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년 원하지 않던 중학교에 가까스로 입학한 나는 한 선생님을 만나 인생이 달라졌다. 의욕을 잃은 내게 문학적 재능이 있음을 일깨워주시고,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늘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건 선생님의 예지력과 연금술이다.
1973년 동북고 3학년 시절 신철수 선생님(오른쪽)과 함께.
실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동북중학교에서 주최한 장학생 선발시험을 미리 본 적이 있다. 그 학교 서무주임으로 계신 분이 아버지 고향분이어서 알게 된 정보 덕이었다. 함께 과외 공부하던 친구들까지 떼로 몰려가서 실습 삼아 시험을 치렀는데 결과는 나 혼자 합격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 대부분이 사교육을 받던 시절의 이야기다.
동북중학교에 진학할 생각이 1%도 없었기 때문에 내겐 그다지 기쁜 소식도 아니었다. 짓궂은 과외선생님은 동북을 ‘똥북’이라고 발음하며 걸핏하면 “넌 똥북이나 가라”며 놀리셨다. 결국 동북으로 가게 된 후 그 말씀이 씨가 된 게 아닌가 싶어서 한동안 과외선생님을 은근히 원망하기도 했다. 그나마 후기전형으로 입학하면 장학생 대우라도 받을 수 있었는데 나는 3차, 이른바 보결로 들어온 셈이어서 그런 혜택조차 받지 못했다.
학생들의 학업수준은 대체로 삼류(?)였지만 선생님들은 쟁쟁한 일류였다. 실력이 출중했을 뿐 아니라 대단히 의욕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셨다. 영어를 가르치던 정향숙 선생님이 특히 인상에 남는다. 여선생님인데도 학생들이 모두 무서워해서 영어시간에는 떠드는 아이가 거의 없었다.
국어를 담당하신 오완영 선생님은 꼭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처럼 수업을 하셨는데 나중에 진짜 목사님이 되셨다. 바로 그 오 선생님이 어느 날 나를 부르시더니 “수업 마치고 교무실로 가서 신철수 선생님을 만나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반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분이라고 하셨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워낙 소심한 터라 그 말을 들은 후 남은 시간 내내 걱정이 되어 수업에 몰두하기가 어려웠다.
“‘문학의 밤’에 나가봐”
방과 후 1층 교무실로 향하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그러나 특별히 죄지은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침 신 선생님이 자리에 계셨다.
“네가 주철환이야?”
그리 다정한 음성은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 윽박지르는 느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거 네가 쓴 거 맞아?”
선생님의 손에는 몇 장의 원고지가 들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지난 국어시간에 내가 제출한 작문 과제물이었다. 왜 내 숙제가 지금 선생님의 손에 들려 있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한번 내 앞에서 읽어봐.”
선생님의 말씀에, 겁에 질린 목소리로 떠듬떠듬 읽어 내려갔다. 고개를 끄덕이시던 선생님이 짧게 말씀하셨다.
“제법인데.”
중학생이 된 후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그러고는 놀라운 명령을 내리셨다.
“너, 다음 달에 열리는 교내 문학의 밤에 나가라.”
선생님은 이렇게 나의 화려한 데뷔무대를 마련해주셨다. 그 시의 제목은 ‘나’였고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내가 우울할 때도, 배가 고플 때도, 화가 났을 때도 액자 속의 내 얼굴은 철부지처럼 늘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밤이 되어 하늘엔 별들이 나타났는데 액자 속의 나는 여전히 한낮의 동산에서 신나게 놀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땐가 동구릉으로 소풍 가서 찍은 흑백사진을 작은 액자 속에 넣어두었는데 그걸 보며 별생각 없이 지은 시였다. 어찌 보면 시라고 할 수도 없는 조잡한 내용이었는데 선생님은 그걸 높이 평가하시고 교내 최고의 행사인 문학의 밤에까지 나가라고 등을 떠미신 것이다.
당시 웬만한 중·고등학교는 문학의 밤이라는 연례행사를 열었다. 분위기 있는 배경음악과 함께 희미한 조명 아래서 시를 낭송하는 자리인데, 볼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인근 학교 학생들도 많이 구경 오곤 했다. 그 해 ‘동북 문학의 밤’에는 당시 유명한 시인이던 김용호 선생님이 초대작가로 오셔서 강평을 하셨다. ‘곡마단 트럼펫 소리에 탑은 더 높아만 가고…’로 시작하는 ‘5월의 유혹’을 쓰신 분이다. 그 시는 당시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다. 김 시인은 유독 내 이름을 거명하며 중학교 1학년 학생의 시로 매우 훌륭하다고 평가하셔서 수줍음 많은 나를 감격시켰다.
‘바둑이’ 선생님
별볼일 없던 나는 졸지에 동북의 스타가 되고 말았다. 행사가 끝나기 무섭게 인근 계성여고 문예반 누나가 나를 찾아왔다. 이정인이라고 자신을 씩씩하게 소개한 후 자기 학교 문학의 밤에 와서 그 시를 낭송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 누나는 나중에 이화여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서 미주 한국일보 기자가 됐다. 지금까지 연락하며 지내는 절친한 사이다. 이화여대 교수로 오기 한참 전에 대학 홍보실에서 이화에 얽힌 추억을 써달라고 해서 그 누나와의 인연을 소상히 쓴 적이 있는데, 나중에 내가 이화여대 교수로 오게 됐으니 ‘참 세상은 좁구나’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문학의 밤 행사가 끝난 후 복도나 운동장에 신 선생님의 모습이 멀리서 보이면 호로록 달려가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선생님은 늘 조그만 몽둥이를 들고 다니셨는데 그걸로 내 옆구리를 찌르는 게 그분의 독특한 인사법이었다. 수업을 할 때 다른 학생들에게도 늘 그런 식으로 애정을 표현하셨다.
그분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선생님을 ‘바둑이’라고 불렀다. 자그마한 체구에 귀여운(?) 눈망울이 한눈에도 장난꾸러기 같아 보였다. 흔한 성함이어서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영희야, 철수야, 바둑아 이런 식으로 붙여진 별명임이 분명했다. 중학교 3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나는 ‘고궁’이라는 시를 써서 장원을 했는데 선생님은 따로 나를 불러서 먹을 것까지 사주시며 격려하셨다. 중학교 3년 내내 선생님의 수업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의 따뜻한 시선이 내 주변에 머물고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주철환도 모를 거야”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세칭 명문이라고 하는 경기·서울·경복중학교가 한꺼번에 없어지면서 경기·서울·경복고등학교는 그 중학생 숫자만큼 입학정원이 늘어났다. 동북중학교에 다니던 동기 중에도 공부깨나 하던 친구들은 그 3대 명문으로 많이 진학했다. 그러나 국어를 제외하고는 공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나는 그 대열에도 끼지 못했다. 동북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천만다행인 것은 신철수 선생님이 동북중학교에서 동북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기셔서 드디어 2학년 때부터 선생님께 국어를 배우게 된 일이었다.
선생님은 소문대로 국어의 대가, 아니 지존이었다. 전설로 내려오던 선생님의 국어수업은 매시간 내게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백제가요 ‘정읍사’를 가르치시는데, 처음 나오는 단어 ‘달’ 하나만 가지고도 칠판의 절반을 채우는 정도의 심화학습이었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이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알록달록 흥미로운 수업을 진행하셨다.
지금 돌아보니 선생님의 수업은 한 편의 미니시리즈와도 닮았다. 단순한 지식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사춘기 소년들의 심리와 생리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고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의 학습법을 구현하셨다. 그때 벌써 교실 안의 ‘시청률’을 높이는 고도의 전략전술을 가지고 계신 분이 선생님이셨다.
나는 어느 시점에서 선생님의 분신이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장차 유능한 국어교사가 되기로 굳게 결심한 것이다. 국어수업은 어느새 선생님과 나의 긴장감 넘치는 대결의 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건방진 나의 일방적인 해석이다. 선생님과 대적(?)하기 위해 다른 공부는 안 해도 국어과목만큼은 복습 예습을 철저하게 했다. 없는 돈에 국어 참고서만 따로 두세 권 사봤을 정도다. 선생님은 이따금 “이건 주철환도 모를 거야”라고 하시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셨고, 나는 이에 뒤질세라 “선생님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하며 언필칭 국어의 달인 행세를 했다.
운명이 그렇게 가기로 계획을 세웠는지 고맙게도 선생님은 나의 고3 담임이 되셨다. 어린 마음에 장차 국어교사가 되려면 신 선생님이 다닌 서울대는 못 갈지라도 어느 정도 전통 있는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년 동안 나름대로 공부하는 흉내를 내봤다. 그렇지만 국어를 제외한 다른 과목의 실력은 일년 사이에 쉽게 늘지 않았다. 특히 수학과목이 취약했다.
동북중학교 재학 시절(오른쪽) 나는 신철수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이후 선생님의 조언 덕택에 나는 ‘글 쓰는 PD’로 이름을 날렸다.
오로지 국어 시험을 잘 본 덕으로 나는 무려 9대 1에 가까운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다. 면접 때 전공주임이시던 정규복 교수님은 “넌 커트라인에 걸려서 들어왔으니 열심히 하지 않으면 따라가기 힘들 거다”라고 친절하게 내 점수까지 알려주셨다. 그러나 커트라인이면 어떻고 데드라인이면 또 어떤가. 나는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선생님 저 국어 하나는 잘합니다. 열심히 해서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답했고 그 약속을 4년 내내 충실히 지켰다.
‘리틀 신철수’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여러 차례 모교를 방문했다. 동북은 이제 더는 내게 똥북이 아니었다. 내 마음속의 든든한 운동장이었다. 선생님은 후배들 앞에서 나를 소개하며 “수학은 16점 국어는 100점” 하시며 흐뭇해하셨다. 모교에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도 신 선생님이 나를 가장 반갑게 맞아주셨다. 나의 국어실력(!)을 기억하시는 교장 선생님은 나를 ‘리틀 신철수’라고 부르며 졸업하면 모교에 오라고 취직 약속까지 하셨다.
문제는 군대였다. 대학 시절 내내 몸무게가 48㎏을 밑돌던 나는 군대 신체검사에서 두 번이나 판정유예를 받았고 세 번째 신검을 받던 4학년 때는 입영 장정 중 가장 낮은 단계의 합격으로 입대가 결정됐다. 그때 나는 하루라도 빨리 교단에 서고 싶었다. 알아보니 군대를 안 갈 수는 없지만 좀 늦게 갈 방도가있었다. 바로 대학원 진학이었다.
나는 교수가 될 생각이 전혀 없음에도 과감하게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냈고 운 좋게 합격했다. 그러나 난 대학원 입학시험보다는 순위고사, 즉 교사임용고시에 더 신경을 썼다. 그 결과 예닐곱 군데의 학교에서 전화를 받을 만큼 좋은 성적으로 순위고사에 합격했다. 당당히, 아니 당연히 나의 발걸음은 은사님이 계시는 모교로 향했다. 군 미필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당히 정식교사로 임용됐다.
신 선생님은 내가 대학원에 가는 시간을 감안해 수업시간표를 손수 짜주셨다. 그리고 늘 하시는 말씀이 “공부해”였다. 돌아보면 같은 교사 신분이었지만 선생님께 나는 늘 부족한 제자였을 뿐이다. 달콤했던 2년 반이 지나고 드디어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1980년 7월30일 논산 연무대 입대. 선생님은 내가 군복무 하는 동안 휴직할 수 있음에도 굳이 사표를 쓰라고 강권하셨다.
“대학원까지 마쳤는데 네가 원하면 왜 복직이 안 되겠냐. 적은 돈이지만 퇴직금으로 휴가 때 책도 사서 읽어라.”
이게 당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난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정든 학교를 떠나 훈련소로 향했다.
제대를 두 달 정도 앞두고 휴가 때 모교를 찾았는데 선생님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다. 얼굴 표정부터가 사뭇 달랐다.
“넌 다시 학교로 올 생각 마라.”
한마디로 청천벽력이었다.
“넌 계속 공부해서 대학으로 가라. 너만큼 국어실력이 탄탄한 사람도 드물다. 네가 연구할 국문학 분야가 많을 거다.”
지금 생각하면 그 깊은 사랑이 절절하게 이해되지만 당시엔 엄청난 배신감으로 다가와 여린 나를 혹독하게 찔렀다. 하지만 바로 그날이 내 인생의 갑오경장이 될 줄이야 그때는 까맣게 몰랐다.
선생님에 대해 서운함을 안은 채 하염없이 걷다가 내 발걸음이 머문 곳이 엉뚱하게도 바로 광화문의 옛 문화방송사 자리였다. 젊은이들이 무슨 게시판 앞에 잔뜩 몰려 있어서 다가가 보니 미래 방송의 주역을 찾는다는 내용의 신입사원 모집광고였다. 도대체 방송사에는 어떤 시험을 보고 들어가는지 호기심에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맨 위에 국어라고 씌어 있는 게 아닌가. 그 밑에는 수학 대신 영어가 자리하고 있었다.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자대로 배치된 곳이 원주에 있는 미군부대였고 그곳에서 취미(?) 삼아 영어공부에 흠뻑 매진했으니, 이 시험에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의욕이 샘솟을 수밖에. 더구나 그 밑에 써 있던 상식과 작문은 더욱 입맛을 다시게 만들었다. 평소 신문 읽기를 좋아해서 깊은 지식은 부족해도 자잘한 상식은 넘친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또한 작문으로 치자면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두 번씩이나 한 몸 아닌가 말이다. 그 길로 나는 원서 한 장을 받아들고 귀대했다.
기자는 마음이 약해 못할 것 같고 아나운서는 인물이 안 돼 못할 것 같으니 결국 남은 건 PD였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연예인과 친하게 지낼 것 같은 직종임에는 분명했다. 신 선생님 친구분 중에 연기자인 사미자씨 친오빠가 있는데 그분이 방송사 PD라는 말을 수업시간에 들은 기억도 언뜻 났다.
용감하게 시험을 보았고 무난히 필기에는 통과했으나 문제는 면접이었다. 통 알 수 없는 질문을 쏟아붓는데, 처음부터 군색하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면접관들도 군복 차림의 지원자가 딱해 보였는지 군대생활에는 애로사항이 없느냐는 질문으로 마무리를 해주었다. 제대를 불과 일주일 앞두고 최종합격자를 발표했는데 내 이름은 거기 없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이건 내 길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으로 잠시의 방황을 끝내고 미련을 접었다.
이제 내가 매달릴 사람은 미우나 고우나 신철수 선생님밖에 없었다. 다른 학교에 교사로 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은 여전히 냉정했다. 나중에는 오히려 선생님이 사정하셨다. 후회하지 않을 테니 박사과정에 일단 진학하라는 게 선생님의 한결같은 조언이었다. 공부엔 뜻이 없었지만 선생님의 뜻을 좇아 박사과정시험에 응시했고 별 어려움 없이 합격했다.
글 쓰는 PD가 되다
운명은 복병처럼 매복하고 있었다. 이듬해 3월 어느 날 방송사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지난해 최종면접까지 갔다가 낙방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추가로 면접시험을 치를 예정인데 응할 생각이 있느냐는 거였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좋아하지만 대학원생으로 공부하는 건 썩 즐겁지 않던 차에 반가운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타 방송사에 PD로 근무하는 현정주라는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예상 질문과 답변 목록까지 전해주며 격려해줬다. 나름대로 준비하고 면접에 응하니 답변이 술술 나왔다. 이 사람이 바로 그때 얼굴이 뻘겋게 상기되어 눈치를 보던 그 군인 맞느냐는 반응이 면접관들에게서 나왔다. 난 합격을 예감했고 그것은 적중했다.
1983년 3월21일, 나는 보무도 당당하게 문화방송에 입성했다. 중학교 때는 보결로 가까스로 입학하고, 대학교에는 꼴찌로 턱걸이 입학하고, 군대도 최하등급으로 가더니 기어이 방송사도 함께 필기시험 친 사람들보다 몇 개월 늦게 추가모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선생님은 방송사 입사를 축하해주시며 그 대신 박사과정도 포기하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나는 입사 전날 밤 ‘두 개의 우물을 판다’는 시까지 쓰며 전의를 가다듬었다. 장학퀴즈 조연출을 맡으며 간접적으로나마 교사 기분을 낼 수 있어서 좋았다. 박사과정을 마칠 즈음에는 이미 PD 생활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PD라는 직업 또한 일종의 교사란 걸 발견한 것이다. 나는 틈틈이 글을 썼고, 그 글들은 PD라는 직업의 애환을 사람들에게 조금씩 알리는 계기가 됐다. 군인 대상 프로그램을 연출할 때도, 코미디 프로그램을 맡았을 때도 나는 꾸준히 글을 썼다. 새벽에 글을 쓰다가 선배 PD에게서 ‘프로그램 연출이나 잘해라’는 핀잔을 받기 일쑤였지만 나는 쓰고, 쓰고, 또 썼다.
예지력과 연금술
PD 생활 17년차 되던 해에 이화여대로부터 교수 영입제의를 받았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내가 쓴 글들을 차분히 읽고 이 사람이면 방송실습을 가르치는 교수로 채용해도 될 것 같다는 믿음을 가진 듯하다. 물론 박사과정 수료자라는 이력도 한몫 했을 게 틀림없다. 교사를 꿈꾸던 내가 졸지에 PD가 되더니 어느 날 갑자기 교수로 변신한 것이다. 거의 모든 신문이 나의 전직 관련 기사를 속보로 보도할 정도였으니 사람들도 놀라긴 놀란 모양이다.
이 모든 변화의 원동력은 바로 신철수 선생님이다. 선생님의 예지력과 연금술이 나를 부족하나마 작품으로 만든 게 틀림없다. 해마다 스승의 날 즈음이면 은퇴하신 선생님과 사모님을 모시고 조촐한 식사자리를 마련한다. 음식은 달라도 이야기 메뉴는 늘 똑같다. 헤어질 즈음엔 조용필의 노랫말 한 구절이 내 마음을 스친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진정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