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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협소설 명인열전 ④

실존주의적 무협작가 좌백

기존 질서 거부하는 하위주체의 데카당스

  • 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junaura@snu.ac.kr

실존주의적 무협작가 좌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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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년 등장한 좌백은 하위주체들의 실존적 탐색을 다뤄 무협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좌백의 무협 영웅들은 무공 연마와 복수라는 숙명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에 천착한다.
실존주의적 무협작가 좌백
1965년생인 좌백(左栢)은 1995년 ‘대도오’를 출판하면서 무협소설계에 등장했다. 한국 무협소설의 독서사(讀書史)는 크게 세 시대, 즉 ▲워룽성(臥龍生) 등 대만 무협소설이 주류를 이룬 1970년대 ▲서효원, 야설록, 금강, 사마달, 검궁인 등 소위 ‘창작무협’이 전성기를 이룬 1980년대 전반 ▲홍콩 작가 진융(金庸)의 작품이 인기를 모았던 1980년대 후반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좌백의 ‘대도오’는 이전의 무협소설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다.

‘대도오’의 무엇이 새로운가. 종래의 무협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특이한 인물 설정이다. 주인공 대도오는 미남도 아니고, 명문가 출신도 아니다. 또 자질이 특출하지도, 기연(奇緣)이 풍부하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하급무사이다. 심지어 대도오는 사생아 출신인 데다 정식 사문(師門)도 없는, 평범하다기보다는 비천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합한 인물이다.

물론 대도오에게도 나름대로 비범한 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비범함이란 종래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비범함과는 성질이 아주 다르다. 또 종래 무협소설에도 하급무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이들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고급무사로 상승하는 게 상례인데, 대도오는 무공이 상당히 높아졌음에도 여전히 하급무사로 남는다. 이러한 점은 매우 중요하다. ‘대도오’가 무협소설의 역사에서 이룩한 신기원이 바로 이 점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하급무사가 무협소설의 주인공

‘대도오’는 대도오라는 한 하급무사의 이야기이면서 ‘흑풍조’라는 하급무사들의 작은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도오와 흑풍조는 둘다 ‘비뚤어졌다’는 특징을 갖는다(비뚤어짐은 좌백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좌백이라는 필명부터가 ‘왼쪽으로 비뚤어진 잣나무’라는 뜻이다).



비뚤어졌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정상적인 상태가 있을 때 비로소 비뚤어진 상태도 가능하다. 여기서 ‘정상적인 상태’란 곧 무림 세계의 기성 질서와 기성 질서가 유포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 질서는 사살상 허위, 위선, 탐욕, 기만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그럴듯한 명분으로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질서이다. 지배층은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진력하고 피지배층은 이 질서에 길들여져 있다. 대도오와 흑풍조의 비뚤어짐은 바로 이러한 질서에 순응하는 것을 거부하고 이 질서의 허위를 비웃으며 이 질서의 바깥에서 나름대로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는 단순한 반항과는 다른 차원이다.

기성질서에 대한 전복

대도오와 흑풍조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그러나 생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존심이다. 이 자존심이란 자신의 삶의,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실존적 충일(充溢)에 대한 자존심이다. 하급무사로서의 자존심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다. 실존적 충일은 기성 질서의 허위에 물들어 있는 한 이룰 수 없다. 그런데 이 허위를 벗어나는 데 가장 유리하거나 가장 적절한 신분이 실질적 의미에서든 비유적 의미에서든, 바로 하급무사이다.

하급무사란 요즘 유행하는 말로 바꿔 말하자면 ‘하위주체(subaltern)’라고 할 수 있다. 하위무사들은 각각 개별자이면서 흑풍조라는 작은 공동체의 일원이다. 여기서 개인-공동체의 관계는 동지애에 바탕을 두지 않고서는 그들 각자 추구하는 바가 달성될 수 없고, 또 공동의 추구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신이 각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이다.

흑풍조가 철기맹 및 구륜교의 배반자들과 싸우고, 다음에는 녹림맹과 싸우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남파와 싸워 끝내 이기고야 마는 이야기인 무협소설 ‘대도오’는 하급무사, 즉 하위주체가 기성 질서와 싸워 이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해 없기를! 이 승리는 기성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승리가 아니다. 이 싸움의 승부가 가려진 후에도 기성 질서는 바뀌지 않는다. 다만 대도오와 흑풍조는 실존적 충일을 허용하지 않는 기성 질서에 반해 실존적 충일, 각자 색깔을 달리하고 양태를 달리하는 실존적 충일을 획득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승리의 진정한 모습이다. 무협소설 ‘대도오’를 두고 실존주의적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대도오’의 실존주의적 작품세계는 종래 무협소설과 어떤 관계일까? 우선 워룽성(臥龍生)을 대표로 하는 대만 무협소설의 주류와 비교해볼 때 ‘대도오’는 그것의 전복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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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junaur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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