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둘러보면 현실이 소설가의 상상력을 앞지르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탈(脫)현대성의 세계에서 참조할 만한 이성의 거울은 깨졌다. 깨진 거울에 비치는 현실의 상은 수천 개로 파편화되고 일그러져 있다. 소설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기란 불가능해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이란 살아가는 데 없어도 그만인 사치품”이라고 했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새로운 소설은 계속해서 씌어지고 새로운 소설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가 소설에서 읽을 것은 세상의 이야기들이 아니다. 진정한 이야기는 신화와 함께 죽었다.
요즘도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근대적 의미의 작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혀끝에서 맴도는 어휘들을 늘 헛짚어내고, 그들이 지어내는 이야기는 의식의 표면으로 미끄러져간다. 오늘의 소설가가 보여줘야 할 것은 징후로서 사유하는 방법, 혹은 사유의 열반(涅槃)이다. 이제 이야기가 아니라 징후, “언어 이전의 실체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가리키는 징후, 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덕, 즉 격렬한 장면, 현실에 앞선 실재, 즉 교합”(파스칼 키냐르)이다. 독자도 소설에서 이야기가 아니라 사유하는 방법을, 아니 사유 그 자체를 탐식할 줄 알아야 한다.
피어나지 못한 꽃봉오리
키냐르는 이렇게 쓴다. “글을 쓰는 손은 차라리 결여된 언어를 발굴하는 손이며, 살아남은 언어를 찾아 더듬다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가,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어 언어를 구걸하는 손”이다. 소설은 사유의 나무에 움트는 꽃망울이다. 사유의 동반자로 파스칼 키냐르와 편혜영이라는 작가를 천거한다.
소설가는 현실을 탐문한다. 소설은 그 탐문한 것을 시대의 징후로 풀어내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언어로 불러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언어화된 것은 의미를 얻는다. 매혹적인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는 “혀의 ‘끝’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은 무엇이 움은 텄으나 꽃을 피우지는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 무엇은 자라지만 말없이 애타게 기다리는 자의 입술 위에 다다르진 못했다. 그것은 먹는 행위 너머로, 입 위에 ‘선’ 채로 맴도는 언어의 보이지 않는 개화의 ‘봉오리’이다”라고 쓴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피어나지 못한 꽃의 봉오리다. 혀는 사실적인 것과 사실적이지 않은 것 사이의 한계점에서 얼어붙는다. 얼어붙은 혀, 발음하지 못하는 혀, 이름의 망각으로 타오르는 혀. 그것이 되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굳은 혀에서 주술이 풀릴 때 흘러나올 것은 이름이다. 그 불가사의한 이름은 무엇인가? 키냐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시, 되찾은 단어, 그것은 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하며, 어떤 이미지 뒤에나 숨어 있게 마련인 전달 불가능한 이미지를 다시 나타나게 하며, 꼭 들어맞는 단어를 떠올려 빈칸을 채우고, 언어가 메워버려 늘 지나치게 등한시된 화덕에 대한 그리움을 되살리고, 은유의 내부에서 실행 중인 단락(短絡)을 재현하는 언어이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콜브륀은 재봉사 죈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죈느는 콜브륀에게 하나의 숙제를 낸다. 제 허리에 졸라맸던 장식 벨트를 풀어주며 그것과 똑같은 장식 벨트를 만들어 달라고 한다. 콜브륀은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자수를 놓지만 끝내 벨트를 완성하지 못한다.
어느 날 밤 길 잃은 영주(領主)가 콜브륀의 집 문을 두드린다. 식사 대접을 받고 휴식을 취한 영주는 콜브륀이 장식 벨트를 만들려는 사정을 듣고는 콜브륀에게 자기가 갖고 있던 장식 벨트를 준다. 그러면서 콜브린에게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는 약조를 하라고 한다. 콜브륀은 ‘아이드비크’라는 간단한 이름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느냐며 선뜻 약조를 하고, 장식 벨트를 받는다. 영주는 이렇게 말한다.
“콜브륀, 그대를 놀리는 게 아닐세. 그렇게 크게 웃지 말게. 만일 1년 후 같은 날, 같은 시각, 한밤중에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내 사람이 되는 거니까.”
죈느와 콜브륀은 결혼한다. 결혼 후 아홉 달쯤 지났을 때 콜브륀은 영주와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그래서 영주의 이름을 막 떠올리려는 찰나 별안간 이름이 기억에서 사라졌다.
“이름이 혀끝에서 맴돌고 있었으나 도저히 기억해낼 수 없었다. 이름은 그녀의 입술 주변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데 있었고, 느껴지는데도, 그녀는 이름을 붙잡아서, 다시 입속에 밀어넣고, 발음할 수가 없었다.”
의미의 선정, 추출, 복귀
말해지지 않는 이름은 탐문되지 않는 현실이다. 그것은 얼음 덩어리다. 얼어붙어 덩어리가 된 아이스크림은 그것을 절단하려는 칼을 미끄러지게 한다. 얼음 덩어리는 “덩어리 상태로 저장된 의미”에 대한 메타포다. 미끄러지는 칼은 현실(덩어리)에서 의미를 “선정, 추출, 복귀”시키려는 자, 곧 글을 쓰는 자를 가리킨다. 글쓰기의 고통이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자의 고통과 하나로 겹쳐진다.
‘아오이가든’은 신예소설가 편혜영의 단편소설을 묶은 창작집이다.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중심 이미지는 시체다. 책의 목차가 끝나고, 본문이 시작되는 첫 면에 밑도 끝도 없이 “안녕, 시체들”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뿐 아니다. “여학생의 옷이 최초로 발견된 곳은 저수지 뒤쪽의 숲이었다”(‘저수지’), “시체는 왕피천 동쪽 끝자락에서 떠올랐다”(‘문득’), “전화가 걸려온 것은 아내가 실종된 지 한 달가량 지나서였다”(‘시체들’)와 같이 아예 소설의 모두(冒頭)에서부터 죽음과 관련된 실종이나 우연히 발견된 시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많은 사람이 이유 없이 사라지거나 죽는다. 실종의 모티프는 존재했다가 사라진 자들의 흔적을 탐문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다. 시체들이 발견됐다면 마땅히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가해자가 존재하고, 그러한 사건이 벌어진 곡절과 사연이 있을 터다. 그러나 소설에서 누가 왜 그들을 죽였는지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의 관심사가 아니다.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오로지 시체다. 편혜영의 소설은 그것들을 미궁 속에 몰아넣는다. 소설 속의 장소는 누군가 죽은 저수지이거나 “형제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사라진 숲”(‘서쪽 숲’), 죽음의 냄새가 음습하게 피어오르는 동굴이나 맨홀이다. 평론가 이광호는 해설에서 이 장소들을 “하드고어 원더랜드”라고 부른다. 이 장소는 산 자조차 깜깜한 밤에 구더기와 함께 매장되는 계곡이다(‘시체들’). 시체 아니면 붉은 개구리를 낳는 여자(‘아오이가든’), 죽어가는 쥐들(‘마술 피리’)이다.
자명한 현실의 무수한 균열
우리가 마주치는 현실의 모습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 자명함을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무수한 균열과 틈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와 타자 사이, 어제와 오늘 사이의 간극은 의외로 크다. 그 간극은 “삼백오십만년”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틈으로 흐르는 시간에 묶여 있고, 늙어간다.
“그녀가 있어야 하는 하루가 흐르고, 중첩된 하루하루가 묶여 세계가 된다는 걸 안다. 시간이 흐르는 건 축복이었다. 나에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아침에 맞닥뜨린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어제와 오늘 사이의 간극이 삼백십오만년쯤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낀다. 매시 매분마다 나날이 늙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녀의 살갗, 태초에 붉은색으로 태어났다가 시간과 함께 점차 옅어졌다가 종내는 시커멓게 변해버린 살갗.”(‘아오이가든’)
편혜영이 드러내 보이고 싶은 것은 문명의 이면이다. 문명의 이면은 곧 위생적이고 안전하다고 믿는 자명한 현실의 이면이다. 편혜영의 소설은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작가는 왜 ‘시체’에 집착할까? 문명세계의 삶이 무수한 사체 위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걸까? 문명의 이면이 얼마나 끔찍한 야만으로 채워져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은 걸까? 그것은 명확하지 않다.
기학의 관점에서 풀어보자면 시체는 대기활동운화의 힘이 변통을 드러내는 이미지다. 변통이 상습화한 세계에서의 삶은 불길하며 끔찍하다. 무시로 출몰하는 사체는 그 변통의 가시적 실체며, 괴이쩍은 세계의 파편적 상이다. 작가는 세상에 널린 끔찍함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무감각해진 사람들의 뇌리를 불로 달군 쇠꼬챙이로 지지기라도 할 듯 사체들의 이미지를 쑤셔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