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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산신령’ 김민수 “고구려사가 발에 채이는 돌이더냐”

  •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아차산 산신령’ 김민수 “고구려사가 발에 채이는 돌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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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찾는 온달은 평강공주의 남편 온달입니다. 영양왕 때 사람이어야 하고 신라와 싸웠어야 하죠. 그게 바로 기록에 나오는 고승장군입니다. 온달의 이름이 바로 고승이었고 온달이 싸우다 죽은 곳이 아차산성이었다면 진평왕이 1만 대군을 이끌고 지키러 온 북한산성이 바로 여기라는 것이죠. 다행히 여기서 北자와 漢자와 山자가 쓰인 기왓장이 다량 채집되어 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게 됐습니다. 역사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지만 실증할 수 있는 유물이 없으면 소설 쓰기밖에 안되거든요.”

거침없고 당당한 말투다. 문헌을 뒤지고 현장을 샅샅이 밟고 다니다 보면 논리로 설명이 안되는 암시를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런 상상력이나 이미지가 학문이 될 수는 없다. 예지력을 현실화하는 유물이나 문헌이 발견돼야 증명이 가능해진다. 그가 아차산에 미쳐버린 것, 마침내 산신령이 되어버린 것, 고대사 연구 외에는 다른 염을 일체 품지 않은 것, 그 비밀이 바로 그 지점에 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남달리 빼어난 감각이 시키는 대로 역사 이미지를 찾아가 보면 증명 가능한 유물이 기다렸다는 듯 발굴되어줬다.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신비가 마치 그의 손길에 목말랐다는 듯 번번이 해맑은 얼굴을 드러냈다. 고대사 연구는 고구마 넝쿨이 서로 얽히듯 한 의문이 다른 의문과 줄줄이 연관된다. 역사적 진실이 한 가지 밝혀지면 거기 잇달아 또 다른 진실이 얼굴을 내민다.

역사기록에 끊임없이 의문 제기

김민수 선생이 밝혀낸 연구 중에 ‘나당연합군의 백제정벌 루트 재검토’라는 게 있다. 그는 한강을 따라 그 물길을 차근차근 발로 밟았다. 한강 하류에서 충주까지 남한강을 따라 강 이쪽에서도 걷고 강 저쪽에서도 걸었다. 서울에서 김포까지도 걸어봤다. 실제 그 길을 한발한발 걷는 것은 책상 앞에서 사료를 뒤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그 시대 그 길을 걷던 사람들의 심리가 생생하게 짚어졌다. 물길과 벼랑과 굽이와 마을을 지나면서 숱한 의문이 저절로 풀렸다. 하지만 그렇게 무지막지한 노역을 주류 역사학자에게서 기대한다는 건 왠지 부자연스럽다.



“그럴 겁니다. 아무래도 은사나 선배의 연구방식을 답습해야 하고 그러는 중 논문 쓰는 방식이 굳어버릴 우려가 있지요. 내가 역사학을 독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너지 아세요? 용어였어요. 똑같은 것도 계보에 따라 다르게 말해요. 세형동검, 좁은 놋당검, 한국형 동검이 결국 같은 말이거든요. 알고 나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거죠. 요즘은 논문에 쓰는 용어만 봐도 출신학교를 금방 알 수 있어요. 내가 정식으로 학위를 받고 기성학계 한 귀퉁이에 끼여들기를 원했다면 이런 논문들은 아마 쓰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한강에서 금강까지, 다시 서울에서 김포까지 발이 닳도록 쏘다닌 이유는 어디 있을까. 역사기록을 당연시하지 않고 거기 나타난 의문을 풀어보기 위해서다. AD 660년 나당 연합군은 백제를 정벌한다. 당의 소정방은 18만 수군을 이끌고 서해안 덕적도에 미리 도착해 있었다. 신라의 5만 대군은 지금의 이천이라고 일컬어지는 남천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신라 태자 법민(무열왕의 아들, 후에 문무왕)은 6월23일 미리 소정방을 찾아가 7월10일 백제의 남쪽에서 만나자는 작전을 짜고 돌아온다. 재야사학자 김민수는 이쯤에서 면밀하게 계산을 시작한다.

‘태자 법민이 덕적도에서 남천까지 돌아오는 데는 하루가 걸릴 것이다. 급히 신라군을 정비해 출정시킨다 해도 다시 하루는 족히 걸릴 것이다. 신라군은 남은 15일 동안 남천에서 백제의 도성 부여를 우회하여 그 남쪽 황산벌까지 진격해야 한다. 나당의 침입을 미리 알고 있는 백제는 방어 전략에 몰두할 텐데 아무 저항 없이 신라의 5만 대군을 이끌고 과연 보름 만에 황산벌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 더구나 당시 신라는 백제에 밀려 낙동강까지 후퇴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쯤에서 무릎을 탁 친다. 신라군은 육로로 간 게 아니다. 신라군도 당과 마찬가지로 수군이었다! 그런 가설의 증거를 찾기 위해 그는 뙤약볕과 으스름을 마다 않고 한강변을 걷고 또 걸었던 것이다.

“신라군은 가다가 황산벌 전투를 치르느라고 소정방과의 약속에 하루가 늦었어요. 그 일로 소정방은 신라군의 선봉장을 참수하려고 해요. 이때 김유신이 황산벌 전투를 몰라서 저런다고 항변하는 내용이 나오거든요. 황산벌이 지금의 논산이라면 지척에 있었던 당군이 몰랐을 리가 없지요. 삼국시대 말기에도 포차와 대포가 있었으니 소리가 요란했을 테고 패잔병이나 피난민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몰랐다는 건 거리가 멀다는 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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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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