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입이 즐거운 남도기행 전남 무안·함평

‘호남가’ 한 대목에 흐느적, 白蓮 앞에선 합장

  • 글: 김현미 차장 khmzip@donga.com 사진: 김성남 차장 photo7@donga.com

    입력2004-07-30 15: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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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도행을 결심했을 때 허리띠부터 늦춰 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 아니라 ‘연꽃 구경도 식후경’이다.
    • 무안의 5미(五味), 함평의 특산물을 두루 맛보지 않고 어찌 돌아가랴. 야트막한 산자락, 오밀조밀 논밭 지나 곧바로 탁 트인 바다가 나오는 이 땅에서 나그네의 발길은 더디고 가슴은 넉넉해진다.
    입이 즐거운 남도기행  전남 무안·함평

    6월 양파 수확을 끝내고 수박을 심는 농부들(무안). 한여름 더위를 식혀줄 수박 출하도 7월이면 끝나고 이 밭에는 다시 김장무가 심어진다. 그렇게 밭은 쉼 없이 인간을 먹여 살린다.

    차창을 내리자 밀려드는 매운 내에 정신이 퍼뜩 든다. 도로 옆에 쌓아둔 양파자루가 붉은 벽돌담처럼 길게 뻗어 있다. 이정표를 확인하지 않아도 신통한 코는 이미 전남 무안군에 진입했음을 감지한다. 전국 양파 생산량의 20%가 넘는다는 무안 양파는 게르마늄을 함유한 황토밭에서 자라 맛이 좋을 뿐 아니라 약용성분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양파를 사료로 먹여 키워 육질이 좋다는 양파한우, 매콤달콤한 양파김치 등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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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련대축제’가 열리는 백련지의 연꽃들.

    그러나 허리띠를 풀기 전에 볼거리부터 챙기는 게 이 고장에 대한 예의다. 첫 코스는 회산 백련지(白蓮池). 세상의 기운이 돌고 돌아 이곳에 모인다 해서 회산(回山)이란다. 요즘은 무안 하면 ‘백련지’부터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10만평 저수지가 연꽃방죽이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일제 때 인근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이 저수지를 만들었다는데, 60~70여년 전 한 마을주민이 백련을 심은 것이 계기가 돼 연꽃밭으로 바뀌었다. 토사가 쌓여 수위가 낮아질수록 연꽃은 번성했고 1990년대 들어서는 10만평 저수지가 연잎에 가려 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됐다. 백련, 수련, 가시연, 왜개연, 홍련이 6월부터 9월까지 쉼 없이 핀다.

    매년 연꽃의 절정기에 맞춰 ‘무안백련대축제’가 열리는데 올해는 8월14일부터 22일까지로 예정돼 있다. 그러나 연꽃을 바라보며 부처님의 ‘염화시중(拈華示衆)’을 체험해보겠다면 축제기간은 피하는 게 낫다. 그 무렵이면 백련교(280여m의 나무다리) 위를 사람에 밀려 다닐 정도기 때문. 대신 연꽃의 개화가 막 시작되는 6월말 백련지에 가보면 황소개구리의 ‘끄억’ 하는 울음소리와 ‘첨벙’ 하는 물소리에 흠칫 놀랄 만큼 고즈넉하다. 곧장 백련지로 가려면 서해안고속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다 일로IC까지 내달아 815번 지방도로를 거쳐 820번 도로를 타면 된다. 이곳을 기점으로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무안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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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안 용월리 상동마을 청룡산에 자리잡은 백로·왜가리떼.

    허기를 좀 참으며 꼭 들러볼 곳이 있다. 무안IC 부근에서 가까운 용월리 상동마을 백로·왜가리(천연기념물 제211호) 번식지다. 어둠이 짙게 깔릴 무렵 먹이를 물고 돌아오는 어미새들을 볼 수 있다. 그동안 어린 새끼들의 서툰 날갯짓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백로, 왜가리, 해오라기 등 철새들이 상동마을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라고 한다. 4000마리나 되는 철새가 청룡산 소나무숲에 앉아 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 누군가 큰 붓으로 흰 점을 찍어놓은 것 같다. “저 새들 덕분에 우리 마을에는 화(禍)가 없지. 외지에 나간 자식들도 교통사고 하나 안 당하고, 6·25 때도 주민들이 모두 무사했다면 말 다했지.” 양파 수확을 끝내고 마을 입구 정자에 모여 땀을 식히는 촌로들의 얼굴이 넉넉하다.



    사실 무안은 볼거리보다 먹을거리의 고장이다. 양파한우고기, 기절낙지(낙지 보고 놀라고, 그 맛에 놀라고, 가격에 놀라 세 번 기절한다는 세발낙지), 도리포 숭어회, 명산 장어구이, 돼지짚불구이가 무안 5미(味)다. 어느 하나 후회는 없겠지만 오늘 저녁은 짚불구이로 정하고 동남쪽 방향의 몽탄면 사창리 쪽으로 갔다. 이 마을에서 10년 넘게 짚불구이를 해온 김정희, 고은숙 부부의 ‘녹향가든’(061-452-6990)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완전히 떨어졌다. “짚불은 화력이 좋아서 고기가 순식간에 익고 기름이 쫙 빠져서 담백하죠. 볏짚은 2년 묵혀 완전히 건조한 것만 씁니다.” 고은숙씨는 석쇠에 가지런히 놓은 삼겹살에 천일염을 술술 뿌려 구워내면서 눈 한 번 깜짝 하지 않는데 구경꾼만 매운 연기에 눈물을 찔끔거린다. 이렇게 구운 삼겹살은 뻘게장에 찍어 먹고 뜨거운 밥에 뻘게장을 쓱쓱 비벼 양파김치 한쪽씩 얹어 먹으면 더 무슨 바람이 있으랴.

    전남 무안은 서쪽으로 서해바다와 신안군, 동쪽으로는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나주, 북동쪽으로 함평, 남서쪽으론 목포와 만난다. 다음 행선지는 함평이다. 함평은 5월 나비축제가 열려 한바탕 관광객이 몰려왔다 떠난 후였다. 가을에도 한국 100경(百景) 중 하나로 꼽히는 불갑산 자락의 용천사 꽃무릇 군락이라는 훌륭한 볼거리가 있지만 함평군은 연중 내내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대동저수지 부근에 자연생태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올 연말쯤 자연생태공원을 산책하고 돌머리 해수욕장에서 ‘해수찜’을 즐기는 관광코스가 생길 것 같다.

    입이 즐거운 남도기행  전남 무안·함평

    불을 붙이자마자 짚은 훨훨 타올랐다. 숙련된 솜씨로 삼겹살 짚불구이를 하는 고은숙씨(좌). 선짓국과 함께 먹는 함평 육회비빔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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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파 집하장에서 수확한 양파를 크기별로 다시 분류하는 아낙들.

    함평 역시 먹을거리의 고장이다. 선짓국비빔밥, 한우생고기, 보리새우, 세발낙지. 맛에 관한 한 절대 무안에 뒤지지 않는다. 암소고기만 사용해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육회비빔밥을 먹기 위해 함평읍내 시장골목의 ‘목포식당’(061-322-2764)으로 갔다. 텁텁할 만큼 매운 고추장에 밥을 비벼먹다 보면 혀끝이 얼얼한데 맑은 선짓국 몇 술 뜨면 금세 가라앉는다.

    함평군을 다니다 보면 어디서나 나비문양과 ‘천지(天地)’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호남가’ 첫머리에 등장하는 ‘함평천지’는 현재 함평 특산물의 공동 브랜드로 사용된다. 함평천지 쌀, 함평천지 오이, 배, 토마토. 최근에는 함평군내 산딸기 재배농가가 크게 늘자 산딸기 와인(레드마운틴) 생산도 시작했다. 한여름에 얼려 먹는 ‘아이스 홍시’에 이어 산딸기 와인이 함평 명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함평 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 바라보니, 제주 어선 빌려 타고, 해남으로 건너올 제, 흥양에 돋은 해는 보성에 비쳐 있고, 고산의 아침 안개, 영암을 둘러 있다.” 다음에는 ‘호남가’ 한 대목이라도 배워와야겠다고 생각하며 함평IC를 빠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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