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는 캐럴(Lewis Carroll)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호프먼(Ernst Theodor Amadeus Hoffman)의 ‘모래 사나이’, 카프카(Franz Kafka)의 ‘변신’에 이어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가로 추앙받는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작품 등 몇몇 사례에나 유용한 이론일 뿐 현재 국내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장르 판타지의 본질과 그 의미를 해명하는 데 참고자료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국내에서 장르 판타지가 이렇게 선풍적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 3부작(1954∼72), 미즈노 료(水野 良)의 ‘로도스도(島) 전기(戰記)’(1988), 테이블에서 주사위를 가지고 하는 역할놀이 게임의 일종인 RPG, 그리고 컴퓨터통신과 인터넷의 발전 등을 꼽을 수 있다.
각 요인들이 판타지 붐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반지의 제왕’은 ‘해리 포터 시리즈’나 ‘드래곤라자’와 같은 장르 판타지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료의 ‘로도스도 전기’는 톨킨 다음으로 후대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 장르 판타지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한편 1960년대 초반 미국 대학생들이 톨킨의 작품에서 힌트를 얻어 개발해낸 주사위 게임의 일종인 RPG는 오늘날의 전략 인터넷게임과 판타지 소설의 모델이 됐다. 그리고 컴퓨터 통신망(의 발전)은 청소년들 사이에 판타지 붐을 불러일으킨 발판이 되었다.
간판급 판타지들
주지하듯, 마니아들 사이에서 현대 장르 판타지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반지 원정대(The Fellowship of the Rings)’ ‘두 개의 탑(The Two Tower)’ ‘왕의 귀환(The Return of the King)’ 등 3부작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톨킨 필생의 노작이다.
이 장중한 판타지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것은 탄탄한 서사구성과 미학적 완결성 등 완벽한 허구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장르 판타지의 전형이며 지평을 연 작품이기 때문이다.
모험의 플롯을 가진 소설이 모두 그러하듯 이 작품의 스토리 라인은 비교적 간단하다. 인간과 가장 유사한 난장이 종족인 호비트(Hobbit)족의 젊은 영웅 프로도 배긴스(Prodo Baggins)가 인간·마법사·엘프·드워프 등으로 구성된 9인의 다종족 원정대와 함께 악의 제왕인 사우론(Sauron)이 만든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불의 산(운명의 산)’까지 찾아가는 과정과 그 이후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 구성과 문법은 RPG 게임 마니아였던 료에 의해 계승·발전(실은 속류화)됐다. 그의 ‘로도스도 전기’(국내에서는 ‘마계마인전’이란 이름으로 번역·소개)는 일본과 한국에서 판타지 소설의 일대 유행을 불러일으키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이 작품 역시 많은 등장인물과 낯선 용어들로 인한 생소함이라는 거품을 걷어내고 보면, 스토리 라인은 매우 단순한 편이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로도스는 일종의 이차세계(second world)로 포세리아에 부속된 섬이다. 태고적 죽음의 신 카디스와 대지의 모신 마파의 싸움에서 수세에 몰린 카디스가 대지에 저주를 건다. 그러자 마파는 그 저주가 전체 대륙에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륙의 일부를 잘라내는데 이것이 바로 로도스섬이다.
마을을 습격한 고블린들을 퇴치한 죄(?)로 고향에서 추방된 채 정처없이 세상을 유랑하고 있는 주인공 판이 아름다운 요정 디트리트와 함께 회색의 마녀 카라의 음모를 분쇄하여 전란과 위기에 빠진 로도스섬의 평화와 질서를 지켜낸다는 게 기본 줄거리다.
한편 장르 판타지의 또 다른 기원이며 선풍적 유행의 발판으로 작용한 컴퓨터게임은 판타지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쌍방향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요컨대 RPG는 톨킨의 판타지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역할놀이 게임이지만, 여기에 근거하여 계속 발전한 컴퓨터게임들이 후대의 장르 판타지에 영향을 주었고, 장르 판타지 독자를 키워내는 온상 구실을 했다. 이런 점에서 판타지와 컴퓨터게임은 대단히 복잡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판타지는 애초부터 다른 장르의 작품들과는 달리 그 기원·발전·전개에 있어 첨단기술과의 친연성이라든지 타 장르에의 접근성이 대단히 높은 장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간판급 판타지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그것의 유행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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