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프란체스코 성당 하원(下院)의 제대. 벽면의 프레스코화는 치마부에가 그린 것이다.
필자는 지난해 유럽 여행길에 그렇게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그들의 환희에 찬 노래를 두 귀로 직접 들었다. 800여년 전 청빈을 몸소 실천한 성인 프란체스코(St. Francesco·1182∼1226)의 고향이자 주된 활동지였고 또 그의 유해가 묻힌 이탈리아의 아시시(Assisi)란 곳에서였다.
오전 8시30분, 로마의 테르미니역을 출발한 페루자행 열차가 로마 시내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움브리아 지방 특유의 구릉과 초지가 펼쳐졌다. 대도시 로마나 원색의 남부에서는 못 보던 목가적 풍경이라 눈길이 자주 창 밖으로 향했다. 승객들도 늘상 재잘대는 남부인들과는 달리 말수가 적고 모션도 작아 창 밖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로마를 떠난 지 꼭 2시간 만에 아시시역에 닿았다. 함께 내린 승객들 중에는 한국의 대학생 배낭족도 섞여 있었다. 남자 셋, 여자 셋 모두 여섯 명으로 한 팀이었다. 그들은 “서울을 떠날 때는 초면이라 어색했지만 여행을 계속하다 보니 피차 선입견도 없고 뒷걱정할 필요도 없어 오히려 편안해졌다”고 했다.
성(聖) 프란체스코 성당(Basilica di Santa Francesco)은 역 앞의 마을에서 4km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해서 역사(驛舍) 가게에 짐을 맡겨놓고(짐 보관소가 따로 없다) 역 앞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열차 시간과 연계되어 있는지 우리가 타자 곧바로 떠났다. 차는 옥수수와 해바라기가 자라는 밭 사잇길로 달렸고, 성당이 있는 마을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 멀리서도 잘 보였다. 사이프러스와 올리브나무가 푸른색을 발하고 성당과 종탑, 가옥들은 옅은 핑크빛을 띠고 있어 마치 우리를 반기는 듯했다.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에 쓰인 핑크빛 대리석은 인근 수바시오산(山)에서 캐낸 것이었다. 대리석의 나라 이탈리아에선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이 생산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시시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고도(古都)는 대부분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중세에 굳이 이렇게 높은 곳을 택해 마을을 조성한 것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흉내내서가 아니라 말라리아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습기가 많은 저지대에는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가 많아 고지대로 삶터를 옮겼다는 것이다.
750세 성당의 건강한 자태
버스가 멈춘 곳은 성당 입구의 성 피에트로 광장. 크고 작은 차량이 그 넓은 광장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일단 거기에서 샌드위치로 요기를 하고 목을 축인 다음 상승램프를 따라 성당으로 다가갔다. 웅장한 성당 앞은 이미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아무래도 유럽인이 가장 많았으나 한국과 일본에서 온 순례자와 관광객도 더러 눈에 띄었다.
출입구에서는 복장검사를 했다. 반바지나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한 사람은 출입을 금했다. 우리 일행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어 어쩔 수 없이 혼자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성당이 많은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에는 반바지 차림을 삼가는 것이 좋은데, 그 친구는 그걸 깜박해 귀한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은 성인이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228년 수도사 엘리아(Elia)의 설계에 따라 공사가 시작되어 1253년 완공됐고, 기초공사가 끝난 다음에는 성 지오르지오 성당에 임시로 안치돼 있던 성인의 유해도 이곳에 안장됐다. 그러니 성당의 나이도 750세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시간의 무게를 힘겨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때라면 우리 역사에서 고려 중기에 해당되는데, 당시의 건축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수덕사 대웅전 등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이탈리아에는 그 정도 건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남아 있다. 그것도 아주 건강한 자태로. 나무(木)의 문화는 지구력에서 돌의 문화를 이길 수 없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