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리 포터 시리즈’를 사려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이나 대형서점마다 마련된 판타지 전용 공간, 그것을 시나리오로 한 수많은 컴퓨터게임의 존재는 이제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게 됐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판타지는 우리 시대 최고의 문화적 화두로, 고부가가치를 산출하는 첨단산업으로 떠올랐다.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서의 판타지
문화산업이란 말조차 새삼스러울 만큼 판타지의 경제적 규모와 그 파급효과는 실로 엄청나다. 박스오피스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반지의 제왕’의 경우 제1부 ‘반지 원정대’가 8억6000만달러, 제2부 ‘두 개의 탑’이 9억2000만달러의 흥행실적을 올렸다. 제3부 ‘왕의 귀환’의 흥행실적은 10억달러를 상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다 책 판매 부수와 비디오 판권, 그리고 이른바 ‘프로도 경제효과’란 신조어가 만들어질 만큼 미증유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뉴질랜드의 관광수입까지 계산에 넣으면 그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뿐인가. 국내에서도 이미 400만부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해리 포터’는 46개 언어로 번역돼 1억1000만부 이상이 팔려나갔다. 국내에서 생산된 장르 판타지들도 결코 이에 못잖은데, ‘퇴마록’이 700만부, ‘드래곤 라자’가 90만부 이상 팔려나갔고 기타 이름이 조금 알려진 작품들도 많게는 수십만부에서 적게는 수만부씩 팔렸다.
책, 영화, 비디오, 컴퓨터게임, 만화, 캐릭터산업, 관광수입 등에 이르기까지 몇몇 간판급 판타지들이 보여준 문화적·경제적 파급효과와 규모는 이처럼 상상을 초월한다. 하나의 히트상품이 다양한 종류의 상품으로 개발·판매되는 현상과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한 문화자본의 마케팅전략을 가리켜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use)라고 하거니와, 판타지는 바로 마케팅전략이 거둔 최대 성과다.
그렇다면 한편에선 초정밀 나노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제품들이 생산되고 생명을 복제해낼 정도로 과학기술이 고도화되는데, 다른 한편에선 마법이니 드래곤이니 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이 열광적인 인기를 끄는 기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화성에 탐사선을 띄워보내는 첨단과학과 삶의 길흉화복을 영매(靈媒)에게 의존하는 황당한 주술이 공존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므로 첨단과학기술시대에 판타지가 유행하는 것이 전혀 이상할 건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상으로 가득한 동화 같은 이야기들에 세계인이 열광하는 이 문제적 현상은 분명 일상적이고 자연스런 것은 아니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를 계기로 혁명의 가능성과 계몽적인 열정이 사라지고 문학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는 자조와 비관의 목소리가 결코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 이 위기의 시대에 과연 판타지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판타지를 둘러싼 문제들을 몇 개의 작품을 통해 짚어보기로 하자.
톨킨·료 그리고 인터넷
한마디로 판타지는 모방(mimesis)과 함께 문학예술의 기저를 이루는 핵심적 자질로서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장르문학의 일종이다.
환상문학 이론가이자 펜실베이니아 대 영문과 교수인 캐더린 흄(Katharyn Hume)은 ‘환상과 미메시스’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오늘날까지 서구문학이론의 중심으로 군림해온 모방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모든 문학작품은 모방의 요소와 환상의 요소를 동시에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했다.
그의 주장대로 모방이야말로 문학예술의 핵심적 자질이고 환상은 열등하고 불길한 것이라는 기왕의 통념은 환상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기독교적 전통과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철저히 배타했던 유교적 합리주의, 그리고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근대사회의 이성중심주의 등이 만들어낸 편견이며 오해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