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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기자가 만난 사람

여의도 입성한 ‘토론의 달인’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빨강이든 파랑이든 색깔 진하게 가져야”

  • 글: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여의도 입성한 ‘토론의 달인’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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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입성한 ‘토론의 달인’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룰라 브라질 대통령 포스터를 배경으로 선 노회찬 사무총장.

‘귀 있는 자 들으라’라는 제목은 서예를 하던 같은 반 이종걸군(열린우리당 의원)이 큰 글씨로 썼다. 둘이서 밤에 전교생의 책상 속에 일일이 넣고 다녔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1973년 11월 경기고는 이 사건으로 조기방학했다. 중앙정보부의 막강 수사력으로도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다. 1974년엔 경기고에서 유신반대 데모가 일어났다. 다행히 든든한 배경을 가진 동문들이 감싸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노 총장은 대학입시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방과 후에는 흥사단이나 정당을 찾아가고 돈이 생기면 청계천 고서점가에 들렀다. ‘사상계’를 읽고 막판엔 레닌까지 탐독했다. 그는 데모를 하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데모 잘하던 대학이 서울대와 고려대였다. 그는 서울대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재수를 했다. 1차 서울대에 떨어지고 2차 대학에 붙었지만 입학하지 않았다.

재수생시절부터 성북경찰서 담당형사의 감시를 받았다. 친구들이 대학에 다니며 감옥에 드나들기 시작할 때였다. 재수생 신분이면서도 대학생들과 서클을 만들어 유신반대 운동을 했다.

3수를 하던 중 입대영장이 나왔다. 신길동사무소에서 1년 반 방위복무를 마치고 대입 공부를 했다. 이번엔 붙는 쪽으로 선택해 고려대 정외과에 합격했다. 고등학교 동기생들은 76학번이지만 그는 3년 늦은 79학번이다.

대학교 4학년 때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기아자동차 생산직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예비군 관계로 대학생임이 밝혀져 탈락했다. 평생 노동자로 살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1982년 학력을 중졸로 속이고 영등포기계공고 부설 청소년직업학교에 들어가 용접기술을 배웠다.



‘왜 이 길이냐’

2급 용접기능사 자격을 취득하고 독산동 대림보일러에 취직했다. 산업용 보일러를 제작하는 회사였다. 보일러는 용접 부위를 엑스레이로 찍어 계량검사를 할 정도로 치밀한 용접이 필요하다. 기능사 자격증 덕에 일당 5000원을 받았다. 일반 근로자들이 고작 1500원 받을 때였다.

대학생이 학력을 속이고 생산직 근로자로 취업해 노동운동을 하고 근로자를 의식화하는 위장취업 현상이 공안당국에 포착돼 제3자 개입(지금은 폐기됨) 혐의로 구속되기 시작한 것은 1984년부터다. 그는 1981년도에 공장에 취직한 위장취업 1세대다. 1983년부터 제5공화국의 현실에 절망한 대졸자가 차떼기로 공장에 몰려들었다. 그는 1985년 인천에서 위장취업자 150명을 모아 서클을 만들었다.

그가 용접공으로 일하는 것을 부모가 안 것은 1985년이었다. 형사들이 가끔 부산 집에 찾아오니까 아들이 평탄하지 않은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막상 용접일을 한다고 고백하자 놀라는 기색이 완연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꽥하고 소리를 질렀죠.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냐. 네가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에 기여할 수도 있지 않느냐. 불쌍한 사람 돕는 게 그 길밖에 없느냐며 반대했습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워낙 한다 하면 하는 애로 각인돼 있으니까 못 말렸죠. 한번 격렬하게 반응한 후로는 사실상 용인해 주었어요. 어머니가 2, 3년 전에 신문기사 스크랩북 10권을 주더군요. 제가 용접일을 한다고 고백한 날로부터 10년 동안 신문에서 노동문제 기사를 오려 모은 것이죠. 스크랩북 표지에 ‘왜 이 길이냐’는 제목이 붙어 있더라구요. 아들이 노동운동을 한다니까 왜 그 길이냐고 연구하신 거죠. 국회의원에 당선된 날 아침 전화통화를 했는데 아버지(노인모·80)는 좋아하셨지만 어머니(원태순·75)는 여전히 긴장하셨어요.”

1982년 수배를 받아 1989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사건으로 구속될 때까지 7년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그는 007처럼 도망다녔다. 형사들이 자취방을 덮쳤을 때 지붕을 타고 달아났다. 경찰이 체포된 친구를 이용해 덫을 놓았을 때도 친구 뒤에 형사들이 깔려 있는 것을 먼저 발견하고 튀었다. 친구들은 경찰에 끌려가 ‘노회찬의 소재를 불라’는 압박과 고문을 당했다. 1985년 인천 5·3사태 때는 비합법 조직을 끌고 참여했다.

1987년 6월에는 인민노련을 만들어 비슷한 조직들을 통합했다. 1990년 민중당이 창당될 때 장기표 이우재 김문수 이재오가 간판이었지만 지구당 위원장의 80% 이상이 인민노련에서 나왔다. 그는 민중당이 만들어지는 과정엔 참여했지만 민중당이 창당돼 1992년 4월 해산될 때까지 감옥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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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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