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국회 소추 당한 노무현 정치 1년

  • 글: 김정훈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jnghn@donga.com

    입력2004-03-26 11: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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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 대통령의 비타협적 정치관은 1990년 3당합당 합류를 거부한 데서 비롯됐고 이후 비주류의 길을 걸으면서 더욱 고착됐다. 자신이 내세우는 원칙에 어긋난다고 판단하면 대화조차 거부하는 배타주의적 소신은 야당과의 타협을 통한 국정안정보다 정치적 승부수에 치중하는 결과를 낳았다.
    국회 소추 당한 노무현 정치 1년
    노무현 대통령의 특별기자회견을 하루 앞둔 3월10일 밤 9시경,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농성을 하고 있던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 나타난 정동영 의장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바로 직전 청와대를 찾아가 노 대통령에게 “기자회견에서 사과가 어렵다면, ‘대국민 유감표명’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강력하게 설득했으나, 노 대통령은 요지부동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 대통령은 ‘사과를 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며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런 기조로 회견을 했다가는 야당이 탄핵 표결 강행으로 나올 게 뻔했다. 그러나 이제는 노 대통령의 마음을 돌릴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정 의장의 머릿속에는 ‘탄핵 가결’이라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상황이 떠오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뭐하러 표결 막느냐”

    노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등을 이유로 야당이 탄핵소추안을 발의한 이후 일부 여야 중진들은 “그래도 파국은 막아야 하지 않겠냐”며 물밑 대화를 해왔다. 그리고 한나라당 쪽에서는 9일 오후 늦게 노 대통령의 초대 비서실장을 맡았던 문희상 대통령정치특보 등을 통해 모종의 타협책을 제시했다. 타협책은 박관용 국회의장 주선으로 노 대통령과 유지담 중앙선관위원장, 그리고 여야 4당 대표가 만나는 7자회동이었다.

    이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노 대통령이 유 위원장에게 자신의 열린우리당 지지발언 경위를 설명하고 선관위 결정을 존중한다는 뜻만 분명하게 밝힌다면 탄핵안 표결을 강행하지 않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문 특보는 10일 오후 3시 정치특보 위촉장을 받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가 노 대통령을 만났지만, 7자 회동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씨가 먹힐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문 특보는 이미 김우식 대통령비서실장과 이병완 홍보수석비서관과의 접촉을 통해 노 대통령의 강경한 대응기류를 감지하고 있었다.

    10일 박관용 의장이 별도로 김우식 비서실장을 통해 제안한 여야 대표와의 긴급회동 역시 노 대통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 의장이 탄핵안 가결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경호권’을 발동한 것도 노 대통령의 대화 거부가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

    박 의장이 표결을 강행하면서 화난 목소리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고 소리쳤던 것도 의장석을 점거했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 한 것이라기보다 노 대통령을 향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즈음 노 대통령을 만났던 여권 고위관계자의 전언.

    “노 대통령은 자신감에 차 있더라. 처음에는 화가 나서 열린우리당 쪽에 농성도 하지 말라고 했다. ‘야당이 표결하라고 놔두지, 뭐하러 막느냐’는 것이었다. 당 쪽에서 ‘그래도 우리는 막아야겠다’고 하니까 ‘알았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저지하면 표결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것 같았고, 설사 투표에 들어가 탄핵안이 가결되더라도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도 아닌 ‘각하’결정을 내릴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청와대의 한 핵심관계자도 “야당이 처음 탄핵안을 발의했을 때 노 대통령이 ‘한판 붙자는 거 아이가’ 그러더라. 대통령은 한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고 전했다.

    김우식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참모들도 ‘야당의 탄핵소추안 발의는 잘못됐지만, 파국을 막기 위해 이유를 불문하고 대통령이 사과하는 게 좋겠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대통령에게 들이밀면서 마음을 돌리기를 바랐으나, 노 대통령은 도리어 참모들을 설득하는 식이었다.

    노 대통령은 고집을 꺾지 않았고, 11일 오전 회견에서 “잘못한 게 뭔지 모르는데 시끄러우면 무조건 대통령이 원칙에 없는 일을 해서 적당하게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것은 좋은 정치적 전통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대결과 충돌의 악순환 끝에 결국 탄핵소추안은 거대야당의 힘에 의해 가결됐고, 노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탄핵소추를 당한 ‘불행한 대통령’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

    여기에는 ‘옳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노 대통령 특유의 정치스타일이 크게 작용했다. 원칙에 있어 타협하지 않는 일관된 태도는 어떤 면에서는 그를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르게 한 원동력이었다.

    패배를 예상하면서도 지역주의 타파라는 명분을 내걸고 부산 출마를 세 차례나 감행했고, 2002년 대선 때 후보단일화를 막판까지 거부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1988년 야당이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 유보에 합의하자 당시 통일민주당 소속 의원이었던 노 대통령은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내고 지방으로 잠적했고, 1989년 초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회에 나와 변명으로 일관하는 석명서를 읽자 국회의원 명패를 집어던지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과 비타협적 정치스타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노무현류’의 정치스타일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번 사태를 두고도 노 대통령의 일부 측근들은 “노 대통령은 지난 15년 동안 정치를 해오면서 고개를 숙여본 일이 없다. 해본 적이 없고 그게 체질이 돼 있는데, 쉽게 숙일 수 있었겠냐”고 말한다.

    노 대통령의 비타협적 정치관은 1990년 1월 3당합당 합류를 거부한 데에서 비롯됐고 이후 더욱 고착됐다. 이어 정치권의 본류가 아닌 비주류의 길을 걸었고 거기에서 ‘노무현류’ 정치는 완성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386 측근 중의 한 명인 정윤재(열린우리당 부산 사상구 후보)씨는 “노 대통령이 과거 정치역정을 회고하면서 가끔 ‘내가 3당 합당 때 김영삼 대통령을 따라갔다면 아마 정책위의장도 했을 거고, 원내총무나 사무총장도 해봤을 거다. 그랬다면 내 정치인생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고 말하곤 했다”고 소개한 적이 있다.

    원내총무를 하면 국회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배우는 동시에 상대 정당과 타협하는 법을 배우고, 사무총장을 했다면 자금과 조직을 배우고, 정책위의장을 했다면 정부 고급관료들과 호흡을 맞추게 돼 정부의 생리를 알게 되는데 그런 경험을 갖지 못했음을 은연중에 토로한 것이다.

    이는 노 대통령이 3김식 정치메커니즘에 물들지 않도록 하는 순기능 작용과 동시에 상대를 배려하면서도 목적을 달성하는 유연함을 갖추지 못하게 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했다.

    “쌀 한 톨 안 남기는 게 습관”

    이런 그의 태도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대로 유지됐고, 거대야당이 지배하는 국회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취임한 지 2개월여 만에 국회는 고영구 국정원장 후보자에 대해 ‘임명 부적절’ 의견을 냈으나, 노 대통령은 “시대착오적인 색깔 덧씌우기를 하고 있다”며 임명을 강행했다.

    지난해 9월 야당이 노무현 정부 내각의 상징이던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가결하면서 또다시 충돌이 빚어졌다. 노 대통령은 한동안 해임건의 수용을 거부하다가 10여일이 지나 김 장관 사표를 수리했고, 이는 국회에 상정돼 있던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 부결 사태로 이어졌다. 타협할 줄 모르는 대통령과 거대야당의 대결상태는 이번 탄핵사태가 있기 전부터 여러 차례 되풀이된 셈이다.

    노 대통령의 고집스런 행동철학은 사생활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지난해 가을 청와대 관저에서 참모들과 식사를 하던 노 대통령은 삶은 호박에 약밥을 얹은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먹으려다 실수로 식탁에 떨어뜨렸다. 그 바람에 약밥에 섞여 있던 잣, 대추, 밤이 흩어지고 말았는데, 노 대통령은 이것을 일일이 손으로 집어먹었다.

    옆에서 함께 식사를 하다가 이를 지켜본 정찬용 인사수석비서관이 “꼭 드시고 싶으시면 주방장을 불러서 하나 더 갖다달라고 하지, 그걸 다 주워서 드십니까? 요즘은 애들도 그러지 않는데, 다른 자리에서는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점잖게 충고했다.

    대개는 “그런가요?” 하고 가볍게 넘어갔을 일인데, 노 대통령은 정색을 하고 반박했다.

    “나는 1946년생으로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에 자랐습니다. 쌀 한 톨이라도 남기지 않는 것이 습관처럼 돼 있습니다. 정 수석도 잘 알면서 왜 그래요. 그리고 음식을 남겨서 버리면 환경에도 좋지 않습니다.”

    노 대통령이 조목조목 따지면서 식탁 위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먹은 행위를 정당화하는 반론을 펴는 바람에 대통령의 ‘품위’를 생각해서 한마디 꺼냈던 정 수석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정 수석은 그 때 일에 대해 “노 대통령의 얘기는 ‘솔직히 말해서 너나 나나 똑같은 촌놈인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얘기하느냐’는 것으로 들렸다”고 풀이했다.

    이처럼 적당한 관용이나 애매모호한 타협을 싫어하는 노 대통령의 의식의 저류에는 비주류 의식, 나쁘게 말하면 변방의식이 강하고 넓게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3월11일 기자회견에서 형 건평씨에게 인사청탁을 한 대우건설 남상국 전 사장을 향해 “좋은 학교 나오시고 성공한 분들이 시골에 있는 사람에게 머리 조아리고 돈 갖다주고 그런 일 말아달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의식의 단편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또한 2002년 민주당 경선 당시 돌풍을 일으킬 때 일부 보수언론이 자신을 깎아내리는 보도를 계속하자 노 대통령은 사석에서 “일부 언론에서는 내가 마치 ‘만적의 난’이라도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아니겠냐”고 말한 적도 있다.

    노 대통령의 비타협주의는 ‘숫자의 정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태도로 나타났다. 여소야대 국회라는 상황을 맞았지만, 노 대통령은 인위적인 정계개편이나 야당의원 흡수를 통한 안정의석 확보에는 애초부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과거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전격적인 3당합당을 통해 여소야대를 거여(巨與) 구도로 전환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야당의원 빼내기를 통해 과반수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 전례가 있다. 그렇지만 과거 3당합당을 거부했던 노 대통령으로서는 ‘자기부정’이 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접근방식을 취할 수도 없었고, 취할 의사도 없었다.

    생사 갈리는 승부수 즐겨

    그는 오히려 ‘뺄셈정치’라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자신의 원내 지지세력을 줄이는 쪽의 선택을 했다. 2002년 12월 대선 승리 직후, 노 대통령을 지지했던 조순형 추미애 천정배 신기남 의원 등의 주도로 민주당 의원 23명이 당 해체를 결의했다. 대선 승리의 기세를 몰아 민주당을 노무현당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다.

    당시 이를 주도했던 천정배 의원은 제주도로 휴가를 가있던 노무현 당선자에게 전화를 걸어 속전속결로 민주당 해체를 추진하자고 건의했지만, 노 당선자의 반응은 간단했다. “그래도 당내 절차를 밟아서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라는 답이었다.

    노 당선자가 즉각적인 민주당 해체 추진에 소극적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들의 활동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민주당 조순형 대표는 당시 노 당선자의 태도에 크게 실망했고, 이 때를 기점으로 두 사람의 거리는 점차 멀어져갔다. 그리고 이번 탄핵 사태에서는 극과 극의 위치에 서고 말았다.

    이후 민주당의 환골탈태 작업은 구주류와 신주류가 대립하며 질질 끌어 진척되지 못하다, 노 대통령의 지지도가 30%대까지 추락한 최악의 시점인 지난해 8월 분당(分黨)으로 구체화됐다. 원내 2당을 목표로 삼았던 노무현 지지 의원들은 47명의 의원을 규합하는 데 만족해야 했고, 그 결과는 대통령 탄핵 가결선인 원내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야당에 내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세몰이식 정계개편보다는 당내 절차를 중시했던 노 대통령의 태도에 대해 천정배 의원은 “노 대통령이 법률가 출신이라는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본다”고 분석한 적이 있다. 항상 세(勢)가 불리한 위치에서 정치를 해오다 보니, 노 대통령은 ‘국민의 힘’ ‘여론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었고 ‘여론의 힘’을 얻기 위해 명분을 앞세워 정면돌파의 승부수를 던지는 길을 선택해왔다. 그것도 나중에 크게 문제가 될 성싶으면 빠져나갈 퇴로를 만들어놓는 정치적 수사로 덧칠한 승부수가 아니라, 승패와 생사가 분명하게 갈리는 승부수를 던졌다.

    여기에 법률가적 면모가 투영되면서 그의 승부수에는 법률적 계약서처럼 늘 갑과 을이 분명했고 효력과 조건이 확실하게 따라붙었다. 이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그냥 해보는 얘기가 아니라, 진검승부를 건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반영돼 있음을 뜻한다.

    2002년 대선후보가 된 뒤 8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지도가 급락세를 보이자 노 대통령은 “부산 경남 지역에서 단 한 명의 광역단체장도 건지지 못하면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했고, 민주당내 ‘반(反)노무현’ 의원들이 후보교체론을 거론하자 재경선을 주장했다.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는 발언이나 재신임 국민투표 제안도, ‘대통령직’을 내건 조건이 분명한 승부수다. 탄핵 표결을 앞둔 상황에서 내던진 총선 결과와 재신임 연계방안도 ‘대통령직’을 조건으로 건 도박 같은 승부수다.

    대통령후보 시절부터 노 대통령을 죽 지켜본 문희상 대통령정치특보는 지난해 11월 이를 ‘올인(All-in)의 정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노 대통령은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나라와 국민의 미래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목표 달성에 집착하는 불안한 지도자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제왕적 대통령’의 행태에 익숙해 있는 국민에게는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기도 했다. 또한 권력 전체를 건 승부수는 유권자에게 자유로운 의사표시보다는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개혁독재’의 발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국회 소추 당한 노무현 정치 1년

    1988년 국회 5공비리 청문회장에서 위원장에게 의사진행에 관해 항의하는 통일민주당 노무현 의원.

    그렇다고 해서 힘을 앞세운 거대야당과 물러설 줄 모르는 노 대통령의 충돌을 꼭 노 대통령의 정치스타일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다. 어떤 점에서는 2002년 대선에서 불과 57만여표(2.32%포인트)차로 노 대통령이 신승(辛勝)할 때부터 야당과의 무한대결의 씨앗은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대통령 임기(5년)와 국회의원 임기(4년)가 일치하지 않아 취임 1년 만에 총선이라는 대회전을 치러야 하는 헌법구조적 숙명도 노 대통령과 야당간 극한대결 양상을 부채질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5년 단임 대통령제가 도입된 이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4명의 대통령이 탄생했으나 이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와 국회의원 임기 불일치에 따른 정치적 부담이 가장 큰 대통령이다.

    대체로 임기 중반 이후에는 레임덕 현상으로 인해 대통령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임기가 1년쯤 지난 뒤 총선을 치르게 된 노 대통령은 총선결과에 따라선 조기에 레임덕을 맞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또한 4월 총선을 통해 구성되는 17대 국회는 노 대통령이 2008년 2월 퇴임한 뒤인 2008년 5월에 임기가 끝난다. 구조적으로 대통령에게 협조하기보다는 2007년 12월 대선과 2008년 4월 총선 승리를 모든 행동의 기준으로 삼을 것이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조차 총선 이후 필요에 따라서는 노 대통령을 공격하고 나설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은 최악의 정치적 환경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런 부조화 때문에 노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자신의 5년 임기를 총선을 기점으로 해 ‘1년짜리 집권 1기’와 ‘4년짜리 집권 2기’로 구분해 국정운용구상을 짜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총선은 노 대통령에게 사실상 새로운 4년 임기를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봐도 무방할 만큼 정치적 의미가 깊다.

    승부사 기질이 강한 노 대통령은 이러한 악조건을 넘어서면 훨씬 좋은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음직하다. 상황을 거꾸로 보면 거대야당이 지배하는 16대 국회를 1년 만에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셈이다. 4월 총선을 6개월여 앞둔 지난해 10월부터 대통령직을 건 승부수를 거듭 띄우고 나선 연유도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두관 장관 해임 가결이 고비

    노 대통령은 적어도 취임 초에는 야당과 대화하고 타협하며 ‘정말로’ 잘해보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야당과 한판 붙자는 식의 대결적 자세 때문에 국회와 늘상 대립만 해온 것으로 각인돼 있지만, 노 대통령은 지난 1년 사이에 세 차례나 국회를 찾았고 10여차례 여야 지도부 및 상임위별 회동을 가졌다.

    지난해 3월 비전투병의 이라크 파병안에 대해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이 반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내가 직접 만나 설득하겠다”고 나섰으나, “괜한 정치적 오해만 산다”는 유인태 당시 정무수석비서관의 만류로 포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야당과 잘 지내보겠다는 노 대통령의 생각은 지난해 9월초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가결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8월말까지만 해도 청와대는 물론 여권내에서 ‘총선 올인’이라는 얘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이른바 ‘총선 올인’이라는 표현은 지난해 9월25일 노 대통령과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활동을 같이했던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열린우리당 부산 영도구 후보)이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내년 총선에 올인해야 한다”며 ‘인재 총동원론’을 편 것이 시초다.

    노 대통령 진영에서 고수급 전략가로 꼽히는 김 전 장관은 노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인 지난해 1월초 여의도의 개인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났을 때 이미 4월 총선에 대한 걱정부터 했다.

    “노무현 정권은 소수파 정권도 아니고, 극소수파 정권이다. 솔직히 말해 민주당 의원들이 모두 노 당선자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엄밀하게 따지면 한줌밖에 안 되는 통추세력이 집권했다고 봐야 한다. 결국 내년 4월 총선에서 ‘극소수’라는 태생적 기반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노무현 정권은 5년 내내 힘들 것이다. 그리고 내년 총선에서 최우선과제는 영남권에서 몇 석 늘리는 게 아니라, 수도권 대패를 막는 것이 될 것이다.”

    김 전 장관은 이미 민주당의 분열을 예상하고 있었고, 노 대통령을 전폭 지지했던 호남표의 분산에 따라 수도권 지역에서 힘겨운 싸움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예견한 것이다.

    다수 의석보다 국회 합리화 기대

    여하튼 지난해 8월까지만 해도 노 대통령은 측근들에게 “내년 총선에서 의석수에 연연하지 않는다. 여야 구분 없이 개별적으로 의원들을 만나 정부 정책에 협조를 구하는 미국식 대통령제를 운영하면 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달라진 게 있다면 취임 초기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 같은 행정부와 입법부간 권력분점 방안을 거론했던 노 대통령이 이때부터 ‘미국식 대통령제’에 강조점을 두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두관 전 장관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데 이어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이 부결되면서 노 대통령의 야당에 대한 시각은 “더 기댈 게 없다”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총선에 대한 시각도 김정길 전 장관의 시각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은 지역구도를 극복할 수 있는 선거제도 도입을 조건으로 4월 총선 이후 다수정파에 총리 지명권과 내각의 3분의 1을 할양하는 권력분점안에 끝까지 집착했다. 국회 다수 의석보다는 ‘국회의 합리화’에 더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노 대통령의 판단은, 원내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국회가 합리화된다면 협력을 얻는 문제는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12월 초 정기국회 폐회를 앞두고 선거법 개정 논의가 막판으로 치닫고 있을 때 청와대와 야당 사이에 이를 둘러싼 물밑 대화가 활발하게 오갔다. 박관용 국회의장과 문희상 당시 대통령비서실장간, 유인태 당시 정무수석비서관과 홍사덕 한나라당 원내총무간 2개의 채널이 동시에 가동됐다.

    당시 노 대통령과 박 의장은 청와대에서 서너 차례 극비회동을 갖기도 했다. 이번 탄핵안 표결 때 박 의장은 결국 경호권을 발동했지만, 행정부와 입법부의 두 수장은 적어도 이 때만큼은 정치개혁에 머리를 맞대고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이 같은 물밑 접촉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노 대통령은 총선 ‘올인’에 들어갔다. 윤덕홍 전 교육부총리, 강금실 법무장관, 문재인 전 대통령민정수석 등에게 조심스럽게 총선 출마에 뜻이 있는지를 타진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재신임을 고리로 한 마지막 올인 카드를 검토했다. 총선이 다가올수록 정국은 ‘탄핵 충돌’이라는 전면적 권력투쟁의 상황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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