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시간에 걸쳐 보고가 진행되었으나 긴장된 분위기 탓에 숨소리 하나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통령이 배석한 각료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침묵을 깨지 않았다. 마침내 Y 문교부 장관이 입을 뗐다.
“각하, 행정수도 이전은 국가안보와 민생 안정상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학이 서울에 집중한 것이 수도권 인구 증가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만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연구기관이 연구중에 있습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의 말이 이어졌다.
“연구는 무슨 연구! 이렇게 많은 대학생이 한 지역에 몰려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하지 않는가. 대학만 바라보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어찌 막을 건가. 나는 2∼3년 전부터 임시 행정수도 건설을 생각해왔네. 6·25 전쟁이 끝난 후에 중부 지역으로 수도를 옮겼어야 했어. 그러나 서울에 계속 머무른 탓에 이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야. 임시 행정수도 건설 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나.”
박 대통령은 단호했다. 그는 곧장 임시 행정수도 건설 구상을 승인하고 구체적인 사업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수도권 인구 분산 필요성 대두
내가 행정수도 이전 문제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으로 재직하던 1975년 12월 중순, 청와대 경제제1수석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청와대에 와서 할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다음날부터 청와대로 출근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경제제1수석실로 향했다.
당시 경제제1수석은 이경식(전 한국은행 총재)이었다. 그리고 오휘영 비서관(전 조경학회장)과 이성권 과장(전 부두관리공사 사장)이 조경관광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수석실에 들어서자 오휘영 비서관이 나를 부른 배경을 설명했다. 한마디로 “수도권 인구대책팀을 만들어 수도권 인구집중 억제대책을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어 “이는 대통령의 지시사항”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대책팀의 책임자는 오휘영 비서관이었고, 이성권 과장이 실무를 총괄했다. 대책팀은 두 체제로 나뉘었는데, 나와 유원규 건설부 도시계획계장이 한 팀을 이뤘고, 나머지 팀에는 송병락(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을 비롯한 KDI 연구위원들이 속했다. 청와대가 나를 부른 까닭은 유원규 계장이 수도권 인구대책이 서울시와 관련된 문제인 만큼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이 참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경식 수석은 수도권 인구억제책 마련의 많은 부분을 손수 관장했다. 나를 불러 추진배경과 작업방향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 수석은 “수도권 인구 집중이 경제발전을 저해하고 국토개발 불균형을 초래한다”며 “가능하면 인구를 지방으로 유도할 수 있는 행정대책을 수립하라”고 요구했다. 여기서 행정대책이란 ‘부드러운’ 접근방법을 말한다. 지방으로 내려가는 기업에 세금감면 혜택을 주거나 각종 규제를 풀어주는 것 등이다.
처음 한 달 동안은 각종 자료를 취합하며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었다. 이성권 팀장을 통해 정부 각 부처 공무원을 청와대로 불러 필요한 자료를 요구하는 한편 이 수석이 직접 학계 교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의견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교수들은 ‘지방 유인책이 제시된다면 지방으로 내려갈 생각이 있느냐’는 청와대의 질문에 매우 난감해했다고 한다. 총론에는 동의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거부감을 보였다는 것.
행정관료팀은 국내외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자료와 연구실적은 극히 미미해 실질적인 행정시책을 마련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인구총량 연구는 나름대로 축적되었지만, 인구의 도시집중 문제는 미개척 분야였던 것.
두 달 동안 작업이 진행됐지만, 실질적인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자료수집과 몇 가지 구상안이 나왔을 뿐이다. 결국 나는 현재의 연구방향이 부적절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수석이 지시한 ‘부드러운 행정대책’으로는 수도권 인구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1970년대 중반에 이미 서울은 대한민국 그 자체였다. 모든 분야에서 서울이 국민에게 주는 매력이란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산업시설은 서울, 인천, 경기 등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고 금융 및 중소기업 투자도 서울 인근으로만 몰려들었다. 명문대학은 말할 것도 없이 전체 대학생의 75%가 서울에 거주했다. 객관적으로 인구와 관련된 모든 지표는 서울로만 향했지, 서울 밖으로는 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