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 “야당, 총선연기론 분명히 들고나올 것”

  • 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4-03-26 11: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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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탄핵은 생중계로 진행된 세계 최초의 의회쿠데타
    • 5·16 쿠데타 이후 44년간 주류였던 그들, 순순히 물러갈 리 없어
    • 중앙선관위, 일개 지도과장 명의로 대통령께 공문 보낸 것은 상식밖
    • 박관용 의장, 퇴장하는 정치인이 마지막을 그렇게 추하게 장식하나
    • 헌법재판소, 국가비상상황에 관례 따지며 ‘목요회의’ 고집하면 욕먹을 것
    • 노 대통령 입당과 총선 연계, “지금은 관심 대상 아니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 “야당, 총선연기론 분명히 들고나올 것”
    2004년 3월12일 오전 11시22분. 박관용(朴寬用) 국회의장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탄핵의결소추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자 열린우리당 정동영(鄭東泳) 의장은 국회 본회의장 의석 맨 앞 책상 위에 올라서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통곡에 가까운 고함을 질러댔다. “이건 쿠데타야. 당신들은 5공이야, 5공. 5공은 물러가라. 이건 무효야. 안 돼!”

    정 의장의 눈에서는 분노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 등 야3당의 의지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탄핵안 처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상정과 동시에 시작된 투표는 28분 만에 끝났고, 11시56분 박관용 국회의장이 그 결과를 발표했다. “195표 중 가 193표, 부 2표로 헌법 제65조 2항에 의해 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음을 선언합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이 의결되는 순간이었다. 정 의장은 이날 통한의 심정으로 두 번 애국가를 불렀다. 김근태(金槿泰) 원내대표 등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함께 투표결과 발표 직전 한 번, 그리고 투표결과가 발표되고 한바탕 거대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폐허처럼 변해버린 본회의장 안에서 쓸쓸히 또 한 번.

    지난 1월11일 전당대회에서 열린우리당 의장으로 선출된 지 이제 2개월 남짓. 그 짧은 기간 동안 노 대통령 측근의 불법자금이 창당자금으로 사용된 사실이 드러나 당사 이전을 강행해야 했고, 급기야 대통령 탄핵사태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정 의장의 심경은 어땠을까.

    “온 몸이 너무 무거워요”



    3월14일 오후 3시25분, 서울발 전주행 새마을호 기차 안에서 기자는 단독으로 정 의장을 만났다. ‘신동아’는 정 의장을 비롯,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 민주당 조순형 대표 등 여야 3당 대표 모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고, 정 의장만이 어렵사리 시간을 허락했다.

    -무척 피곤해 보이시네요.

    “뭔가 둔기 같은 걸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큰 충돌사고를 당한 후 멍한 그런 느낌입니다. 몸도, 마음도, 머리도… 온 몸이 너무 무거워요.”

    -마음을 추슬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탄핵 의결) 다음날 아침에 비상대책회의를 갖고 동작동 국립묘지를 들러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 갔어요. 그곳에서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아마 모든 참석자들에게 잊지 못할 순간이었을 겁니다. 애국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고요. 그 자리에서 임시정부 기념관 하나 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반성하고, 우리 손으로 꼭 짓기로 약속했습니다.”

    탄핵안 의결 이후 전국적으로 대규모 탄핵규탄집회가 봇물 터지듯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여의도에 이어 광화문에서 연일 수만 명이 운집해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정 의장은 이런 국민들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제 느낌인데요, 그동안 한국의 민주주의가 한참 진행됐고 이제 성숙단계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의식이라든지, 제도적 측면이라든지, 정치발전 단계에서 민주주의의 공고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는 반역사적인 행위가 이뤄진 겁니다. 대한민국 시계가 20~30년 전으로 거꾸로 돌아간 거죠. 여기서 나오는 어이없음, 분노 등이 표출되고 있다고 봅니다.

    1991년 걸프전이 TV를 통해 리얼타임으로 지구촌에 생중계된 최초의 전쟁이었다면, 이번 탄핵은 생중계로 진행된 최초의 의회쿠데타입니다. 세계사적 사건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온 국민이 낱낱이 지켜봤다고요. 매체를 통해 전달받은 것이 아니라 (탄핵에) 찬성하는 사람이든, 반대하는 사람이든 모든 국민들이 현장 안에 들어와 있었던 거죠. 그것이 주는 충격파는 다른 어떤 사건과도 비견할 수 없는 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것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고 침묵할 수 없는 국민의 정치의식, 또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 그것에 상처받은 것, 이런 부분들이 자연발생적으로 터져나오고 있다고 봅니다.”

    -박관용 의장이 탄핵안 처리를 강행할 때 눈물을 흘리며 고함을 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는데, 당시 심경은 어땠나요.

    “무력감이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내가 바로 그 현장에 서 있는데, 저지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었잖아요. 어찌 보면 참담함이죠. 소리치는 것 이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으니…. 그리고 죄스러움, 이걸 목격하고 있는 데도 이걸 방치 방조한 굴욕감, 뭐 그런 거죠.”

    -탄핵안이 처리될 거라고 예상했었나요.

    “완벽한 시나리오와 완벽한 조직력으로 밀어붙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180명을 채우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봤거든요. 그 전날과 그 전전날 야당의 페인트(속임수)에 말린 거예요. 그들이 못 채웠거든. 한나라당 의원총회에는 120명 정도밖에 안 왔고, 민주당도 20~40명 선에 그쳤고, 야당 내부에서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자민련까지 가세하면서 개헌선을 훨씬 넘어선 거죠. 아마 내각제를 고리로 JP(김종필 총재)를 건 것 같습니다. 그 점에서 상대방의 전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측면이 있어요.”

    -한나라당과 민주당, 두 당의 이해관계가 다르겠지만, 야당이 국민적 반발을 예상하면서까지 탄핵안을 강행처리한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민주당이 먼저 시도했고, 완성한 건 한나라당이에요. 한나라당은 총선에서 패배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고, 민주당은 절망감 때문에 이런 무리수를 둔 겁니다. 당의장이 되고 선거를 준비해 가면서 그렇게 느꼈어요. 전당대회 이후 열린우리당에 대한 여론의 지지도가 급상승하기 시작했잖아요. 의석은 16%밖에 안 되는데 지지율은 한나라당이나 민주당과 비교할 때 3(우리당) : 2(한나라당) : 1(민주당)이었다고요. 그런데 자민련까지 합쳐서 84%나 되는 의석을 갖고 있는 야당이 ‘그냥 물러갈 사람들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좀 불안해지더라고요.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들은 5·16 쿠데타 이후 44년간 주류였어요. 우리는 기득권 세력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주류라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순순히 4·15 총선에서 민의의 심판을 받고 퇴장하거나 주류세력의 자리로부터 물러서지는 않을 것 같았어요. 그들의 뿌리는 수구냉전입니다. 기본적으로 지역주의 정당 아닙니까. 몸으로 지역주의를 넘으려는 시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이죠. 수구냉전, 지역주의 기생, 차떼기 등 부패행위 세력의 연합체인데 이 사람들이 순순히 퇴각한다? 그러지 않으리라고 봤어요. 결국 탄핵이라는 역사적 반역행위를 한거죠.”

    -최근 전국적인 탄핵철회 집회가 계속되면서 위기감을 느낀 야당은 국면 전환을 위한 여러 가지 카드를 내놓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헌론과 총선일정 연기론, 총선 보이콧 가능성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배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탄핵을 밀어붙여서 판을 뒤집고자 했는데 역풍이 분 것 아닙니까. 그럼 여기서 다시 또 살길을 모색할 텐데, 반드시 악수가 나올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 시민들의 탄핵규탄 시위가 이어지는 분위기에서는 총선을 순조롭게 치르기 어렵기 때문에 총선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 분명히 이렇게 나올 겁니다. 그래서 오늘 오후에 전 지구당에 ‘가족 단위 또는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는 것은 좋으나 당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 노란 점퍼 입고 시위장에 가지 말라, 시위를 선도하지 말라,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어요. 자칫 흐름이 왜곡돼 전달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또 시민들에게도 자제를 촉구했습니다. 선거연기의 빌미를 주면 안 되거든요.

    총선연기는 박관용 의장이 방망이를 두드리면 그걸로 되는 거예요. 그럴 때는 들어가서 막겠습니다. 지금 우리당 의원들의 의원직 사퇴서를 원내대표가 쥐고 있어요. 박 의장에 맡기면 금방 수리해버릴 것 아니겠어요. 그럼 무장해제되는 거죠. 1단계는 빌미를 주지 않는 것이고, 2단계는 만일 그렇게 나오면 응징해야죠, 저지해야죠. 반드시 나올 겁니다. 다만 개헌론은 크게 우려하지 않습니다. 국회에선 통과될지 모르겠지만 국민투표라는 장치가 있잖아요. 턱없는 일이죠.”

    -지금 상황에서 야당이 개헌이나 총선일정 연기를 주장한다면 어떤 상황이 전개될 것 같습니까.

    “상식적으로 보면 더 큰 역풍에 직면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하도 상식을 뛰어넘는 사람들이라. 상식이 있다면 탄핵했겠습니까, 탄핵을 발의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발의할 때 설마했었습니다. 그 점에서는 저희가 실책을 한 거지만.”

    총선은 재신임 연계 아닌 해소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 다음날 한 일간지에 정동영 의장과 노 대통령의 전화통화 내용이 보도됐다. 정 의장이 3월9일 오후 9시30분께 전화통화에서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과 관련해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는 것.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과하면 하는 대로 (야당은) 분명히 사과의 수위를 갖고 문제를 삼을 것입니다. 야당은 분명히 탄핵하려 할 것이고,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사과요구는 걸지도 않았을 겁니다”라는 게 요지였다고 한다.

    “전화야 수시로 할 수 있는 거죠. 당시 열린우리당의 주된 의견은 ‘야당이 요구하는 사과는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됐든 국민들께 불안과 걱정을 끼친 점에 대해서는 국민 앞에 죄송하다고 사과하되, 야당의 요구에 대해서는 부당하다는 식으로 분리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2일 아침에 이병완 홍보수석을 통해서 대통령의 국민에 대한 사과발언이 나온 거죠.”

    -노 대통령이 하루만 빨리 사과했으면 이런 파국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야당이 그렇게 말하죠. 국민들이 걱정하고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최고책임자로서 유감을 표하고 사과하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야당이 정략적으로 대통령을 굴복시키려 하는 것은 옳지 않죠. 여기서 두 가지 문제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중앙선관위가 일개 지도과장 명의로 대통령께 공문을 보냈는데, 그게 우리 상식에 맞는 일입니까. 대통령도 헌법기관이고 중앙선관위도 헌법기관입니다. 중앙선관위는 스스로 격을 허물어뜨린 것이라고 봅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 설명을 못 들었어요. 또 공문에는 ‘선거법 위반은 아니다. 그러나 제9조 공무원의 중립의무 규정을 준수해주시기 바란다’고 돼 있습니다. 그건 권고거든요. 그걸 가지고 야당이 ‘사과해라, 그럼 봐주마’ 하는 것은 굴복하라는 것인데, 그런 발상자체가 반민주적이죠. 권위적이고 반의회적인 것입니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 “야당, 총선연기론 분명히 들고나올 것”

    정동영 의장이 서울발 전주행 새마을호 기차 식당칸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대우건설 남상국 전 사장의 죽음이 노 대통령의 지나친 발언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이 많습니다.

    “안타까운 일이고, 죄송스럽죠.”

    -탄핵 하루 전날, 정 의장께서 최 대표에게 대화를 제안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좀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까요.

    “긴장상황이 계속됐어요. 최악의 시점은 투신, 분신 이런 상황이 발생한 11일 오후였습니다. 제가 이재오 의원을 찾아갔어요. 이 의원과는 대학시절 동아리활동을 할 때부터 알았습니다. 저보다 한참 선배신데 한 30년 됐죠. 여야로 갈려 있지만 인간적으로는 좋아합니다. (이 의원에게) ‘전쟁중에도 적군과 대화한다. 지도자라면 무한책임 의식을 느껴야 한다. 노 대통령, 최 대표 만나자. 지금 상황이 너무 엄중하지 않느냐. 내가 주선해보겠다. 둘의 만남은 어떤 형식, 어떤 틀이어도 좋다. 밤 12시라도, 심야회동도 좋다. 국민들이 좋아하지 않겠느냐. 이 위기국면을 정치지도자들끼리 풀어내는 모습에서 지도력에 대한 신뢰가 생길 것이다. 식물대표로 전락한 최 대표도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어요. 이 의원이 ‘뭘 갖고 만나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만날 수 있는 알맹이가 있다. 첫째 야당이 진정으로 원하는 핵심이 뭐냐, 대통령의 공정한 선거관리 아니냐, 그 다음으로 지금 야당이 탄핵사유가 추가됐다고 말하는 핵심은 총선에 재신임을 연계하겠다는 것 아니냐, 이건 사실관계가 다르다. 기자가 연계하는 거냐고 물었고 대통령은 연계가 아니다, 재신임을 묻겠다는 말에 대한 해소다, 연계와 해소는 다르다고 답한 것이다’고 했어요. 대통령은 해소라고 두 번씩이나 말했거든요.”

    새벽회동이라도 합시다

    정 의장의 얼굴에는 당시 상황이 떠오르는 듯 긴장과 허탈감이 교차했다.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정 의장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내가 (이 의원에게) 말하기를 ‘연계와 해소는 같지 않다. 재신임 연계는 선거과정에 개입해서 심판을 받겠다는 것이고, 해소라는 것은 그 결과만을 놓고 대통령이 약속한 재신임을,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미다. 연계는 과정이고 해소는 결과인데, 그 사이에는 많은 간격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해법이 있는 것이다. 야당이 원하는 것은 공정한 선거관리와 중립 아니냐, 그걸 담보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 내일 모레가 선거인데’ 그랬더니 일리가 있다 이거야. 그러면서 최 대표에게 전하겠다며 갔어요. 조금 있다가 김영춘 비서실장이 이재오 의원을 만나고 왔는데 최 대표의 첫 번째 반응은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탄핵을 조순형 대표와 같이 추진해왔는데 상의해봐야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 후로는 아무런 답이 없는 거요. 김 실장이 그날 자정까지 계속 전화하고 찾아다니고 그랬어요.

    그 다음날 새벽 4시에 쳐들어왔잖아요. 기습이었죠. 발칵 뒤집혔어요. ‘아! 이제 강공이구나, 해치우려나 보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6시10분에 최 대표를 만났어요. 본회의장 근처에 별실이 하나 있어요. 20분쯤 대화를 했죠. 거의 마지막 순간이었는데, (최 대표에게) ‘밀어붙이실 모양인데 이건 재앙입니다. 국가적 재난이요’라고 따졌더니 최 대표는 ‘그렇지 않다. 내일 아침부터 고건 체제로 간다. 그러면 더 안정적으로 될 것이다. 고건 체제로 선거 치르면 된다’며 오히려 강변하더군요. 그래서 ‘만납시다. 시간은 지났지만 (노 대통령과) 새벽회동이라도 합시다’고 제안했죠. 최 대표는 ‘늦었다’며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더라고요. ‘당신이 여당 대표로서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사과하도록 했어야지. 역할을 못한 것 아니냐’. 그래서 공방을 벌였지요. ‘좋다. 국민에게는 사과할 수 있지만 야당에게 굴복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리고 탄핵 처리가 (무산)되면 사과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따졌죠. 공방은 평행선을 그었는데, 그때 최 대표는 득의만면했어요. ‘너희들은 끝났어’라는 표정이었죠. 절망적이었어요. 아침 7시 CBS 라디오 뉴스레이다에 절규하다시피 호소했어요. ‘국민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의원들에게) 전화를 해주십시오. 그래야 국가적 재난을 피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 사람들이 밀어붙이려고 하는데 그러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아십니까’ 하고. 그러고 나서 김우식 비서실장에게도 전화하고, 대통령께도 전화했죠. 상황이 이렇습니다.”

    -그래서 대국민 사과문이 나오게 된 거군요. 그때 노 대통령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밤새 잠을 못 주무셨다고 그러더라고요. 전국적으로 격앙돼 있는 분위기니까, 입장표명을 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상황을 멈출 수가 없었죠. 자민련까지 그렇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JP는 탄핵에 반대했잖아요. 그런데 내각제를 고리로 끌어간 거죠. 오늘 3당 대표회담에서 개헌 안 한다고 하니까, JP 총재가 ‘속았구’나 하고 상당히 당혹해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죠. 또 무슨 논리와 명분을 내세울지.”

    -박 의장이 탄핵의결을 선포한 직후 ‘자업자득이다. 대한민국은 계속 전진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탄핵을) 대한민국이 전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어디 있습니까. 박 의장의 역사의식이 부재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퇴장하는 정치인인데 마지막을 그렇게 추하게 장식할 수 있습니까. 아주 불행한 국회의장이 된 것입니다. 자업자득이라니, 이건 의장으로서 품위에도 안 맞고, 품격을 스스로 떨어뜨린 겁니다. 아마 과거 국회의장 중에 최악의 국회의장이 몇 있었죠. 백두진, 이효상… 이런 분들의 반열에 올라간 겁니다.”

    박관용은 최악의 국회의장

    -민노당은 양비론을 펴고 있습니다. “차떼기 정국을 만회하려는 한나라당과 날로 떨어져가는 지지율을 회복하려는 민주당, 그리고 탄핵을 빌미로 총선과 재신임을 연계, 극한 대결을 유도하고 신중하지 못한 발언을 일삼는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인데요.

    “가장 무책임한 주장이 양비론이죠. 양비론은 기본적으로 물타기거든요.”

    -이제 헌재의 탄핵심판 결과가 관건인데요, 언제쯤 어떤 결과를 내놓을 것으로 기대하고 계십니까.

    “오늘 경제 5단체장을 만났어요. 전원이 ‘이 사태를 빨리 끝내야 한다. 그러려면 헌재가 신속하게 결정해야 된다’고 말합디다. 경제주체 입장에서 늦춰지면 늦춰질수록 실이 된다는 판단 아니겠습니까. 헌재도 그런 목소리를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겁니다. 헌재도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존재하는 거죠. 헌재가 스스로 국익을 해치면 두고두고 원망을 들을 겁니다.”

    -총선 전에 결론을 내리면 총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수도 있는데요.

    “그건 정치적인 판단이고, 그것보다는 국익이 우선이지요. 신속한 판단이 국익에 합치된다고 하면 아무리 헌재라도 신속히 해야 되는 거죠. 지금 야당이 국가안정을 위해 적극 협력하겠다고 말하잖아요. 우리는 그 기만성을 폭로하려 합니다. 방화범이 ‘불이야’ 하는 꼴이죠. 애들이 성냥 가지고 장난치다가 집이 다 타버린 셈입니다. ‘불조심하자’? 그건 위선이죠. 그런데 관례상 매주 목요일 만나기 때문에 첫 회의를 목요일에 하겠다고 헌재가 말한 것에 대해선 대단히 실망했어요. 헌재의 관례가 그렇다? 이분들은 국민들의 걱정이나 국익은 그 밑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대단히 실망스럽습니다. 국가 비상상황에서, 금요일에 탄핵이 가결됐는데 1주일 후에나 첫 회의를 갖는다니…. 정말로 목요일까지 시간을 끌면 아마 욕먹을 겁니다.”

    영등포 당사는 1당 될 자리

    차창 밖을 보니 기차는 벌써 조치원을 지나고 있었다. 정 의장과 약속한 인터뷰 시간은 서울역에서 서대전역까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당내 일각에서는 지금과 같은 탄핵정국 상황에서 노 대통령의 입당 여부는 더이상 중요치 않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탄핵의 충격이 너무 커서 아직은 입당문제에 대해 생각을 못했습니다. 좀더 시간을 갖고 논의를 해보겠습니다.”

    -정 의장께서는 총선 전 노 대통령의 입당을 반대하지 않았었나요.

    “그런 적 없어요. 비상상황인 지금, 선거니 총선이니, 입당이니 하는 것은 일체 우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재신임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총선 전에 밝히겠다고 한 것은 총선 전 입당을 기정사실화한 것 아닌가요.

    “탄핵 쿠데타 이전과 이후, 정국을 그렇게 나눠서 봐야 해요. 탄핵 이후는 선대위가 어떻고, 선거전략이 어떻고, 총선이 어떻고, 입당이 어떻고 하는 것은 당장 국민적 관심사도, 우리의 관심사도 아닙니다. 탄핵쿠데타로 빚어진 헌정유린으로부터 헌정수호와 국정안정이라는 두 개의 축에 집중하는 게 가장 중요한 거죠. (입당문제는) 1~2주일 정도 지나서 이런 불확실성이 해소되고 난 후에 논의를 할 겁니다. 지금은 말할 시기가 아닙니다.”

    -이번 총선은 열린우리당과 노 대통령의 향후 4년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아닙니까. 아무리 탄핵정국이라고 해도 대통령 입당시기와 총선 전략을 마냥 미룰 수는 없을 텐데요.

    “원래는 내일 깨끗한 선거대책위원회(깨선위) 발대식을 하기로 돼 있었는데, 그것도 연기해놓은 상태입니다. 선거와 관련된 논의는 모두 뒤로 미뤄놨습니다.”

    -최근 당사를 옮겼는데, 화장실에서 하늘이 보인다고 하더군요. ‘열린’ 우리당 화장실이라 그런가요.

    “30년 전에 지어진 청과물시장 농협공판장이었는데 두 달 전에 돈 벌어가지고 이사를 갔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나간 뒤에 불이 났대요. 불난 집이 부자가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 뒤에 우리 당 총무팀에서 풍수하는 분을 데리고 가서 물어보니 그 자리가 1당이 되는 자리라고 합디다. 우리 정당사에 한수 이남으로 당사가 옮겨간 것은 처음입니다. 전부 여의도와 마포였어요. 공교롭게 3·12쿠데타 다음날인 13일 아침에 영등포 시대를 연 거죠. 당사문제가 전화위복이 된 셈이에요. ‘국민과 함께 가는 것’ ‘국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우리의 컨셉트와 당사가 기가 막히게 잘 맞아떨어진 것이죠. 우리를 새롭게 각성시키고 재무장할 수 있는 기회도 줬고요. 당내 반대와 반발도 있었지만 밀어붙였는데, 제 생각이 맞았다고 봅니다.”

    탄핵정국은 민족정신과 양심의 위기

    -노 대통령의 재신임 문제를 떠나 현재로서 원내 1당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1당이 되고자 지역 구도를 포기한 것 아닙니까. 이번에 처음으로 정당투표제가 도입됐는데 분명히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심판할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서초동 어느 교회 목사의 말씀을 전해들었습니다. 성경 구절에 ‘누가 늙은 자인가’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목사가 이렇게 해석했다는 겁니다. ‘바로 서초동 동네가 늙은자들의 동네다. 늙은자라는 것은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귀가 어두워서 안 들리는 사람이다. 새 시대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과거를 움켜쥐고 개혁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민족의 미래와 희망을 버리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이다. 이런 자들이 늙은 자이다.’ 목사는 뒤이어 ‘나라의 위기 앞에 눈물 흘릴 줄 아는 자가 새 시대의 희망이다. 눈물이 없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다.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 회복, 양심 회복이다. 그래서 이 위기가 정치위기가 아닌 민족정신의 위기이자, 양심의 위기인 것이다’라는 설교를 하셨다고 합니다. 이번 총선은 양심 회복의 기회입니다.”

    -당분간 총선을 접고 국정과 민생안정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했는데요. 그렇다면 그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지금까지는 개혁세력이 주축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우향우입니다. 중간을 향해서 가는 거죠. 우리를 지지하는 20대, 30~40대와 좀더 개혁세력, 여기에 더해서 안정을 희구하는 중간층, 한나라당에 실망한 보수층도 받아들여야죠. ‘아, 열린우리당이 이 나라에 개혁독재를 하려는 세력이 아니라 안정감을 가지고 국가비전을 실현하려는 새로운 대안세력이구나’ 하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거죠. 우리의 이 진정성이 전달되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총선 전략으로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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