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각계 인사 9인 “난국, 이렇게 풀라”

  • 입력2004-03-26 14: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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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고된 파국’이자 ‘계산된 파장’이라 해도 탄핵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이번 탄핵정국은 4·15총선과 맞물리면서 사생결단의 대결구도가 될 가능성도 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며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각계 인사  9인 “난국, 이렇게 풀라”

    강영훈<br>전 국무총리

    2004년 3월12일은 대한민국 헌정사에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 법치국가에서 위법사실이 없는 날이 없겠지만, 그날의 통한은 법률해석 문제를 가지고 국가통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입법최고기관인 국회와 극한 투쟁을 벌인 데서 기인한다.

    극한투쟁의 조짐은 제16대 대통령선거 부정자금 출처에서부터 나타났다. 대통령과 야당은 선거 부정자금 근절을 위한 법제도 확립에 협조하는 대신, 대통령이 제기한 ‘10분의 1’을 놓고 정치공방에 더 바빴다. 결국 누가 더 나쁘냐를 증명하여, 누가 더 좋으냐를 결정짓는 감정싸움이 되고 말았다. 중간에서 타협 조정 역할을 하는 기관이나 인사도 없이 이성을 넘어 파국으로 이어진 셈이다.

    이 와중에 선관위가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에 대한 야당의 견해를 인정한 시점부터 대통령 탄핵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 감정은 위대한 힘이 될 수 있지만 방향을 그르칠 때는 모든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던가.

    이와 같은 국가 비상시국에 우리는 냉정을 되찾아 민주주의 법치국가의 국민다운 자세를 보여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심의처리과정을 주시하며 침착하게 왜 이런 불행한 일이 발생했는지 깊이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이런 불행을 반복하지 않을 것인가 숙고해야 한다. 대통령을 위시하여 모든 정치인들이 하루 빨리 정도로 돌아가도록 촉구·격려하는 일은 민주시민으로서 의무라 할 것이다.

    오늘의 격앙된 정국의 배후에는 과거 40년의 산업화 민주화 과정에서 뿌리박힌 우리의 정치문화가 있다. 헌법학의 석학인 김철수 박사는 저서 ‘한국헌법사’에서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에서부터 제4공화국 헌법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기본권이 제한되어 왔으며 국가권력에 대한 견제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음을 지적했다. 그와 같은 국민의 기본권이 헌법에 충분히 반영된 것은 1980년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부터였다.



    이 시기에 국정일반에서 산업화·민주화가 진행됐다. 정치도 형식상 정당정치의 모습을 띠었지만 실상은 여야를 막론하고 정책중심이 아닌 보스중심의 운영으로, 정당 간 관계는 정책이견(政策異見)이 대화와 타협으로 조율되기보다 흑백논리로 전부(全部)냐 전무(全無)냐의 비타협적인 정치 분위기를 조장해 왔다.

    그와 같은 분위기에서 대통령 탄핵사건이 발생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정경유착으로 비리·부패가 만연하여 집권세력에 대한 일반대중의 반항심이 커진 상태인데다, 자유민주주의 국시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면서 불만이 쌓인 대중은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를 ‘보수반동’이라 비판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자유민주주의 국시 수호를 부르짖는 측에서는 좌파 비판세력을 용공이라 몰아세워, 좌우 정치세력의 상호불상용(相互不相容) 관계가 오늘의 불행을 초래했다.

    그러나 국민은 자유냐 평등이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이루는 민주사회 번영을 갈망하고 있다. 불법 폭력사태를 피하고 국민 모두가 공존 공영하기 위해서는 자유와 평등의 정치원리에 따른 조화로운 발전이 필요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에 따라 자유민주주의 정치원리를 존중하는 야당이라면 먼저 정경유착으로 조장된 부정부패를 정화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또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며 개혁 또는 혁명을 주장하는 여당은 파퓰리즘이라는 애매한 정치구호 대신, 당당하게 사회민주주의 정당 간판을 내걸라. 영국정치에서 보았듯이 여야가 민주주의 기반 위에 중도 우파, 중도 좌파로서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이루는 정치를 펼쳐주기를 갈망한다.

    각계 인사  9인 “난국, 이렇게 풀라”

    남시욱<br>언론인·세종대 석좌교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로 빚어진 여야대립이 날이 갈수록 심각한 국민분열 사태로 번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을 둘러싸고 노무현 지지세력과 반대세력 간에 8·15해방 직후를 방불케 하는 대립이 빚어질까 걱정이다. 뿐만 아니라 4·15총선이 탄핵과 맞물려 사생결단식 대결로 번질 가능성도 엿보여 적잖은 우려감을 자아낸다.

    이러한 국민분열 사태를 막는 길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탄핵소추에 관해 누구든 찬반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국회의 이번 탄핵소추 가결은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 정부감독권한 테두리 안에서 행해진 것이다. 이를 두고 “국회의 쿠데타”라느니,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어찌 국회가 내쫓으려하느냐”는 식의 선동적 구호는 대의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며 국민을 오도한다.

    따지고 보면 이번 탄핵소추는 노 대통령이 4·15총선에 관한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하고 앞으로 선거에 간여하지 않겠다고 다짐만 했더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참으로 허망한 사건이다.

    그런 허망한 일이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탄핵 소추로 이어진 점, 그리고 탄핵소추 주동세력이 바로 노 대통령의 친정인 민주당이라는 점은 헌재의 심판 결과와 관계없이 그로서는 대단한 정치적 마이너스가 아닐 수 없다. 탄핵 사유가 된 선거 관련 문제는 직접적인 계기일 뿐,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지난 1년간 노 대통령의 국정수행 방식과 경솔한 언행에 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탄핵 반대시위는 민주사회에서 허용되는 의사표현의 범위를 넘어 헌재의 심판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일부 시민단체에서 공언하듯 헌재에서 탄핵 기각결정이 내릴 때까지 시위를 계속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다중의 힘을 빌린 압력행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중학교 2학년생이 같은 동호회 회원으로부터 이메일을 받고 탄핵소추 규탄 광화문 촛불시위에 참가한 것은, 2002년 미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 때의 촛불시위를 재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탄핵소추의 당사자인 노 대통령은 국회의 탄핵결의 직후 “법적 판단과 국민 판단이 남아 있는데 두 판단에 기대를 걸고 그 결과를 겸허하게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국민 판단’에 기대 걸겠다는 그의 자세는 탄핵반대 시위의 격화를 유발할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런데 문제는 노무현 지지세력의 시위가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점이다. 반(反)노세력도 시위를 벌여 노 대통령의 하야운동을 조직적으로 확산시킬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두 세력간의 대립이 국론을 양분시키고 폭력사태를 부를 우려마저 없지 않다.

    또 하나 걱정되는 점은 친정부적 언론매체의 노골적인 편파보도다. 이들의 보도태도는 단순한 편향보도 차원을 넘어 탄핵소추 반대를 감정적으로 선동하고, 나아가 헌재의 심판에 압력을 가하려는 캠페인으로 보인다. 더욱 기막힌 사실은 한국인터넷기자협회가 탄핵소추 가결 직후 이를 ‘쿠데타’라고 규정한 성명을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이 성명은 “탄핵소추결의는 총성 없는 반민주 수구야당의 쿠데타이며, 노 대통령을 선출한 국민에 대한 사형선고”라고 주장하면서 “인터넷 대안 언론인들은 오늘 단행된 수구야당의 국민에 대한 쿠데타를 하나도 빠짐없이 역사에 기록하고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심판을 돕는 일로 대안언론의 소임을 다해 나갈 것을 선언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총선에 대해 편파보도를 하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된다.

    헌재의 탄핵 심판은 한국 민주주의의 중대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헌재 재판관들이 오로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소신껏 재판하는 데 방해가 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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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거일<br>소설가

    탄핵소추는 느닷없이 왔다. 아무도, 심지어는 탄핵소추를 추진한 국회의원까지도,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너무나 중대한 일이라, 그것은 누구에게도 마지막까지 고민되는 일이다. 야당 지도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대통령이 사과하면 탄핵소추를 거두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다. 노 대통령이 텔레비전 앞에 나서 믿기 어려울 만큼 무디어진 정치 감각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탄핵소추안은 실제로 그리 큰 운동량을 지니지 못했다.

    그래서 일반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인들도 심리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채 탄핵소추를 맞았다. 당사자인 노 대통령도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당연히 국민들은 큰 심리적 충격과 혼란을 겪었다. 게다가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받은 예가 전혀 없어, 이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데 참고할 만한 원칙도 없고 자료도 적다.

    이제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은 앞으로 불거질 실제적 문제들에 대한 합리적 대책을 효율적으로 찾아내려 애써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국민들은 감정과 의견을 거칠게 드러내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 느닷없는 탄핵소추 사태를 맞아감정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조직적 집회와 시위를 통해 극단적 감정과 의견을 거칠게 드러내는 일은 얘기가 다르다. 이 점과 관련해 일부 언론매체들이 드러내놓고 편파적 보도로 국민들의 감정을 부추기는 행태가 걱정스럽다.

    탄핵은 권력을 실제로 행사하는 고위 공무원에 대한 견제장치다. 탄핵은 엄청난 권력을 휘두를 뿐 아니라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하는’ 대통령에 대해선 특히 큰 뜻을 지녔다. 따라서 탄핵을 실질적으로 ‘죽은’ 제도로 여기거나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를 ‘헌정 중단’이라 부르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요구하므로 남용의 위험도 아주 작다.

    그리고 이번 탄핵소추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내린 노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판단에 근거해 적법한 절차를 밟아 처리됐다. 아울러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에 관한 사항들을 모두 심판할 터이다. 따라서 국민들이 이번 탄핵소추를 거칠게 비난할 근거는 없다. 열린우리당의 지도자들이 탄핵소추를 ‘쿠데타’라고 부르는 일 또한 정당화될 수 없다. 거듭 강조돼야 할 것은 탄핵소추에 대한 심정적 반응이 무엇이든, 노 대통령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국민들은 국회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탄핵을 즐기는 사람은 없을 터이다. 그것은 아주 거추장스럽고, 분열적이고, 비용이 많이 든다. 그래서 비교적 탄핵이 흔하게 일어나는 미국에선 실제적 해결책이 나왔다. 탄핵안이 가결되어 조사 받게 된 공무원들은 대개 사직하고, 탄핵절차는 사직으로 인해 종결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가결될 경우에 그러한 해결책은 비현실적이고 바람직하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그러한 해결책을 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탄핵소추 자체를 비난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당장 중요한 것은 물론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외부의 영향력으로부터 되도록 자유로운 상태에서 심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재 재판관들에게 어떠한 주문도, 선거 전에 판결을 내려달라는 주문까지도 억제돼야 한다.

    이번 탄핵소추는 우리 사회의 불확실성을 더욱 키웠다. 그래서 지금 국민들이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은 사회 분위기를 정상에 가깝게 만들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새 내각은 책임감 있는 국민들이 이 덕목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각계 인사  9인 “난국, 이렇게 풀라”

    전상인<br>한림대 교수·사회학

    탄핵 이후 한국 정치는 위험수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다. 한 편의 영화이고 말면 좋으련만, 국민은 관객이 아니라 볼모에 더 가깝다. 어떤 의미에서 작금의 위기는 4·19나 10·26을 능가할 수도 있다. 대통령 하야나 시해처럼 예상치 못한 헌정 공백이 갑자기 발생할 경우, 그것을 메우기 위한 정치적 및 국민적 노력도 이에 걸맞게 비상하게 작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과 같은 대통령 탄핵의 경우 그것은 ‘예고된 파국’이자 ‘계산된 파장’이라는 점에서 사태 해결을 위한 의지와 단초가 정치권 안에서는 대단히 부족해 보인다.

    국민들도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마음과 정성을 한데 모으기보다는 차제에 오히려 분열과 대립을 심화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번 사태는 지금까지의 제반 갈등구조를 정치적 이슈로 집결시키면서 우리 사회를 과잉 정치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청와대와 국회, 국회와 국민,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신문과 방송 등의 관계가 ‘협조적 공존’과는 정반대 방향인 ‘적대적 대립’으로 일제히 돌아서고 말았다. 특히 불안하고 불길한 요소는 정치구조가 지나치게 의인화(擬人化)되고 있다는 점이다. 온 세상이 송두리째 친노(親盧) 대 반노(反盧)의 전쟁터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한국정치는 제도와 법률의 틀을 벗어나 특정한 인물을 매개로 하는 전근대적 동원정치로 퇴보하는 인상마저 준다.

    싫든 좋든 바로 이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자 주어진 실제 상황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시계가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우리는 그래도 역시 정치란 ‘가능성의 예술’이라는 믿음으로부터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고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정치의 세계에서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관객이 보는 패자가 사실은 무대 뒤에서는 웃고 있을 수도 있어서, 역전에 역전을 한없이 거듭하는 것이 실물정치의 특징이다.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는 것이 정치현장인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는 항상 새로 시작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그러므로 탄핵 정국이 남긴 정치적 잔해를 수습하고 다시 일어서는 주체는 그래도 정치권밖에 없다. 또한 그것은 어디까지나 법치주의와 제도적 절차를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정치가 정치권 바깥으로 밀려나거나 국내정치가 국제적 개입의 대상이 되는 일만은 다함께 피해야 한다. 정치부재나 정치실종의 상황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정치권에 대한 국민적 신뢰다. 지금 정치권에 필요한 것은 이번 탄핵 사태에 대한 잘잘못을 가리기보다 앞으로의 교훈을 도출하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정도의 차이나 순서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정파와 정치인들이 국민 앞에 유죄가 아닌가.

    먼저 야당들은 대통령 탄핵결과에 대한 여론이 일단은 매우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 탄핵은 물론 일차적으로 법률적·정치적 판단의 대상이지만 국민적 정서도 충분히 고려했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노무현 대통령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의 민심은 노 대통령이 범한 죄에 대해 벌이 과하다는 것일 뿐, 있는 그대로의 그를 인정하고 수용하겠다는 뜻은 결코 아닌 것이다.

    노대통령이나 여당이 탄핵 직후 여론으로부터 마치 면죄부라도 받은 양 착각한다면 그것은 국민을 ‘두 번 죽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헌재(憲裁) 판단과 상관없이 또한 총선 결과와도 무관하게 이번 탄핵 사태의 정치적 의미는 그 자체로서 평가돼야 한다.

    각계 인사  9인 “난국, 이렇게 풀라”

    정갑영<br>연세대 교수·경제학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가결은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당연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정책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지고 탄핵정국에 편승한 사회적 혼란과 집단 이기주의까지 가세한다면, 또 한번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우선 참여정부가 출범한 이후 지난 1년간을 생각해보자. 정책의 혼선과 불확실성으로 경기회복이 지연됐고 여야의 정쟁으로 민생 법안이 제때 처리된 적이 없다. 구조조정과 개혁정책도 정쟁을 일삼는 국회 때문에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사례가 많다. 경제는 중진국 수준으로 발전했지만, 정치는 아직도 1960~70년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기에 정치개혁이 급속히 이루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은가.

    왜 그렇게 정치만 후진적일까.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듯 정치인은 항상 정권쟁취만을 위해서 뛰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항상 국가적 이익보다는 자신의 표를 먼저 생각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정치권이 경제에 도움을 주며 국가를 위한 일념으로 활동한다고 믿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탄핵의 심리적 충격은 컸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경제는 안정을 되찾을 것이다. 실제로 탄핵 자체가 경제에 미치는 충격보다 탄핵 이후의 사회적 갈등과 혼란의 심화, 이념논쟁의 첨예화 등이 더 큰 부정적 영향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

    사회적 혼란만 나타나지 않는다면, 탄핵이 경제에 미치는 충격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탄핵이 경제의 구조적 특성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 경제가 선진화되려면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도 경제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내각제를 유지하고 있는 선진국들이 잦은 정권교체에도 경제적 번영을 이루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바로 경제를 정치로부터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운용하기 때문이다. 즉 경제문제를 정치논리로 푸는게 아니라, 정권에 관계없는 전문가가 시장논리로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현재 의장인 앨런 그린스펀은 1987년에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사람이다. 정권은 수차례 바뀌었지만, 교수출신의 그린스펀은 올해까지 17년 동안 FRB 의장으로서 미국경제는 물론 세계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로 건재하다. 그의 전임자인 폴 볼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써서 레이건 정부와 갈등이 많았다. 청문회에도 불려나가고, 레이건의 질책도 받았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미국의 제도가 보장해 준 자신의 권한으로 물가를 잘 관리하여 1990년대의 호황기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경제정책이 선진화되려면 먼저 정치권력이 갖고 있는 경제에 대한 ‘권력 프리미엄’을 대폭 축소시켜야 한다. 정부가 각종 사업에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경제에서는 자연스럽게 정치권력의 경제적 프리미엄이 커진다. 경제가 시장의 자율에 따라 움직이게 해야지, 정부가 개입하여 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 이런 여건에서는 경제정책이 정치의 종속변수로 전락하고 만다. 경제에 대한 각종 규제를 과감히 철폐해 경제를 정치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대통령보다 시장이 더 큰 힘을 갖게 해야 한다.

    둘째, 소수여당이 등장해도 일관된 정책을 실시할 수 있도록 정당간, 노사간 대협약이 필요하다. 사회가 다원화될수록 계층간 또는 이해집단간 갈등이 더 확대될 수밖에 없다. 일부 선진국과 같이 경제문제는 누가 정권을 잡아도 일관된 원칙을 적용하고, 시장논리로 정책을 집행할 수 있도록 초당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대통령과 여당은 포용력을 발휘하고 야당은 타협의 정치문화를 정착시켜서, 경제성장을 위한 공동의 목표를 상호협력 속에 추진할 수 있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각계 인사  9인 “난국, 이렇게 풀라”

    정태호<br>경희대 교수.법학, 전 헌재 헌법재판연구원

    야3당의 대통령 탄핵안 가결은 과연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야권은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측근비리 등으로 국정수행의 도덕적·법적 정당성 상실, 국민경제 파탄에 대한 책임을 탄핵소추 사유로 제시했다. 그러나 탄핵의 실질적 요건은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과 법률에 위배한 때(헌법 제65조 제1항)’로 명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탄핵제도는 대통령의 경제실정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적법한 수단이 될 수 없다. 또 탄핵 대상 공무원의 ‘자신의 현직’에서의 위법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헌법학계의 통설이다. 지금까지 노 대통령이 대통령 취임 이후 측근비리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없다. 또 앞으로 노 대통령이 불법 경선·대선자금 모금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재직 중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탄핵사유가 될 수 없다.

    결국 이번 탄핵소추의 핵심 쟁점은 대통령이 공무원의 선거중립 의무를 명시한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 제9조를 위반하였는지 여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사유를 중대한 위법행위가 있는 경우로 한정하는 것에 비하여 대통령이 선거중립 의무를 위반했는지 여부도 불확실하고, 설사 위반했다 하더라도 그 정도가 경미하다. 프랑스는 ‘대역죄’라는 명문의 규정을 통해, 미국과 독일은 단순위법행위가 아닌 중대한 위법행위라는 해석을 통해 탄핵사유를 제한하고 있다.

    한편 우리 헌법은 ‘비례의 원칙’에 따라 침해된 헌법질서 회복을 위한 대통령 탄핵의 필요성과 탄핵으로 인한 국정혼란의 위험, 이 둘을 비교해 전자가 후자를 능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모두가 대통령에 대한 탄핵사유를 ‘중대한 위법행위’로 한정하는 해석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기자회견석상의 발언은 선거법상 원칙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었다. 또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대통령에게 경고조치한 것인지, 아니면 권고조치한 것인지가 논란거리다.

    그밖에도 선거법 9조는 정당활동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정당 중심으로 정치가 이뤄지는 헌정 현실, 대통령 당적 보유를 허용하는 정당법과 충돌하고 있다. 대통령의 국정운영은 총선에 영향을 미치고, 또 총선결과는 대통령의 행보반경을 규정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통령에게 직원공무원과 같은 선거 중립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불합리를 넘어 불가능할 수 있다. 선거법을 통해 규제가 필요한 것은 유리한 선거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행정조직을 동원한 경우이지 대통령의 공개적인 정치적 발언, 국민에 대한 지지호소가 아니다. 그러므로 선거법 9조가 대통령에게 무조건적 중립을 요구, 정치인인 대통령의 손발을 묶어버린다면 선거법 9조는 위헌 소지가 있다. 헌재는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룰 것으로 본다.

    설혹 대통령의 기자회견석상 발언이 선거법 9조 위반이라 해도, 그것은 기자의 질문에 대통령이 자신의 희망을 밝힌 것에 불과하다. 행정조직을 동원하거나 국고를 빼돌려 선거자금으로 지원한 경우와 달리, 위반 정도나 의미가 정녕 중대하다고 할 수 있는가? ‘사과하지 않으면 탄핵하겠다’는 야당의 주장은 희극적이다.

    한편 노 대통령이 총선 결과와 재신임 문제를 결부시키는 것이 탄핵사유가 될 수 있을까? 헌법에 이에 관한 명문 규정이 없다는 것이 곧 연계선언의 위헌성을 뒷받침하지는 않는다. 헌법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규정해놓은 법전이 아니라, 공동체 질서의 요강만을 규정한 법이다.

    임기제는 임기동안 대통령직을 제3자의 찬탈로부터 보호해주고, 대통령의 권한을 시간적으로 제한함으로써 국민주권 공동화를 방지해주는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국민의 지지의사가 증발했을 경우 대통령이 임기 도중 스스로 하야하는 것이 임기제의 본질에 반한다고 볼 수 없다. 또 국정의 안정이란 대통령이 임기를 지킨다고 확보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이번 탄핵안이 분명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번 탄핵안은 법적 근거가 전혀 없거나 희박한 정치공세로밖에 볼 수 없다. 탄핵안 가결 이후 야권이 크게 당황할 정도로 국민적 역풍이 부는 이유는 대통령에 비해 도덕성이 우월하지 못한 야당 의원들이 최후의 수단을 너무 가볍게, 너무 정략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각계 인사  9인 “난국, 이렇게 풀라”

    함인희<br>이화여대 교수·사회학

    노무현 대통령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이보다 더 드라마틱할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를 연출했던 것이 엊그제 같다. 그런데 이번 탄핵정국은 ‘전편’보다 더 극적인 후편 방영을 시작한 게 아닌가 싶다.

    일찍이 미국의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우리 모두는 세상사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대로 세상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했다. 헌정 사상 초유의 사건이라 할 만한 대통령 탄핵안 가결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원인과 의미, 해법을 논하는데 10인 10색의 목소리가 나올 것은 분명하다. 실은 각양각색의 의견 속에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간극이 드러나고, 이 간극들의 충돌 속에서 우리 사회의 아킬레스건이 작동한다.

    이번 탄핵정국은 열린우리당의 ‘올인 전략’을 떠나서는 생각하기 어려울 것 같다. 처음 ‘올인 전략’이 등장했을 때 공전의 히트를 치고 막을 내린 TV드라마 ‘올인’의 애절한 이미지 위로 ‘정치판=도박판’이라는 등식이 오버랩됐던 기억이 난다.

    더불어 ‘꾼’들이 날고 기는 도박판에 신참내기가 뛰어들 경우 초반에 오히려 고수들이 고전을 하듯, 노 대통령이 던지는 패를 놓고 정치권 ‘프로’들이 그 진의를 파악하고 파장을 고려하면서 대책을 마련하는데 갈팡질팡하는 형국을 보면서 ‘올인’이라는 수사의 절묘함에 내심 감탄했던 적도 있다.

    4·15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은 문자 그대로 ‘사활은 건 투쟁’에 돌입했다. 헌데 적어도 명분으로나마 중립을 지켜야 할 대통령이 ‘올인 전략’의 주역을 자처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 아닌가. 야당 입장에선 ‘이번에 밀리면 끝장’이라는 절박한 위기의식을 아니 느낄 도리가 없었을 법. 결국 정치권 내부의 권력갈등이 고조되면서 처음부터 의도했던 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초강수를 두고만 셈이 됐다.

    문제는 정치권 세력다툼이 경제생활 안정과 국민정서의 ‘웰빙’을 볼모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들어 전세계 경제가 바닥을 치며 호황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는 낙관적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유독 한국경제만 이러한 경제흐름에서 역행하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려온다. 이 안타까운 현상은 바로 정치권의 후진성이 소득 2만달러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발목을 쥐고 있는 탓이라는 진단은 늘 사족처럼 따라온다.

    설상가상으로 호시탐탐 분출기회를 노리던 다양한 갈등이 ‘친노’ 및 ‘반노’의 깃발 아래 속속 집결하고 있음도 우려된다. 이렇게 되면 대통령 탄핵안 찬반 논쟁 차원을 훌쩍 넘어 사회 전체가 세대전쟁, 이념투쟁, 지역대결, 계급갈등 등으로 점철된 혼란 속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혼돈 속에서, 그 뿌리가 어디서 왔는지 차치하고라도, 우리 사회의 취약함, 미성숙함, 그리고 불합리함이 가감 없이 표출되리란 것 또한 쉽게 상상이 간다. ‘법 말고 주먹은 가까운’ 다혈증, ‘호미로 막을 것 가래로 막는’ 무모함, ‘도 아니면 모’라는 식의 극단적 이분법,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편가름증, 그리고 여전히 ‘소 잃고도 외양간 고치지 않는’ 망각증이 되풀이될 것 아니겠는가.

    당장 탄핵정국을 현명하게 풀어갈 열쇠를 찾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장기적으로는 사회 각 부문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별 영향을 받지 않는’ 공정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더불어 이전투구식 정쟁을 협상과 조정의 장(場)으로 순화시키는 정치문화의 업그레이드 작업을 실현하는 일, 나아가 성숙한 시민사회를 향한 자정(自淨)능력을 끊임없이 키워나가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각계 인사  9인 “난국, 이렇게 풀라”

    홍성태<br>상지대 교수·사회학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국민적 반대에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켰다. 이 미증유의 사태를 맞이해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두 당이 불신임한 것은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 아니라, 6월항쟁 이후 어렵게 가꿔온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탄핵정국은 ‘친노-반노’의 정국이 아니라, ‘민주-반민주’의 정국이다.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라고 불린다. 이 나라의 최대 정당이 아니라 이 나라의 최대 부패당이요, 최대 정경유착당이라는 뜻이 이 불명예스러운 별명에 담겨 있다. 민주당도 명예를 따지기는 어려운 정당이다. 민주당은 국민경선을 통해 자당의 대통령 후보로 뽑힌 노무현을 후보자리에서 밀어내려고 했던, 반민주적인 배신의 전력을 가지고 있다.

    두 당이 힘을 모으면 대통령도 몰아낼 수 있다. 그만큼 막강하다. 대통령 위에 두 당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이처럼 막강한 힘을 가진 두 당은 그 힘을 어떻게 썼는가?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썼는가, 아니면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썼는가? 그렇지 않다. 바로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잠시 16대 국회를 돌아보자. 민생을 외면하고 당리당략을 추구한 ‘식물국회’, 범죄자를 보호하기 위해 국회의원의 특권을 악용한 ‘방탄국회’, 범죄자를 출옥시키기 위해 국회의원의 특권을 악용한 ‘탈옥국회’,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쿠데타 국회’. 두 당은 막강한 권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 썼다.

    두 당의 탄핵안 가결 이후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 두 당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국정을 큰 혼란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탄핵요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두 당이 내건 탄핵요건은 두 당이 저지른 잘못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도 안 된다. 국민들은 ‘떼강도가 무단횡단한 사람에게 사형을 구형한 격’이라고 한탄한다.

    국민의 분노에 대한 두 당의 태도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두 당은 ‘언론보도가 편파적’이라고 우기면서 나쁜 여론을 언론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이처럼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언론이 연일 크게 보도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국민의 반대여론도 누구의 조작이 아니라 상식적 판단의 결과다. 두 당은 언론을 탓하면서 사실은 국민의 반대여론을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스스로 다수 국민의 여론을 무시했음을 시인한 셈이다.

    여론은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여론을 올바로 반영하는가를 기준으로 민주주의를 올바로 실천하는가를 따져볼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 탄핵은 내용과 과정이 모두 잘못됐기 때문에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당은 ‘잘못한 것이 없으며, 국민들이 잘못 알고 있다’고 우긴다. 이런 식으로 두 당은 여론을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반민주적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낸 꼴이 되었다.

    이른바 탄핵정국은 이 나라 정치의 후진성을 고스란히 보여준 역사적 사례가 됐다. 이 사태의 근본원인은 제대로 된 정당정치의 부재다. 한국의 정당은 정책이 아니라 지역주의와 정경유착에 뿌리내리고 있다. 탄핵정국의 근본 해법은 정당개혁을 핵심으로 하는 정치개혁에서 찾아야 한다. 4·15 총선은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단기적 해법은 헌법재판소가 한시바삐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국가 비상사태는 짧을수록 좋다. 헌재는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구제하고 수호하는 임무를 가능한 빠른 시간에 수행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국민과 역사가 헌재를 지켜보고 있다.

    각계 인사  9인 “난국, 이렇게 풀라”

    홍윤기<br>동국대 교수·철학

    3·12사태는 25년 전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났던 그 날과 그 뒤에 나온 전두환 체제를 연상시키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군부 독재 아래에서는 눈 한번 치켜뜨지 못하고 4년간 충실하게 독재의 거수기 노릇을 하던 ‘민-한’당을 연상시키고, 한국 민주화의 한 국면을 왜곡하는 데 경악스러운 역할을 했던 3당 야합 ‘민-자’당의 유령도 불러냈다.

    하지만 분명히 다르다. ‘민-한-자’ 공조는 물리적 폭력과 언론의 전폭적 엄호를 받는 위치에 있지 않다. 거리에 나선 시민들은, 탄핵을 발의하고 주도한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위법성이나 불법성을 규탄하거나 ‘대통령 노무현’을 연호한 것도 아니다. 시민들은 헌법적 상식을 넘어서는 야당 의원들의 권력남용이 통할 경우 계속 짓밟힐지도 모를 헌법 정신과 우리의 미래를 불안해 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외치는 구호는 ‘노무현 만세’가 아니라 ‘탄핵무효’ ‘민주수호’다.

    자, 이제부터다. 조순형 민주당 대표가 아무리 “민주헌정을 수호한다”고 탄핵 발의문에 쓰고, 홍사덕 한나라당 총무가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견제 기능을 원칙적으로 우겨도, 이번 탄핵정국의 핵심은 ‘법률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그것도 정당정치가 아니라 국가정치의 차원으로 비약한 문제다.

    취임 이래 대통령의 모든 정책적 처신에 특히 그 지지자들 사이에서 실망과 환멸이 컸어도,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는 그가 적어도 검찰중립을 최대한 보장하였으며, 자신의 측근을 내동댕이치는 정치적 비정함을 보이면서까지 부패와 비리에 얼룩진 구태정치의 척결을 위해 전례 없이 과감하고 정직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제대로 체감하지 못한 야당 지도부는 ‘정당 차원’에서 느낀 압박을 의회와 대통령이라고 하는 두 헌법 기관 사이의 ‘국가적 대결’로 급상승시켰다. 너무나 돌연하게,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역사적 시험대가 펼쳐졌다. 그리고 이 시험은 대통령과 의회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당사자다.

    사태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달을 때는 현안과 관련하여 새로운 쟁점이 될 시빗거리를 만들어내지 말아야 한다. 즉 정치적 문제를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왕의 문제 상황을 극단까지 간 그 상태에서 일단 동결함으로써, 문제 해결 과정의 부담을 추가시키지 않는 현명함이다.

    바로 이 점에서 제일 먼저 주목되는 것은 대통령 대행을 맡은 고건 국무총리의 행보다. 대통령과 의회가 정면충돌한 이 상황에서 대행은 ‘정치적으로’ 그야말로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하고, 그것도 ‘산술적으로’ 그래야 한다. 무엇보다 그는 대통령을 정신적으로 민다고 자임하는 열린우리당이 현재 의회 참여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빠진 채 대통령을 몰아세운 당들로만 채워진 의회에서 탄핵주도 정당들이 요구하는 대로 국정연설을 한다든지 정책협의회를 여는 것은 적절치 않다.

    고건 대행에 적용되는 원칙은 이 탄핵정국을 조성한 민-한-자 3당과 나아가 대통령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무엇보다 야당은 이 국가에 더 이상의 정치적 부담을 가중시키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내각제 개헌 논의, 총선 연기, 현직 특정 장관들에 대한 해임 시도, 하다못해 선거 중립 내각 재구성 등 현재의 정치 상황을 또 한번 경직시킬 사안을 만에 하나라도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된다.

    의회는 대통령을 탄핵함으로써 자신도 심판대에 올라선다. 따라서 열린우리당을 포함한 4개 원내 정당은 두 달도 채 안 되는 임기 안에 의회의 권한을 남용하거나 아니면 장외 분풀이들 통해 두고두고 상처를 남길 정치적 모험을 감행해선 안 된다.

    정당들은 이 탄핵조치까지 포함하여 오직 다가오는 총선에서 국민적 심판을 받도록 정당 본연의 업무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즉 지금 정당들이 해야 할 가장 중대한 업무는 선거운동이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한국 제도정치판의 금기와 성역을 깨는 작업을 중간 정리하는 정치적 휴식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대통령은 무엇보다, 탄핵무효를 외치는 대다수 시민들이 반드시 자신의 정치적 지지자들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하며, 이들에게만큼은 한없이 겸양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누구보다 중요한 것은 이 국가의 국민들이다. 대통령과 의회가 모두 국민 주권을 기반으로 성립한 국민의 주권기관인데, 이 두 기관 사이에 충돌이 빚어짐으로써 주권의 원천지인 국가 시민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 모두가 각자 주권자로서 이 중대 사안에 관해 자기 나름으로 최고급의 의견을 정립해야 한다.

    따라서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든 찬성하든 이 사안은 현재 이루어져야 할 최고의 국가업무가 되었으니만큼 서로의 의견이 분출되는 데 어떤 장애나 방해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탄핵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움직임만큼이나 탄핵에 찬성하고 노무현을 증오하는 이들의 움직임도 그대로 분출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단, 어떤 형태로든 폭력행사는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현재 우리 국민은 저 저열한 국회보다 한 수준 높다는 것을 보여줄 역사적 의무가 있다. 그리고 4월15일, 단순한 분노나 증오가 아니라 약 한 달 남짓 숙고한 자기 의견을 갖고 ‘생각하는 주권자’로서 반드시 투표권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헌법재판소의 몫이 있다. 헌재가 법리적 판단을 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헌법 재판소는 말 그대로 헌법 차원의 판단을 하는 곳이다. 거기에는 이 국가를 국가로서 있게 하는 모든 것, 즉 실정법뿐만 아니라 국민 차원의 모든 정치적 움직임에 대한 대한민국 국가 차원에서의 심의(審議·deliberation)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선진 민주국가들의 사례로 볼 때 대체로 헌법 차원의 재판에서는 국가를 보듬어(保) 지킬(守) 수 있는 한층 나아간(進) 발걸음(步)을 보이거나, 아니면 한층 나아간 발걸음으로 이 국가를 보듬어 지킬 수 있는 판결로 국가적 시비를 안정시키는 판례가 많았다.

    물론 헌재에서 70% 가까운 대다수 시민들이 보여준 탄핵반대의 압도적 여론과는 상반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분명히 그것은 역사를 25년 전으로 되돌리는 엄청난 재앙이고, 의회를 배경으로 한 3당 지역연합독재를 극복하기 위해 21세기 초반을 또 지루하게 낭비해야 함을 의미한다.

    지금은 헌재의 재판관들에게 그 모든 영향들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모든 움직임을 깊이 관찰하고 생각해볼 시간과 공간을 줄 때다.

    현재의 탄핵정국은 정치인들이 이성적 분별력만 있었더라면 어느 면에서는 겪지 않아도 되었을 짜증스러운 국면이다. 하지만 모든 국민과 탄핵 당사자들이 깊이 생각하고 열심히 말하면서도 직접적인 행위는 삼가고 자신의 직분을 다한다면 앞으로의 문제는 더 쌓이지 않고, 지난 문제에 대한 지혜가 더 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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