”고 발언, 민주당을 자극했다. 조 대표는 다음날 확대간부회의에서 “노 대통령의 발언은 공무원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현행 선거법(9조1항)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다”며 “이는 탄핵 사유가 되는 만큼, 당 차원에서 엄중히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서 유용태(劉容泰) 원내대표는 대통령 탄핵을 위한 구체적 절차에 착수하자고 제안했다. 민주당의 공식회의에서 탄핵이 본격 공론화된 것도 이 무렵이다.

    노 대통령이 2월24일 취임 1주년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에서 “열린우리당에 대해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기대한다”고 발언한 것은 민주당이 탄핵이라는 미사일을 성능시험 완료단계에서 실전배치 단계로 옮기는 계기가 됐다.

    2월27일 민주당 의원총회에서는 이만섭(李萬燮) 전 국회의장, 한화갑(韓和甲) 전 대표 같은 당내 중진 원로들도 ‘탄핵’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 전 의장은 “탄핵을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오늘 의총에서 결의라도 해야 한다. 국민 여론은 ‘이대로 4년을 어떻게 더 가느냐’는 것이다”고 탄핵 결의를 재촉했다.

    이에 힘입은 조 대표는 3월3일에는 급기야 노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묘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날 “오만불손하고 독재의 길로 가는 최고권력자를 바로잡기 위해 탄핵 제도가 있는 것이다”고 목청을 높였다.

    ‘법’ 무시하는 대통령에 대한 분노

    조 대표가 단단히 화가 난 것은 노 대통령이 시사주간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의 총선 개입에 대한 야권의 비판에 대해 “대통령이 누굴 지지하든 왜 시비를 거느냐”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노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 기대’ 발언 등에 대해 ‘공무원의 선거중립의무 위반’ 판정을 내린 것도 ‘법을 무시하는 대통령’에 대한 민주당의 탄핵 추진 움직임에 속도를 더해줬다.

    3월4일 긴급 개최된 민주당의 심야 의원총회에서 조 대표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명언까지 인용해가며 “중대한 결단을 해야 할 시점에 와있다”고 결연한 모습을 보였다.

    “우리 의원들은 의원에 당선된 만큼 대한민국 헌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 노 대통령은 실정은 차치하더라도, 헌정질서와 법치주의를 파괴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선거법 위반뿐만 아니라, 본인과 그 측근들의 일련의 부정 비리로 인해, 대통령직을 수행할 도덕적 기반을 상실했다고 본다.”

    이렇듯 조 대표가 탄핵에 ‘올인(모든 것을 건다는 뜻)’할 의지를 천명하면서 한나라당과의 공조도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한나라당 홍사덕(洪思德) 원내총무와 민주당 유용태 원내대표 사이에서 물밑으로만 교감되던 탄핵에 대한 양당의 협력 논의가 자연스럽게 표면에 부상했다.

    물론 양당 공조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내부적으로 탄핵안 처리 자체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남은 4년을 노 대통령에게 맡길 수 없다”는 ‘노무현 정권 심판론’을 확산시켜 4·15 총선을 노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로 몰아가겠다는 전략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이 예상외로 강공으로 나오자 한나라당은 민주당과의 공조를 마냥 외면할 수는 없다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공조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나라당이 3월4일 상임운영위원회의와 운영위원회를 잇달아 열어 노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이 분명해진 만큼 탄핵을 원칙적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을 정리하고 홍사덕 원내총무에게 전권을 위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민주당은 3월7일 “노 대통령이 선거법 위반에 대한 사과 요구에 불응함에 따라 8일부터 소속 의원 및 한나라당 의원들의 서명을 받아 구체적인 탄핵소추안 발의에 돌입키로 했다”고 밝혔다. 양당간에 탄핵소추안에 대한 절충과 조정작업이 이미 끝난 뒤였다.

    그러나 3월9일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탄핵소추안을 발의할 때까지만 해도 최대 강경파인 조 대표까지 ‘발의 자체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탄핵 문제를 정리한 민주당의 한 내부 문건에 따르면 ‘탄핵 가결에 실패했을 경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설령 우리 민주당의 능력 부족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해 탄핵이 실패로 돌아갔을 경우에도 형법 존재의 3대 이유인 일반 예방, 특별 예방, 응보의 효과는 충족된다.’

    ‘탄핵이란 제재 수단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노 대통령에게 그 존재 사실을 인식시켜주는 일반 예방의 효과가 있고, 특정인에 대한 범죄 행위의 재시도를 예방하는 특별 예방의 효과가 있다. 노 대통령과 그 세력들에게 최고 수준의 경고를 가함으로써 앞으로 국정 운영에 긍정적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그런 조 대표에게 ‘탄핵안을 반드시 가결시켜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은 3월11일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이다. 노 대통령은 이날 회견에서 선거법 위반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고, ‘불법 대선자금 한나라당의 10분의1 초과시 사퇴’ 약속 발언에 대해서도 복잡한 계산을 통해 얼버무려 거센 비판여론을 불러일으켰다.

    불길에 기름 부은 대통령 기자회견

    이날 민주당 지도부는 국회 대표실에서 기자회견을 같이 지켜봤는데, 회견 1시간20분 동안 ‘허허’ 하는 ‘어이없다’는 식의 감탄사만 계속됐다고 했다. 당 지도부는 “도저히 대통령감이 아닌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다”고 말했고, 일부 의원들은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선대위의 홍보본부장을 맡았던 김경재(金景梓) 상임중앙위원에게 “저런 사람을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링컨에 비유하는 광고를 만들었느냐”고 농담 섞인 면박을 주기도 했다. 이에 김 상임위원은 “그래서 내가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았느냐”고 답했다.

    이에 앞서 3월10일 조 대표와 한나라당 홍사덕 원내총무는 전화접촉을 갖고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처리방안에 대해 협의했다. 조 대표와 홍 총무는 11일 국회 본회의에서 탄핵소추안 처리방침을 거듭 확인하고 양당에서 탄핵소추안 발의에 서명하지 않은 의원들을 집중적으로 설득키로 했다.

    그러나 민주당 일각에서는 이날까지도 ‘노 대통령의 확실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만 있으면 탄핵이라는 극단적 선택은 피해보려고 청와대와 최후의 대화를 시도했다.

    “해볼 테면 해보라”

    민주당 핵심관계자는 “청와대 관계자와 통화를 해서 ‘선거법 위반 등에 대해 사과하고 이쯤에서 끝내지 않는다면 정말 심각한 상황이 도래할 것이다. 이건 경계경보가 아니라 실제상황이다’고 말했으나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이었다”며 답답해했다.

    실제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당시 “발의가 국회를 통과하리라고는 절대로 예상하지 않는다”며 “선거중립을 해쳤다는 이유만으로 야당에 사과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것은 굴복이기 때문이다”고 단호한 반응을 보였다.

    민주당에서는 이 때문에 “어차피 사과를 한두 번 했던 처지도 아닌데 오히려 ‘탄핵할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버틴 데는 노 대통령 특유의 ‘막판 뒤집기’ 승부수가 깔린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탄핵안이 가결되면 탄핵의 원인이 된 노 대통령의 위법행위보다는 오히려 ‘약자 노무현’을 동정하는 역풍이 불 것을 기대해 은근히 야당의 탄핵안 제출을 기다린 것 아니냐는 ‘탄핵유도설’까지 나오고 있다.

    어쨌거나 노 대통령은 3월11일 기자회견에서 사과는 빼버린 채 측근과 가족 비리 등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일관함으로써 당초 탄핵안에 반대했던 한나라당과 민주당내 소장파 의원들까지 속속 탄핵찬성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이날 회견 직후 여의도 모처에서 회동한 한나라당 홍사덕 총무와 민주당 유용태 원내대표는 이미 탄핵안 가결 정족수(재적의원 271석의 3분의2선인 181석)를 넘어선 185석을 확보했다는 계산을 마쳤다.

    이날 밤 본회의장 주변의 교섭단체대표실 등에서 철야에 돌입한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들은 교대로 본회의장을 드나들어 분위기를 긴장시키며 3일간의 철야농성에 지쳐 있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진을 빼는 ‘심리전’을 구사하기도 했다. 또 두 당 원내총무단은 “12일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의장석을 덮칠 것”이라고 흘린 뒤 실제로는 이 시간을 넘긴 직후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점거하고 있던 의장석을 급습하는 ‘연막전술’도 구사했다.

    결국 3월12일 탄핵안 가결은 위법행위에 대한 사과를 거부한 노 대통령에 대한 여론의 비판에 힘입어 표결을 강행한 야당과, 탄핵소추 강행이 불러올 역풍을 믿은 노 대통령간의 표계산과 오기가 맞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진정한 승부는 4·15 총선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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