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운아’는 김옥균을 위한 이름이다. 한말, 개화 개혁의 깃발을 치켜들고 구국을 외친 열혈 청년. 외세 일본의 힘을 빌려서라도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를 무너뜨리고자 갑신정변을 일으킨 그는 과격한 ‘위로부터의 혁명’을 시도하지만,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고국 혁명에 재도전하기 위해 상하이로 향한다. 그곳에 명성황후 일파가 쳐놓은 함정이 있을 줄이야. 역사를 뒤엎고자 했던 혁명가의 망명 10년,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최후.
일본, 중국의 힘을 빌려 부패한 정부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김옥균. 현실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부족했지만 모략이 없고 순진했다.
“상하이에 가지 마시오, 절대로. 위험하오.”
옥균이 중국에 간다고 하자 후쿠자와는 만류했다. 이날의 만남은 두 사람의 ‘영결(永訣)’의식이 되고 만다. 기이한 인연이었다. 10년 전 옥균이 갑신정변에 실패해 인천에서 치도세마루를 타고 일본에 도망쳐 왔을 때, 처음 머문 곳이 바로 도쿄의 미타(지금의 게이오대학 일대)에 있는 후쿠자와의 집이었던 것이다. 첫 유숙지를 내준 사람과 최후의 작별인사. 운명의 수미일관이라고 할까.
후쿠자와는 정치인 고토 조지로와 함께 옥균의 인생을 바꿔놓은 인물이다. 옥균이 그들을 만난 것은 1882년 생애 처음으로 일본에 갔을 때였다. 후쿠자와는 이미 일본에 서양 사정을 소개하고 문명개화를 부르짖어, 선각 지식인 중에서도 국사(國師)로 대접받고 있었다. 그가 김옥균의 가슴에 개화 쿠데타의 불을 붙였다.
고토는 이타가키 다이조와 함께 조선의 쿠데타를 지원해서 중국의 영향력을 누르고 일본 세력권을 넓히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고토는 옥균에게 명성황후 정권을 뒤엎을 쿠데타에 필요한 자금을 대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고토와 이타가키는 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중국이 전쟁을 벌이자 도쿄에 주재하던 프랑스 공사 생퀴지를 만나 은밀히 ‘조선의 쿠데타 자금 100만달러’를 요구한 것이다. 두 일본 정객은 “조선에서 쿠데타가 나면 아시아에서 중국세력은 몰락한다. 바로 프랑스가 바라는 바 아닌가?”라며 미리 내는 ‘수익자 부담금’조로 쿠데타 자금을 대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안 일본 정부가 위험한 외교 도박으로 여겨 방해하는 바람에 고토의 공작은 흐지부지됐다. 모두 갑신정변 이전의 비화다.
김옥균의 중국행을 만류한 사람이 또 있다. 당시 외무차관 하야시다. 옥균이 하야시를 만난 때는 중국과 조선의 설날이던 2월9일. 하야시는 말했다.
“가지 마시오. 중국은 조선 정부의 환심을 사려 애쓰고 있으니, 조선 정부의 원수인 당신을 억류하거나 붙잡아 넘기려 할지도 모르오. 중국이 조선에 줄 선물로 당신만한 것이 또 있겠소?”
옥균은 10년 유랑 끝에 이판사판이 되어 있었다. 돈도 건강도 동나고, 너구리 같은 일본 정객의 지원도 더는 기대할 수 없었다. 중국에 가서 세 치 혀로 마지막 담판을 벌이면 승산이 있을 듯싶었다. 설득 수완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중국의 이경방과 그의 양부 이홍장(李鴻章)을 협력자로 돌려 세울 수 있다고 과신했다. 옥균이 말했다.
“중국이라도 상하이의 조계(租界)는 중립지역이므로 위험하지 않습니다.”
하야시는 반박한다.
“중립지라는 것은 외국인이 자국의 법률로 보호받는 땅을 말하오. 그러나 당신이 거기에 가면 일본의 보호도 못 받고, 오직 중국과 조선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과 같소. 위험천만이오.”
그래도 옥균은 막무가내였다. 하야시는 옥균의 주장과 표정을 나중에 이렇게 전했다.
‘김옥균은 나가사키를 거쳐 상하이로 갈 모양이었다. 나가사키에서 이일직(李逸稙·명성황후 일파가 김옥균 암살을 위해 파견한 자객. 아직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의 사람(암살범 홍종우(洪鍾宇)를 지칭하는 듯)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받을 돈이라도 있어서 만나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실은 이일직이 노리는 바가 있어서, 김이 중국에 가니까 거기 편승해 무언가 일을 꾸미는 성싶었다.’ (고균 김옥균 정전)
‘삼화주의’의 바랜 꿈
1894년 중국에서 조선으로 송환돼 능지처참된 김옥균의 시체. 양화진 처형장에 효수해놓은 것을 찍은 것이다.
“김옥균의 장점은 사교술이다. 실로 외교에는 능했다. 문장력, 화술, 시, 글, 그림,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단점이라면, 덕(德)이 모자라고 모략이 없다는 것이었다.”
모략이 없다는 것은 순진하다는 의미다. 박영효의 인물평을 뒷받침하는 사건도 있었다. 1882년 1월8일자 일본 ‘초야(朝野)신문’에 난 기사를 보자. 서울의 대원군이 며느리 명성황후의 정권과 암투를 벌일 때 일본 망명객 옥균과 박영효에게 사람을 넣어 제휴의 손길을 내민 적이 있었다.
‘조선에 사는 오가와라는 일본인이 국왕의 아버지 대원군을 찾아갔더니 대원군이 조선 정부의 개혁에 대해 말했다. 오가와는 대원군의 비밀 지령을 받아 박영효와 김옥균에게 각각 전달했다. 김옥균은 이를 듣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금방이라도 사람을 데리고 서울에 달려가 대원군의 뜻에 보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박영효는 근직(謹直) 온후하고 평소 세상일에 손을 뗀 채 선학(禪學)에 빠져온 사람답게 이를 반대하고, 오히려 김옥균의 경거(輕擧)로 조선에 대환(大患)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면서 김옥균을 만류했다. 그래도 김옥균은 그 충고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귀국을 서둘렀다.’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로 금릉위라 불렸다. 권력투쟁의 맥락을 꿰뚫어보는 안목에서 확실히 옥균보다는 한 수 위였다. 복합적으로 보고 문제의 핵심을 짚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박은 옥균에게 상하이에 가서는 안 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같은 보잘것없는 망명객이 이홍장을 설득하고 그의 힘을 빌린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야. 꿈도 꾸지 말아야 해.”
옥균은 반박한다.
“이홍장을 만나 중국과 일본이 제휴해서 조선의 내정(內政)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이홍장도 이해할 거야. 세 나라가 이해관계를 평화롭게 조절하면 조선의 독립이 성취되고 조선 중국 일본의 동맹, 즉 삼화(三和)가 이루어질 거라 믿네.”
“이홍장이 우릴 알아주지도 않거니와, 설령 중국의 힘을 빌려 명성황후 정권을 몰아낸다 해도 중국에 종속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야.”
박영효의 반박이 이어지지만 결국 옥균을 말리지 못한다. 결과를 놓고 보면, 김옥균은 유랑에 지친 탓인지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이상향을 그려놓고 현실을 꿰어 맞추는 어리석음이라고 할까. 역시 박영효의 판단이 정확했던 것이다.
이 무렵 옥균은 부쩍 ‘삼화주의’라는 말을 자주 입에 담았다. 이것은 원래 후쿠자와의 발상이었다. 일본 조선 중국 삼국이 손잡고 화목과 발전을 도모하면 아시아에 평화가 자리잡고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비전이다. 그러나 김옥균이 삼화주의에 관심을 둔 때는 후쿠자와가 그 구상을 버린 지 한참 뒤였다.
후쿠자와는 이미 조선과 중국을 나쁜 친구, 즉 ‘악우(惡友)’로 규정하고, 악우와 놀다 손해 보느니 서양과 손잡고 악우에게 칼을 들이대 서양 제국주의의 논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론에 기울어 있었다. 그야말로 ‘모략이 없고’ 순진한 옥균이었다.
왕명칙서를 지닌 자객
사신(死神)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 옥균은 무엇인가에 쫓기듯 상하이 여행을 강행했다. 총리와 대신을 지낸 오쿠마 이누카이나 고토 같은 거물 정객에게도 찾아가 중국 여행을 떠난다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도쿄 유라쿠초 집에서 짐을 싸갖고 나와 해변의 시바우라(芝浦)에 있는 ‘해수욕’이라는 여관 겸 요릿집에 며칠을 묵었다.
1894년 3월9일 저녁 9시58분, 옥균은 시나가와(品川)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오사카로 향했다. 수행원은 주일 중국공사관 통역 오보인(吳?仁), 수행 보디가드 격의 청년 와다(和田延次郞)와 사진사 겸 수행원 가이(甲裴軍治) 단 3명이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 망명 시절의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왼쪽부터).
보디가드 와다는 도쿄에서 남쪽으로 1000㎞나 떨어진 태평양상의 오가사와라(小笠原) 출신이다. 그가 김옥균을 처음 만난 것은 8년 전인 1886년. 옥균은 망명 2년차이던 그해에 일본 정부에 의해 오가사와라에 유배됐다. 요코하마를 오가는 정기 배편이 1년에 네 차례밖에 없는 낙도 중의 낙도였다. 요코하마 항구에서 슈고마루(秀鄕丸)에 강제로 실려 21일 만에 도착했다. 거기서 알게 된 소년 와다는 옥균을 한국말 그대로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 시절 이래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옥균을 좇아 아들처럼 따라다녔다.
오가사와라 제도는 해저 화산의 융기로 생긴 섬, 즉 치치시마(父島) 하하시마(母島)등 30여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옥균은 아열대의 원시림이 우거진 음습한 치치시마와 하하시마에서 2년 동안 병고에 시달리며 유배생활을 한다. 절해고도(絶海孤島)의 외로운 삶에 지쳐 그는 미국으로 보내달라는 탄원서를 내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관(靜觀).’
그가 오가사와라 시절에 남긴 휘호다. 견디기 힘든 몸과 마음의 병을 다스리고자 몸부림친 망명 정객의 고뇌가 잡힐 듯 와 닿는다. 딱 한 가지 위안거리라면 일본 바둑의 대가 혼인보 슈에이가 다녀간 것이다. 그 머나먼 뱃길, 스무 날을 견디며 찾아와주었다. 슈에이는 무려 석 달이나 머물며 옥균의 바둑친구가 돼줬다. 슈에이는 옥균의 유배지가 홋카이도로 바뀌자 다시 삿포로까지 찾아와 위로하고 대국(對局) 상대가 돼줬다. 도쿄 망명 직후 바둑으로 사귄 이래, 둘의 우정은 참으로 두터웠다.
김옥균과 슈에이가 남긴 기보(棋譜)가 1992년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발견됐다. 1886년 2월20일의 이 대국에서 옥균은 6점을 놓고 일본 최고수 슈에이에게 230수 만에 불계승을 거뒀다.
오가사와라 유배는 옥균이 잘못을 저질러서 처해진 것이 아니었다. 고국에서 명성황후 일파가 옥균을 죽이려고 보낸 자객 지운영(池雲英·종두법을 전파한 지석영의 형제)이 발각된 사건 때문이었다. 지운영은 무기와 독약 따위를 갖고 김옥균에 접근하다 도쿄 긴자 인근 교바시 경찰서에 체포됐다.
‘명여특차도해포적사(命汝特差渡海捕賊使).’
‘바다 건너 역적 체포의 특명을 부여하노라’는, 지운영이 지니고 있던 왕명칙서였다.
당시 옥균은 도쿄 쓰키지(현재 수산물시장과 아사히신문사 일대)의 외국인 거류지에 살고 있었다. 1991년 조선의 첫 신사유람단이 쓰키지 해변의 하마리큐(긴자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는 해변정원)에서 영접을 받고 외국인 거류지에 묵은 이래, 조선영사관이 거기 들어서는 등 이 일대는 도쿄 진출 한인들의 교두보 구실을 했다.
일본에 있어 김옥균은 귀찮고 번거로운 존재였다. 조선 정부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반정부 망명객 옥균을 껴안는 것이 외교적으로 득(得)이 없다고 판단했다. 옥균에게는 가혹하더라도 일본의 국익을 위해 외딴 섬에 격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객 지운영을 명성황후 일파에 되돌려 보냈다.
계속된 전복 모의
자객 밀파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옥균에게도 귀책사유가 있다. 성격이 급한 옥균은 일본에 와서도 명성황후 정권을 전복하려 절치부심했다. 후쿠자와의 도쿄 집에서 두어 달 머물다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류지 야마테초로 집을 얻어 나갔다. 이 지역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 공원’으로 이름지어진 데서 알 수 있듯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경관 좋은 곳. 개항 이래 외국인들이 모여 살았고 지금도 외국인 묘지가 남아 있다. 현재 한국의 요코하마 총영사관이 야마테초에 멋들어진 한국식 건물로 들어서 있으니 김옥균의 선견지명이 엿보인다.
야마테초에서 옥균은 겐요샤(玄洋社)라는 우익 집단의 장사들과 접촉했다. 겐요샤는 시나가와역에서 합류해 오사카행 열차에 동승해 김옥균의 옆자리에 앉은 바로 그 인물, 도야마 미치루가 만든 조직이다.
도야마는 일본 암흑가와 정계에 전설로 남아 있다. 규슈 후쿠오카 태생인 그는 청년기에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征韓論)을 지지하다 사이고가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투옥된다. 24세 때 우익단체인 고요샤(向陽社)를 조직해 국회 개설 운동을 벌이고 그 조직을 발전시켜 겐요샤로 키운다. 그의 이름과 겐요샤는 일본 국가주의 운동의 원류로, 우익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그는 테러도 서슴지 않는 괴물이었다. 정부의 외교 교섭이 비위에 맞지 않자 외무대신 오쿠마를 없애버리려 했다. 겐요샤 부하인 국수주의자 구루시마를 시켜 폭탄을 던지게 했는데, 다행히 오쿠마는 한쪽 다리만 날리고 살아남았다. 테러로 문제의 외교 교섭이 중지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시·서·화에 능했던 김옥균은 일본 망명 생활을 하며 글씨를 팔고, 서도 전시회를 열어 푼돈을 마련했다.
옥균은 도야마와 겐요샤의 힘을 이용하고자 했다. 박영효는 이런 점을 못마땅해했지만 옥균은 막무가내였다. 옥균은 멀리 고베까지 가서 다루이라는 정치인을 유명한 아리마 온천(일본의 3대 온천 중 하나)에 불러내 조선 정부 전복을 논의했다.
옥균의 극비 모의가 고스란히 유지될 리 없었다. 다시 ‘초야신문’ 1886년 1월21일자 기사.
‘김옥균이 일본의 무뢰배 수백명을 고용해 폭약을 휴대케 하고 조선에 진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보도된 바 있다. 몇 달 전, 일본 배 미노마루가 인천에 도착하자 일본 경찰관이 그 배의 승객과 짐을 샅샅이 조사했다. ‘김옥균이 일본에서 무뢰한들을 조선에 보내 독을 뿌리겠다고 해서 사전 점검하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것을 조선의 경찰관 김굉신이 조선 정부에 보고해 발칵 뒤집혔고, 포도청이 나서서 변란(갑신정변)의 잔당을 엄중히 수색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옥균을 처치하고자 조선 정부가 자객 지운영을 밀파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오가사와라의 통탄
그러나 옥균으로서는 망명생활도 서러운데 오가사와라로 쫓아내는 일본 정부가 더없이 야속했다. 일본의 비정함에 치를 떨었다. 그날, 정변이 실패하고 인천으로 달아나 일본 망명을 위해 치도세마루에 올라탔을 때도 그랬다.
서울에서 명성황후 정권의 수구파 대신 조병호가 묄렌도르프(독일인으로 당시 직책은 통리기무아문 협판)를 인천에 급파, 일본 공사 다케조에에게 김옥균 등의 신병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갑신정변을 함께 모의한 다케조에는 돌연 안면을 바꾸고는 김옥균 일행을 향해 배에서 내리라고 했던 것이다. 죽으라는 말이었다.
위기에 몰린 그를 구해준 것은 선장 쓰지였다. 의협심으로 배 밑창의 화물창고에 옥균 일행을 숨겨줬던 것이다. 쓰지는 옥균에게 ‘이와타 슈사큐(岩田周作)’라는 일본식 가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와타는 옥균이 일본 체류 10년 동안 즐겨 쓴 통명(通名)이다.
오가사와라 유배 조처에 옥균은 너무도 억울하다며 반발했다.
“무릇 섬으로 보낸다는 것은 유형(流刑)으로서 중죄인에게 내리는 형벌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에게 보낸 유배 명령서에 죄명을 명시해야 할 일 아닌가. 나의 죄를 말해다오.”
그는 1886년 6월12일 주일러시아 공사에게 탄원서를 쓰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나를 일본에 오도록 허용했고, 그들의 보호 아래 평온하게 살게 해준 뒤, 갑자기 오가사와라에 보내 죽을 위험에 처하게 했습니다. 이는 이해가 가지 않고 국제법 원리에도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가 보호받을 수 있도록,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해주실 것을 바랍니다.”
암살미수범 지운영을 조선에 돌려보낸 것도 통탄스러웠다. 옥균은 영국인 변호사를 내세워 사법 당국에 고소했으나 검찰은 이유 없다며 뿌리치고 말았다. 옥균 자신은 유배당하는 신세가 됐다. 일본의 신문들이 옥균을 동정적으로 보도한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고 할까.
운명의 조우
김옥균 일행이 탄 열차는 밤새 달려 다음날 오후 1시 무렵에 오사카역에 닿았다. 이일직 등이 마중 나와 반갑게 맞아줬다.
이일직. 명성황후 정권의 거물 민영소의 비밀지령을 받고 2년 전인 1892년 5월 도쿄에 온 이래, 김옥균과 박영효를 암살하기 위해 암약해온 인물이다. 그는 쌀 무역업자로 위장해 활동하면서, 휘하에 권동수·재수 형제와 김태원, 일본인 가와쿠보를 고용해 옥균과 박영효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김옥균을 처치하려 해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어려운 데다 주변에 망명 동지인 이윤고, 유혁로, 신응희 등이 감싸고 있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박영효 또한 도쿄에 ‘친린의숙’이라는 학교를 세워 조선 청년 학생 30여 명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일직은 벌써부터 옥균 주변 망명 동지들의 의심을 샀으나 옥균은 그를 경계하라는 충고를 외면했다. 옥균은 “그 자를 믿지는 않지만 멀리할 필요야 있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자객이라도 오히려 ‘전향’해서 망명객인 자신을 도울 수 있으리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일본 망명 당시의 김옥균(왼쪽).
자객은 자객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홍종우가 이일직의 눈에 띄었다. 이일직은 홍종우를 불러내서 손을 잡자고 제의했다. 두 사람은 암살계획을 세웠다. 언젠가 김옥균은 이일직에게 말했다.
“망명생활도 벌써 10년이 되어가오. 자금이 부족하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형편이오. 좋은 계책이 있으면 말해주시오.”
그동안 글씨를 팔고 서도전시회를 열어 근근이 푼돈을 마련해왔으나 이제 그것조차 한계에 달해 있었다. 붓글씨도 팔리지 않아 곤궁은 더해갔다.
이일직과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중국에 가서 재원을 모으라고 권하고 상하이로 유인해서 처치하는 방안을 세웠다. 훗날 이일직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진술한 내용에도 그 흉계가 드러나 있다.
“김옥균은 조국혁명을 위해 무슨 방도가 있느냐고 나 이일직에게 물었다. 그래서 러시아나 프랑스에 의지하는 방법이 있고, 먼저 러시아에 가서 때를 살피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홍종우도 좋은 방도라고 맞장구를 쳤다.
김옥균의 마음이 크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때 러시아에 가면 프랑스어가 필요할 것이고 통역으로 홍종우를 데려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김옥균이 ‘실은 이홍장의 양자 이경방을 도쿄에서 사귀어 잘 아는 처지이니 중국에 가면 편리할 것 같다. 이홍장이 힘써준다면 대충 일이 될 것이다’고 했다. 그리하여 중국행이 정해진 것이다.”(훗날 도쿄지방재판소의 검사신문에서 이일직이 한 답변)
야마토의 여인
3월10일 오사카역에서 헤어진 도야마 미치루와는 14일과 16일 두 차례 다시 만난다. 옥균은 도야마와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내면서 중국행을 걱정하는 도야마에게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는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고 호언했다.
도야마는 만류를 단념한 듯, 옥균에게 ‘이홍장에게 선물로 갖다주라’며 뭔가를 내밀었다. 최고의 일본도로 치는 교토의 산조(三條)칼 한 자루였다. 이 일본도는 상하이에서 옥균이 살해당하자 임자를 잃고 말았다. 그래서 보디가드 와다가 소중하게 챙겨 도야마에게 정중히 돌려줬다.
옥균은 오사카에서 가까운 야마토에 들렀다. 거기에는 옥균의 사생아가 자라고 있었다. 옥균의 여자관계는 난잡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8년 전 망명 직후, 야마토의 히가시 히라노초 1465번지에 있는 야마구치의 집에 잠시 기식하는 동안, 야마구치의 어머니 나미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이듬해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문란한 성생활은 암흑가 보스 도야마의 권유에 자극받은 것일 수도 있다. 도야마의 얘기다.
“조선에서 김을 죽이려 자객을 보내자 그의 신변이 걱정된 나는 그에게 충고했다. 일본 고사(古事) 중 오이시우치가 교토에서 기라의 첩자를 방심시킨 내용을 인용하면서, 우국적 행위를 버리고 주색에 빠진 바보 시늉을 해보라고 권했다. 그랬더니 그가 매일같이 도쿄 유라쿠초의 여관에서 시바우라의 온천장까지 들락거리며 홍등가를 방황했다.”
반쯤은 자객의 칼끝을 무디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반쯤은 망명유랑에 지치고 지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쿄의 윤락가를 배회한 옥균. 박영효는 이런 옥균을 싫어하고 지겨워했다. 망명 동지들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짓이라고 비판도 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윤치호가 도쿄에 들렀을 때도 박영효는 김옥균을 격하게 비난했다.
“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 사람, 일본 사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쓰듯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혁명이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지도자 때문일세.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 꼴이 난 걸세. 그렇다고 옥균이 진짜 리더였나? 나와 홍영식이 다 했지.”
혼인보와의 추억
옥균의 주색(酒色) 방종은 홋카이도 유배시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오타루에서 사귄 기생도 옥균의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자기가 낳은 아이는 물론 다른 여자의 소생까지 거두어 옥균의 도쿄 쓰키지 집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사실 1888년부터 2년간 계속된 홋카이도 유배는 오가사와라 유배의 연장이었다. 옥균은 오가사와라에서 위장병을 심하게 앓아 몇 차례나 일본 정부에 호소한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마침내 삿포로 체류를 허가했다. 그해 4월30일 일본의 내무대신 야마가타가 외무대신 오쿠마에게 보낸 문서에 그 경위가 나타나 있다.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의 외국인 묘역에 있는 김옥균의 무덤과 비석.
옥균이 홋카이도에 도착해 하코다테의 가쓰다 온천,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촬영지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오타루를 다니며 몸을 추스르고 심신을 달래는 동안, 바둑의 명인 혼인보 슈에이가 다시 찾아왔다. 과연 의리와 인정이 있는 일본인이었다. 삿포로의 요류테이(楊柳亭)와 하코다테의 가쓰다 온천여관이 바둑모임의 근거지가 됐다.
혼인보가 왔다는 소문에 홋카이도의 유지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바둑을 두며 교유했다. 혼인보 슈에이와 옥균의 바둑모임에 관한 신문기사는 반년이나 이어진다. 슈에이는 홋카이도에 그처럼 장기 거주하며 옥균을 돌보고 위로했다.
옥균은 2년 반 동안 그렇게 눈 많고 싸늘한 홋카이도 유배생활을 견뎌야 했다. 1890년 11월이 되어서야 유배억류가 해제됐다. 그해 7월 총선거 결과, 김옥균과 가까운 이타가키가 총리가 되고 옥균의 후견 정치인이던 고토 조지로가 체신대신에 올라 힘을 써준 것이었다.
자신만 모르는 운명
3월16일, 옥균의 오사카 체류 7일째.
그는 교토에 가서 긴가쿠지(金閣寺·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제목으로 유명한 사찰. 일본의 국보)를 둘러본다. 12년 전 시찰차 일본에 처음 왔을 때도 긴가쿠지를 둘러본 적이 있다. 세상을 곧 하직할 것이라는 어떤 예감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다음날, 그는 이일직 일행을 만난다. 밤낮으로 옥균을 죽일 궁리에 몰두해온 일행, 그 가운데는 권동수와 재수 형제도 있었다. 그러나 옥균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일직은 옥균에게 돈을 내놓았다. 오사카와 내일 방문할 고베, 경유지 나가사키에서도 용돈이 필요할 것 아니냐고 했다. 옥균은 그 돈으로 당구도 치고, 양복도 맞추고, 골동품점과 토산품점을 기웃거리며 중국에 가지고 갈 선물도 샀다.
옥균이 쇼핑과 소풍으로 나돌아 다닐 때, 이일직은 홍종우를 불렀다. 마지막 점검이었다. 이는 홍에게 권총과 단도를 주면서 말했다.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면 반드시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동화양행에 묵도록 해. 배가 밤중에 도착하면 어둠을 틈타서 여관에 가는 도중에 뒤에서 총을 쏘아 죽이게.”
홍은 고개를 저었다.
“대로에서 처치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대신 동화양행에 들어가서 3층 객실이 배정되면 소리가 나더라도 권총을 써서 처치하고, 2층이나 1층 객실에 배정되면 투숙객이 놀라 뛰쳐나오지 않도록 단도로 찔러서 없애는 게 좋겠어요.”
이일직이 말했다.
“아무튼 상하이에 상륙할 때는 권총이 드러나지 않도록 헐렁한 한복 한 벌이 필요할 거야. 준비해서 그 안에 감추고 다니도록.”
김옥균이 고베에 도착해 니시무라 여관에 여장을 풀자, 홍종우도 오사카에서 고베로 찾아왔다. 이 여관은 옥균이 망명하던 해, 그의 신병인도를 요구하러 일본에 온 명성황후 정권의 사절 서상우 일행이 머물던 곳이었다. 옥균을 암살하려다 조선에 송환된 지운영도 여기 묵었다. 홍종우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고베에 도착해 처음 머문 곳도 이 여관이다.
옥균이 숙박계에 적어넣은 이름은 이와타 상와(岩田三和)라는 가명이었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조선·중국·일본의 삼화주의, 그 염원을 담은 것일 터이다.
홍은 여관 주인에게 은화 300개를 내밀며 금화 150엔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다시 지폐뭉치를 꺼내더니 “여객선 회사인 일본 우선(郵船) 고베지점에 가서 상하이까지 가는 승선표를 사되, 김옥균, 오보인과 내 표는 상등(上等)으로 왕복표를, 와다와 가이의 표는 중등(中等)으로 사달라”고 주문했다. 옥균은 고베 시내를 산보하며 담배 주머니와 궐련, 서양식 중절모를 샀다.
3월23일 사이쿄마루를 타고 고베항을 떠났다. 여관비 일체는 홍종우가 지급했다. 옥균, 와다, 사진사 가이는 일본 복장이었고, 홍종우는 양복, 오보인은 중국옷 차림이었다. 배는 24일 오후 나가사키에 닿았다. 일단 승객을 내리게 하고 만 하루를 쉬었다. 옥균 일행은 오무라초에 있는 후쿠시마야 여관에 묵었다. 일본 정부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조선 정부에 김옥균의 중국행을 서둘러 알렸다. 립 서비스였다. 당시 서울 주재 일본공사 오토리가 외무대신 무쓰에게 보낸 긴급보고서.
“조선 조정이 김의 중국 방문에 동요하고 있습니다. 제가 ‘김옥균이 사이쿄마루를 타고 상하이에 간다’고 알려줬기 때문에 궁중에서 그에 관한 대책을 놓고 회의를 열고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당시 서울 주재 중국 대표)까지 부르는 등 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정보를 준 내게도 감사를 표했습니다.”
김옥균만이 자신의 운명을 모르고 있었다.
최후, 그리고 능지처참
3월27일 오후, 옥균을 태운 배는 상하이에 도착했다. 옥균 일행은 홍종우의 안내대로 동화양행에 체크인했다. 옥균은 통역 오보인에게 개화 쿠데타 동지인 윤치호를 부르게 했다. 윤은 일본 망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갔다. 거기서 영어를 익힌 뒤 그동안 상하이에 머물며 중서학원(中西學院·The Anglo-Chinese College)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옥균은 윤치호에게 “이홍장의 양아들 이경방의 초청으로 오게 됐다. 경비는 이일직이라는 자가 대고 있다”고 말했다. 윤치호가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홍종우라는 수행원은 수상해 보입니다. 조심해야겠습니다. 스파이 같아요.”
그러나 옥균은 “스파이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신임하는 건 아니야”라고 답했다. 옥균은 왕복 배표가 석 달 유효라는 얘기도 하면서 당분간 중국에 머물 것이라고 했다.
운명의 3월28일이 밝아왔다. 홍종우는 수표를 현금으로 바꾼다는 핑계로 외출했다가 곧 되돌아왔다. 오보인은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며 외출하고 없었다. 보디가드 와다도 심부름으로 잠시 아래층에 내려간 사이, 옥균은 양복 저고리를 벗고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 책을 펼쳐들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이었다. 일본 정객 이누카이(훗날 총리가 됨)가 전별 회식 때 빌려준 것이다.
홍종우는 서둘렀다. 권총을 꺼내 옥균의 머리를 겨누어 한 발을 당겼다. 옥균이 흠칫 놀라 쳐다보는 사이 또 한 발. 비칠거리며 일어서는 그에게 다시 한 발. 모두 세 발이었다. 옥균은 홍종우를 붙잡을 심산이었는지, 피할 생각이었는지, 몸부림치면서 20m 떨어진 복도에 쓰러졌다.
와다가 총성에 놀라 돌아왔을 때, 옥균은 절명해 있었다. 같은 층에 묵고 있던 시마자키라는 해군대령이 총성에 뛰쳐나왔으나, 홍종우는 달아나고 유혈이 낭자한 옥균의 시신만 뒹굴고 있었다. 홍종우는 다음날인 3월29일 오후 경찰에 체포됐다.
김옥균의 시신은 중국 군함 위정호에 실려 4월12일 인천에 닿았다. 왕명에 따라 시신은 능지처참됐다. 일본 ‘지지(時事)신보’ 1894년 4월28일자는 그 현장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김의 시신을 관에서 끄집어내 땅 위에 놓고, 절단하기 쉽게 목과 손, 발 밑에 나무판자를 깔았다. 목을 자르고 난 다음에 오른쪽 손목, 그 다음 왼쪽 팔목을 잘랐다. 이어 양 발목을 자르고 몸통의 등쪽에서 칼을 넣어 깊이 한 치, 길이 여섯 치씩 열세 곳을 잘라 형벌을 마쳤다.”
끝나지 않은 기복(起伏)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의 외국인 묘역 한가운데 김옥균의 무덤이 있다. 1904년 3월 그의 유발(遺髮))과 의복 일부를 묻고 3m 높이의 비석을 세운 것이다.
김옥균이 죽고 능지처참당한 이후에도 그 파란만장한 기복(起伏)은 끝나지 않는다. 죽은 지 8개월이 지난 1894년 12월. 갑오경장에 따라 총리대신 김홍집과 내무대신 박영효의 연립내각이 들어서면서, 그는 왕명에 의해 완전히 복관(復官)된다. 옥균의 부인 유씨도 노비로 전락했다가 복권됐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아관파천으로 정세가 뒤집히고 박영효가 다시 일본으로 달아나는 신세가 되자, 복권조치는 취소된다. 1910년 한일강제합방 이후에 김옥균은 ‘규장각 대제학’으로 복권됐다.
도쿄 아오야마 묘지의 외국인 묘역 한가운데 자리잡은 비석, 개화당 유길준이 쓴 비명(碑銘)의 첫 구절이 바로 그의 삶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비상한 재주를 갖고,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功)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하게 죽어간, 하늘나라의 김옥균공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