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1825년 이래 미 국무장관 인준투표에서 가장 많은 반대표였다. 바버라 박서 의원(민주당)은 “이라크와의 테러전쟁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반대표를 던졌다고 밝혔다. 라이스에겐 백악관 안보보좌관 시절, 사담 후세인이 테러단체인 알카에다와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은 채 부시를 보좌했다는 책임이 따른다.
그 청문회에서 라이스는 몸속에 흐르는 강경 보수의 색깔을 드러냈다. ‘폭정의 전초기지(Outposts of Tyranny)’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 표현은 9·11 테러 뒤인 2002년 초 국정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이 이란, 이라크, 북한을 가리켜 ‘악의 축(axis of evil)’이라 규정한 발언의 후속편이다.
라이스가 “미국이 자유를 신장시켜야 할 의무를 지닌” 폭정의 전초기지로 꼽은 나라는 이란, 쿠바, 짐바브웨, 벨로루시, 버마 그리고 북한이다. 부시 대통령은 뒤이어 있었던 2기 취임식 연설에서 “미국은 전세계적으로 폭정에 맞서 싸우겠다”고 큰소리쳤다. 당시 제4차 6자회담 재개시점을 놓고 저울질하던 북한의 비난과 반발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북한은 6자회담 무기한 불참과 더불어 핵무기 보유 발언으로 맞섰다.
라이스는 국무장관에 취임한 뒤 지난 10개월 동안 외교적으로 다자주의적인 제스처를 보여왔다. 라이스는 스스로를 ‘실용적 이상주의자’로 여긴다. 실제로 라이스는 복합적 이미지를 지녔다. 북한과도 협상하는 현실주의자의 모습이지만, 미국적 가치(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를 지켜나가고 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선 반미세력을 공격적 외교로 봉쇄해야 한다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주장에 동조해온 게 사실이다.
겉은 다자주의, 속은 강성
대선을 앞둔 조지 W. 부시 후보의 외교정책 보좌관으로 막 합류했던 1999년 말 라이스(당시 스탠퍼드대 교수)가 미 외교협회가 발행하는 유력 격월간지 ‘포린 어페어즈’ 2000년 1∼2월호에 발표한 글에도 그의 강경 성향이 드러난다. ‘캠페인 2000 : 국가이익을 증진하기 위해’라는 제목의 글은 부시 후보의 대외정책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이 글에서 라이스는 반미(反美)노선을 걷는 이라크, 이란, 북한 3개국을 이른바 불량체제(rogue regime)로 규정하면서 체제변화를 언급했다.
▲북한의 경우, 라이스는 클린턴 행정부가 이라크에서 그랬듯이 때론 무력을 쓸 것처럼 위협하고 때론 뒤로 물러서는 등 대북정책에서 실패했다고 단정하면서 “그런 실패를 거울삼아 미국은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라이스는 “만일 북한이 대량살상무기(WMD)를 개발했다고 해도 그것을 쓰려는 어떠한 시도도 (미국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나라 자체가 말살(obliteration)될 것이므로 쓸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강경한 견해를 밝혔다.
▲이라크의 경우, 라이스는 “사담 후세인은 WMD를 개발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단정하면서 “후세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므로 미국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란의 경우, 라이스는 “이란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국제체제를 이슬람 근본주의로 대체하려 한다”고 비난하면서 “이란은 미국과 유럽 국가들을 겨냥한 테러를 돕고, 미국의 우방인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과의 국방협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라이스의 친(親)이스라엘 편향은 아랍인들의 분노를 샀다. 지난 1월 의회 국무장관 인준을 위한 상원 외교위 청문회에서 행한 라이스의 발언은 그의 대(對)중동 인식이 지닌 편향성을 드러낸다. “중동의 넓은 지역이 독재와 절망, 분노로 남아 있는 한 미국인과 우리의 친구들(유대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극단주의자들과 집단적 움직임은 계속 생겨날 것이다” “팔레스타인에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은 성지(聖地)에서의 유혈투쟁을 끝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민주주의 국가인데,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 정치권은 민주화가 되지 않아 유혈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담겨 있다.
냉정한 시선으로 본다면, 라이스 외교의 본질은 매파의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여러 대외정책을 봐도 강경 일색이다.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무장해제를 강력히 요구하면서, 무장해제 없이는 2006년 1월로 예정된 팔레스타인 총선에 참여할 수 없다는 강경방침을 거듭 밝혔고(이 방침은 10월 들어 극적으로 철회됐다) ▲시리아를 압박하면서 무력에 의한 정권교체 가능성을 은근히 흘리고 있고 ▲이란이 핵의 평화적 이용을 거듭 천명했는데도 유엔 안보리 경제제재를 위협하고 있고 ▲결정적으로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본질과 문제점을 솔직히 밝히기는커녕 이슬람권 민주화론을 내세우는 점이 라이스 외교의 본질과 한계를 말해준다.
볼턴 유엔대사 방출은 잘한 일?
라이스가 국무장관으로서 잘한 일로 평가받는 대목이 국무부의 강경파 존 볼턴(전 국무부 차관, 현 유엔대사)의 방출이다. 볼턴이 국무부에 남아 있었다면, 6자회담이 미국의 강경 기조로 말미암아 삐걱거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부시 행정부에 비판적 논조를 펴온 ‘뉴욕타임스’는 매파인 볼턴 국무부 차관을 유엔대사로 내보냄으로써 대북정책 같은 위험한 분야에서 볼턴을 제거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유엔으로서는 볼턴이 전혀 반갑지 않은 인물이다.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일방주의적 오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가 존 볼턴 유엔대사다. 그는 1기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부 차관으로 초강경파를 대표하던 인물이다. 2003년 여름 1차 6자회담을 앞둔 상황에서 한국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포악한 독재자’, 북한을 ‘지옥’에 비유하는 비외교적인 연설을 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기본적으로 6자회담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를 좌초시키고 싶어 했다. 북한을 봉쇄함으로써 북한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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