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를 얻는 데는 사람들을 규합해 설득하고 옛 폐해를 비판하는 능력이 중요했다. 하지만 천하를 얻은 다음엔 사람을 끌어모으기보다는 자신의 일터로 돌려보내 각자의 소임을 다하게 해야 했다. 이러한 수성(守成)의 정치를 실현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된 것은 신진 유신(儒臣)들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었다.
“작년의 강무(講武·임금의 주재로 사냥을 하며 무예를 닦는 행사)는 참으로 한심했다.”
꼭 1년 전인 1431년(세종 13년) 포천 매장원에서 일어난 집단 동사(凍死) 사태를 가리키신 것이다.
“총제(摠制·총사령관) 홍약이 아니었다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나는 변명처럼 대답했다.
지난해 이맘때, 마지막 사냥터인 보장산으로 가는 도중 군사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한 매장원의 겨울 들판을 가로질러가는 것은 사실 군마를 탄 나로서도 벅찬 일이었다. 하물며 변변치 못한 옷차림으로 20여 일간 어가를 따라다니며 풍찬노숙(風餐露宿)해야 하는 병사들에게 야간행군은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그런 와중에 26명의 군사가 사망하고 70여 필의 마소가 얼어죽은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평소 신료들의 말을 경청하던 아버지께서도 유독 강무에 대해서만은 완강하셨다. 백성과 군사들의 괴로움을 들어 강무를 폐지하자고 건의하는 신하들에게 “나는 정치의 대체를 돌아보지 않고 몇 가지 폐단을 들어 오활(迂闊·실제와 관련이 먼)한 말만 늘어놓는 것을 매우 잘못된 것으로 본다”(‘세종실록’ 16년 1월15일조, 이하 ‘16/1/15’ 형태로 줄임. 윤달은 #로 표시)고 논박하곤 하셨다.
가을 추수기에 벼농사 형편을 돌아보시던 모습과도 사뭇 달랐다. “일산(日傘)과 부채를 쓰지 않고” 들판을 지나다가 “벼가 잘되지 못한 곳에선 반드시 말을 멈추고 농부에게 까닭을 묻고” 마음이 아파 “점심을 들지 않고 돌아”오시던(01/07/03) 당신이셨다. 하지만 겨울 강무 때는 백성의 온갖 고초를 감내하면서도 군사훈련을 그치지 않으셨다. “강무란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13/1/30)로서 만일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무비(武備)가 쇠퇴할 뿐만 아니라 이미 이루어놓은 왕법에도 위배된다”(7/12/16)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지난해 강무는 내가 생각해도 지나쳤다. “군사는 자주 조련해 한서(寒暑)의 고통을 익히고, 기계의 장비를 정하게 하며, 좌작진퇴(坐作進退)를 익숙하게”(31/3/6)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명(命)에 따라 20여 일간 강행군을 계속한 결과 “추위에 얼고 굶주린 군사들이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자가 속출”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다행히 총제 홍약이 대신들의 침묵을 깨고 행군의 정지를 요청했고, 도진무(都鎭撫) 성달생이 군사들의 상태를 긴급히 보고해 더 이상의 인명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백성 고초 감내하며 군사훈련 강행
강무 반대 여론을 의식하셨던 것일까. 올해 행차에는 양녕 백부 등 종친을 대동치 않으셨다. 최윤덕 장군 등 문무관료,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만이 어가를 수행할 따름이었다. 행차의 속도도 다소 늦춰졌다. 포천에 못미친 양주군 사천동 일대에서 점심참을 드신 것이나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에 철원부의 풍천(楓川) 지역에 야숙을 위한 악차(幄次·임금이 거둥할 때 쉬도록 막을 둘러친 곳)를 설치한 것이 그것이다.
어가가 도착하자 갑사, 별패, 시위패를 포함한 2000여 명의 군사와 1만여 필의 말, 그리고 9000여 명의 몰이꾼이 빠르고 익숙한 동작으로 야숙(野宿) 준비를 했다. 그 사이에 상(上)께서는 야간 암호 등 몇 가지 사항을 숙위 사령에게 전지(傳旨)하시고, 때맞춰 함길도 감사가 보내온 해물을 군사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다. 황금 갑옷을 입고 최윤덕 등에게 내일의 행군과 사냥계획을 지시하시는 위용은 태종 임금을 똑 닮아 있었다. 즉위할 때까지 독서에만 몰두해 할아버지 태종의 걱정을 자아내던 문약한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지난해에 이어 강원도 평강(平康)을 목적지로 떠나는 이번 강무의 의미는 나로서도 각별했다. 물론 상께서는 문무 관료들의 진취적인 기상을 높이고, 병사들의 예기(銳氣)를 가다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사병(私兵)이 혁파되고, 체제가 안정되면서 문약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일곱 살 때 왕세자가 된 형님 향(珦·나중의 문종)의 건강도 건강이려니와, 아버지의 열여덟 명이나 되는-역대 최다수인-아들들 중에서 나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세자의 나이도 이제 열여덟 살이 됐으니 대가(大駕)를 수행할 만하다. (세자는) 항상 금내(禁內)에만 있어 밖의 일을 보지 못해 마치 계집아이를 기르는 것 같다. 혹 중국 사신을 접견하게 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머뭇거린다. 또 몸이 날로 비대해지고 있으니 말을 타고 기를 펴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강무를 떠날 때 전하의 말씀이셨다.
그런데 상의 의도와 달리, 일단 강무장에 나오면 형님은 더욱 더 머뭇거렸다. 반면 나와 동생 안평대군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사냥에 몰두했다. 특히 내 활솜씨는 집안 내력 덕분인지 주위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내곤 했다. 9마리의 노루가 동시에 달리는 곳으로 활을 쏘아 한꺼번에 6마리를 잡기도 했으며, 말 위를 뛰어넘어 달려드는 노루를 겨냥해 적중시키기도 했다(‘세조실록’ 총서). 상과 세자가 찬탄하면서 박수를 보낼 정도였다. 안평대군 역시 보통의 활솜씨는 넘었다.
강무 사흘째 되던 날, 아버지는 삼군(三軍)장수 최윤덕을 불렀다.
“강무라는 것은 원래 군사들에게 활 쏘고 말 달리는 기술을 익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강무장 안의 짐승은 종친들만 쏠 수 있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우리의 지나친 경쟁을 의식하신 듯했다. 다른 한편 그것은 상께서 생각하는 현재 강무 방식의 문제점이었다. “짐승들이 포위를 뚫고 빠져나가도 몰이하는 군인(驅軍)이 쏠 수 없다면, 병졸을 훈련하는 뜻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실전에 도움 되는 훈련으로
상께서는 포위망에서 빠져나간 짐승들을 말 탄 병사(騎士)들로 하여금 쫓아가 쏘게 하면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이에 최윤덕, 신상 등은 기사를 세 집단으로 나누어 쫓아가 쏘게 해보자고 했다. 그러나 김종서는 반대했다. “설사 포위망 뒤쪽에서 쫓게 하더라도 다투어 활을 쏘다 보면 필시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상께서는 논의 끝에, 지신사(知申事) 안숭선(安崇善)의 의견에 따라, 그날은 종전의 방식대로 시행하라고 하셨다(14/2/21).
이틀 후, 불행히도 김종서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23일 평강현 북쪽 석교(石橋) 인근의 강무는 상의 뜻에 따라 ‘적극적인 사냥’이 허용됐다. 그런데 어찌나 사냥에 몰두했던지, 별안간 화살이 임금의 막사 안까지 날아들었다. 안숭선은 활을 쏜 환관 유실(兪實)을 법령에 따라 국문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상께서는 “실수로 잘못 쏘아 위내(圍內)까지 들어온 것이니 용서해주라”고 하셨다(14/2/23).
그날 오후 철원부 내문(乃文) 강무에서는 사망사고까지 발생했다. 포위를 뚫고 달아나던 사슴이 시위패 김득부를 들이받았는데, 그 자리에서 죽고 만 것이다. 상은 경기감사에게 장례를 관에서 치러주도록 하고, 그의 집에 세금도 면제해주라고 지시했다(14/2/23).
이 사고로 강무 일정이 예정보다 늦어졌다. 애당초 24일의 의혜왕후(이성계의 모친)의 제사 때까지는 환궁해 당신이 직접 사냥한 짐승으로 제사를 지내려고 했다. 그런데 새로운 강무방식이 도입되고, 몇 가지 예상치 않은 사고가 발생하면서 일정이 예상보다 길어진 것이다.
내문에서 의혜왕후 제사를 지낸 다음 날, 마장면 일대의 강무 또한 치열했다. 이 날은 상께서 친히 사냥에 참여하셨다. 아침 수라를 드신 후, 상께서 삼면이 포위되고 한쪽 방향만 열린 사냥터에 도착하자 북이 울렸다. 병조 당상관의 영(令)에 따라 말 탄 장수와 기사들, 그리고 몰이꾼 병사들이 포위망을 좁혀갔다. 그러는 사이 상께서는 가마에서 내려 말로 갈아탔다. 첫 번째 몰이와 두 번째 몰이까지는 화살을 겨누기만 했지 쏘지는 않으셨다. 마지막 세 번째 몰이에서 상께서 짐승의 왼쪽에서 화살을 날렸다. 노루의 정강이에 적중했다. 병사들은 북소리와 함께 함성을 질렀다. 우리는 여러 장수와 함께 치사를 올렸다.
바로 그때, 산속에서 큰 멧돼지가 나타났다. 종친과 장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그런데 멧돼지는 화살을 맞은 채 포위망을 뚫고 달려나오면서 매어놓은 내구마(內廐馬) 한 마리를 들이받았다. 아버지께서 타실 내구마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다들 황망해하는 사이에 멧돼지는 숲속으로 사라졌다. 당황한 최윤덕이 담당자를 처벌하겠노라고 아뢰었다. 아버지는 “어찌 멧돼지가 꼭 이 말에게 달려와서 부딪칠 줄을 알았겠느냐. 뜻밖에 생긴 일이니 거론하지 말라”고 명했다. 하지만 당신께서도 은근히 겁이 나셨는지 옆에 있는 김종서에게 활과 화살을 주시면서 “항상 차고 있다가 짐승이 나타나면 쏘라”고 말씀하셨다(14/2/25).
이번 행차는 30일 보장산에서의 강무를 끝으로 종료됐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사고에서 나타났듯이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몰이꾼은 물론이고 국왕 친위부대까지 훈련이 돼 있지 않아서 우왕좌왕했다. 상께서도 “항오(行伍)가 정제되지 못한” 것이 작금의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셨다(14/2/30). 항오가 정제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상 이 시대 나라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아직까지 건국과 창업기의 어수선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큰 공을 세워보려는 일부 공신들의 기회주의와 몇몇 대신의 경박한 발언과 무책임한 태도, 그리고 상당수 “더벅머리 선비(儒竪)”들의 사대적 근성 탓에 나라 전체가 우왕좌왕했다. 혹독한 겨울의 강무는 바로 이런 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훈련과정이었다.
창업에서 수성으로
창업에서 수성(守成)의 정치로 전환! 부왕께서 생각하는 시대적 과제였다. 하지만 태조께서 세우시고 선대왕 태종께서 만드신 우리 조선왕조의 기틀을 안착시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 위(馬上)의 정치’에 익숙한 사람들은 ‘좌상(座上)의 행정’에 서툴렀다. 서투를 뿐만 아니라 “도필지임(刀筆之任)”이라 해 무시하기까지 했다.
물론 천하를 얻는 데는 사람들을 규합하고 설득하는 능력, 그리고 기존의 폐해를 비판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이미 천하를 얻은 다음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사람들을 끌어모으기보다는 자신의 일터로 돌려보내 각자의 소임을 다하게 해야 했다. 비판하기보다는 일의 결과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어주어야 했다.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고(刀之任) 일상의 사무를 원활히 돌아가게 하는(筆之任) 일이 중요해졌다.
세종 13년(1431년) 강무(講武)가 벌어지던 경기도 포천 일대 지형도(대동여지도).
수성의 정치를 가로막는 더 큰 장애물은 신진 유신(儒臣)들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이들은 유교 이외의 모든 사상을 배척하려 했다. 물론 전조(前朝·고려)의 말과 아조(我朝·조선)의 창업과정에서 척불론(斥佛論)은 고려왕조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된 이론적 무기였다. 삼봉 정도전을 비롯한 건국자들이 신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그 무기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삼봉의 경우 척불론의 ‘정치적 상징성’을 이용하는 데 그치고, 그 이상의 정책적 조치로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근래의 유생들은 유교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했다. 특히 성균관의 유생과 집현전의 학사들은 불교는 말할 것도 없고 태조 임금께서도 중시한 풍수지리조차 이단사상이라 해 배척했다.
풍수학에 반대한 신하들
재위 중반기의 풍수지리 논쟁이 그 한 예다. 재위 12년에 선대왕 태종의 능침(獻陵·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소재) 옆길을 풍수지리의 차원에서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행(行) 사정(司正) 최양선이 “천천(穿川)의 큰길은 헌릉의 주산 내맥이니 막아야 한다”고 상언한 것이다. 이에 대해 풍수(風水) 이양달 등은 “비록 큰길이 있더라도 산맥에는 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맥(脈)에는 사람의 발자취가 있는 것이 더욱 좋으므로, 막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15/07/22; 12/08/21).
그러자 부왕께서는 “그 근원을 캐보아야겠다”면서 경연(經筵)에서 이 문제를 다뤄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하셨다. 그러나 그 제의는 곧 반대에 부딪혔다. “경연은 오로지 성현의 학문을 강론하고 구명해 정치 실시의 근원을 밝히는 곳인데, 풍수학이란 것은 잡된 술수 중에서도 가장 황당하고 난잡한 것이니, 강론에 참예시킴이 옳지 못하다”며 지신사 안숭선 등이 반대하고 나셨기 때문이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역대의 거룩한 임금을 보건대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면서 “우리나라의 일로 말하더라도 도읍을 건설하고 능 자리를 정하는 데에 모두 술수 전문가의 말을 채용하지” 않았냐고 반문하셨다. 나아가 아버지께서는 “지금 헌릉 내맥(來脈)의 길 막는 일에 있어 이양달과 최양선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고집해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나 자신도 그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결단하지 못하겠으니, 한번 집현전의 유신들을 데리고 이양달과 함께 그 이치를 강론”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다시 제의하셨다.
그러자 안숭선은 “전부터 경연에서는 경전의 학문만을 한결같이 해왔는데, 이제 만일 잡된 학문을 강론한다면 오랜 적공이 한번 실수로 헛되이 될까 실로 두렵긴” 하지만, “그러나 그 학문도 국가를 위해 소용되는 것이라 폐해버릴 수는 없으니, 경학에 밝은 신하를 선택해 강습하게”(15/07/07) 하는 것도 좋겠다고 동의했다. 결국 “풍수학을 강명하는 것은 결코 유자(儒者)의 분수 밖의 일이 아니라”(15/07/27)는 당신의 주장에 따라서 사상 처음으로 ‘지리전서(地理全書)’ 등의 내용이 경연석상에서 강론됐다.
이처럼 아버지께서는 유교 이외의 사상에 대해서도 “투철하게(洞)” “그 근원을 캐어본” 다음에 “나라에 이롭고”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실용적인 차원에서 이용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상께서는 특히 “비록 주자(朱子)의 말이라도 또한 다 믿을 수는 없을 듯하다”고 해 성리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즉 경연에서 당신은 주문공(주자)이 옛말의 잘못을 바로잡은 대목에 이르러서 “주문공은 진실로 후세 사람으로서는 논의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잘못을 바로잡은 말에는 혹 의심스러운 곳이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이 한 말 또한 의심스러운 곳이 있다”(19/10/23)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주자의 뛰어남을 인정하면서도 “의심”을 가지고 주자의 글을 읽으셨던 것이다.
“행한 지 오래된 걸 급하게 바꿔서야”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는 상의 면모는 불교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났다. 물론 즉위 초년에는 아버지께서도 상왕이신 태종 임금의 뜻에 따라 불교개혁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위 중반부터 당신은 신하들의 불교개혁론에 대해서 시종 온건한 입장을 취하셨다. 승려를 뽑는 시선(試選)제도를 폐지하고 전토(田土)로 봉양하는 폐단 등을 바로잡자는 대사헌 하연(河演) 등의 상소에 대해서 당신은 “개혁을 해도 점차로 해야 한다”는 허조의 손을 들어주었다. 즉 “불법(佛法)이 이단”인 것은 확실하지만, 이 법이 세상에 행해진 지가 오래돼서 “급작스럽게 개혁할 수는 없지 않느냐”(06/02/07)는 것이었다.
당신은 불교개혁론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종종 불교를 옹호하기도 하셨다. 재위 20년(1438년)부터 3년간 지속된 ‘흥천사 사리각 수리’가 하나의 예다. 태조 임금께서 건립하신 궁궐 동쪽(서울시 돈암동)의 흥천사 사리각이 퇴락하자 아버지께서는 그 개조를 명하시고, 그 수리가 끝나자 효령 백부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것을 축하하는 경찬회를 열게 하셨다. 이에 대해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한 대다수 신료가 반대하고 나섰다. 당신께서 그토록 아끼는 김종서조차 “즉위하신 이후 한 가지 정치나 한 가지 일도 실수하심을 보지 못했는데” 이번 경찬회를 보고 “깊이 실망”했다고 말했다(23/11#15). 집현전의 최만리도 이 일이 “불교가 다시 일어나는 징조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23/11#17).
이에 대해 부왕께서는 고전의 말씀을 들어 물리치셨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세 번 간해도 듣지 아니하거든 버리고 가라(三諫不聽則去)’고 했는데, 너희들이 스스로 가면 내가 금할 수 없거니와, 만약 나가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구태여 파출(罷黜)시키랴”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 좌사간 박중림(朴仲林) 등은 “옛사람은 열국(列國)에서 벼슬했기 때문에 세 번 간해 듣지 아니하면 버리고 갔거니와, 신 등은 본국 외에는 다시 갈 만한 곳이 없사오니, 차라리 벼슬을 파면시켜”(23/11#29) 달라고 말했다(결국 이듬해 3월, 흥천사 경찬회는 1만여 명의 승려가 모인 가운데 5일 동안 개최됐다).
이 정도의 척불논쟁은 그나마 괜찮았다. ‘파저강 토벌’이나 ‘수령육기제 채택’을 둘러싼 군신간의 논쟁에 비추어 볼 때, 이 정도의 대립과 비판은 이미 낯익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재위 말년에 있었던 ‘내불당 논쟁’은 신료들의 어조에서도 위험 수준을 넘어섰고, 아버지의 대응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1448년(세종30) 여름, 부왕께서는 창덕궁 문소전(文昭殿) 서북쪽 공터에 불당을 건립할 것을 지시하셨다. 원래 창덕궁 중장(重墻·안쪽 담) 밖의 문소전 동쪽에 불당이 하나 있었는데 1433년(세종15)에 폐철(廢撤)된 후 여태 복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시점에서 “국가에서 불교를 남김없이 끊어버린다면 모를까, 그러지 못할 바에야 선왕이 세웠던 이 불당을 복구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신 것이다.
“불교는 믿을 게 못 되지만…”
이미 ‘흥천사 사리각 논쟁’에서 정국을 파국 직전까지 몰고 간 경험이 있는 부왕께서 근 10년 만에 다시 이 ‘뜨거운 감자’를 꺼낸 이유는 무엇인가? 내 생각에 내불당 건립은 가족의 죽음이라는 실존적 상황에 대한 당신의 인식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지존(至尊)인 당신도 자신의 어머니가 죽어가는 한계 상황에 직면했을 때 “약사여래에게 정성껏 부지런히 불공”(02/06/06) 드리는 것밖에는 달리 할 것이 없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당신은 또한 그렇게 사랑하시던 일곱째아들 평원대군이 19세에 홍역으로 급사하고(27/01/16), 그후 1년 만에 중전이 다시 사경을 헤매자 “산천과 신사(神祠)·불우(佛宇)에 기도”(28/03/12)하게 하셨다. 아울러 죄수들을 사면하는 조치도 취했다. 자신이 “군주로서 비록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경하고 부지런히” 해왔지만, “천재(天災)가 잇달아오고, 가환(家患)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제 또 중궁(中宮)이 질병을 만났으나 치료하는 방법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상한 은택(恩澤)을 베풀어서라도 뜻밖의 근심을 그치게 하기”(28/03/13)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설사 불교가 “무부무군(無父無君)의 교”로서 “풍속을 상하게 하고 국가와 조정을 그르치게”(06/03/12) 하는 주범이라 할지라도 가족을 살릴 수만 있다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보려는 심정이셨을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국왕이라 할지라도 국가의 이념과 배치되는 행동을 임의로 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불사와 관련해 신하들과 논란을 벌일 때마다, “불교는 믿을 것이 못 된다”(07/07/15)라거나 “내가 이를 존숭해 믿는 것이 아니다”(20/07/07)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보기에도 아버지는 불교신도는 아닌 듯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신료들의 파상적인 공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궁성 안에 불당을 짓겠다고 하신 것일까. 사실 많은 사람이 놓치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흥천사 논쟁에서 이미 나타났던 바, 신료들의 이분법적 정치관을 저지하려는 당신의 의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예상했던 것처럼, 내불당 건립 지시에 대한 반발은 강력했다. 우선 이 지시를 받은 승지들부터 반발했다. “궁궐 안(禁內)에 불당을 설치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하고, 또 문소전은 깨끗이 재계(淸齋)하는 곳인데, 승도로 하여금 그 옆에 처하게 하는 것은 더욱 불가”(30/07/17)하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도승지 이사철을 위시해 집현전과 의정부와 육조의 판서들이 나와서 내불당 건립 지시 철회를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이사철은 궁궐 안에 불당을 설치하는 것은 선대왕 태종의 유교(遺敎)에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아버지께서는 “궁궐 안에 불당을 세우는 것이 그르다는 것은 그렇더라도, 어째서 정직하지 못하고 교묘히 돌려서 말을 하느냐”고 질책했다. “조종을 위해서” 불당을 세우려 하는데 “태종의 유교” 운운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지적이셨다.
“나는 부덕하니 따를 수 없다”
신하들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좌의정 하연 등은 “저 부처를 높이는 임금이 어찌 어진 임금입니까. 신 등은 기어이 청하는 것을 얻은 뒤에야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맞섰다. 예조판서 허후(許·허조의 아들)는 나아가 지금 “흥천·흥덕 두 절도 혁파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다시 새 절을 세울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허후의 이 말에 다소 흥분한 아버지는 “경이 두 절을 혁파해야 한다고 하는데, 내가 지금 인부를 뽑아서 경에게 줄 터이니, 가서 한번 흥천사의 부도(浮屠)를 허물어보겠느냐”고 맞대응했다. 이에 흥분한 허후는 “신의 생각으로는 허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아버지는 “대신이 말을 하니 내가 말을 못하게 할 수는” 없지만, “허후는 예관(禮官)으로서 어찌 저리 천연(天然)스럽지 못한가”(30/07/18)라고 개탄했다.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세조(수양대군)의 전신 화상.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조판서 정인지가 나섰다. 정인지는 “전하가 무릇 국사에 있어 모두 대신에게 의논한 연후에 시행하셨는데, 유독 불사에서는 매양 독단하시고 중론을 취하지 않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아버지는 “경이 나더러 여러 사람의 의논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장차 나를, 스스로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일일이 신하들의 의논을 취해 따르는 왕으로 만들려는 것인가”라고 힐문하셨다. 국왕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사안이라는 것이었다. 나아가 아버지는 “만일 어진 임금이라면 반드시 경들의 말을 따르겠지만, 나는 부덕하니까 따를 수가 없다”고 못박았다(30/07/19).
부왕의 이런 전례 없는 모습에 실망한 신료와 유생이 하나 둘 도성을 떠나기 시작했다. 언관은 물론이고 의정대신(議政大臣)의 말도 듣지 않는 임금과 어떻게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與共爲國)”(30/07/19)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생각하옵건대, 천하의 일은 시비선악의 두 끝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시비는 양립(兩立)할 수가 없고, 선악은 길을 함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 신 등은 참으로 이 불당이 그렇게 절실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백년을 폐철하더라도 무슨 부끄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예전 예(禮)를 어기고 공론을 등져가며 묘궁(廟宮) 곁에 불우를 세우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신 등은 두렵건대, 전하 혼자 스스로 부끄러울 뿐 아니라, 후세에서 또한 전하를 위해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이 불당을 세우는 것이 비록 작은 일이라고 하지마는, 자손의 본받는 것과 백성의 취향(趣向)과 치화(治化)의 오륭(汚隆)과 정도(正道)의 소장(消長)과 생민의 이병(利病)과 국세(國勢)의 안위(安危)가 모두 여기에서 결정됩니다. 국가는 조종(祖宗)의 국가요, 전하의 사유(私有)가 아니온데, 어째서 국가 만세의 염려를 하지 않으십니까(國家者 祖宗之國家 非殿下之私有也. 何不爲國家萬世慮乎)(30/07/19).
“시비는 양립할 수가 없고, 선악은 길을 함께할 수가 없다”는 집현전 학사들의 말은 유교 정통론의 시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내불당 건립은 “공의”에 어긋나고 “공론”을 등지는 것이며, 역사적으로도 부끄러워할 일이라는 논리가 그것이다. 특히 “국가는 조종의 국가요, 전하의 사유가 아니”라는 주장은 유교국가에서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인주(人主)의 자질에는 어리석은 경우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으니” 훌륭한 총재(?宰)를 세워서 “인주로 하여금 대중(大中)의 지경에 들게 해야 한다”는 정도전이나, 위의 상소를 올린 신석조 등은 재상을 국왕과 “함께” 국가를 다스려 나갈 주체로 보고 있다. 즉 신석조에 따르면, 재상은 국왕이 비록 임명했지만 “천위(天位)를 함께 해 천직(天職)을 다스리는(共天位治天職)” 존재다.
그러나 이런 시각과 태도는 나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중에 내불당이 건립된 이후 내 의견을 밝힌 바 있지만, 나는 결코 “석가의 도가 공자의 도보다 못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석씨의 도가 공자보다 나은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30/12/05). 나는 또한 “주자의 설이라 해 감히 그르다고 말하지 못하는” 태도 또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주자가 군부(君父)가 아닌데, 그리고 주자라고 틀린 곳이 없지 않을진대, 무슨 이유로 감히 그르다고 하지 못하는가.”
“주자라고 틀린 곳 없지 않을진대…”
나는 주자의 설을 절대시하는 유학자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후일에 유신 김종련은 “주자에게도 틀린 곳이 많음을 발견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 감히 아뢰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다른 사람들이란 이른바 “직임도 없고 관직도 없으면서 함부로 비방하는 무리”들로서 그들은 늘 “공론”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국왕의 시책을 비판하고 주자를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공론정치론은 “처음에는 선비를 권려(勸勵)하는 데서 시작하고, 다스림에 이르기를 구한 데서 출발하지만 마침내는 윤상(倫常)을 무너뜨리는 데 이르는 것”으로서 “이익도 큰 편이지만 해독도 컸다”(‘세조실록’ 12/9/2). 특히 훌륭한 재상을 세워 정사를 맡긴다는 ‘재상론’과 ‘의정부서사제’는 더더욱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백대(百代)의 임금이 모두 어리며, 백대의 의정부가 모두 이윤이나 주공과 같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찌 고금천하에 왕보다 신하에게 먼저 보고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도무지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권력이 장차 옮겨가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게” 될 것이었다(‘세조실록’ 7/6/23).
여하튼 ‘국왕과 신하가 천직을 함께 다스린다’는 ‘군신공치론(君臣共治論)’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논리였다. 부왕께서도 공론과 인심, 그리고 천도를 내세워 내불당 건립의 부당성을 집단적으로 주장하는 신하들에 대해서 “이것은 나를 겁주는 것”(30/07/21)이라고 불쾌하게 생각하셨다. “이후로는 내가 다시 대답하지 않겠다”(30/07/23)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결국 우회적 표현이긴 했지만, “승평(昇平·나라가 태평함)한 지 오래되자 점점 교만하고 편안한 마음이 생겨” “토목(土木)을 일으키고 있다”는 말까지 올라왔다. 국왕에 대한 비판을 넘어선 정창손의 이 같은 비난에 직면하자, 아버지는 다시 지난번 흥천사 때와 마찬가지로 ‘세 번 간해서 듣지 않으면 떠나야 한다’는 논리로 맞섰다. “지금 너희들은 한 가지 일로 세 번 간하는 것을 이미 지나서 열 번 간하는 것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에 정창손 등은 “파면해”줄 것을 요청했고, 아버지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30/07/23).
집현전 학사들이 파면되자 조정의 신료들도 파면을 요청했고, 나아가 성균관의 유생들까지 “방(榜)을 붙이고” 집으로 떠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아버지는 상당히 당황하신 것 같았다. “지금 유생(儒生)들까지 모두 파해 갔는데, 어찌하면 좋을까”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도승지 이사철도 이는 실로 “천년 뒤에 듣고 놀랄 일”이라고 말하면서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당신은 “지금 집현전의 관사가 모두 파해 가고, 유생이 또한 흩어져 갔으니, 대성(臺省·사헌부와 사간원)도 이를 좇아갈 것이다. 내가 이제 독부(獨夫)가 됐구나”(30/07/23)라고 개탄하셨다.
선위(禪位) 협박으로 불당 건립 관철
그러나 곧이어 아버지는 좌의정 하연 등 여러 대신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유생들이 학업을 파하고 간 것에 대해 국문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실로 사태의 반전을 노린 당신 특유의 노회한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신은 ‘흥천사 사건’ 때도 성균관의 생원 이영산 등 648명이 올린 상소문 가운데 과격한 내용을 들어 국문하려 했었다(21/04/19). 그 결과 정작 상소문에서 제기된 ‘불사의 폐단’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그들의 처벌 수위를 둘러싼 쪽으로 논의가 흘러갔다. 그 와중에 신하들의 척불론이 흐지부지된 것은 물론이다.
이번에도 논의의 흐름이 당신의 의도대로, 유생들의 처벌 여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듯했다. 아버지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성균의 생원·진사·유학과 사부(四部)의 생도로서 나이 20세 이상인 자는 아울러 추국해 아뢰라”고 의금부에 지시했다. 그리고 권당(捲堂·성균관 유생들이 불만이 있을 때 단결해 일제히 관(館)을 나가던 일)을 주창한 주도자를 찾아내되 “만일 승복하지 않거든 고문”(30/07/23)을 해서라도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이에 대해 정인지는 “사람들이 모두 간했는데 유독 유생들만 가두면, 이것은 속담에 말하는 ‘무른 땅에 말뚝 박는다’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사안이 다른데 무른 땅에 말뚝을 박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30/07/24)라고 반박하셨다.
결국 유생들을 국문하려는 국왕의 시도는 의금부 제조 남지 등의 간청으로 중지됐다. 유생들의 행위는 임금을 “위협”한 것이 아니라 “진언하려다가 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니 이들을 용서해달라는 간청이 그것이다. 남지는 일단 국왕으로부터 “알았다”는 대답을 얻은 다음에, “전하가 위(位)에 있은 지 30년에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하다가 지금 이와 같은 데에 이르렀으니, 사필(史筆)이 먼저 30년의 선정(善政) 선치(善治)한 것을 쓰고, 마침내 불당을 세우고 충언을 거스른 일을 쓰게”(30/07/24) 될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의제를 가까스로 불당 건립의 문제로 돌린 것이다.
지난번 흥천사 논쟁 때와는 다소 다른 양상으로 일이 전개되자, 아버지는 전혀 엉뚱한 방안을 제시했다. “불당이 궁성에 가깝다 하니, 내가 이어(移御)하고자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궁궐을 “이어하면 불당과 동떨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억지스러운 주장에 대해서 하연은 “전하의 명령이 이렇게 모순되니 어찌합니까. 날을 마치고 밤을 새우더라도 명령을 기다릴 뿐입니다”라고 맞섰다. 허후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 궁은 전하의 궁궐이 아니고 만세 자손의 궁궐입니다(此宮非殿下宮闕 乃萬世子孫之宮闕). 전하가 비록 다른 곳으로 이어하시더라도 궁궐과 불당은 전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30/07/24)라고 해 부왕의 ‘이어론’을 무력화했다.
백성 이익에 아랑곳없는 사대주의자들
유생을 국문하겠다는 방안에 이어 궁궐을 옮기겠다는 방안까지 무력화되자, 아버지는 드디어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세자에게 “선위(禪位)할 뜻”을 내비치면서 임영대군의 집으로 이어(移御)를 감행한 것이다(30/08/04). 이후로 당신은 거의 50여 일을 임영대군의 집에서 칩거하면서 농성을 계속했고, 결국 내불당은 건립됐다.
솔직히 나는 ‘선위’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이미 1445년(세종 27년)부터 형님은 세자로서 섭정(攝政)을 계속하고 있었다. 실질적인 국왕의 역할을 수행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게다가 그보다 4년 전에(1441년) 아들을 낳아 금년부터는 세손에 책봉하기까지 했다. 언뜻 보기에 왕위계승의 길이 안정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아버지와 형님의 건강이었다. 만약 불행하게도 두 분이 동시에 와병하시거나 돌아가실 경우 종묘사직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왕위계승 서열로 볼 때 두 번째인 내게 야심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로서는 유학과 천문·군사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역수(曆數)와 서도에도 능숙한 형님이라면 기꺼이 받들 것이며, 설사 내게 왕위를 넘기신다 해도 “청권(淸權·왕위를 양보함)”할 각오가 돼 있다. 하지만 자신을 문사의 하나로 자처하고 다니는 동생 안평대군에게 왕위가 넘어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동생이 중국 황제로부터 “조맹부와 같다”는 극찬을 들을 만큼(32/1#/11) 뛰어난 서예솜씨를 갖추었고, 타고난 교화력으로 주위 문사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국의 대권이 글씨와 사교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리라. 무엇보다도 “재상은 국왕과 천위(天位)를 함께 해 천직(天職)을 다스린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이 나라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나라가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데 ‘군신공치(君臣共治)’ 따위의 말을 함부로 지껄일 수 있단 말인가.
최만리와 같은 자들은 “중국의 비난을” 거론하며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었다. 우리의 말을 갖는 것이 “문명의 큰 흠결”이요 “중화를 사모하는 데 부끄럽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김종서도 중국의 예를 들어 여악(女樂) 사용을 중지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 더벅머리 선비들은 오로지 중국 문명을 따라잡는 것만을 중시했다. 중국에 밉보여서는 안 되며, 백성에게 법조문(律文)을 알게 해서도 안 된다고 고집했다.
물론 이 시대에 명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그들의 선진 문화를 배우는 것은 중요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다. 하지만 백성의 불편과 불이익을 강요하면서까지 문자 창제를 반대하고, 무조건 중화 문명에 맞추어 우리 풍속을 바꾸려는 태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처럼 줏대 없는 유학자들에게 이 나라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부왕의 얼굴에서 간간이 보이는 그 헤아릴 수 없는 고독, 그리고 당신이 키운 집현전 학사들을 향한 돌연한 분개도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정치란 결코 가르쳐서 전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당신은 재위 말년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더 절실히 느끼시는 듯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신호가 뜻밖의 사태를 통해 전해졌다. 재위32년 중국 사신이 왔을 때였다. 새 황제의 등극을 알리러 오는 사신을 누가 맞이해야 하는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영의정 하연 등은 동궁의 병이 다소 호전됐으니 세자가 사신을 맞이하게 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상께서는 “내가 이미 와병 중이고 세자 또한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으니” 다른 사람을 보내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박팽년·신숙주 등은 세자가 어렵다면 세손에게 그 일을 맡기자고 했다. 나와 안평대군의 호기로움과 야심을 견제하려는 집현전 학사들의 의중이 반영된 주장이었다.
“경들도 알다시피, 중국에서는 종친을 매우 야박하게 대우한다. 그들이 사는 집의 담장은 매우 높아서 감옥과도 같다.”
이미 많이 쇠약해진 상께서 힘들게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황제가 유고하면 반드시 종친으로 하여금 섭정하게 한다. 천지·종묘·사직에 제사지내는 일에 이르기까지 섭행하지 않음이 없다.”
황제 유고시 종친에게 섭정하게 한다는 말이 미묘한 여운을 남겼다.
“이제부터는 임금과 세자에게 연고가 있을 경우 대신이 아닌 왕자가 반드시 섭정하게 하라. 섭정하는 것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조칙을 맞이하는 일이겠느냐?”
실로 놀라운 말씀이셨다. 당신의 유고시 집현전 학사들에게 세손을 부탁했다고 전해오는 그동안의 풍문을 날려버릴 만한 말씀이셨다.
“조선은 예로부터 예의의 나라로 칭해져 왔는데, 경들은 제도를 잘 의논해서 더벅머리 선비들에게 기롱당하는 일이 없게 하라.”
결국 “잔치를 베푸는 일은 왕자가 대신하게 하라”는 말씀이셨고, 왕자는 바로 나를 가리키신 것이었다(32/1/18). 도대체 아버지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