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다시 위(魏)나라로, 마침내는 초(楚)나라로 ‘소속’을 바꿔가며 입신양명을 도모한 오기(吳起). 그는 출세를 위해 아내마저 살해하는 비정함을 드러내며 군사적 명성을 떨쳤지만, 결국 자신을 불신하는 세력에 의해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오기의 인생을 놓고, 군사에서는 우수했으나 정치에서는 참사했으니 이를 곧 그의 일변도적 자질로 속단한다면 ‘성급한 간단화’라는 오류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의 정치개혁 구상만 해도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했을뿐더러 통찰력과 짜임새가 돋보인다. 비극은 열악한 환경과 여의치 않은 조건 때문에 초래된 것이다.
그의 인생행로에서 말썽이 된 ‘가정파탄’에 대한 비참한 고민, ‘소속의 변경’을 에워싼 변절 시비도 간단한 논란대상이 아니다. 그의 역경과 인생론, 신조체계를 아울러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생관에서의 ‘선택’ 문제와 ‘자기실현(self-realization)’ 문제는 21세기에 와서도 모든 지성인의 지속적 관심사로 부각되는 까닭에 따로 언급이 필요할 것 같다.
오기의 환경과 성격
오기는 전국시대 초기 위(衛)나라에서 태어났다. 위는 작은 나라였다. 오늘의 허난(河南)성과 산둥(山東)성 사이에 위치해 교통은 편리했으나, 주변 강대국의 멸시 대상이었다. 또 그 통치집단은 무사안일을 능사로 삼는 고식적인 사대주의자들이었다.
오기의 가정은 부유했는데, 부친은 벼슬에 실패하고 상인으로 성공했다. 성공의 비결은 밝은 인사성, 그리고 시비(是非)를 가리지 않는 처세술이었다.
오기는 나서부터 똑똑했으며 독서를 즐겼다. 자존심도 무척 강했다. 성장하면서 권력지향적인 공명심이 각별히 강해졌다. 시비 가리기에 명확했으며 결단력이 비상했다. 자존심과 공명심, 결단력으로 특징지어지는 그의 성격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 또 시비 가리기에 명확한 만큼 신의를 중시하고 행동이 엄격하며 정실에 좌우되지 않았다.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오기는 조국인 약소국 위나라에 계속 붙어 살다가는 뜻을 펼 수 없으며 인생의 보람도 찾지 못할 것이라 통감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문화생활을 즐기며 인재들을 사귄다고 가재(家財)를 탕진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던 거리의 동년배들은 오기를 좋게 보지 않았다. ‘과대망상’이니 ‘방탕아’니 하는 조소도 들려왔다. 아내의 불평불만도 늘어났고 잔소리도 많아졌다. 결국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오기는 아내와 이별했다. 아내는 후회하며 돌아오길 원했으나 오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오기 자신은 안에서만 강하고 밖에 대해 약하다면 이는 비굴한 노예근성일 뿐 대장부답지 않다고 단정했다. 그래서 자기를 조소하거나 부당하게 시비하던 동년배 30여 명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결국 그는 사건에 대한 추궁을 견뎌내지 못하게 됐다. 오기는 위나라를 떠나 외국에 가서 공부한다는 명분으로 노모와 작별하면서 맹세했다.
“외국에서 대신이나 재상에 오르기 전엔 절대 위나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 죽이고 전쟁에 대승
오기는 먼저 노(魯)나라를 찾아갔다. 대국은 아니지만, 공자의 출생국답게 문화가 발달했다. 유학(儒學)으로 이름난 증자(曾子)의 문하생이 되어 열심히 공부하면서 천하에 대한 시야를 넓혔다. 점차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마침 이웃 제(齊)나라에서 대부(大夫) 벼슬을 하던 인사가 노나라에 와 있었는데, 오기가 인재임을 알자 자기 딸과 결혼시켰다. 오기의 두 번째 아내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어느 날, 갑자기 고향에서 인편으로 속달이 왔다. 노모가 별세했다는 소식이었다. 오기는 비통에 잠겼다가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의 혼잣말이다.
‘고향을 떠날 적에 노모 앞에서 맹세하지 않았던가. 외국에 가서 대신이나 재상이 되기 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그러니 돌아갈 수 없다. 결심은 강해야 한다.’
오기는 아울러 자신이 죽인 동년배 연고자들의 보복 가능성도 감안했을 것이다. 오기는 슬픔을 딛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했다. 스승인 증자가 그 사연을 알고 오기를 불러 고향에 가서 모친상을 치르고 오라고 엄명했다. 유교에서는 효도가 으뜸 윤리다. 하지만 오기는 따르지 않았다. 분노한 증자는 오기를 파문하고 축출했다.
오기는 비통과 비난으로 더욱 고독해졌으나, 더 분발하여 병법 서적과 서류에 파묻혀 연구에 몰입했다. 유학과 멀어진 것을 기회로 법가(法家)의 통치술을 폭넓고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때를 기다리며 준비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드디어 애타게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와 오기를 향해 미소 짓기 시작했다. 비상시국에 즈음하거나 위기의식이 팽배하지 않고서는 어느 군주도 오기와 같이 경력상 문제가 있는 영재를 즉각 발탁하기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마침 이웃 제나라가 군대를 동원해 노나라를 침공해왔다. 삽시간에 3개의 성을 탈취했는데 노군은 연전연패했다. 병사들의 질에는 별 차이가 없었으나 사령관이 문제였다. “공자 왈”이나 되뇌며 ‘논어’만 읽던 노나라의 평범한 선비들은 제군을 막아내지 못했다.
위기에 처한 노나라 목공(穆公)이 이때 주목한 사람이 바로 오기였다. 지능이 뛰어나고 병법 소양이 풍부하다는 세평이 자자한 데다 오기는 성격과 풍채도 군인다운 특징이 있었다. 목공은 즉각 오기를 장군으로 임용하려 했으나 제동이 걸렸다.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고관의 딸이라니 어느 나라 편이 될지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기는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와 자신의 뜻을 펴고 돌아가신 어머니 앞에서 한 맹세도 지킬 참인데, 아내의 출신지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사라지게 됐으니…. 정신착란이라도 일으킨 듯 고민에 잠긴 오기는 넋을 잃은 상태에서 아내를 살해하고 만다. 그러나 자신의 공명심 때문에 무고한 아내를 죽인 행위는 어느 나라의 도덕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하여튼 노나라 목공은 안보가 위급한 데다 다른 대안도 없으니 오기를 장군으로 임명했다. 전선으로 달려간 오기는 상황을 파악한 뒤 침착하게 작전을 짰다. 우선 적 진영에 특사를 파견해 ‘약소국의 병력으로는 귀군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니 평화를 위한 담판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적군의 거만함을 조장하고 방심을 유도한 것이다. 동시에 노군의 전투대형을 바꿔 우익과 좌익에 걸쳐 정예부대를 배치하는 한편, 중앙에 노약자 부대가 모여 있게 했다. 적의 주력을 중앙으로 유도하면서 노군은 측익으로부터 맹공을 개시했다. 결과는 노군의 대승과 제군의 참패로 판가름 났다.
이에 앞서 오기는 그동안 연전연승을 자랑하던 제군의 관용 전법을 연구해뒀다. 본시 인간은 지난날 성공의 비결이라든지, 승리를 이끈 전법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법이다. 노군 사령관의 교체라는 조건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기는 그러한 적군의 심리를 역으로 이용해 대승을 거둔 셈이다.
급기야 노나라는 모든 실지(失地) 회복에 성공했고, 오기의 명성은 삽시간에 천하를 진동시켰다. 하지만 오기는 노나라에서 중용되지 않았고, 도리어 악질적인 중상과 간휼(奸譎)한 참언에 휩싸이게 됐다. 목공을 에워싼 측근의 소인배들이 경쟁적으로 중상과 참언을 일삼았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오기는 장군이 되고자 무고한 아내를 죽인 비정한 사내이니, 어찌 앞날의 충성을 믿을 수 있겠는가 ▲원래 노나라와 위나라는 형제국으로 친목관계를 유지해왔는데, 만약 우리 노나라가 오기를 중용하면 위나라와의 관계가 파탄에 이를 것이다 ▲오기를 중용해서 거듭 성공하면 다른 제후국의 질투심과 경각심을 자극하게 되어 그들이 앞을 다퉈 침범해올 것이다.
위(魏)에 바친 충성과 하서(河西) 통치
노나라 목공은 이러한 소인배들의 중상모략에 현혹돼 오기를 불신하고 냉대했다. 이러한 상황을 직시한 오기는 노나라에 더 머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는 탈출을 결심했다. 다음 행선지는 위(魏)나라였다. 때마침 위나라는 문후(文侯)가 집권 중이었는데, 뜻과 그릇이 컸다. 특히 부강국 건설을 위해 천하의 인재를 영입·중용하는 데 적극적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오기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문후는 이미 중용하고 있던 이극(李克)이란 인재를 불러 의논했다.
“오기는 어떤 인물인가?”
“오기는 공명심이 강하고 여자관계가 좋지 않지만, 병법과 용병술에 있어 그 이상의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주공에게 필요한 인재는 유능한 장군이지, 유덕한 공자님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사진)는 잦은 당적 변경으로 구설에 올랐다. 중국 전국시대의 영재 오기도 국적 변경 시비에 휘말렸지만, 그는 뛰어난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당시 위나라는 중원의 선진지역에 위치하여, 전국칠웅(戰國七雄) 가운데서도 강대한 편이었다. 또 문후는 개혁과 개방의 정치를 표방하면서 인재 등용이 국운을 좌우한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위나라엔 신흥의 기상이 왕성했다. 오기를 중용한 것에서 보듯이 소악(小惡)에 구애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대담하게 등용하고 특별대우와 신임하는 데도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임명식 거행에 앞서 성대한 환영 연회를 마련했는데, 문후의 부인이 직접 술을 따라 오기에게 바치기도 했다. 이어서 융숭한 의식을 거행하고 오기를 정식으로 대장에 임명했다. 전국시대치고도 휘황찬란했던 오기의 본격적인 군사적·정치적 생애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오기는 감격에 겨워 위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무한충성을 바치고자 결심했다.
문후는 오기를 대장으로 임명하고는 잠시 군정을 파악하게 한 뒤 중대한 명령을 내렸다. 서쪽 강대국인 진(秦)나라에 대한 진공을 명령한 것이다. 목표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하서(河西)지구 점령이었다. 이 지방은 오늘의 산시성(山西)성과 산시(陝西)성의 경계를 흐르는 황허(黃河)와 산시성 서북부를 관통하는 뤄수이(洛水)의 중간지대인데, 그동안 위진 양국의 군사적 충돌이 빈번했다가 당시는 그 대부분이 진군의 점령하에 놓여 있었다. 진나라의 중원 진출 근거지 격이고, 위나라에 최대의 위협을 주는 곳이기도 했다.
오기는 위군 주력을 이끌고 진격을 개시해 2년에 걸쳐 적국의 5개 성을 함락시키며 하서지구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오기 병법의 요체는 적군 사령관의 심리 및 생태 파악이고, 다른 한편 아군의 군심 장악이다. 이는 슬기로운 통찰력과 크나큰 영도력을 전제로 한다.
기뻐한 문후는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하서군을 설치하고는 오기를 태수로 임명했다. 군사와 더불어 정치도 일임한 것이다. 정치에서는 청렴의 본보기를 말없이 실천하면서 ‘변법(變法)’이라는 개혁을 단행해 사회 기풍을 신뢰와 화합 위주로 일신했다. 경제에서는 이른바 ‘지력지교(地力之敎)’를 펴나가 지방 실정에 맞는 개발정책으로 세금을 줄이면서 민생을 향상시켰다. 군사에서는 ‘무졸(武卒)’이라는 상비군을 창설해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는 동시에 그 가족들을 따뜻이 보살폈다.
오기는 일상생활에서 특권층 행세를 하지 않았고, 사병과 고락을 같이하며 검소했다. 언행이 자연스럽고 명확하며, 실정을 빨리 이해해 부하들이 우러러 봤다. 오기의 하서지구 통치 기간은 약 20년에 달하는데, 당시의 모든 기록과 문헌이 그를 찬양하고 있다. 그는 몸소 실천하는 모범을 통해 장교와 하사관에게 ‘부하 사랑’을 교육하기도 했다.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해진다.
한번은 한 병사가 종기로 고통을 겪는 안타까운 광경을 발견했다. 오기는 주저하지 않고 다가가 입으로 고름을 빨아냈다. 병상에 있던 병사의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 이웃이 타일렀다.
“당신 아들은 병사에 불과하지만, 오 장군께서 친절하게 고름까지 빨아내 주셨는데, 감사 대신 통곡이 웬일이오?”
병사의 모친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이전에 오 장군이 그 애 아비의 고름을 빨아낸 일이 있었지요. 그러자 감격해서 오 장군을 위해 생명을 바친다고, 전선에 나가서는 형세가 불리해도 후퇴하지 않고 싸우다 전사했어요. 이번에는 아들까지 그렇게 되겠으니 슬퍼 우는 거요.”
야릇한 ‘2세 심리’와 탈출 구상
그런데 오기를 등용하고 신임하던 명군 문후가 세상을 떴다. 후계자는 무후(武侯)였는데 나이가 어렸다. 오기는 무후의 경험 부족을 고려해 간언과 건의를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판단은 ‘2세 심리’를 모르는 오판이었다. 2세 또는 후계자는 경험담이나 잔소리를 싫어한다. 아울러 오기 또한 인간이니 때로는 대상에 대한 심리적 통찰에서 실책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무후는 누나인 공주를 오기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는데, 오기는 이를 거절했다. 여복이 없다고 믿는 자학심리 같은 것이 의식의 심층에 자리잡은 데다, 공주가 가문만 믿고 남편을 업신여기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자존심이 손상된 무후는 오기를 불신했다. 그후 신설된 재상직의 주인공이 전문(田文)에서 공숙(公叔)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오기는 승진에서 소외당했다. 2세는 1세의 그늘에 안주하지 않고, 독자적인 권위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애쓰는 법이다.
무후가 오기를 보는 눈은 부정적 방향으로 치달았다. 처음엔 경원하다 싫어하게 되고, 이어서 불신으로 옮겨간다. 다음 차례는 경계심과 적개심인데, 이를 부채질하는 것이 소인배들의 참언이고, 일부 정보원들의 경박한 오보(誤報)도 이에 합세한다. 그리되면 인재가 멋쩍게 기대할 것은 억울하게 당하는 숙청뿐이다.
오기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조건이 무너지고 신변에 위협마저 느끼게 되자, 위나라 탈출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적대국은 안 되겠고, 그러다 보니 장래성 있고 희망을 걸 만한 대상국으로 초(楚)나라가 부각됐다.
그동안 위국에 봉사하면서 서하지구를 점령·수비하는 동안, 오기는 큰 싸움을 76차례나 치렀다. 그중 전승은 64차례이고 나머지는 무승부였다. 패전은 한번도 없었고, 위나라를 위해 광대한 새 영토를 확보했다. 강대한 진(秦)군으로 하여금 동진(東進)을 체념케 하면서 위의 국가안보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러한 오기를 잃으면서 위나라는 급전직하 쇠망으로 치닫게 된다.
전국시대 초기 천하를 뒤흔든 오기의 명성은 한편으로 ‘유명세’처럼 그의 행동 자유를 제약했을 뿐 아니라 불필요한 질투심과 경계심, 적대의식을 초래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의 ‘이름 가치’는 시간 낭비가 따르지 않는 즉각적인 ‘투자 가치’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번에는 오기를 활용할 기회가 남방의 강대국 초(楚)나라로 넘어간 셈이다.
때마침 초나라에서는 인재를 갈망하던 도왕(悼王)이 집권하고 있었다. 그는 약 100년에 걸쳐 쇠약해진 국운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개혁이 필요하며, 개혁이 성공하려면 이를 구상하고 추진할 탁월한 인재가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도왕은 오기가 입국했다는 보고를 접하자 벌떡 일어서면서 좋아했다. 하늘의 도움이라 생각한 것이다. 오기를 상빈(上賓)의 예의를 갖춰 환영하고 곧바로 원()이라는 지방의 태수로 임명했다.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는 동시에 초나라의 실정을 연구케 한 셈이다.
초나라의 정치개혁
1년 후에는 수도로 불러들여 초나라의 최고 군정장관 격인 영윤(令尹)으로 임명했다. 외국의 재상에 해당한다. 개혁을 주도하라는 의미였다.
오기의 개혁 목표는 부강한 초나라 건설이었다. 그 방법은 우선 가문주의에 안주하는 무능하고 부패한 기득권층, 즉 귀족과 왕족의 특권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군공(軍功)이 있는 군인 출신 신진 엘리트를 대량 등용해 요직에 두면서 국가와 사회의 중핵세력이 되게끔 육성하는 데 있었다. 그러자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오기는 불행히도 너무 일찍 이승을 떠나야 했다(오기의 개혁 작업은 3년으로 중단됐고, 그는 60세경에 사망했다).
개혁 작업에 들어간 오기가 맨먼저 착수한 것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방대한 영토를 차지했던 왕족·귀족들로 하여금 3세 후에는 모든 작위와 영지를 국가로 반환케 한다는 법령 제정이었다. 반환된 재산은 군공을 세운 군인과 행정 실적이 뚜렷한 공무원에게 분배한다고 했다. 이런 조치에 대해 “우리는 뭘 먹고 사느냐”고 항의하던 기득권층에게는 황지(荒地)와 미개지를 지정하여 개간케 하고, 정부가 그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해주기로 했다.
다음으로 쓸데없는 정부 부처와 자문기관을 폐지했고 무능한 관리를 파면했다. 절감된 예산은 복지와 군비에 돌렸다. 청탁 금지와 부패 퇴치에도 엄격했다. 군비 확장을 군인 보호와 병행했다.
개혁의 초창기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기원전 381년엔 남진(南進)의 탐색전을 벌이려던 진군을 간단히 격퇴했으며, 초나라의 맹방인 조나라를 침범하던 위군을 대패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했다. 몰락하던 기득권층의 반항이 뭉쳐지는 반면, 개혁 지지세력의 중핵화 작업은 더뎠다. 정보기구의 혁신·보강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다사다난했던 기원전 381년, 바로 그해에 갑작스레 불행이 닥쳤다. 개혁을 적극 지지하며 오기를 절대 신임하던 도왕이 돌연 병사한 것이다.
비극적인 인생 종장
드디어 기득권 세력이 조직적 반란을 일으켰는데, 오기가 국장(國葬) 준비에 바쁘던 무렵이었다. 궁전으로 난입한 반란세력을 피하는 위급한 순간, 오기의 머릿속에 최후의 지혜가 번쩍였다. 그는 도왕의 시체 곁으로 달려가 엎드렸다. 뒤쫓아온 반란군 귀족들이 오기를 향해 마구 활을 쏘아댔다. 무수한 활촉이 오기의 죽음을 재촉하는 동시에 도왕의 시체에도 수없이 꽂혔다. 반란세력은 오기의 시체를 끌어내어 토막냈다.
초나라 태자가 등극해 숙왕(肅王)이 되자, 제1호 칙명을 내려 오기를 죽이면서 선왕의 시체를 손상한 70여 귀족 가문을 모조리 족멸(族滅)의 극형에 처했다. 오기는 죽으면서도 죽은 국왕의 손을 빌려 개인적 보복을 완수한 셈이다.
“군자는 위험한 곳으로 가까이 가지 말라”고 유가는 가르치지만, 그것은 평시의 일이다. 위급할 때는 연루가 많을 곳, 위험한 곳을 찾아가는 것이 지혜롭다고 병가(兵家)는 가르친다.
오기는 불행했으나 슬기로운 인재였다. 희생 없이는 대공(大功)도 없다고 역사는 말해준다. 오기의 행적을 보면 과오도 뚜렷했으나, 그 연유의 대부분은 난세의 역경과 악조건으로 돌려야 할 것 같다. 공명심은 인간이 누구나 한때 갖는 것이지만, 능력과 운명에 따라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공인으로서 그의 생활을 바라보면 중국에서는 높은 평가만이 돋보인다. 유능한 군인이고 훌륭한 정치가에다 민감한 경제인을 겸했고, 일깨움이 많은 저서도 남겼다고 한다. 사마천(司馬遷)을 비롯한 거의 모든 중국인이 오기에게 동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중국인은 자기보다 못한 자를 지도자로 선출하지 않는다).
일부 외국인은 오기가 위(衛)나라에서 노나라로, 노나라에서 위(魏)나라로, 다시 초나라로 국적(또는 소속)을 바꿨다고 ‘변절 시비’를 제기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영국 총리 처칠도 ‘당적 변경’(보수당과 자유당을 왕래)으로 유사한 시비에 휘말렸다. 고대 중국 한(漢)제국의 최고 승상이자 최량의 충신으로 꼽히는 진평(陳平)도 위나라에서 항우 진영으로, 다시 유방 진영으로 소속을 옮겼던 인재다.
공명심은 자기실현으로 연결된다. 인간은 누구나 나서부터 갖고 있는 자신의 능력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는 생명의 동력이고, 발전의 원천이다. 나아가 능력이 뛰어날수록 자기실현 욕구도 강력하다고 알려져 있다. 보편성과 개별적 특징이 교차된 이러한 심리분석은 이승의 전국시대를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다 결국 비극을 통해 저승으로 떠나가버린 오기의 생애를 관조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대목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