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실존주의적 무협작가 좌백

기존 질서 거부하는 하위주체의 데카당스

  • 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junaura@snu.ac.kr

    입력2004-03-30 13: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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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년 등장한 좌백은 하위주체들의 실존적 탐색을 다뤄 무협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좌백의 무협 영웅들은 무공 연마와 복수라는 숙명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에 천착한다.
    실존주의적 무협작가 좌백
    1965년생인 좌백(左栢)은 1995년 ‘대도오’를 출판하면서 무협소설계에 등장했다. 한국 무협소설의 독서사(讀書史)는 크게 세 시대, 즉 ▲워룽성(臥龍生) 등 대만 무협소설이 주류를 이룬 1970년대 ▲서효원, 야설록, 금강, 사마달, 검궁인 등 소위 ‘창작무협’이 전성기를 이룬 1980년대 전반 ▲홍콩 작가 진융(金庸)의 작품이 인기를 모았던 1980년대 후반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좌백의 ‘대도오’는 이전의 무협소설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다.

    ‘대도오’의 무엇이 새로운가. 종래의 무협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특이한 인물 설정이다. 주인공 대도오는 미남도 아니고, 명문가 출신도 아니다. 또 자질이 특출하지도, 기연(奇緣)이 풍부하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하급무사이다. 심지어 대도오는 사생아 출신인 데다 정식 사문(師門)도 없는, 평범하다기보다는 비천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합한 인물이다.

    물론 대도오에게도 나름대로 비범한 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비범함이란 종래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비범함과는 성질이 아주 다르다. 또 종래 무협소설에도 하급무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이들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고급무사로 상승하는 게 상례인데, 대도오는 무공이 상당히 높아졌음에도 여전히 하급무사로 남는다. 이러한 점은 매우 중요하다. ‘대도오’가 무협소설의 역사에서 이룩한 신기원이 바로 이 점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하급무사가 무협소설의 주인공

    ‘대도오’는 대도오라는 한 하급무사의 이야기이면서 ‘흑풍조’라는 하급무사들의 작은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도오와 흑풍조는 둘다 ‘비뚤어졌다’는 특징을 갖는다(비뚤어짐은 좌백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좌백이라는 필명부터가 ‘왼쪽으로 비뚤어진 잣나무’라는 뜻이다).



    비뚤어졌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정상적인 상태가 있을 때 비로소 비뚤어진 상태도 가능하다. 여기서 ‘정상적인 상태’란 곧 무림 세계의 기성 질서와 기성 질서가 유포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 질서는 사살상 허위, 위선, 탐욕, 기만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그럴듯한 명분으로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질서이다. 지배층은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진력하고 피지배층은 이 질서에 길들여져 있다. 대도오와 흑풍조의 비뚤어짐은 바로 이러한 질서에 순응하는 것을 거부하고 이 질서의 허위를 비웃으며 이 질서의 바깥에서 나름대로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는 단순한 반항과는 다른 차원이다.

    기성질서에 대한 전복

    대도오와 흑풍조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그러나 생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존심이다. 이 자존심이란 자신의 삶의,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실존적 충일(充溢)에 대한 자존심이다. 하급무사로서의 자존심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다. 실존적 충일은 기성 질서의 허위에 물들어 있는 한 이룰 수 없다. 그런데 이 허위를 벗어나는 데 가장 유리하거나 가장 적절한 신분이 실질적 의미에서든 비유적 의미에서든, 바로 하급무사이다.

    하급무사란 요즘 유행하는 말로 바꿔 말하자면 ‘하위주체(subaltern)’라고 할 수 있다. 하위무사들은 각각 개별자이면서 흑풍조라는 작은 공동체의 일원이다. 여기서 개인-공동체의 관계는 동지애에 바탕을 두지 않고서는 그들 각자 추구하는 바가 달성될 수 없고, 또 공동의 추구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신이 각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이다.

    흑풍조가 철기맹 및 구륜교의 배반자들과 싸우고, 다음에는 녹림맹과 싸우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남파와 싸워 끝내 이기고야 마는 이야기인 무협소설 ‘대도오’는 하급무사, 즉 하위주체가 기성 질서와 싸워 이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해 없기를! 이 승리는 기성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승리가 아니다. 이 싸움의 승부가 가려진 후에도 기성 질서는 바뀌지 않는다. 다만 대도오와 흑풍조는 실존적 충일을 허용하지 않는 기성 질서에 반해 실존적 충일, 각자 색깔을 달리하고 양태를 달리하는 실존적 충일을 획득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승리의 진정한 모습이다. 무협소설 ‘대도오’를 두고 실존주의적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대도오’의 실존주의적 작품세계는 종래 무협소설과 어떤 관계일까? 우선 워룽성(臥龍生)을 대표로 하는 대만 무협소설의 주류와 비교해볼 때 ‘대도오’는 그것의 전복이라고 할 수 있다.

    실존주의적 무협작가 좌백

    실존주의적 무협소설의 지평을 연 작가 좌백

    대만 무협소설의 주류는 일찍이 비평가 김현 선생이 분석했듯이 사회의 기성 윤리와 기성 질서에 편안하게 적응하는 데 성공하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러한 성공담을 ‘중산층적 질서의 승리(혹은 안정성)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며 ‘중산층적 삶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중산층적 삶의 의미에 대한 확신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대도오’는 이와 정반대이다. 서문벽에게는 ‘생의 목표’라고 할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을 대도오가 한마디로 부정하는 장면에서 보듯 ‘대도오’는 중산층적 삶의 의미를 불신하며 중산층적 삶에 대한 욕망을 비웃는다. 대만 무협소설의 주류가 중산층의 무협소설이라면 ‘대도오’는 하위주체의 무협소설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대도오’는 구룽(古龍)을 대표로 하는 대만의 신파 무협소설과 상당히 닮았다. 구룽의 무협소설 또한 중산층의 속물성에 대한 야유와 조소를 기본 태도로 삼고 있다. ‘대도오’에는 미리 주어진 삶의 의미 없이 그에 대해 질의와 탐색, 추구가 이뤄지는데, 구룽 역시 중산층에 대한 야유와 조소에서 출발하여 삶의 의미에 대한 실존주의적 탐색으로 나아간다. 때문에 ‘대도오’는 구룽과 닮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구룽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구룽과 ‘대도오’ 사이에는 그 유사성보다 훨씬 더 큰 차이가 존재한다. 똑같이 반(反)중산층적이고 실존주의적이지만 구룽의 실존주의는 귀족적 데카당스인 데 반해 ‘대도오’의 실존주의는 하층, 소외된 자, 주변, 소수자, 즉 하위주체의 데카당스이기 때문이다. ‘대도오’는 워룽성의 전복일 뿐만 아니라 구룽의 전복이기도 한 셈이다. 만약 구룽이 ‘대도오’를 썼다면 대도오가 아니라 비극적인 운명을 지닌 철기맹의 젊은 맹주 운기준을 주인공으로 삼았을 것이다.

    사실 ‘대도오’ 속에는 따로 독립시켜도 좋을 만큼의 매력적인 이야기가 몇 개 들어 있다. 운기준의 데카당스, 매봉옥의 성장, 노대의 고뇌 등이 그것이다. 좌백은 이 이야기들을 대도오를 주인공으로 한 흑풍조 이야기 속에 용해시켰는데, 좌백이 하필이면 대도오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흥미로운 점은 ‘대도오’가 양으로든 음으로든 1980년대 후반 한국의 독서시장을 장악했던 진융과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무협소설에 대한 진융의 영향’이라는 문제에 포함시켜 좀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대도오’로 신무협 지평 열어

    흔히 ‘창작무협’이라고 불리는 1980년대의 한국 무협소설은 주류인 워룽성과 신파인 구룽, 그리고 귀파(鬼派) 천칭윈(陳靑雲) 등으로부터 복합적인 영향을 받아 ‘창작’됐다. 그러나 대부분 실패한 아류에 그쳤고 일부는 아예 천박함으로 추락해버렸다. 나름대로 새로운 면모를 보인 게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천박함으로 추락한 것에서 나타났다. 아마도 그 예외로 주목되는 작품이 야설록과 용대운으로 이어지는 구룽 계열일 터이다. 그러나 이들은 나름대로 흥미롭게 구룽의 변형 내지 변주를 보여주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세계로의 전환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대도오’는 그 전환에 성공했다. 더구나 ‘대도오’는 단단한 문장과 절제된 언어라는 글쓰기의 기본적 덕성이 무협소설에서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었고, 무엇보다 글쓰기에 대한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이라는, 종래의 무협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귀중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대도오’가 아무리 새롭고 뛰어난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 혼자만으론 하나의 예외적 작품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대도오’가 ‘신무협’이라 불리는 무협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작가 좌백 자신이 ‘대도오’ 이후에도 신무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을 계속 써냈기 때문이다. 또 좌백 이외에도 다른 새로운 작가들이 좌백과 동지적 관계를 맺으며 신무협의 지평 형성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시대적 및 세대적 징후가 발견된다. ‘신무협’은 적어도 1990년대 후반이라는 시대, 특히 이 무렵의 젊은 세대의 어떤 정신, 마음의 움직임, 욕망의 움직임이 무협소설이라는 장르 속에서 자기 표현을 얻음으로써 생겨났다는 것이다. 좌백은 그 시대 젊은이의 자기 표현의 흐름에 물꼬를 터 준 장본인이다.

    1995년 4월 ‘대도오’를 출판한 좌백은 곧이어 7월에 ‘생사박(生死搏)’을, 9월에 ‘야광충(夜光蟲) 1부’를, 1996년 1월에 ‘야광충 2부’를 펴냈다. 상당히 숨가쁜 듯 보이는 이러한 행보는 물론 ‘대도오’ 출판 이전에 이미 세 작품에 대한 구상과 집필 준비가 갖춰졌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작품은 물론 좌백다운 어떤 동일성이 관철되고 있지만, 그 동일성이 구현되는 구체적 방식은 각기 다르다. 좌백은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것을 싫어하는 작가다. 달리 말하면 그는 부단한 자기 갱신을 중시하는 예술가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실존주의적 무협작가 좌백

    좌백의 초기 작품들. ‘대도오’는 대만 무협소설 주류에 대한 전복이라고 평가된다.

    ‘생사박’의 주인공 흑저(黑猪)는 오척 단신에 못생긴 얼굴을 가진, 내공은 파괴되고 팔의 힘줄이 끊겨 조막손이 된 파계승이다. 자신이 창안한 ‘박투술’을 완성하고 자신을 파문시킨 소림사로 귀환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자 삶의 의미이며 가치이다. 그는 결국 이 소망을 이루지만 그 대신 무공을 잃고, 또 무공을 잃은 대신 불도(佛道)를 얻는다.

    그런데 흑저의 박투술 완성 과정은 금룡장의 구룡(九龍)과의 대결 과정과 겹친다. 흑저는 엽검영, 통비원, 곽상, 금조운, 한백, 귀도 등과 함께 작은 공동체를 이룬 후 대결을 수행한다. 주목할 것은, 이 작품의 대립구조가 단층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흑저는 ①자신을 파문시킨 소림사의 전통과 대립하고 ②구룡과 대립하며 ③금조운과 대립한다. ①은 소림사 전통의 수정 ②는 흑저 등의 작은 공동체의 승리 ③은 양립으로 귀결된다. ②는 ‘대도오’와 유사한 이야기라고 하겠고 ③은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대립에 관한 이야기라 하겠는데, 문제는 ①이다. 소림사로부터의 파문과 귀환, 그리고 무공 상실과 불도 획득은 보다 심층적인 해석을 기다리는 착잡한 이야기이다.

    보다 치열해지는 실존적 질문

    ‘야광충’은 주인공 야광충과 무림의 최고수 로부 옹고트 사이의 대결 이야기이다. 야광충은 흑수당(黑手堂)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결성하여 로부 옹고트와 대결해 결국 승리한다. 이 대결 이야기는 ‘대도오’와 ‘생사박’②와 유사하다. 그러나 야광충의 더욱 중요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 있다.

    야광충은 처음에 햇빛을 볼 수 없는 괴물로 나온다(그래서 이름이 야광충이다). 그가 햇빛을 볼 수 있으려면 흡혈귀가 되어야 한다. 흡혈귀가 되기를 거부하던 야광충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결국 흡혈귀가 되고 마는데, 그 다음에는 흡혈귀를 극복하고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 도대체 야광충은 무엇이고 흡혈귀는 무엇일까?

    야광충은 로부 옹고트에 의해 만들어졌다. 로부 옹고트는 ‘예충’이라는 또 다른 신분으로 위장하여 갓난아이를 괴물 야광충으로 만들고 사부가 되어 그를 어려서부터 키웠다. 로부 옹고트의 의도는 ‘야광충(현음옥령지맥)-흡혈귀-인간’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옥령체에 있다. 옥령체를 사용하여 불로불사를 이루는 것이 로부 옹고트의 목적인 것이다.

    야광충과 로부 옹고트의 대결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둘을 노예주와 노예의 관계로 볼 때 이 이야기는 자유주의 휴머니즘의 알레고리가 된다. 또 둘을 상징계와 주체의 관계로 볼 때 이 이야기는 억압적으로 구성된 주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서사가 된다. 둘을 대립관계로 보지 않고 동종으로 본다면 둘 다 억압된 본능과 욕망의 표현 이야기일 수 있다. 그렇다면 ‘야광충’은 억압된 본능과 욕망을 명백히 드러내되 다시 그것을 길들이는 이야기가 된다. 이 세 가지 해석이 나름대로 성립된다는 점, 그 복합성 내지 혼란이 이 작품의 진정한 모습일 것이다.

    ‘생사박’과 ‘야광충’은 ‘대도오’에 비해 구조가 한결 복잡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복잡한 정도는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점점 깊어지고 치열해져가는 것과 상응하는 듯하다. 실존적 충일에 대한 비교적 단순한 물음(‘대도오’)에서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비교적 복잡한 물음(‘야광충’)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있는 것이다.

    1998년작 ‘독행표(獨行?)’는 전작들에 비해 종래 무협소설, 특히 1980년대의 ‘창작무협’적인 면모를 많이 나타낸다. 멸문한 표국 집안의 유일한 생존자인 14세 소년 용유진(龍游眞)이 주인공이다. 이 작품은 용유진이 우여곡절로 가득한 성장 과정을 거쳐 무림의 고수가 되고 가문의 복수를 이룸과 동시에 악당들의 음모를 분쇄하는 이야기이다. 작가 자신은 “이 작품은 1980년대 무협의 대표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며, 나 자신이 한때 열광했던 사마달류의 이야기 구성을 따른 것이다”라고 해명한 바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작품은 단순한 이야기 구성의 유사성을 넘어 훨씬 더 중요한 차이를 갖고 있다. 우선 문장부터가 그렇다. 단단한 문장과 절제된 언어, 그리고 정제된 표현은 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플롯 또한 치밀하고 설득력 있게 잘 짜여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의 성격이다.

    주인공 용유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자신이 추구하는 바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며 끊임없이 그 답을 모색한다. 물음과 모색의 핵심에는 ‘표사(驃師)로서의 삶’이 있다. 용유진은 무림 십대 고수 중의 하나인 상관대부를 격파하고 황제의 신임을 얻은 뒤에도 표사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이 선택은 곧 생활세계를 선택한 것이고, 하위주체를 선택한 것이며, 결국 실존적 의미를 선택한 것이다. 이 선택이야말로 좌백다운 상상력의 소산인데, 이러한 상상력은 후속작 ‘금전표(金錢?, 2000)’에서 더 잘 발휘된다.

    실존주의적 무협작가 좌백

    좌백의 신작들. 작가의 무르익은 솜씨가 발휘되고 있는 ‘비적유성탄’의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된다.

    ‘독행표’의 결말로부터 3년 뒤, 용유진은 혼자 표국을 운영한다. ‘금전표’는 용유진이 거대한 표행에 참가하여 겪는 사건의 전말을 서술한다. 그러나 표행은 애당초 실패하도록 계획되어 있는 것이고, 이 실패를 통해 물주가 자신의 재산을 은닉하고 자신의 신분을 바꿀 수 있으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실패가 오히려 성공이라는 것. 이것이 표행의 숨겨진 비밀이다.

    이 비밀이 밝혀지는 데서 소설이 끝난다면 ‘금전표’는 중국 구파 무협소설 중 허무, 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바이위(白羽)의 작품과 그 수준이 같아졌을 것이다(그렇게 끝났다 하더라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좌백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표행 공동체가 허구였음이 밝혀진 뒤 용유진은 대력귀, 남궁홍, 임태풍과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결성하여 표물을 탈취하고 이를 빈민 구제에 사용한다.

    그런데 이 의적 공동체는 구성이 몹시 특이하다. 용유진은 도둑으로부터 표물을 지키는 표사이고, 대력귀는 황제가 보낸 밀사이며, 남궁홍은 말하자면 무림의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명문의 자제, 그리고 임태풍은 녹림도 총표파자, 즉 도둑의 우두머리이다. 동창, 즉 요즘으로 치면 정보부와 같은 국가 기관이 압수한 표물을 이들 의적 공동체가 탈취하여 빈민구제에 사용하는 셈이다.

    이러한 설정은 황제가 스스로의 선의로도 어쩌지 못하는 견고한 지배 질서의 허위에 대한 유쾌한 조롱이자 씁쓸한 반추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일을 끝낸 용유진은 다시 표국으로 돌아간다. 그는 처음에도 표사였고 끝에 가서도 표사인 것이다. ‘독행표’가 1980년대 창작무협의 재구성인 데 반해 ‘금전표’는 ‘독행표’의 후속작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혈기린외전(血麒麟外傳)’은 2003년에 완성되었으므로 최근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1996년에 처음 씌어지기 시작해 3부 중 1부와 2부가 1999년에 완성되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씌어졌음에도 이 작품은 통일성을 갖추고 있는데, ‘협객불망원(俠客不忘怨)’ ‘협객불상신(俠客不喪信)’ ‘협객불기의(俠客不棄義)’라는 각 부의 제목이 시사하듯 ‘협(俠)’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 탐색을 주제로 삼고 있다.

    주인공 왕일은 빈농 청년이다. 왕일은 돈 몇 푼에 팔려가 남의 군역을 대신 살게 되고, 그리하여 남만의 밀림에서 몇 년간 극한 체험을 한 뒤 다행히 신분을 회복하고 귀가한다. 그러나 왕일이 집을 떠난 사이 누이동생은 실종되고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죽었다. 왕일은 군대에서 배운 전투기술과 굳센 의지를 발휘하며 악산삼귀의 도움을 받아 필경 복수에 성공한다.

    여기까지가 1부이다. 1부가 왜 ‘협객불망원’, 즉 ‘협객은 원한을 잊지 않는다’인가 하면 원한에 대한 복수를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복수의 주체는 주인공 왕일이며 조력자는 악산삼귀인데, 악산삼귀는 자신들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왕일이 복수를 마치도록 돕는 고전적 협객으로 등장한다.

    무림은 강북의 군호맹과 강남의 제룡련 사이의 전쟁으로 혼란스럽다. 왕일은 군호맹 소속의 한 중소 방파에 용병으로 들어갔다가 무림 제일 고수인 혈기린의 초빙을 위해 남만으로 파견된다. 온갖 고초를 겪은 뒤 마침내 혈기린을 만난 왕일은 그의 후계자가 된다. 여기까지가 2부이다. 2부는 왜 ‘협객불상신’, 즉 ‘협객은 믿음을 잃지 않는다’인가. 믿음이 2부의 주제라면 믿음의 주체는 왕일이 아니라 혈기린이다. 혈기린은 선대의 약속이 정당하지 않을 뿐더러 음모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지키기 위해 죽음이 멀지 않은 쇠약한 몸을 이끌고 길을 나선다.

    혈기린의 죽음으로 새로운 혈기린이 된 왕일은 군호맹을 도와 제룡련과 싸운다. ‘왕일’이라는 실존과 ‘혈기린’이라는 신분 사이에서 갈등하던 주인공은 최후의 전장에서 자신이 왕일이면서 동시에 혈기린임을 밝히고 청룡왕과 백호왕을 물리친다. 무림의 전쟁은 종결되고 군호맹과 제룡련은 해체된다. 왕일은 남만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황보장군의 죽음을 지켜본다. 3부는 왜 ‘협객불기의’, 즉 ‘협객은 의를 버리지 않는다’인가. 여기서 ‘의’의 주체는 황보장군이다. 감옥에서 만난 황보장군은 탈옥을 거절하고 죽음을 자청하는데 그것은 ‘의’ 때문이다. 3부의 주제가 ‘의’이기 때문에 황보장군의 처형이 마지막 장면으로 배치된 것이다.

    ‘혈기린외전’의 주제는 좌백이 후기에서 밝혔듯이, 옛사람들이 남긴 다음과 같은 말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아래 인용의 번역은 좌백이 택한 번역을 그대로 따랐다).

    ① 남에게 머리카락 하나라도 뽑히면 이를 매 맞은 것으로 여기었고, 자신을 욕하는 말을 듣기만 하면 반드시 복수하고야 말았다. -맹자(孟子)

    ② 그들의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고 행동에는 반드시 과감성이 있으며 이미 허락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성의를 다한다. 몸을 돌보지 않고 남의 곤경에 뛰어들며, 벌써 생사존망의 어려움을 겪었어도 그 능력이 있음을 뽐내지 않으며, 그 덕을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사기(史記)

    ‘혈기린외전’의 1부는 ①의 맹자의 말과 관계된다. 원한에 대한 복수는 ‘협’의 정신에서 불가결한 기본 원리 중 하나이다. 2부는 ②의 사마천의 말 중 첫 문장과 관계된다. 약속에 대한 믿음 역시 ‘협’ 정신의 기본 원리이기 때문이다. 3부는 ②의 두 번째 문장과 관계가 있다. 여기서 ‘의’는 주로 이타성(利他性)과 관계되는 덕목인데, 이것 역시 ‘협’ 정신의 기본 원리이다. 그런데 ①은 맹자가 ‘협’을 폄훼하면서 한 말이고 ②는 사마천이 ‘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한 말이기 때문에 ①은 적절치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협’의 복수정신을 똑같이 묘사하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적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그냥 두어도 무방할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로 남는 것은 복수와 믿음, 그리고 의(義) 사이에 모순과 갈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1부에서 왕일의 복수는 원한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입힌다. 2부에서 혈기린의 ‘믿음 잃지 않기’는 속임수인 줄 알면서도 속는 어리석음일 수 있고, 단지 어리석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애매한 사람들에게까지 해를 끼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또 3부에서 황보장군이 ‘대의’를 위해 순순히 처형을 받아들이는 것은 복수 정신에 위배되며, 나아가서는 악의 횡행을 방조하는 일이 될 수 있다. 1부에서 악산삼귀는 이타 정신과 복수 정신에 입각해 행동했지만, 그 행동은 역시 그들을 따르는 많은 청년들을 죽게 만든다.

    모순 끌어안는 실존적 진정성

    요컨대 고대의 ‘협’ 사상은 순수한 반면 자체에 모순을 안고 있으며 동시에 그 모순을 인식하지 못하는 나이브한 사상이었던 것이다. ‘혈기린외전’에서 빈농 왕일이 왕일인 동시에 혈기린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협’의 내적 모순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그것을 의식화하며 그로 인해 고뇌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고대의 ‘협’ 사상을 단순히 액면 그대로 행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을 근거로(좌백에게 근거는 오직 실존뿐이다) 그 모순을 끌어안으려 하기 때문에 고뇌가 생긴다.

    이것은 다분히 현대적인 태도이다. 좌백은 “이런 규정(‘협’에 대한 고대인들의 규정)에 대해 과연 그러한가를 시험해본다는 기분으로 이야기를 꾸며 거기에 주인공을 띄워보냈습니다”라고 고백했거니와, 말하자면 이는 고대인의 ‘규정’에 대한 현대인의 시험이다. 악산삼귀나 혈기린, 황보장군의 ‘협’이 고대인의 그것이라면 왕일-혈기린의 ‘협’은 현대인의 그것이다. 그래서 왕일은 황보장군의 ‘대의’에 일면 수긍하면서도 간신 동한신을 암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지막에 이르러 왕일이 ‘협’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확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애당초 명확한 개념이란 불가능하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모순과 갈등을 끌어안는 실존의 진정성 뿐이고, 그런 의미에서 ‘혈기린외전’은 하위주체의 실존주의가 수행한 ‘협’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기대되는 신작 ‘비적유성탄’

    좌백은 현재 두 개의 작품을 쓰고 있다. 하나는 ‘천마군림(天魔君臨)’으로 마도(魔道)가 천하를 온전히 지배하게 된 이후의 상황을 설정, 그 속에서 한 소년이 성장하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말하자면 야설록의 일부 주인공들에 의해 이룩되었다가 금세 무너지고 만 ‘마도천하(魔道天下)’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설정해놓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셈이니 흥미로운 작품이다.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요동을 무대로 하여 고대 이래의 예맥, 동호, 숙신의 여러 종족들과 한족이 혼재하는 상태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이는 요즈음의 고구려사 논쟁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이 문제에 관심 있다면 최근 출판된 김한규의 ‘요동사’가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없이 늘어지는 스토리, 컴퓨터게임을 연상케 하는 구성 등 요즘 유행하는 소위 판타지 무협소설에 가까워 곳곳에 반짝이는 좌백다운 면모들을 가리고 있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하나의 작품은 ‘비적유성탄(飛賊流星彈)’이다. 현재 1권만 나와 있는데, 은퇴한 신비의 살수가 몇 년간의 은거를 끝낸 후 허무에 빠진 채 세상으로 돌아와 세상을 조롱하며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좌백의 무르익은 솜씨가 정교하게 발휘되고 있는 이 작품은 한국 무협소설에 또 하나의 의미 있는 개척이 될 것 같다.



    좌백은 “‘천마군림’은 읽고 싶은 작품이고 ‘비적유성탄’은 쓰고 싶은 작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무협소설을 쓰는 일과는 무관하게 읽을 줄만 아는 나로서 읽고 싶은 작품이란 ‘천마군림’이 아니라 ‘비적유성탄’과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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