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타락의 시대, 판타지는 ‘대안’인가

  • 글: 조성면 문학평론가·인하대 강사

    입력2004-03-30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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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타지, 대중의 퇴행적 욕망과 상업주의의 합작품 영화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이 올해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싹쓸이’했다. 이제껏 수상작의 주를 이뤘던 ‘휴먼스토리’를 물리친 판타지의 완벽한 승리다. 대중은 왜 판타지 같은 비합리적인 이야기에 열광할까.
    • 아마도 답답하고 권태로우며 차가운 일상에 대한 환멸의 표현일 것이다. 과연 판타지는 미래에 대한 진정한 꿈과 희망일까.
    타락의 시대, 판타지는 ‘대안’인가
    3 월1일 열린 제76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반지의 제왕’을 위한 대관식으로 기억될 것이다. 현대 장르 판타지의 아버지로 주목받아온 ‘반지의 제왕’은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 무려 11개 부문을 휩쓴 것을 계기로 명실상부한 ‘흥행의 제왕’에 등극했다. 이미 ‘그들만의 잔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된 아카데미상이 작품성과 문화적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겠지만, ‘반지의 제왕’의 독식이 보여주고 있듯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 판타지는 청소년들이나 즐기는 키즈문학(화)의 차원을 훌쩍 넘어섰다는 점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사려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이나 대형서점마다 마련된 판타지 전용 공간, 그것을 시나리오로 한 수많은 컴퓨터게임의 존재는 이제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게 됐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판타지는 우리 시대 최고의 문화적 화두로, 고부가가치를 산출하는 첨단산업으로 떠올랐다.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서의 판타지

    문화산업이란 말조차 새삼스러울 만큼 판타지의 경제적 규모와 그 파급효과는 실로 엄청나다. 박스오피스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반지의 제왕’의 경우 제1부 ‘반지 원정대’가 8억6000만달러, 제2부 ‘두 개의 탑’이 9억2000만달러의 흥행실적을 올렸다. 제3부 ‘왕의 귀환’의 흥행실적은 10억달러를 상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다 책 판매 부수와 비디오 판권, 그리고 이른바 ‘프로도 경제효과’란 신조어가 만들어질 만큼 미증유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뉴질랜드의 관광수입까지 계산에 넣으면 그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뿐인가. 국내에서도 이미 400만부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해리 포터’는 46개 언어로 번역돼 1억1000만부 이상이 팔려나갔다. 국내에서 생산된 장르 판타지들도 결코 이에 못잖은데, ‘퇴마록’이 700만부, ‘드래곤 라자’가 90만부 이상 팔려나갔고 기타 이름이 조금 알려진 작품들도 많게는 수십만부에서 적게는 수만부씩 팔렸다.



    책, 영화, 비디오, 컴퓨터게임, 만화, 캐릭터산업, 관광수입 등에 이르기까지 몇몇 간판급 판타지들이 보여준 문화적·경제적 파급효과와 규모는 이처럼 상상을 초월한다. 하나의 히트상품이 다양한 종류의 상품으로 개발·판매되는 현상과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한 문화자본의 마케팅전략을 가리켜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use)라고 하거니와, 판타지는 바로 마케팅전략이 거둔 최대 성과다.

    그렇다면 한편에선 초정밀 나노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제품들이 생산되고 생명을 복제해낼 정도로 과학기술이 고도화되는데, 다른 한편에선 마법이니 드래곤이니 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이 열광적인 인기를 끄는 기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화성에 탐사선을 띄워보내는 첨단과학과 삶의 길흉화복을 영매(靈媒)에게 의존하는 황당한 주술이 공존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므로 첨단과학기술시대에 판타지가 유행하는 것이 전혀 이상할 건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상으로 가득한 동화 같은 이야기들에 세계인이 열광하는 이 문제적 현상은 분명 일상적이고 자연스런 것은 아니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를 계기로 혁명의 가능성과 계몽적인 열정이 사라지고 문학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는 자조와 비관의 목소리가 결코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 이 위기의 시대에 과연 판타지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판타지를 둘러싼 문제들을 몇 개의 작품을 통해 짚어보기로 하자.

    톨킨·료 그리고 인터넷

    한마디로 판타지는 모방(mimesis)과 함께 문학예술의 기저를 이루는 핵심적 자질로서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장르문학의 일종이다.

    환상문학 이론가이자 펜실베이니아 대 영문과 교수인 캐더린 흄(Katharyn Hume)은 ‘환상과 미메시스’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오늘날까지 서구문학이론의 중심으로 군림해온 모방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모든 문학작품은 모방의 요소와 환상의 요소를 동시에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했다.

    그의 주장대로 모방이야말로 문학예술의 핵심적 자질이고 환상은 열등하고 불길한 것이라는 기왕의 통념은 환상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기독교적 전통과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철저히 배타했던 유교적 합리주의, 그리고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근대사회의 이성중심주의 등이 만들어낸 편견이며 오해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캐럴(Lewis Carroll)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호프먼(Ernst Theodor Amadeus Hoffman)의 ‘모래 사나이’, 카프카(Franz Kafka)의 ‘변신’에 이어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가로 추앙받는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작품 등 몇몇 사례에나 유용한 이론일 뿐 현재 국내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장르 판타지의 본질과 그 의미를 해명하는 데 참고자료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국내에서 장르 판타지가 이렇게 선풍적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 3부작(1954∼72), 미즈노 료(水野 良)의 ‘로도스도(島) 전기(戰記)’(1988), 테이블에서 주사위를 가지고 하는 역할놀이 게임의 일종인 RPG, 그리고 컴퓨터통신과 인터넷의 발전 등을 꼽을 수 있다.

    각 요인들이 판타지 붐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반지의 제왕’은 ‘해리 포터 시리즈’나 ‘드래곤라자’와 같은 장르 판타지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료의 ‘로도스도 전기’는 톨킨 다음으로 후대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 장르 판타지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한편 1960년대 초반 미국 대학생들이 톨킨의 작품에서 힌트를 얻어 개발해낸 주사위 게임의 일종인 RPG는 오늘날의 전략 인터넷게임과 판타지 소설의 모델이 됐다. 그리고 컴퓨터 통신망(의 발전)은 청소년들 사이에 판타지 붐을 불러일으킨 발판이 되었다.

    간판급 판타지들

    주지하듯, 마니아들 사이에서 현대 장르 판타지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반지 원정대(The Fellowship of the Rings)’ ‘두 개의 탑(The Two Tower)’ ‘왕의 귀환(The Return of the King)’ 등 3부작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톨킨 필생의 노작이다.

    이 장중한 판타지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것은 탄탄한 서사구성과 미학적 완결성 등 완벽한 허구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장르 판타지의 전형이며 지평을 연 작품이기 때문이다.

    모험의 플롯을 가진 소설이 모두 그러하듯 이 작품의 스토리 라인은 비교적 간단하다. 인간과 가장 유사한 난장이 종족인 호비트(Hobbit)족의 젊은 영웅 프로도 배긴스(Prodo Baggins)가 인간·마법사·엘프·드워프 등으로 구성된 9인의 다종족 원정대와 함께 악의 제왕인 사우론(Sauron)이 만든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불의 산(운명의 산)’까지 찾아가는 과정과 그 이후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 구성과 문법은 RPG 게임 마니아였던 료에 의해 계승·발전(실은 속류화)됐다. 그의 ‘로도스도 전기’(국내에서는 ‘마계마인전’이란 이름으로 번역·소개)는 일본과 한국에서 판타지 소설의 일대 유행을 불러일으키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이 작품 역시 많은 등장인물과 낯선 용어들로 인한 생소함이라는 거품을 걷어내고 보면, 스토리 라인은 매우 단순한 편이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로도스는 일종의 이차세계(second world)로 포세리아에 부속된 섬이다. 태고적 죽음의 신 카디스와 대지의 모신 마파의 싸움에서 수세에 몰린 카디스가 대지에 저주를 건다. 그러자 마파는 그 저주가 전체 대륙에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륙의 일부를 잘라내는데 이것이 바로 로도스섬이다.

    마을을 습격한 고블린들을 퇴치한 죄(?)로 고향에서 추방된 채 정처없이 세상을 유랑하고 있는 주인공 판이 아름다운 요정 디트리트와 함께 회색의 마녀 카라의 음모를 분쇄하여 전란과 위기에 빠진 로도스섬의 평화와 질서를 지켜낸다는 게 기본 줄거리다.

    한편 장르 판타지의 또 다른 기원이며 선풍적 유행의 발판으로 작용한 컴퓨터게임은 판타지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쌍방향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요컨대 RPG는 톨킨의 판타지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역할놀이 게임이지만, 여기에 근거하여 계속 발전한 컴퓨터게임들이 후대의 장르 판타지에 영향을 주었고, 장르 판타지 독자를 키워내는 온상 구실을 했다. 이런 점에서 판타지와 컴퓨터게임은 대단히 복잡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판타지는 애초부터 다른 장르의 작품들과는 달리 그 기원·발전·전개에 있어 첨단기술과의 친연성이라든지 타 장르에의 접근성이 대단히 높은 장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간판급 판타지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그것의 유행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타락의 시대, 판타지는 ‘대안’인가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피터 잭슨 감독.

    판타지의 유행이 지니는 문제점은 두 개의 층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텍스트 내적 층위이고, 다른 하나는 텍스트 외적 층위다. 몇 편의 주요 작품을 통해 우선 텍스트 내적 층위의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차지함으로써 장르 판타지 제왕의 위상을 확고히 다진 ‘반지의 제왕’부터 제2부의 헬름협곡 전투와 제3부의 펠렌노르 전투 장면 등 스펙터클한 영상이 관객을 압도하는 영화와는 달리 원전은 특별한 각오나 사명감을 갖지 않고서는 쉽게 읽어낼 수 없을 정도로 부피가 엄청나다. 스토리도 대단히 지루하고 답답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중간계에서 활약하는 영웅들은 모두 백인 남성으로, 여성이나 비서구인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 등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오리엔탈리즘을 보여준다.

    ‘반지의 제왕’과 함께 국내 장르 판타지에 막대한 영향을 준 미즈노 료의 ‘로도스도 전기’ 역시 표면적으로는 일본풍 판타지란 느낌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독창적이고 보편성을 띤 탈일본적인 작품으로 보이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주인공인 자유의 기사 판이 사무라이의 변형이며 로도스섬을 분할하고 있는 작은 왕국들의 왕은 중세시대 일본의 다이묘(大名)들과 대단히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또한 작품이 전개되는 공간도 하필이면 대륙이 아닌 섬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스토리도 하나의 사건을 해결한 뒤 또 다른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가 지루하게 반복되는 등 작품의 구성이나 번역의 수준 등 여러 가지 점에서 결함이 목격된다.

    김민영의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과 함께 국내 최고의 장르 판타지로 손꼽히는 이영도의 ‘드래곤라자’에도 여기 저기서 문제점들이 목격된다. 다행히도 ‘드래곤라자’에는 압도적인 영상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젊은 세대에게서 나타나는 보편적 특징인 문자언어에 대한 지식과 구사능력의 허약함, 이로 말미암은 묘사 없는 대화체 중심의 단문형 거친 문장들, 문법적 오류투성이에 엉성하기 짝없는 작품 구성 등 국내 장르 판타지들에 내재된 문제점들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세계관과 취향에 있어 대단히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난다.

    작가는 거의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톨킨과 미즈노 료에 큰 영향을 받아 씌어진 작품답게 초자연적 존재들을 제외한 등장인물들이 모두 백인이라는 인종차별주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이렇게 ‘드래곤라자’는 서구문화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소설가 복거일이 지적한 바와 같이 작품에 진화의 개념이 전혀 없는 데다 주인공 후치를 쥐락펴락하는 여자친구 ‘제미니’나 탁월한 창 솜씨로 행인들의 주머니를 터는 의적 ‘네리아’ 등 여성 캐릭터들은 비록 표면적으로는 진취적이고 개성이 강한 것처럼 묘사될지라도 결국엔 남성 영웅들에 의존하는 유약한 여성성을 지닌 반주체적 인물로 그려진다.

    최근 들어 ‘황금 드래곤 문학상’과 같은 작품공모 방식이 도입되는 등 장르 판타지의 질적 개선을 꾀하고 있지만 대다수 판타지들은 여전히 ‘서유기’ ‘봉신연의’ ‘평요전’ ‘금오신화’ ‘구운몽’ 등 동아시아의 서사적 전통과 단절된 채 무분별한 서구추수(追隨)성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판타지는 다른 대중문학 작품과 마찬가지로 도피주의를 그대로 드러낸다. 판타지와 대중소설 일반에서 목격되는 도피주의는 두 가지로 대별된다. 이른바 고통스럽고 권태로운 일상적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자들이 판타지로 도피하는 것이 하나이고, 상상력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려는 치열한 작가적 노력을 외면한 채 주어진 작품의 공식과 문법을 모방하여 비슷비슷한 작품을 양산해내는 작가정신의 도피, 또는 텍스트가 새로운 실험과 도전을 하지 않고 주어진 장르 규칙과 공식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 다른 하나다. 판타지의 대유행과 놀라운 생산력의 이면에는 이와 같이 대중의 퇴행적 욕망과 작가의 도피주의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도 극소수 작가를 제외하고 대다수 아마추어 작가들이나 신세대 젊은 독자들이 장르 판타지를 선호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또래의 네티즌들로부터 즉각적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고, 엄정한 작가적 수련이나 훈련 없이도 마음껏 써내고 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한편 텍스트 바깥의 층위에서 목격되는 문제점은 어떠한가. 결론적으로 말해서 판타지의 집단적 수용과 유행은 고통스럽고 권태로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대중의 퇴행적 욕망과 자본의 상업주의 논리가 조장하고 확대재생산해낸 현상이다.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 시리즈’의 경우가 입증하듯 판타지의 배후엔 어김없이 자본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판타지와 같은 대중문학을 둘러싼 오해 가운데 하나는 이들의 막강한 생산력과 지속성이 각 장르 내부에 존재하는 서사규칙과 공식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대중문학은 해당 장르의 규칙과 문법을 따라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기는 하다. 왜냐하면 어떤 대중문학 작품이든 주어진 공식에서 이탈하는 순간 다른 장르의 작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결과론이고, 대중문학이 장르규칙을 따르도록 강제하는 보다 근원적인 원인이 있다. 바로 출판자본의 상업주의 논리다.

    전문적인 학술출판사든 오락물을 펴내는 대중적 출판사든 일차적이고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출판업이 자선사업이 아닌 이상, 책을 통해서 절대 손해보지 않고 이윤을 만들어내는 것이 출판사들의 절체절명의 관심사이고 과제인 것이다.

    그런데 독자들의 다양한 기호와 취향 등 변화무쌍한 출판시장의 상황을 예측하기란 매우 어렵다. 출판하는 책들 모두가 손해를 보지 않거나 항상 이윤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출판사들은 부득이 위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자구책을 마련해놓지 않을 수 없다. 그 대책이란 인기 있는 유명작가의 작품을 찍어내거나 판매가 보장된 장르들을 엄선해서 출판하거나 아니면 대중적 인지도가 높고 어느 정도 판매가 보장돼 있는 장르에 속한 작품만 출판하는 것이다.

    전문가와 기성문단이 적극적 관심 가져야

    판타지와 같은 대중적 장르가 존속하는 것은 이런 출판업자들의 절박한 사정 내지 상업주의적 논리 때문인 것이다. 어떤 한 작품이 히트하면 이와 비슷한 작품이 연이어 쏟아져나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판타지의 유행을 대중의 퇴행적 욕망과 자본의 논리가 결합된 문화적·경제적 현상으로 보아야 하는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다. 그리고 이는 영화사든 컴퓨터게임 업체든 모든 경우에 다 해당되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솔직히 판타지를 읽는 것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다. 극소수 작품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판타지는 독자의 인내력을 테스트하는 시험무대가 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난삽하고 유치한 문장, 황당무계한 이야기, 백인남성 우월주의, 무모한 서구추수성 등 장르 판타지는 판타지라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국적불명의 황당한 이야기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비록 판타지의 실상이 이렇더라도 그것이 제시하는 새로운 가능성과 의미마저 부정하거나 외면해서는 곤란하다. 자본의 전지구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으며, 테크놀로지가 갈수록 고도화하고, 또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색의 진통을 거듭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판타지와 같은 과감하고 새로운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계와 기성 제도권 문단도 판타지에 대해 무조건 비판과 외면으로 일관할 게 아니라 한번쯤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우리에겐 어째서 톨킨이, 해리 포터가, 보르헤스가 나오지 않는 것인가를. 어째서 대중이 이른바 본격문학이 아닌 판타지에 열광하는 것인가.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건 누구의 책임인가. 이런 점에서 판타지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문화적 화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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