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린성 3개 기업, 무산철광 50년 개발권 확보
- 훈춘무역공사, 라진항 3, 4부두 50년간 조차
- 평양 주요백화점 임대·경영권, 중국 기업으로
- 중국 자본이 북한 땅을 파고든다. 중앙정부의 강력한 드라이브에 따라 각 성(省) 기업들이 북한 내 주요 지하자원 광산개발권을 따내고, 항구와 철도 등 주요 인프라를 공동 건설하거나 수십년 조차(租借)하는 식으로 독점사용권을 확보하고 있다. 이미 평양을 가득 메운 중국 소비재는 북한 소비층의 구매행태를 장악한 지 오래. ‘동북공정의 경제버전’으로 추진되는 이 같은 추세는 한반도 통일과정과 그후의 갈등을 배태하고 있는데….
가로등도 없는 묘향산 길을 밤에 이동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초 일정과 달리 향산호텔에서 이틀을 묵은 후 귀국길에도 평양시내로 들어가지 못하고 직접 순안공항으로 가야 했다. 우리의 청와대 경호실에 해당하는 북측 호위총국에서 후 주석의 평양 체류기간 중 남측 인사들이 평양에 숙박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고 한다. ‘평양시내 밖 숙박’이라는 원칙은 북측이 극진히 예우하며 초청한 진보 성향의 통일원로 그룹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 이들도 향산호텔에서 사흘 밤을 보내야 했다.
이번 방북기간에 평양 양각도호텔에서 만난 중국인들은 노동당 창건 60주년을 앞둔 지난 10월9일 중국 우이(吳儀) 부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완공된 대안친선유리공장의 기술자들이었다. 대안친선유리공장을 건설한 야오화유리집단공사 소속 중국 기술자들은 2억6000만위안(약 340억원)이 투입된 첨단유리공장의 운영방법을 북측 기술자들에게 6개월째 전수하고 있었다. 후 주석도 평양 방문기간 중 유리공장의 컴퓨터 통제실을 찾아 기술전수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점검하는 등 깊은 관심을 보였다.
대동강 주변에 풍부하게 매장된 규사를 사용해 하루 300t의 유리를 생산하는 대안친선유리공장은 북한과 중국의 우의와 협력을 상징하는 금자탑으로 칭송되고 있다. 현대화된 설비를 갖춘 대안친선유리공장은 부지가 29만3000㎡, 연 건축면적이 15만7500㎡에 달하지만 불과 15개월 만에 완성되어 ‘속도전’을 자랑하는 북한 당국을 놀라게 했다. H빔을 사용하여 조립식으로 최단기에 완공된 공장 건설과정은 공사기간 내내 조선중앙TV 저녁 종합뉴스에 단골메뉴로 등장했다.
북한 전역을 달구고 있는 중국 자본의 진출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의 붐만 해도 2004년 봄을 기점으로 본격화한 것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중국의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2004년 4월2일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경제·무역협력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중국 정부는 중국 기업이 북한측과 다양한 형태의 호혜협력을 행할 것을 적극 장려한다”고 천명한 일이었다. 신의주 특구의 양빈 장관이 구속되고 후진타오 주석의 방북이 지연되는 등 북·중간 이상설이 확산되던 당시 상황에서 원자바오 총리의 중국 기업 대북진출 장려는 극히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철, 무연탄, 동, 금, 아연, 목재까지
중국 정부의 보증문서가 나오자 민관 차원의 대북진출이 본격화됐다. 중국은 지난해 2월 ‘베이징자오화유롄(北京朝華友聯)문화교류공사’를 설립해 정부 차원에서 대북진출을 총괄하기 시작했다. 중국과 북한 사이의 민간상업 촉진 및 투자업무 자문회사인 이 회사는, 민관영을 통틀어 북한이 유일하게 자문권한을 인정한 기업이다. 자오화유롄공사는 형식상 민간기업이지만 실질적으로 중국 정부를 대행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중국 기업들의 대북투자는 중국 중앙정부와의 교감 아래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김영민 부위원장은 2005년 2월 베이징에서 열린 투자사업설명회에서 “2004년말 현재 북한에 진출한 외국기업은 300개이며, 그중 40%인 120개가 중국 기업”이라고 밝혔다. 또한 자오화유롄공사의 톈하루이 기획부 경리에 따르면 2005년 6월말 현재 이 회사를 통해 북한측과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사업항목이 300개가 넘는다.
이렇듯 날이 갈수록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중국 자본의 대북진출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구한말 서구열강이 조선을 침략할 때 경쟁적으로 얻어낸 지하자원 및 목재 채굴권이다. 둘째로는 에너지, 항만 및 물류 등 사회간접자본의 투자 및 조차권(租借權)이 있고, 셋째로 의류·신발·식품 및 가전제품 등 소비재상품을 직접 수출하는 방식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분야는 지하자원 채굴이다. 빠른 성장으로 각종 원자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중국 경제는 북한의 지하자원 확보에 깊숙이 손을 뻗치고 있다. 특히 2000년부터 중국의 동북부 개발계획이 구체화되면서 건설경기가 활발해지자 각종 건설 원자재를 확보하는 데 비상이 걸렸고, 이 때문에 중국은 각 성(省) 차원에서 북한 지하자원에 투자하고 있다.
중국 지린성의 3개 철강기업이 향후 50년간 개발권을 확보한 북한 무산광산.
중국은 이를 통해 무산철광에서 매년 1000만t의 철광석을 캐낸다는 계획이다. 북한은 지난해에만 동북아시아 최대의 철광산인 무산광산에서 100만t의 철광석을 채굴해 지린성에 제공했다. 원래 무산탄광에서 채굴된 철광은 무산광산연합기업소로부터 청진의 김책제철연합기업소에 이르는 길이 100km의 정광(精鑛) 수송관으로 운반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무산광산에서 채굴되어 선별된 정광은 국경 인근에 있는 중국측 더화(德化)진에 야적되어 대형 트럭으로 중국의 제강소에 옮겨지고 있다.
2003년 694만달러 규모이던 북한의 대중국 철광석 수출은 2004년 6배가 넘는 4452만달러 수준으로 급증했다. 중국 지린성은 5000만t의 철강석을 생산하고 있지만 성(省)내의 자급 비율은 40%에 불과하다. 연간 생산량이 252만t인 퉁화철강그룹은 2007년 무렵 철광석 수요가 820만t에 달할 것으로 예측되자 북측에 50년의 합작을 요구했다. 북한은 지난 9월 중국 창춘(長春)에서 열린 동북아투자·무역박람회에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해 적극적인 투자유치 활동을 벌였다. 이후 10월초에는 북한 내 최대 무연탄 광산인 용등 탄광이 중국 비철금속 대기업인 우쾅그룹과 처음으로 합작회사 설립에 합의했다.
이와 함께 중국 ‘제일재경일보’ 2005년 2월3일자에 소개된 바 있는 양강도 혜산청년동(銅)광산 개발 프로젝트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중국측이 2억2000만위안을 투자, 지린성의 풍부한 전력을 북한에 제공하고 북한은 중국에 동(銅) 광산 채광권을 주는 일종의 바터 거래다. 이러한 방식의 사업은 회령 금광, 만포 아연광산 등에서도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지하자원을 필요로 하는 지린성과 전력을 필요로 하는 북한의 요구가 맞아떨어 이루어진 사례다.
중국이 관심을 갖는 것은 지하자원뿐이 아니다. 현재 랴오닝(遼寧)성 관전현 대서차진 림강촌 지역에는 임시통상구인 대북(對北) ‘화물경유지’ 설치가 추진되고 있다. 림강촌 지역은 평안북도 벽동군 동주리와 압록강을 사이에 둔 지역으로 벽동군 일대의 목재 집하장. 랴오닝성은 이 출입구를 통해 총 1만2000㎥에 달하는 목재를 수입한다는 계획이다.
천연자원의 채굴 못지않게 의미심장한 것이 북한의 사회간접자본 분야에 대한 중국 자본의 발빠른 움직임이다. 노동당 창건 60주년을 맞아 2005년 10월9일 방북한 중국의 우이 국무원 부총리는 박봉주 북한 내각총리와 면담하면서 자원개발과 함께 기초 인프라 건설 참여의사를 강조했다.
인프라 건설의 대표적인 분야는 지난 가을 알려진 라진항의 50년간 독점사용 사업이다. 중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동북지방 개발에 대비해 기존의 다롄항을 대체할 새로운 항구로 두만강 하구에 위치한 라진항에 주목하고 상당 기간 북한에 공동개발을 타진해왔다. 그러던 중 올 들어 북한이 중국측 제의를 수용해 라선시 인민위원회가 중국의 훈춘(琿春)시 둥린무역공사 및 훈춘국경경제협력지구보세공사와 50대 50으로 자본금을 출자해 라선국제물류합영공사를 설립키로 한 것이다.
바로 이 라선국제물류합영공사가 라진항 제3부두와 현재 건설이 추진되고 있는 제4부두를 향후 50년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중국측 합작 파트너는 우리 돈으로 약 390억원 규모의 자금을 북한 내 도로 건설, 관광시설 및 공업단지 조성 등에 투자할 계획이다.
이 사업에서 북·중 양측이 기대하는 바는 서로 다르다. 북측은 외자유치로 육로운송 조건이 크게 개선됨으로써 주변에 풍부한 철광석, 석탄, 희귀 금속 및 도자기 원료 등을 채굴하고, 수려한 풍광을 이용한 관광업은 물론 교통요지를 활용한 무역업과 제조업이 활기를 띨 것이라고 기대한다.
반면 중국은 동북부 개발을 통해 동해로 나가는 출구를 확보하게 됐다. 중국은 동북아의 허브항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닌 라진항을 50년간 독점 운영함으로써 한국의 속초와 부산, 러시아의 자루비노와 포시에트, 일본으로 이어지는 운수통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된 것이다. 특히 지린성의 최대 공업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훈춘은 태평양 진출을 위한 출구로 삼기 위해 라진항이 필요했다.
이렇듯 북한과 중국의 서로 다른 이해가 묘하게 일치함에 따라 사업은 양측 모두에 윈윈(win-win) 게임이 된 형국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사업은 동해안의 물류 이동권을 중국이 조차하도록 허용한 것이므로 한국의 처지에서 보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통일과정에서는 물론 통일 이후에도 우리의 영토주권이 장기간 상당한 정도로 제한받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백두산 관리권 잃은 조선족 자치주
국제법적으로 ‘조차지’란 두 나라 맺은 조약에 따라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로부터 차용한 영토를 가리킨다. 이러한 조차지에는 무기한·영구적인 것도 있으나 보통은 홍콩처럼 조차기간이 붙고, 이 기간에 영토를 내주는 나라(租貸國)의 영유권이 유보되는 형식을 취한다. 조차지는 조대국의 통치작용이 포괄적으로 배제된다는 점에서 특정한 통치작용만 제한 또는 배제되는 국제지역(國際地役)의 승역지(承役地)와는 구별된다. 중국이 북한으로부터 확보한 라진항의 50년간 부두사용권이 조차인가 아닌가는 논란이 일 수 있다. 그러나 라진항의 관련 부두시설은 조대국의 통치작용이 포괄적으로 배제된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조차지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이렇게 보면 중국과 북한의 중장기적인 조차협약은 국제법적으로 통일한국의 권리를 상당히 제약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기업들과 북한 당국이 체결한 계약은 국제계약이다. 국가가 외국의 사기업에 대하여 자원개발에 관한 양허(concession)를 부여한 것으로 일종의 경제개발협정이 되는 것이다. 이들 협정의 대부분은 일부는 공법, 다른 일부는 사법에 의해 규율되는 동시에 계약의 존속기간 동안 개인 및 법인은 본국인 중국정부의 외교적 보호 아래 놓이게 된다.
국제법적으로 경제개발협정의 법적 성질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파기가 가능하다는 주장과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경제개발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면 불법행위나 계약위반의 책임이 발생한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따라서 북한이 붕괴하더라도 중국 기업이 체결한 독점적 권리는 당초 기간대로 인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향후 통일된 정부 또한 라진항에 대한 50년 조차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확인할 사항이 있다. 북한과 중국이 체결한 계약에, 만일 해당국가가 금전적 보상 없이 이미 부여된 독점적 권리를 몰수하거나 파기할 경우 외국 기업의 본국이 외교적 보호권을 발동해 권력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는 이른바 ‘칼보 조항(Calvo Clause)’ 등이 포함됐는지가 그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중국의 영향력과 유효한 계약서 등을 감안하면 이러한 조항이 있다 해도 통일정부가 중국과의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차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외에도 홍콩의 시사지 ‘아주주간(亞洲週刊)’은 중국과 북한이 양국간 물류 활성화를 위해 합작 철도회사를 설립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7월 중국 정부가 옌볜의 조선족 자치주가 갖고 있던 백두산 관리권을 중국의 지린성으로 이전한 것도 유사한 사례다. 중국은 옌볜의 조선족 자치주를 철저히 배제한 채 백두산 개발계획을 내놓았다. 이는 백두산 관광수입에 의존해 생계를 유지하던 조선족은 물론 자치주 전체가 붕괴될 수 있는 치명적인 조치다. 향후 백두산 관리권의 환원을 둘러싸고 통일한국이 부딪쳐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그밖에 중국은 톈진시 등에서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 북한 남포시를 개성·금강산과 유사한 개발특구로 육성하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화교가 밀집한 함흥에 중국 자본을 끌어들여 새로운 화교경제구역을 건설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소문도 있다.
중국인이 중국 물건 파는 백화점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북한 시장을 점령해 들어가는 중국산 소비재 상품과 호텔업 등 서비스업의 직접 진출이다. 평양시내 호텔 구내상점에서 사 먹을 수 있는 라면, 과자, 초콜렛 등 과자류와 셔츠, 신발의 85%가 중국산이다. 북한이 10월말 열린 11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의에서 옷 3만t, 비누 2만t, 신발 6000켤레를 요구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북한측 요구는 해당 소비재가 없어서가 아니라 중국산 소비재의 수입대체를 위한 것이었다.
북한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평양 제1백화점의 임대권과 경영권이 중국 기업에 넘어가는지 여부도 관심사다. 2004년 8월 중국 선양(藩陽)에 있는 중쉬그룹의 쩡창뱌오 회장은 홍콩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제1백화점에 대한 10년 임대차권을 따냈고 2004년 말까지 5000만위안(약 65억원)을 투입해 내부를 개조한 뒤 중국 상인들이 직접 중국 상품을 팔 수 있게 할 것”이라며 합의내용을 공개한 바 있다. ‘중국의 유대상인’으로 불리는 원저우(溫州) 상인인 그는 “앞으로 제2백화점, 평양지하백화상점 등 4개의 백화점을 맡아 북한 주민이 필요로 하는 의류, 신발, 식품, 가전제품, 조명기기 등 모든 생활용품을 중국의 상인들이 공급하도록 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언급했다.
중쉬그룹이 10년간 우리 돈으로 75억원 규모의 자금을 투자하는 임대차계약을 체결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자 한국 정부는 이를 서둘러 부인하며 “여전히 북한이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제1백화점에 중국 자본이 투업되고 있으며, 다만 그 이윤의 배분을 둘러싸고 이견이 있는 정도이다. 북측 처지에서는 호텔 경영권이 넘어갔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므로 외부에는 숨기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구체적 사실은 자매결연한 평양신문사의 초청으로 9월17일부터 5박6일간 평양을 방문한 중국 선양시 흑룡강신문 기자단 일행의 취재에서도 밝혀졌다. 중국 조선족 동포신문인 이 매체는 중국과 조선이 합작해 경영하는 대형백화점이 3개이며, 합작경영 호텔도 2개나 된다고 평양신문사 관계자를 통해 확인했다.
이들 기자단은 또한 평양시 통일거리에 위치한 농수산물 무역시장에서 유통되는 상품도 중국산이 상당수였다고 보도했다. 중국산 가전제품, 생활제품, 식품, 냉동고기, 수산물 등이 유통되고 있으며 하얼빈에서 인기 있는 ‘룽창룽’ 소주가 6000원에 판매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북한 일반주민의 월 평균 소득이 3000~4000원인 만큼 엄청난 가격이지만, 평양시내 50만명에 달하는 이른바 ‘핵심계층’ 인사들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이다.
특히 2002년 7월 북한이 발표한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화폐경제가 부분적으로 도입됨으로써 일부 계층에서 부(富)의 축적이 이뤄짐에 따라 고가의 중국산 제품 소비가 가능하게 됐다. 북한 주부들에게 인기 있는 가전제품은 중국산 텔레비전, 세탁기, 선풍기 등이다. 북한 주민이 선호하는 이른바 ‘5장6기(이불장 양복장 책장 식장 신발장과 텔레비전 수상기 냉장기 녹음기 세탁기 재봉기)’ 가운데 80% 이상이 중국산이다.
중국측 세관통계에 따르면 2004년 중국의 대북수출 품목 1위는 53만t의 원유를 포함한 광물성 연료이고, 2위는 냉동육류다. 육류는 2003년에는 전년대비 6배, 2004년에는 전년대비 2배가 증가했다. 3위 품목인 컬러TV는 2002년 7만대, 2003년에는 17만5000대, 2004년에는 21만대로 증가했다. 비디오는 2002년 2000달러에 불과했지만 2003년 41만달러, 2004년에는 216만달러로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그밖에도 전년과 대비해 2004년 들어 급신장세를 보인 소비재로는 커피와 차(4.7배), 유제품 및 베이커리(3.7배), 음료 및 알코올(2.9배), 도자기제품(2.2배), 악기(9.4%), 가구 및 침구(73%) 등이 있다. 모두 북한에서는 비교적 고급 소비재로 분류되는 품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2002년 7월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북한에 일반 식당이 증가하고 일부 부유층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통계다. 이쯤 되면 고급 육류를 먹으면서 중국산 차와 술을 마시고, 컬러TV와 비디오로 외국 유명 드라마를 보며, 역시 중국산 악기로 여가를 즐기는 북한 고위층과 비즈니스 계층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신의주가 중국 단둥(丹東)의 하청생산기지가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라이터, 셔츠 등 중국 업체들이 요구한 임가공이 신의주의 저렴한 임금을 기반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단둥-신의주 벨트는 북중 국경지대에 가설된 아홉 개의 통로 가운데 물자교류가 가장 많고 비즈니스 종류도 다양하다. 단둥 주민들이 돈이 되면 무슨 업종이든 가리지 않는 신의주 주민들을 보고 ‘돈산주의’라고 놀리는 형국이다. 돈이면 무엇이든 한다는 뜻이다.
중국은 이 벨트를 통해 북한 산업분야를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다. 평양시내 정보통신 전문상점에서 판매하는 컴퓨터와 관련 용품은 대부분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다. 중국의 롄샹(聯相)그룹은 북한의 정보통신(IT) 시장을 장악했다. 일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공장에서 조립된 미국산 델(Dell) 컴퓨터도 판매되지만, 686 펜티엄 컴퓨터의 가격이 1500달러 선에 불과한 중국산은 가격도 저렴해 시장에서 압도적이다. 평양 시민의 주된 운송수단인 자전거도 중국이 투자한 평양자전거합영공장에서 만든다.
향후 중국의 대북진출 분야는 여행사, 호텔 및 무역업 등 서비스 분야를 중심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것이 올해 1월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시 조선반도투자사업설명회에 나온 쳰융창 성(省) 행정간부학원장의 설명이다. 그는 조만간 보험, 증권 및 은행 부분의 투자가 가시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중국 자본의 북한진출 러시는 한중일 3국의 대(對)북한 무역비율을 비교하면 확연해진다. 중국의 대북 무역비율 규모는 2004년 현재 총 13억8500만달러(36.6%)로, 한국의 6억9700만달러 (18.4%), 일본의 2억5200만달러(6.7%)를 각각 두 배, 여섯 배 차이로 따돌렸다. 북·중과 북·일 무역 규모는 2000년 당시 중국이 4억8800만달러, 일본이 4억6400만달러로 비슷했으나 최근 그 차이가 엄청나게 벌어졌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도대체 중국 자본은 왜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가난한 북한에 진출하는 것일까. 평양은 가까운 시일 안에 수익을 남기는 시장이 될 것인가. 북한은 왜 중국 자본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는가. 그에 얽힌 경제적 고려 이외의 정치적 요인은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중국 자본의 대북투자에는 북·중 양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몇 가지 측면이 있다. 우선 북한은 북핵 위기에 따른 미국과 일본의 경제봉쇄로 중국 자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을 강화하는 바람에 돈줄이던 무기 수출과 마약밀매가 막힌 것이다.
반면 중국 처지에서 보면 우선 북한의 투자환경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중국 자본이 지난해를 기점으로 압록강을 건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2002년 7월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기업의 독립채산제가 확립되고 비즈니스 관행이 정착되기 시작한 평양의 기업활동 여건 개선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와 함께 북한이 향후 훌륭한 시장으로 성장할 가능성 또한 중국 기업을 자극하고 있다. 푸젠(福建)성 대외경제무역청 대표로 베이징에 근무하는 왕웨이리 주임은 “북한의 현재가 중국의 1970년대말~1980년대초와 비슷하며, 지금 북한에 진입하는 것이 시장을 점령하는 데 가장 좋은 시기”라고 설명했다. 미개척 시장의 봇물이 터지면 경공업과 사회간접자본 투자수요는 급증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 정부는 수시로 투자설명회 등을 개최하며 기업인들로 하여금 북한시장 선점전략을 강력하게 추진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의 경제버전
세 번째로 주목할 것은 이러한 중국의 움직임이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경제버전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으로서는 김정일 이후에도 한반도 북반구에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외교목표를 지켜야 한다. 특히 중국의 입김이 정치적 차원을 떠나 경제영역에까지 확대될 경우 역사에 이어 경제분야의 동북공정은 자연스럽게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동북3성의 중화(中華)경제권이 한반도로 확대되는 것이다.
최근 중국은 백두산 관리권을 강화함으로써 옛 간도지역에 대한 영토분쟁의 싹을 미리 제거하려는 의도를 굳이 감추지 않고 있다. 만주지역에서 조선족의 민족주의가 발흥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예 북한과의 경제적 통합을 택한 측면도 있다.
북한 경제 회복의 수장인 박봉주 내각총리의 2005년 3월 중국 방문은 북중 경제협력이 북핵 문제 해결과 함께 양국간 최우선 관심과제가 됐다는 것을 상징한다. 일본 교도통신은 중국이 최근 후진타오 주석의 방북을 계기로 북한에 약 20억달러의 장기원조 제공의사를 밝혔다고 보도했다. 물론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북한이 어려울 때 우리의 능력이 닿는 선에서 도울 수 있다”는 답변을 통해 20억달러 지원설을 완곡하게 부인한 바 있지만, 이는 북한의 요청이 반영된 제스처일 공산이 크다.
북·중 경제혈맹, 한국의 대응은?
문제는 이렇듯 북·중 관계가 경제혈맹(血盟)으로 발전하는 대세가 장기적으로 북한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북한이 제품을 생산해 내수시장을 구축하기 전에 중국 제품의 소비지로 전락하게 된다. ‘자체적인 자본축적을 통한 생산증가→소비증가→투자증가→자본축적’의 선순환 발전구조를 형성하지 못하고, 대신 ‘소비재의 수입대체→생산 중단→자본축적 실패→재투자 중단’이라는 악순환 구조가 심화될 수 있다. 북한 경제의 중국 경제 종속이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안방인 평양까지 중화경제권에 점령당하는 최근의 현실은 한국으로선 매우 우려할 만하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협력사업 외에는 한국으로부터 얻어낼 것이 없다는 판단하에 중국 자본에 대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따지고 보면 중국에 대한 의존은 북한이 그동안 그토록 거부해온 ‘외세종속’이나 다름없다. 한반도 북반구가 대륙 세력인 중국의 동북3성 경제권과 해양 세력인 한국 경제권 중 어느 쪽에 편입될 것인가는 21세기 한민족의 진로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렇듯 북한을 중국의 동북3성과 결합해 ‘동북4성’으로 만들려는 흐름에 대해, 한국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정책은 매우 제한적이다. 당장 라진항에 대한 50년 조차 문제만 해도 한국 처지에서는 대응이 필요한 일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북한과 중국이라는 두 주권국가가 체결한 합의에 대해 이견을 밝히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는 지적을 피할 길이 없다. 한국이 중국에 대항해 북한에 대한 경제 투자를 무한대로 확대하기도 쉽지 않다.
결국 이러한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방국을 통해 역학관계를 세심하게 관리하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다. 2005년 가을 한반도 북반구에서 불어오는 북·중의 한랭전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은 미국과 일본 등을 통해, 찬 기류가 한꺼번에 갑자기 남측으로 내려오지 않도록 이 지역에 투사되고 있는 힘의 논리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움직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