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호

노무현 정부의 ‘2012년 한반도 안보 시나리오’

차기 대통령 임기 말까지 독자 방어, ‘돈 되는’ 평화, 남북 단일경제 완수?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5-12-15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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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방부의 전시 작통권 환수와 남북 군사협상 준비, 통일부의 평화체제 방안 및 포괄적 경협 계획, NSC·외교부의 6자회담과 북핵 사찰·검증 로드맵…. 2005년 하반기 들어 한반도 안보환경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련의 중대 방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눈여겨볼 것은 이들 계획이 모두 ‘2010년대 초반’이라는 특정 시점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이 같은 복안(腹案)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은데….
    노무현 정부의 ‘2012년 한반도 안보 시나리오’

    10월21일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부 장관(왼쪽)과 윤광웅 국방부 장관(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서울 국방부에서 한미연례안보협의회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장면1.지난 10월 중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기획실은 북핵 사찰검증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소집했다. 2003년부터 북한의 핵 능력에 관한 기술자문회의가 몇 차례 열렸다 흐지부지됐지만, 이번엔 성격이 조금 달랐다. 과학기술부 산하 원자력통제기술센터의 핵 물질 검증 및 사찰분석 전문가들과 관련 부처 당국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논의가 진행됐다는 전언이다.

    회의의 핵심주제는 ‘북핵 사찰 검증의 로드맵’. 11월9일부터 열리는 5차 6자회담에서 관련 논의가 초보적으로라도 진행될 경우 한국측이 제시할 안(案)의 밑그림을 그린다는 목표였다. 회의는 전문가들이 제안한 초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식으로 진행됐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인원 및 능력 등을 고려해 북한 전역에 대한 사찰 및 검증에 필요한 시간을 산출하는 작업도 병행됐다. 대체적인 결론은 서두른다 해도 2년, 북한 당국과 밀고 당기기가 계속될 경우 5년 이상 장기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고 한다.

    #장면 2. 7월1일 국가정보원은 1급 상당의 ‘국가정보관(NIO)’을 신설해 민간전문가 네 사람을 영입했다. 눈길을 끈 것은 북한 분야의 J모 교수. 인선과정에서는 주로 북한 군사나 정치 분야 전문가들이 거론됐지만, 막판에 ‘발탁’된 것으로 전해진 J교수는 국제금융 전문가다. 북한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국제금융기구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주제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한 J교수의 발탁을 두고, 국정원 주변에서는 “본격적인 북한 경제개발계획 수립과 관련해 전문인력이 필요하다는 정부 고위관계자의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10월20일 통일부가 낸 자그마한 공고도 화제가 됐다. 평화체제 구축방안과 남북경협, 법령 정비 등을 위해 정치학·경제학 박사와 변호사 6명을 사무관으로 채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관련 분야 박사’라면 실무보다는 연구에 가까울 테고, 이는 이제야 인력을 채용해 로드맵 연구부터 시작한다는 뜻이므로 늦은 감이 있다고 평했다.

    각 부처의 이 같은 전문인력 충원은 이 무렵 정부가 대규모의 포괄적 남북경협 방안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오면서 더욱 의미심장해졌다. ‘북방 경제구상’ ‘한반도 평화경제’ 등의 이름으로 회자되던 이 계획은, 향후 7~8년 내에 에너지, 통신, 물류 등을 기반으로 남북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까지 포함하는 공동경제권 형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11월9일 ‘한겨레’는 “8~10개 정도의 세부계획으로 이뤄진 포괄적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14개 관계부처 회의를 3차례 열었으며, 통일부는 실행비용으로 매년 2조~3조원이 적절할 것이라고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전했다.



    #장면 3. 10월27일 주요 일간신문에는 ‘정부 고위관계자의 말’을 인용, 현재 한미연합사령관이 갖고 있는 한국군의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10월21일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이 방한해 열린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한국측이 ‘개념적인 수준에서’ 전시 작통권 이양시기를 거론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관계자는 “2015년보다는 앞당겨 이뤄져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며 “우리는 이미 자체적으로 이양시기와 일정을 설정해둔 상태”라고 밝혔다.

    익명의 이 ‘정부 관계자’는 NSC 이종석 사무차장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차장은 NSC 상황실을 방문한 기자들과 오찬을 함께하며 비보도를 전제로 이 같은 내용을 밝혔지만, 기자들은 정부와의 협의하에 이를 ‘고위관계자’ 발언으로 보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전에도 이 차장의 발언을 익명으로 처리해 보도한 경우가 자주 있었던 까닭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 차장이 이 자리에서 “6자회담과 평화협정 논의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환수 일정도 앞당겨질 수 있다”고 밝힌 부분. 고위당국자가 작통권 문제와 북핵 문제, 평화체제 문제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을 밝힌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2005년 하반기 들어 작통권 문제가 갑자기 이슈가 된 까닭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장면 4. 10월6일 청와대는 공사19기인 김명립 공군사관학교장을 대장으로 승진시켜 합동참모본부 차장에 임명했다. 합참차장은 통상 중장이 임명되던 자리로, 대장이 임명되기는 10년 만이다. 한 달 뒤인 11월10일 ‘중앙일보’는 합참에 “북한군과의 군사협상을 맡을 대북정책과(가칭)를 신설하고 전시 작전통제권을 환수하기 위해 작전본부를 대폭 개편할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전통적으로 합참차장은 대북 군사협상을 책임진다. 신설된다는 ‘대북정책과’는 합참 차장을 지원할 것으로 전해졌다. 합참차장의 대장 승격과 지원조직 신설은 정부가 군사협상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6자회담과 평화협정 논의가 진전되면, 전방에 집중된 전력을 후방으로 이동하거나 병력·무기를 감축하는 협상이 본격 진행되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관련 부처에서는 그간 여러 차례 군비통제 협상 준비를 제의했지만, 구체적인 움직임이 드러난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큰 그림’이 있다

    2005년 가을, 안보부처 당국자들은 바쁘기 이를 데 없다. “머리가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라는 하소연이 쏟아진다. 앞서의 사례는 ‘물밑의 움직임’일 뿐, 최근 관계부처에서 진행되고 있는 ‘로드맵’ 혹은 ‘계획’ 관련 작업은 공개된 것만 해도 6~8개에 이른다. 모두 한반도 안보지형의 근본을 바꾸는 엄청난 그림들. 국방부의 전시 작통권 환수 및 국방개혁과 남북 군사협상, 통일부의 평화체제 구축 및 포괄적 경협 구상, NSC와 외교부의 6자회담과 북핵 사찰·검증 로드맵 등이 주요 리스트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계획이 지향하는 시점이 엇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점이다. 작통권 환수가 ‘2015년보다 앞당겨진 시점’, 평화체제와 공동경제권 관련 계획이 ‘향후 7~8년’, 6자회담을 다자안보 틀로 연결해 상설화하는 방안 도 ‘2010년대 초반’으로 목표 시한이 엇비슷하다. 이들 계획이 제대로 추진되기 위한 전제조건, 즉 사찰 검증을 통해 북핵 문제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작업의 최장시한 역시 비슷하다.

    이렇게 놓고 보면 노무현 정부가 한반도 안보환경을 둘러싸고 주요 이슈를 연결한, 일종의 ‘청사진’을 갖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각각의 이슈가 따로따로 진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점을 목표로 얽히고설키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정부 당국자도 이러한 그림이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각각의 사안을 설명하는 일에는 적극적이면서도, 그 시점 이후 한반도 안보환경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총체적인 그림’이나 그게 과연 언제쯤일 것이냐에 대한 ‘구체적인 시한’을 공론화하는 일에 나선 일은 드물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노 대통령 본인의 언급을 살펴보자. 노 대통령은 지난 3월9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한국군은) 앞으로 10년 이내에 스스로 작전권을 가진 자주군대로서 발전해나갈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비공개 석상에서 한 발언은 좀더 구체적이다. 임기 초반 ‘자주국방’ 문제를 놓고 노 대통령과 군 수뇌부가 이견을 보일 당시 관련 회의석상에서 대통령은 “내 임기 내에 자주국방의 틀을 완성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군 수뇌부가 ‘준비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하자, ‘이번 임기 안에 기초를 다지고 다음 대통령의 임기 말까지 완성하는 것’으로 봉합됐다는 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이후 청와대에서 작통권 환수시점은 2012년과 2015년을 오가며 검토됐다.

    ‘다음 대통령의 임기 말까지.’ 앞서 나온 다른 이슈들의 시점이 ‘정치적 맥락’을 갖게 되는 순간이다. ‘2010년대 초반’이라는 공통된 목표시한이 다음 대통령의 임기 말이라는 시점과 맞아떨어지는 까닭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번 정부에서 큰 방향을 잡아놓고 다음 정부가 이를 계승해 청사진을 완성하는 형태로 정리할 수 있다.

    앞서 열거한 ‘계획’ 혹은 ‘구상’은 노무현 정부 초기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03년 8월 국정홍보처가 펴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자료는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 군비통제, 연합지휘체제 조정(작전통제권 환수), 남북 경제협력을 통한 북한 경제 재건 등의 이슈를 3단계 로드맵의 형태로 설명하고 있다. 북핵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고 평화체제의 토대를 마련하는 1단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구체적 조치를 추진하는 2단계, 평화체제를 제도화하는 3단계가 그것이다.

    이는 2004년 3월 NSC가 펴낸 ‘참여정부의 안보정책 구상’ 책자에도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실려 있다. 나중에 삭제되긴 했지만, 이 책자의 초안에는 이들 사안, 특히 군사분야 어젠더의 구체적인 일정과 시간표가 포함돼 있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때 검토된 목표시점도 2010년대 초반이었다.

    국내 논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최근 정부 관계부처의 분위기는 이러한 초기 로드맵의 첫 단계인 ‘북핵 해결의 전기 마련’이 지난 9월19일 4차 6자회담에서 합의를 통해 달성됐다고 보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다음 단계인 ‘구체적인 조치’를 위해 어젠더별로 세부계획을 만들고 이를 한꺼번에 운용해나갈 준비를 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한 NSC 관계자는 “중첩된 모순을 중첩된 방법을 통해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제각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큰 틀의 그림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보면 주요 사안의 로드맵 구성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분명해진다. 북핵 사찰검증 일정을 기본으로 평화체제 구축이 함께 추진되고, 이와 맞물려 남북간 경제협력을 가속화하면서 군축협상 등으로 연결해나간다는 그림이다. 장기적으로 군축협상이나 평화협정을 추진하려면 한국군이 ‘당사자 자격’을 가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미군으로부터 작전통제권을 환수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작전통제권을 환수하려면 한국군의 능력을 강화하는 국방개혁과 군 구조개편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 각각의 로드맵이 완성되는 2010년대 초반, 구체적으로는 ‘2012년’의 한반도 상황에 대해 노무현 정부는 어떤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과 문서들을 바탕으로 대체적인 그림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북한 전역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주변국 등의 핵사찰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어 한반도 내에 핵무기 혹은 핵무기 계획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공식 확인된다. 이를 계기로 그간 남북한 사이에 논의되어온 군축협상이 전기를 맞아 휴전선을 중심으로 배치됐던 북측의 장사정포와 남측의 전방 밀집 전력은 상당부분 후방으로 이동하거나 폐기된다.

    공중조기경보통제기 4대를 확보한 한국군은 그간 미국에 대거 의존하던 군사정보를 스스로 확보하는 능력을 완비한다. 또한 기능이 강화된 합참은 관련부서의 반복훈련을 통해 작전계획을 직접 작성할 수 있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미군으로부터 전시작통권을 환수한다. 한국군의 숫자는 상당수 감소됐지만, 활동반경을 넓힌 무기체계로 일본 등 주변국 위협에 본격 대비하기 시작한다.

    남북한 사이에는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그간의 ‘정전체제’가 끝나고 유엔군사령부와 한미연합사령부는 해체된다. 휴전선 관리임무는 미군 등 유엔군을 제외하고 상호 감축이 진행 중인 남북한 군대가 맡게 된다. 남북은 이미 서로 체제를 인정하고 영토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담은 헌법 등을 개정함으로써, 현재의 휴전선은 군사대치선이 아닌 ‘국경’의 형태에 가까워진다. 안정된 관계를 바탕으로 남북연합 등 통일논의가 구체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다.

    6자회담은 핵 문제가 마무리된 후 다자간 대화채널로 발전해 OSCNEA(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North East Asia·동북아안보협력기구)가 상설된다. 한국-일본-미국이 연대해 북한-중국-러시아 연대와 대항하는 형태의 국제 정세는 사라지고, 한국은 지역 내에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균형추 기능을 하게 된다.

    이처럼 듣기만 해도 ‘장밋빛’이 넘쳐나는 그림을 놓고 보면, 정부가 왜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다. 이에 대해 당국자들이 가장 먼저 꺼내는 대답은 ‘국내 정치’다. ‘청사진’만 놓고 보면 매우 그럴 듯하지만 들여다보면 수많은 미묘한 전제가 깔려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정치적으로 엄청난 폭발력이 있다는 것이다.

    10월24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개헌이 논의되는 시점에서 (한반도와 부속도서 전체를 영토로 규정하는) 헌법의 영토조항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평화체제나 남북연합 단계를 생각하면 북한을 사실상의 정부로 인정하는 법적 정비를 연구해야 한다는 발언이었다. 이러한 발언내용이 알려지자 야당과 보수언론에서는 “체제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주한미군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작통권 환수로 ‘자주국방’을 이루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도 수차례 반발에 부딪힌 바 있다. 노무현 정부가 상정하고 있는 2012년 한반도 청사진은 북한 체제에 대한 인정과 미국으로부터의 자주권 신장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지만, 이에 대한 국내 여론은 심각한 이념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다는 게 당국자들의 토로다. 정부가 ‘큰 그림’을 강조하고 나설 경우 파장을 감당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2010년대 초반’이라는 시점에 담긴 정치적 맥락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앞서 설명했듯 이 시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다음 대통령의 임기 끝’이다. 차기 정부가 현 정부의 ‘청사진’을 그대로 수용, 발전시켜야만 가능한 그림인 것이다. 2007년 대선을 통해 이 같은 그림이 유권자들의 ‘검증’을 거쳐야 하고, 실패할 경우에는 백지화된다 해도 할말이 없는 상황이다.

    문제는 경제다

    이런 의미에서 여당의 유력 대권후보인 정동영 장관이 NSC 상임위원장을 겸임하며 사실상 외교안보 분야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는 현재의 구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권 일각에서 정 장관이 대선과정에서 앞서 설명한 ‘청사진’을 자신의 정치적 비전으로 활용할 것이라고 분석하는 것도 이 때문. ‘청사진’의 기반조성과 실행계획 작성을 자신이 주도했으므로, 대통령이 되면 임기 말까지 이를 실현해내겠다는 식의 어젠더 세팅이다.

    정 장관의 측근들 또한 대선에서 그의 ‘안보 분야 경력’이 선거운동 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청사진’이 선거국면에서 ‘효과’를 발휘하려면 국민이 직접 체감할 수 있는 형태여야 한다는 견해가 강하다. 정치·안보 사안으로 남겨두지 말고 경제 문제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 ‘한반도 평화’보다는 ‘평화를 통해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이 훨씬 강력하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보면 그동안 정 장관이 여러 차례 남북 경제협력을 가속화·정례화할 필요가 있다고 힘주어 강조한 일은 새삼 의미심장하다. 앞서 설명한 대로 통일부가 청와대에 보고한 ‘포괄적 경협계획’이나, 10월10일 정 장관이 국회 국정감사에서 밝힌 남북협력공사 설립방안이 그 사례다. 남북협력공사 방안은 정부가 주도해온 경제협력을 정례화해 주관하는 공기업을 만들어 중국과 러시아 등 북방 경제까지 담당하게 한다는 안으로, 지난 여름부터 정 장관 주변에서 거론되던 아이디어였다. 공사가 설립될 경우 통일부가 마련 중인 ‘포괄적 경협 계획’의 주요 수단이 되리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경제 분야의 ‘청사진’을 앞서 설명한 ‘큰 틀’과 연결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남북협력공사를 통해 개성공단과 대북송전 등 다양한 경제협력을 꾸준히 진행한 결과, 2012년 무렵 남북한 경제는 상당부분 통합된다. 국제금융 자본이 한국을 통해 북한에 투입되고, 저렴한 북한 노동력을 이용하는 한국기업의 수출경쟁력은 대폭 강화된다. 북한의 경제개혁·개방은 돌이킬 수 없는 궤도에 오르고, 경제협력은 중국, 러시아 일부를 포괄하는 형태로 진행되어 ‘동북아 경제권’이 형성된다. 한반도는 남북을 관통하는 송전망과 철도 등을 통해 지역 내 에너지와 물류 이동의 교량 역할을 하게 된다. 북한은 이를 통해 경제개발의 기반을 마련하고, 한국은 ‘동북아 경제중심’의 위치에 서게 된다.

    사전준비 부족?

    그러나 남북협력공사 추진 방안에 대해 청와대가 “아직 이르다”며 제동을 걸었다는 ‘동아일보’ 11월7일자 보도는 이 같은 ‘급속한 흐름’이 정부 안에서도 완벽한 공감대를 형성하지는 못했음을 시사한다. 11월1일 통일부가 이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기획예산처 등 경제부처 관계자들이 재정문제와 예산조달 문제 등을 들어 난색을 표했다는 것이다.

    관련 사실이 알려지자 ‘청와대가 본격적인 대규모 경협을 추진하기에는 아직 핵 문제가 가시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자연스레 제기됐다. 이봉조 차관 등 통일부 당국자들은 “핵 문제는 6자회담에서 논의되고 있으므로 협력공사나 경협과 연계할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지만, 이는 그간의 설명과는 거리가 있다. ‘포괄적 경협계획’ 등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으로 상징되는 큰 ‘청사진’의 일부이고, 이는 북핵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본격 추진이 가능하다는 게 지난 2년간의 논리였기 때문이다.

    정부 안에서도 9월 6자회담 합의로 핵 문제가 해결 수순에 접어들었다는 인식이나 이후 진행방안 등이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견해가 흘러나온다. 9월 합의문이 북핵 해결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임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앞으로도 장애물이 여럿 남아 있는 것이 사실. 길고도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 사찰·검증 문제나, 그 기간에 북미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등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평가가 정확하다. 11월9일부터 사흘간 열린 5차 6자회담에서 북한과 미국 사이에 감돈 ‘냉기’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그간 ‘북핵 문제 해결’에 치여 평화체제 로드맵 실행준비 작업에 거의 신경 쓰지 못했던 NSC 등 외교안보 참모들의 ‘한계’를 감안하면, 앞으로도 이행방안이 기대만큼 획기적으로 추진되리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서두에서 본 것처럼 전시 작통권 환수나 평화체제 구축 등의 ‘실행플랜’ 작업도 길게 봐야 지난해 가을, 짧게 보면 6월 6자회담 재개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남북협력공사 방안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한 재원마련 방안이나 실행계획을충분한 시간을 두고 검토했다면 경제부처의 공감대를 얻지 못했을 이유가 없다는 견해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9월 합의 이후 각 안보부처에서 다양한 로드맵을 한꺼번에 밀어붙이다 보니 마음이 급해졌고, 충분한 상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경제부처는 이에 당혹감을 느껴 이의를 제기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북핵 문제 해결의 전기는 과연 마련된 것인가’를 두고 정부 안팎에서 제기되는 가장 심각한 염려는 미국의 향후 행보에 관한 이견에서 나온다. 쟁점은 미국이 9월 6자회담에서 ‘경수로 논의’와 ‘평화체제 구축’이 포함된 합의문에 동의한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 ‘2기 부시 행정부는 1기와는 달리 동북아에서 유럽과 같은 다자 안보체제를 추진하는 것으로 전략이 바뀌었다’는 견해와 ‘이라크전과 허리케인, 리크 게이트 같은 상황에 몰려 잠시 고삐를 늦췄을 뿐’이라는 견해가 맞선다. 전자가 맞다면 9월 합의는 문제해결의 시작이지만, 후자라면 ‘잠깐의 휴지기’일 뿐이다.

    특히 한반도 평화체제나 동북아 다자안보틀 같은 구상에 적극적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등, 노무현 정부의 ‘청사진’과 일정부분 ‘코드’가 통하는 ‘협상파’에게 주어진 권한이 과연 어디까지인가가 관심의 초점이다. 일각에서는 이들이 북핵 문제와 관련해 체니 부통령 등 네오콘으로부터 정책결정권을 상당부분 확보했다고 말하지만, 이는 단기상황에 그칠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찮다. 몇몇 당국자는 “어쨌든 당장은 네오콘이 코너에 몰려 있는 만큼, 이를 최대한 이용해 해결흐름을 일정 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한미동맹이라는 ‘약한 고리’

    ‘미국의 의중’을 둘러싼 이 같은 우려는, 외연을 넓혀보면 ‘2012년 청사진’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로 연결된다. 바로 한미동맹에 관한 것이다. 정부 관계자들과 공식자료는 전시 작통권이 환수되고 평화체제가 수립된 후에도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할 것이며 한미동맹도 굳건히 유지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2012년 청사진’이 유엔사와 연합사의 해체 같은 민감한 사항을 포괄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상황이 그리 간단치 않다. 평화체제 협상과정에서 북한이 주한미군의 역할을 과연 어디까지 인정할 것이냐는 피할 수 없는 쟁점이다.

    특히 한반도 방어를 한국군이 주도하는 ‘자주국방’이 완성되면, 주한미군은 중국 등 주변세력을 견제하는 ‘지역적 역할’ 혹은 ‘전략적 유연성’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미군 주둔이 노무현 정부가 말하는 ‘한국의 균형자 역할 수행’과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는 풀기가 매우 난감한 문제다. 중국이 미군의 지역적 역할 강화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음은 공지의 사실이다.

    관점을 달리해 보면, 이미 주한미군이나 미 국방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전시 작통권 환수 공론화 등 한국 정부의 ‘드라이브’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작통권 환수 자체는 미국 처지에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한반도 방어에서 한국의 역량이 강화되면 미군은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기 때문. 10월21일 SCM에서 양국 국방장관은 작통권 환수 협의를 ‘적절히 가속화한다(appropriately accelerate)’는 발표문에 합의했다.

    미국측 관계자들이 말하는 ‘우려’는, 노무현 정부가 지향하는 안보지형의 ‘큰 그림’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상태에서 작통권 문제부터 테이블에 올라온 ‘현재 상황’에 대한 것에 가깝다.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남북 군축이 궤도에 오르면 주한미군은 어떻게 되는지, 동맹의 성격은 어떻게 변할지 등의 ‘총론’에 구체적으로 합의한 바 없고, 한국측이 공식적인 복안을 전달한 바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각론’에 해당하는 작통권 문제부터 공론화되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정부 내부나 한미간에 빚어지는 이 같은 이견은 근본적으로 다양한 로드맵이 얽혀 있는 ‘2012년 청사진’이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는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등 ‘핵심 이슈’에 대해 국내적 합의를 이루기 어렵고 그간의 준비 또한 미흡하지만, 최근 남북관계가 급진전됨에 따라 주요 이슈를 서둘러 진행시킬 수밖에 없기에 빚어진 마찰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한계가 향후 작통권 환수나 동맹 관련 협상과 관련해서도 거듭될 수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 외교안보 이슈에 깊이 관여한 전직 청와대 관계자는 ‘2012년 청사진’ 논의의 미래에 관해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2007년 대선을 생각해 보자. 미국은 한국이 정권 인수인계로 부산한 시기마다 주요 안보협상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노회함을 보이곤 했다. 전략적 유연성이나 미래동맹의 성격 같은 핵심쟁점에 어설프게 대응하다가는, 대선을 전후해 ‘평화체제 구축의 발목을 잡는’ 내용에 어영부영 합의해주는 결정적인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정부가 그려놓은 2010년대 한반도 미래 그림의 최대 고비는 이 시점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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