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호

한국 시 형식의 증거 ‘김상옥 시전집’

  • 이근배 시인, 재능대 교수

    입력2005-12-15 17: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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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시 형식의 증거 ‘김상옥 시전집’

    ‘김상옥 시전집’ 민영 엮음/창비/2만5000원

    대나무처럼 곧고 푸른 역사를 청사(靑史)라고 한다. 이 나라의 푸른 역사 속에는 저 고려시대부터 뻗어내려온 오직 하나뿐인 민족문학의 전통형식, 시조의 숨결이 가쁘게 뛰고 있다.

    두 해 전 반세기 넘게 닫혀 있던 북녘 땅 개성에 갔을 때 내가 눈이 아프도록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가슴에 담은 것은 선죽교였다.

    개국(開國)의 제왕이어서였을까, 태조 왕건의 묘는 새로 문무상을 우람하게 깎아 세우고 단장했으나 어쩐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반혁명의 사적(史蹟)이라 꾸미지 않은 것일까, 600년 전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 선죽교는 오히려 어느 궁성보다도 높이 우러러보였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저 500년 고려왕조를 한몸으로 떠받치며 목숨과 바꾼 노래 ‘단심가’는 내 머릿속에 맨 처음 박힌 이 땅의 노래였고, 그 영원한 민족의 시가(詩歌)를 청청히 흘려보내고 있는 다리가 선죽교 아닌가. 그 다리의 이름은 선지교(選地橋)였는데 뒤에 포은이 흘린 피가 묻은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하여 선죽교(善竹橋)로 불리게 된 것은 다 아는 일이다.

    이렇듯 역사와 시조, 그리고 대나무는 한뿌리로 자라나고 있었으니 100년 전인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맺어지자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이 자결했는데 민영환의 갑옷과 칼이 있던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았다고 했다. 그 충절을 기려 1906년 ‘뎨국신문’ 8월13일자에는 시조 ‘혈죽가 십절(十絶)’이 명누, 충현 등 10인의 여학도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이것이 곧 신(新)시조의 첫 장을 연 것이다.



    치열하게 밝혀 든 모국어 혼불

    올해는 광복 60주년을 맞는 해이다. 이 모국어의 광복 60년을 기념하듯 ‘김상옥 시전집’이 우리 앞에 푸른 대나무로 솟아올랐다. 이것은 육당 최남선이 “시조는 한국시가의 본류(本流)”라고 높이 외치면서 시조의 중흥에 불을 붙인 후 가람 이병기, 노산 이은상, 정주랑 조운에 이어 시조를 현대시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초정(艸丁) 김상옥(金相沃)이 이룩한 단 하나의 푸른 역사다.

    김상옥은 1920년 3월15일 경남 통영시 항남동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통영공립보통학교를 마친 것이 학력의 전부이다. 그는 하늘이 준 뛰어난 시재(詩才)로 보통학교 시절부터 동시를 발표했다. 1938년에는 김용호, 함윤수 등과 동인지 ‘막(?)’을 창간하고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10월, ‘문장’에 시조 ‘봉선화’가 이병기의 추천으로 실리고, 이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이 당선되었다. 동년배의 문학도들이 자유시 쪽으로 몰려갈 때 그는 시조의 물살을 일으키는 외롭고 고달픈 길을 나섰던 것이다.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제의 강압에 많은 지식인이 훼절(毁節)의 오점을 찍을 때에도 초정은 체포, 구금, 도피와 은신을 거듭하면서 몸이나 글을 굽히기를 단연코 거부했으며 오직 시조 창작에 몰두, 해방공간인 1947년 시조집 ‘초적(草笛)’을 출간한다.

    바로 한 해 앞서 나온 ‘청록집(靑鹿集)’이 조지훈·박목월·박두진 세 시인이 각각 시집 한 권 분량이 안 되는 시를 모아 묶은 것이고, 서정주의 ‘화사집’ ‘귀촉도’가 각각 24편을 수록했던 것에 비해 ‘초적’의 41편은 시대적 어둠 속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모국어의 혼불을 밝혀 들었던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시조집 ‘초적’이 출간되자 시조시단을 넘어서 범문단으로부터 갈채가 쏟아졌다.

    소설가이며 당대 최고의 문학논객이던 김동리는 “‘초적’의 작가 김상옥씨야말로 노산, 가람 이래 우리 시조시단의 최고봉을 섭렵한 시인으로 한번 ‘초적’을 읽은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의가 없을 것”이라고 ‘민중일보’ 시 평단에서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정주는 “그는 모든 사물을 볼 때마다 거기에 살다가 죽어간 옛 어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넋을 찾아내는 데 있어서 우리 시인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눈을 가진 선수이다. 귀신이 곡(哭)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의 시 속에는 늘 귀신도 많이 참가하여 곡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했으니 시를 보는 눈이 귀신의 경지에 달한 서정주도 그만 넋을 잃었던 것은 아닌지.

    시조의 금자탑

    또한 조지훈은 1947년의 문단을 총평하면서 “작년에 나온 모든 책 중에서 두 권을 고르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양주동의 ‘고가연구’와 김상옥의 ‘초적’을 꼽겠다”고 했다. 1947년은 서정주의 ‘귀촉도’, 유치환의 ‘생명의 서’, 이태준의 ‘복덕방’, 김동리의 ‘무녀도’ 등 우리 문학사를 장식한 휘황한 명작이 쏟아져 나온 해였는데 조지훈의 안목에는 창작물로는 오직 ‘초적’만이 들어설 뿐이었다.

    뒤이어 발표한 ‘고원(故園)의 곡(曲)’(1949), ‘이단(異端)의 시’(1949), ‘석류꽃’(1953)으로 초정은 시조의 현대시적 재구성에 벼루를 뚫고 붓을 무지르며 질풍노도로 한 시대를 갈랐다.

    ‘초적’ 이후 한걸음도 쉬지 않고 자유시의 거센 홍수에 맞서 민족시가의 본류, 그 흐름을 혼자 감당하면서 2004년 10월 그믐, 붓을 내려놓기까지 초정이 이룩한 시조의 산맥, 시조의 거대한 강물이 그의 1주기를 맞아 ‘김상옥 시전집’으로 상재된 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만나기 어려울, 시조의 금자탑이며 한국문학의 보고가 아닐 수 없다.

    보면 깨끔하고 만지면 매촐하고 神거러운 손아귀에 한 줌 흙이 주물러져 천 년 전 봄은 그대로 가시지도 않았네-‘청자부(靑磁賦)’ 5수 중 첫수

    불 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하도다-‘백자부(白磁賦)’ 4수 중 끝수

    요즘 국보1호를 숭례문으로 그대로 두느냐 바꾸느냐로 논란이 일고 있다. 우리 5000년 역사가 낳은 최고의 예술은 청자, 백자가 아닐까. 저 이름 없는 도공들이 빚은, 세계에 내놓을 절정의 예술혼(魂)을 이 나라의 어느 시인이 함부로 시로 집어낼 수 있을 것인가. 첫 시조집 ‘초적’에 들어 있는 ‘청자부’ ‘백자부’에 김동리, 서정주, 조지훈이 탄성을 지르고도 남을 일이다.

    바로 우리네 삶과 정신의 가장 오래고 가장 깊은 뿌리를 모국어로 캐고 시조로 물레질한 시인이 초정이다. 개화기의 물결은 서구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것, 남다른 것에 쏠리고 정작 우리의 것은 외면하고 있었다.

    不易摩天詩樓主人

    초정이 모두들 달려가는 자유시를 거부하고 고유의 민족시인 시조를 고집해 시단에 나온 것은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를 굽던 도공의 그 솜씨를 잇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과연 초정은 우리 시의 청자며 백자를 재현했다.

    그는 스스로 많은 아호(雅號)를 지었는데 그중에도 불역마천시루주인(不易摩天詩樓主人)이 하나의 상징을 갖는다.

    도대체 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보다 높은 시인의 집은 어디 있으며 그 주인은 누구인가. 초정은 1970년대 초 인사동에서 조선 초기 청화백자 한 점을 행상 노인에게서 구입한다.

    15세기의 그 항아리에는 철사(鐵砂)로 그린, 사람이 용을 타고 있는 형상이 담겨 있는데, 마치 동자의 붓끝에서 나온 듯한 신필(神筆)의 것이라 우리나라 도자기 그림의 역사를 통틀어도 다시는 없는 것이어서 일본의 어느 소장가가 조선백자를 두고 동경의 큰 빌딩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는 일화에 빗대어 “그렇다면 나는 이 도자기를 마천루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천명하면서 작호(作號)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희귀한 도자기보다는 ‘김상옥 시전집’이 있기에 불역마천시루라 하겠으며 그 주인이 초정이라 해서 한치도 어긋남이 없으리라고 말한다.

    을사늑약이 있은 지 100년. 그로부터 현대시조의 혈죽(血竹)이 솟아올랐으니 이제 시조 100년의 총결산을 해야 할 때다. 여기에 때를 맞춘 것은 아닐 터이나 지난 시조 100년사에 이 ‘김상옥 시전집’이 아니었다면 무엇으로 이 겨레의 정신과 정서, 그리고 모국어의 가장 빛나는 가락을 시조만이 내뿜을 수 있다고 강변하겠는가.

    ‘김상옥 시전집’은 초정 한 사람의 위업을 담아낸 것이 아니요, 시조가 한국인이 한국어에 의한 한국을 위한 진정한 시 형식임을 작품으로 증거하는 위대한 한국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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