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7기 국수전 최종 5국에서 맞붙은 이창호 9단과 최철한 7단(왼쪽)이 수읽기에 몰두하고 있다.
【최철한】
올해 만 19세. 보송보송한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이 소년기사의 별명은 ‘독사’다. 요즘 ‘천하의 이창호’를 가장 괴롭히는 ‘바둑짱’으로 2004년 3월2일 열린 제47기 국수전 도전5번기에서 이창호 9단을 3대2로 물리치고 아홉 번째 국수(國手)에 올랐다.
바둑기사에게 국수 타이틀은 영원한 꿈이다. 굳이 반세기에 가까운 전통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국수라는 호칭은 그 자체로 ‘한 나라의 최고수’를 지칭하는 명예 작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타이틀 이상의 무게를 지닌 타이틀 ‘국수’. 때문일까. 그 왕관은 아무나 쉽게 차지할 수 없었다. 지난 50여년 동안 200명이 넘는 기사 가운데 단 한 번이라도 국수에 오른 기사는 조남철-김인-윤기현-하찬석-조훈현-서봉수-이창호-루이나이웨이(芮乃偉) 등 단 8명에 불과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일인자가 아니고서는 정녕 차지하기 힘들었던 타이틀이었기에 국수의 족보는 곧 한국바둑의 계보로 대표된다.
이러한 국수전에 19세의 최철한 7단이 이름을 올렸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들 천하의 이창호에 도전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여기는 분위기였다. 물론 한편에서는 이 소년기사에 대해 내심 희망을 걸고 있었다.
지난해 최 7단은 1997년 입단한 이래 최고의 해를 보냈다. 박카스배 천원전에서 소띠 동갑내기인 원성진 5단을 꺾고 생애 첫 타이틀을 땄으며 연간성적 77전 65승12패로 승률상(84.42%), 다승상(65승)에 이어 신예기사상까지 주요 상을 휩쓸었다. 기세가 얼마나 등등했으면 그의 이름 앞에 ‘두기만 하면 이기는 기사’라는 수식어까지 달아주었겠는가.
그렇지만 상대는 일인자 이창호 9단, 세계가 공인한 현존 최강의 기사다. 도전1국이 벌어지기 전까지 두 기사간 전적을 보면 최 7단이 3전 전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도전1국도 ‘역시’ 이 9단의 승리였다. 그런데 도전2국에서 이변이 생겼다. 최 7단이 승리한 것이다. 최철한으로서는 생애 처음으로 이창호를 이기는 순간이었다. 바둑계에서 ‘제법’이라고 여기면서도 ‘혹시나’ 하는 분위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번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도전자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더니 마침내 승부를 2대2까지 끌고 갔다. 이 9단을 상대로 막판까지 끌고 온 것만으로도 소년기사의 무한한 가능성은 충분히 입증된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흑번(黑番) 필승, 다시 말해 흑을 잡은 쪽이 승점을 올리는 시소게임이 이어졌다는 점이다. 자연히 마지막 5국에서 과연 누가 흑번으로 둘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승부의 여신은 새 역사를 창조할 작심이었는지 최 7단에게 흑돌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또 이겼다. 흑번 필승 신화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아홉 번째 국수의 탄생.
【이세돌】
최철한 7단의 승전보를 분석하려면 먼저 이세돌 9단이 뿌린 씨앗을 살펴봐야 한다. 이세돌 9단은 한 걸음 앞서 이창호 9단을 ‘금가게’ 한 폭풍의 사나이기 때문이다. 천년요새 같기만 하던 이창호 아성의 일각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이세돌 9단으로부터였다. 다음 음악 얘기 한 토막으로 이세돌의 바둑을 설명하는 편이 빠를지 모르겠다.
‘악성(樂聖)’ 베토벤의 음악이 빈 음악계에 처음 선보였을 때 대단한 센세이션이 일었던 모양이다. 그 시대 음악정서에 비추어 상당히 모던한 요소를 담은 베토벤의 음악에 젊은이들은 열광했지만 기성세대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듯하다.
베를리오즈의 스승이면서 프랑스의 저명한 음악교수인 르쥐외르(Lesueur)는 학생들 사이에 굉장한 인기를 누리고 있던 베토벤을 애써 외면했다. 베토벤의 음악세계에 매료된 제자 베를리오즈의 성화에 못 이겨 르쥐외르는 베토벤의 C단조 교향곡이 연주되는 음악회에 가게 되었는데, 연주가 끝난 뒤 제자가 감상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선 바람을 좀 쐬야겠어. 굉장하군. 모자를 쓰려고 했을 때 내 머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어. 지금은 아무 말도 할 게 없네. 다음에 얘기하세.”
베를리오즈의 회상록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