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호

오대양 누빈 영원한 도전자, ‘캡틴’ 제임스 쿡

인류를 위한 위대한 발견, “미지의 남방대륙은 없다”

  •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5-12-01 14: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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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0년 전 바다는 험난한 도전의 대상이었다. 짙푸른 바다 저편 미지의 세계로 건너가기 위해선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해야 했다. 작열하는 태양과 거센 폭풍우, 온갖 해충, 콜레라와 장티푸스의 공포, 언제 도착할지 모를 막막한 기다림은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내와 지혜를 요구했다. 하지만 대양탐험가 제임스 쿡의 호기심과 도전정신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대서양과 태평양, 인도양, 남극해와 북극해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모든 바다를 누볐으며, 그가 남긴 기록은 오늘날 세계지도의 밑그림이 됐다.
    오대양 누빈 영원한 도전자, ‘캡틴’ 제임스 쿡

    쿡 일행이 2,3차 항해 때 통과한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

    여행은 모험을 수반한다. 그중에서도 지독한 모험을 요구하는 여행이 바로 탐험이다. 내륙의 오지나 드넓은 모래사막, 미지의 바다가 바로 탐험의 무대다.

    바다를 대상으로 한 탐험은 15∼16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를 세계사에선 ‘대항해 시대’라고 부른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498년 인도 항로를 발견한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 세계일주 항해에 나섰다가 1522년 필리핀에서 목숨을 잃은 마젤란이 그 주역들이다.

    이들의 대항해 성공은 베네치아·제노아 공화국 중심의 지중해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동시에 새로운 대서양 시대를 열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지구 표면의 70%를 차지하는 바다를 주된 활동무대로 삼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였으며, 나아가 인류의 세계 인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중세의 선각자들이 목숨을 바쳐 외친 ‘지구는 둥글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이 움직일 수 없는 ‘진실’로 밝혀지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15∼16세기에 들어 대서양과 인도양의 세계가 열렸다면 18세기는 태평양의 실체가 드러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주도한 국가는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동인도회사를 설립하는 등 아시아로 재빨리 눈길을 돌린 영국이었다.

    바로 그 시절 영국왕실협회는 ‘미지의 남방대륙(Terra Australis Incognita)’을 찾을 목적으로 해군본부와 공동으로 태평양 탐사계획을 수립했다. 그 일은 캐나다 동부의 뉴펀들랜드 해안선을 측량하고 해도(海圖)를 작성한 뛰어난 선원이자 수로(水路) 측량가이며 관측가인 제임스 쿡(James Cook·1728~79)에게 맡겨졌다.



    탐사대장 쿡은 요크셔 지방의 가난한 농장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쿡은 투지와 인내심이 강한 요크셔인답게 웬만한 역경에는 쉽게 굴하지 않았다. 어린시절 잡화점 점원으로 세상과 마주선 그는 열여덟 살 때 ‘휘트비’란 곳으로 가 퀘이커 교도인 마음씨 좋은 선주 존 워커 아래서 뱃일을 시작했다.

    그의 일터는 워커 소유의 300t급 석탄 운반선. 바다가 얼어붙는 겨울, 비교적 한가한 틈을 이용해 낮엔 배를 정비하고 밤엔 수학을 공부했다. 근무태도가 남달라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젊은 나이에 석탄선 선장까지 오른 그는 그때부터 대수와 삼각측량, 항해술, 천문학, 선원 통솔법 등 항해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것이 후일 그의 행동반경을 태평양과 남극해로 넓힐 수 있게 만들 줄은 당시 그를 아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출항일, 순풍이 불다

    그는 27세 되던 해인 1755년, 장래가 보장된 선장을 그만두고 런던으로 가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그것도 가장 지위가 낮은 수병으로. 하지만 그곳에서도 승진을 거듭했고, 후원자도 생겼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캐나다 동부지역을 두고 관할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른바 ‘7년 전쟁’ 중이었다. 그는 캐나다 현지로 파견돼 퀘벡 봉쇄작전에 참여했다. 그때 그의 측량술과 그가 작성한 해도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1762년 12월, 그는 퀘이커 교도인 엘리자베스 배츠와 결혼해 이스트런던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하지만 달콤한 신혼 기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영국 해군본부는 1768년 5월, 40세의 쿡에게 막중한 임무를 부여했다. 사람들은 출신이 비천하고 대형 선박을 지휘한 경험이 없는 데다 계급도 낮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그에게 태평양 탐사라는 큰일이 맡겨진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한 제독이 “쿡은 많은 이를 올바른 길로 이끌 것이며, 잘못 이끌 일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할 만큼 그는 천재성과 능력을 인정받았고, 또 당시 영국 해군에 그 일을 맡을 만한 적임자가 달리 없었다.

    오대양 누빈 영원한 도전자, ‘캡틴’ 제임스 쿡

    영국 그리니치 국립해양박물관이 소장한 쿡 선장의 초상화(1937).

    쿡은 먼저 탐사에 필요한 배를 구입해줄 것을 해군본부에 요구했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이랬다.

    “홀수(배 밑부분으로 물에 잠기는 부분)가 얕아야 하고 장기간 항해에 충분할 만큼의 식량을 실을 수 있도록 선창이 넓어야 하며, 좌초해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고 필요시 육지로 끌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작아야 한다.”

    해군본부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1765년에 건조된 엔데버호(號)를 구입했다. 길이 30m, 너비 8.7m에 368t급 선박인 엔데버는 뱃머리가 아주 높았다. 흠이라면 너무 단조롭다는 것. 목조 범선 엔데버에는 젊은 식물학자 조지프 뱅크스와 박물학자 다니엘 솔랜더, 그리니치 천문대 소속 천문학자 찰스 그린, 외과의사 몽크하우스 등 조사대원 11명을 포함해 모두 94명이 승선했다. 주축은 10∼30대의 젊은 선원들이었다. 약관 20세의 뱅크스는 항해에 동행하기 위해 국왕 조지 3세가 기부한 돈의 두 배인 1만파운드(지금의 가치로 따지면 100만달러 상당)를 기부했다.

    엔데버호가 잉글랜드 남단의 항구 플리머스에서 대탐험의 깃발을 올린 것은 1768년 8월25일. 쿡은 그날 순풍이 불었다고 항해일지에 적어놓았다. 왕립협회가 그에게 부여한 임무 가운데에는 금성 관측도 포함됐다. 최초로 나침반을 이용해 1698∼1700년 대서양 남쪽 해역을 탐사한 항해가이자 천문학자인 에드먼드 할리가 1769년 6월3일 금성이 태양의 표면을 통과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그 희귀한 천문 현상은 남반구에서만 관측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왕립협회는 그 결과를 토대로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 바퀴벌레, 쥐떼와의 전쟁

    엔데버호에는 맥주 4400ℓ, 브랜디·럼주 같은 독주 5920ℓ, 포도주 1만2000ℓ 등 엄청난 양의 술이 실렸다. 18개월 분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쿡은 그것이 바닥나기 전에 귀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쿡은 술에 관한 한 비교적 너그러워 하루 평균 선원 1인당 맥주 3.9ℓ를 지급했다. 쿡은 신선한 물을 비롯해 장작과 식량을 구하는 데 신경을 쓰는 등 부하 선원들의 복지와 건강을 세심히 챙겼다.

    그러나 항해가 계속되면서 심각한 문제가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화장실은 말이 화장실이지 노천 배설구나 다름없었고 목욕과 세탁은 사치스러운 꿈이었다. 비누가 없던 시절이라 선원들의 머리엔 이가 버글버글했고 배 안엔 구더기, 바퀴벌레, 쥐가 득시글거렸다.

    쿡 일행이 대서양을 통과해 대륙을 처음 본 것은 그해 11월8일이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한 건 엿새 뒤인 14일이다. 지금의 브라질 리우 해안이다. 쿡은 상륙하자마자 보급품부터 구했다. 기강이 해이해진 대원은 매질로 다스렸다.

    선원들은 식사로 오트밀 죽을 먹었고 배에서 기른 염소의 젖을 짜 마셨다. 돌고래와 상어를 잡아 식량을 보충하기도 했다. 하지만 뱃멀미와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쿡이 당시 선원들에게 가장 무서운 질병이던 괴혈병의 원인을 사전에 알고 신선한 채소를 지속적으로 먹게 해 극단적인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

    엔데버호 안에서는 영국 사회의 축소판인 양 신분 질서가 철저하게 지켜져 본토에서와 똑같이 계급에 따라 분리된 생활을 했다. 원래 사치라는 걸 모르던 쿡이라 그의 방은 비좁았다. 쿡은 또 과묵해 선상의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는데, 로맨틱하고 말이 많은 젊은 식물학자 뱅크스 덕분에 그나마 얼마간 분위기가 살아나곤 했다.

    엔데버호에는 ‘항해의 목표날짜’라는 것이 없었고 지루한 일상이 이어졌다. 때맞춰 나오는 식사, 푹신한 의자, 위생적인 화장실에 음악과 영화, 음료수와 술이 나오고 잠들고 싶으면 언제든 눈을 감고 또 천재지변이나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한 예정된 시각에 도착하게 마련인 최신식 항공기 내에서도 10시간 이상 머물면 지루함을 느끼는 현대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항해 조건이었다.

    문란한 타이티 여인들

    쿡은 남미대륙의 최남단인 케이프 혼을 통과해 계속 서진(西進)한 지 8개월 만인 1769년 4월13일 타이티 섬(원래 이름은 킹 조지 섬)의 마타바이만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그가 한 항해 중 가장 긴 것이었다. 쿡 일행이 섬에 나타나자 그곳 사람들은 평화의 상징인 푸른 나뭇가지로 맞이하면서 ‘티아오(친구)’라고 불렀다. 쿡 일행은 그곳에서 파리떼와 소매치기 때문에 애를 먹었지만 이글거리는 눈빛을 가진 풍염한 몸매의 여인과 아름다운 경관에 한동안 마음을 빼앗겼다.

    그때가 마침 금성이 태양 면을 통과할 시기라 쿡은 금성 관측을 위해 작은 요새와 관측소를 세웠다. 쿡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하늘은 맑았으나 어스레한 그늘이 금성의 언저리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정교한 관측기재를 갖추지 못한 탓에 결국 세 차례의 관측 결과가 모두 달리 나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타이티 해도가 제대로 완성됐다는 것.

    쿡은 “타이티에선 여자가 남자 앞에서 음식 먹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영국인 남자와 단둘이 있을 때는 이런 금기를 지키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그는 “이곳 여자들은 성(性)이 문란하다”는 기록도 남겨놓았다.

    엔데버호 선원들은 이런 여자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엄격했지만 서른이 채 안 된 젊은 사내들의 본능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고집불통이 아니었던 쿡은 배를 빠져나갔다가 붙잡혀온 선원들을 채찍질하는 정도로 문책을 끝냈다. 쿡의 지휘를 받지 않는 뱅크스는 그를 유혹하는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따라 배를 빠져나가 해변에서 아늑한 잠자리를 같이하곤 했다. 타이티를 빠져나갈 무렵에는 대원 절반이 성병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쿡은 이곳에서 소중한 친구를 얻었다. 투파이아 족장이다. 영어도 몇 마디 할 줄 알고 여행을 좋아한다는 그는 어린 사내종을 데리고 엔데버호에 승선했다. 그는 일대의 바다는 물론 섬사람들의 행동거지와 관습을 잘 알고 있어 쿡에게 좋은 길잡이가 돼줬다.

    이제 쿡에게 남은 일은 ‘미지의 남방대륙’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서진하던 배는 소사이어티 제도에 도착했다. 여러 섬이 서로 가까이 붙어 있어 그렇게 명명했다. 이어 필리핀 서쪽의 보라보라 섬에 당도했는데, 뱅크스는 그때의 광경을 이렇게 기록했다.

    “멀리서 보면 황량한 바위투성이일 것 같았으나 실제로 들어가보니 유실수와 플랜테이션으로 뒤덮인 비옥한 넓은 저지대가 있었다.”

    쿡은 새로운 섬에 도착할 때마다 엄숙한 의식을 거행했다. 원주민을 존경한다는 뜻에서 쿡은 영국을 떠나기 전 ‘행동요령’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원주민은 그들 땅의 타고난 주인이며, 엄밀히 말해 합법적인 주인”이라고 기록돼 있었다. 그래서 쿡은 섬 이름도 국왕이나 국가의 이름을 붙이기보다는 원주민이 부르는 대로 따랐다.

    남진을 계속하던 10월6일 쿡은 뉴질랜드 해안선을 발견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엔데버호는 투랑가누이(지금의 포버티만)의 작은 만(灣) 입구에 닿았다. 쿡 일행은 이 섬의 두 번째 방문자였다. 최초의 방문자는 1642년 12월에 이 섬에 닿은 네덜란드 탐험가 아벨 얀손 타스만이다.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우리족은 낯선 자들에게 적대감을 나타냈다. 쿡 일행은 뉴질랜드 앞바다에서 6개월을 보냈지만 육지 가까이 다가가 머문 기간은 두 달이 채 안 됐다. 대부분의 시간은 뉴질랜드 해안선을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하는 데 보냈다. 그 과정에서 쿡은 북섬과 남섬을 가르는 지협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쿡 해협’이라 명명했다. 그건 뉴질랜드가 남북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해주는 근거가 됐다. 1770년 4월 쿡 일행은 완전무장한 200여 명의 원주민 전사로부터 위협을 받고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호주의 원주민 ‘애버리진’

    다시 서진한 엔데버호는 신비의 대륙 오스트레일리아(당시에는 뉴홀랜드)의 보타니만에 도착했다. 보타니만은 지금의 시드니에서 남쪽으로 얼마간 떨어진 곳으로, 그곳엔 온갖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쿡은 이 땅에 대해 “순수한 자연의 상태에 있다. 산업은 이 땅 어디와도 관련이 없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낙원과도 같은 이곳은 오래지 않아 영국의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장소로 뒤바뀌게 된다. 잃어버린 식민지 미국을 대신해 이곳을 유형지로 삼았던 것.

    1788년 1월31일, 죄수 736명을 태운 11척의 선단이 도착함으로써 본격적인 이주의 역사가 시작됐다. 선단을 이끌고 온 아서 필립 선장은 뉴사우스웨일스(지금의 호주) 식민지 총독이 됐고, 그들이 입항한 포트잭슨은 오늘날의 시드니로 발전했다. 1월31일은 호주 이민을 기념하는 건국일이다. ‘시드니’라는 도시명은 필립 선장이 당시 호주 탐험의 책임자 시드니 경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쿡 일행은 이곳 원주민인 ‘애버리진’을 만났고, 그들이 사용하는 부메랑, 그리고 캥거루와 같은 희귀한 동식물을 목격했다. 라틴어로 ‘태초에’란 뜻의 애버리진은 서구인이 붙인 이름이다. 외부세계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씨족별로 흩어져 살던 애버리진은 낯선 배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고 백인을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들의 외모와 행동은 쿡이 그동안 남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만났던 부족들과는 판이했다. 그래서 쿡은 물론 뱅크스도 그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한번은 쿡이 무장하지 않고 혼자 무장한 원주민 무리를 뒤쫓아 꽤 먼 데까지 따라가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냉랭한 무관심으로 일관하자 더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발길을 되돌리기도 했다.

    1770년 5월, 보타니만을 빠져나온 쿡 일행은 그곳에서 다시 북상해 케언스에서 브리스번에 이르는 호주 동북부 해안인 그레이트배리어리프를 발견했다. 1000마일이나 되는 긴 해안에서 가오리가 많이 잡혀 처음에는 ‘가오리만’으로 불렀으나 엔데버호가 산호초더미에 끼어 꼼짝 못하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그레이트배리어로 불렀다고 한다.

    오대양 누빈 영원한 도전자, ‘캡틴’ 제임스 쿡

    제임스 쿡 선장이 1차 태평양 및 남방대륙 탐사때 사용했던 368t급 선박 엔데버호의 모형.

    사고는 쿡이 잠들었을 때 일어났다. 엔데버호는 거의 수직으로 바다 표면까지 돌출한 산호더미와 충돌하면서 무시무시한 굉음을 냈고,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서고 말았다. 배가 산호더미 위로 올라간 것이다. 쿡 일행은 온갖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해보았지만 배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날이 밝을 즈음 배 안으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전원이 교대로 물을 퍼냈지만 역부족이었다. 수위는 조금도 낮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높아만 갔다. 평소 침착하던 쿡도 당황했다. 마침내 화물칸에도 물이 들어찼다. 그런 상황이 만 하루가 지속됐는데도 대원들은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뱅크스는 대원들의 얼굴에 죽음의 공포가 드리우기 시작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때 한 대원이 쿡에게 수심을 잘못 측정했다고 보고했다. 사실은 수위가 낮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리를 전해 듣자 펌프로 물을 퍼내던 대원들의 팔에 힘이 실렸다. 마침내 배가 산호초더미에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래톱이 앞길을 방해했다. 산 넘어 산이었다.

    6만4000km 대장정

    시련의 고비를 이겨낸 쿡은 호주와 파푸아뉴기니 사이의 토레스 해협을 통과해 지금의 자카르타 외항인 바타비아까지 나아갔다. 그때가 1770년 8월이었다. 오랜 항해의 뒤끝인 데다 산호초와 모래톱에 끼었던 탓에 엔데버호는 수리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대원들은 건강했다.

    쿡은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이던 바타비아에 머물면서 많은 외국인을 만났다. 유럽 소식을 전하는 신문도 읽을 수 있었다. 뱅크스는 열여섯 가지 요리가 나오는 식사를 즐겼으며, 서비스가 좋은 여인숙에 묵었다.

    그러나 호시절은 채 2주일을 가지 못했다. 대원 여러 명이 장티푸스, 콜레라 같은 질병에 걸렸다. 죽음의 공포가 억누르는 참담한 시간이 한동안 지속됐다. 그 와중에 군의(軍醫)마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쿡은 사망자가 속출하자 질병에 걸린 대원들을 싣고 바타비아를 떠났다. 인도양과 아프리카 남단의 케이프타운을 경유한 엔데버호는 플리머스를 출항한 지 2년11개월 만인 1771년 7월13일 영국으로 귀환했다. 총 1000일에 걸친 항해기간에 탑승자 94명 가운데 38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는 당초 영국 황실이 우려했던 것보다 다행스러운 결과였다. 그들의 항해 거리는 6만4000km에 달했다.

    쿡은 국왕 조지 3세를 배알하고 중령으로 진급하는 영예를 얻었으나 영웅 대접을 받은 사람은 뱅크스였다. 그러는 사이 쿡은 해군본부에 제출할 보고서 작성에 몰두했다. 그는 보고서에 1차 탐험의 성과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평가도 실었다.

    “이번 항해에서 큰 발견을 하지 못했고, 그렇게도 기대하던 미지의 남방대륙을 발견하는 데에도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본인의 실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좌초의 불행을 겪지만 않는다면 다음 항해에서는 더 많은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보고서를 접수한 해군본부는 쿡이 작성한 해도에 따라 제2차 태평양 탐사 계획을 세웠다. 미완의 과제가 된 미지의 남방대륙 발견이 그 목적이었다. 그 임무 또한 쿡에게 맡겨졌다. 이번에는 엔데버호보다 더 큰 462t급 레절루션(Resolution)호가 지휘선이 됐다. 여기에 340t급의 어드벤처호가 동행했다. 선장은 토비아스 푸르노였다. 레절루션호는 1년간의 준비 끝에 1772년 7월13일 플리머스항을 출발했다. 대원들에게는 해군의 오랜 관습에 따라 7월10일 두 달치 급료를 미리 지급했다.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배려였다.

    뱅크스도 처음에는 레절루션호에 승선할 생각이었으나 배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고 포기했다. 대신 프러시아 태생의 박물학자 요한 레이홀드 포스터가 탔다. 그러나 쿡을 비롯해 대원들 모두 그를 싫어했다. 독선적이고 의심이 많으며 허세를 부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배에는 포스터 외에도 과학자와 예술가 여럿이 탑승했다. 이번에는 천문관측기구인 크로노미터 4대를 실었다. 그걸로 경도(經度)를 측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남극 향한 세 번의 도전

    쿡은 이제까지 그 누구도 항해해본 적이 없는 남방 고위도 해역까지 탐사해 미지의 남방대륙의 존재를 확인하고, 겨울에는 뉴질랜드와 타이티섬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복안을 갖고 출항했다. 그로부터 넉 달 뒤인 그해 11월 쿡 일행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경유해 남진하다 남위 60。 선상의 해역에 이르렀고, 다음해 1월에는 남위 71。 넘어 남극권에 진입해 녹아내린 빙산 사이를 헤쳐 가며 그 일대를 선회했다. 기록에 따르면 쿡 일행은 그때 처음으로 펭귄을 목격했고, 남극대륙 75마일 지점까지 접근한 것으로 짐작되나 남극대륙의 존재를 확인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남극대륙은 1840년에야 최초로 확인됐으니 쿡 일행은 남극 주변부의 얼음 덩어리만 본 셈이다.

    그곳에서 더는 남쪽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 쿡은 북상해 그해 3월 뉴질랜드에 닿았다. 한동안 휴식을 취한 뒤 이스터섬과 쿡이 ‘우정의 섬’이라고 부른 통가, 피지, 마케서스, 뉴헤브리디스 제도(지금의 바누아투), 뉴칼레도니아 제도 등 남태평양의 여러 섬을 답사했다. 1773년 여름이 되자 쿡은 다시 남극해 탐사에 나섰으나 미지의 남방대륙이라 부를 만한 땅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듬해 정월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온 쿡은 서쪽으로 항해를 시작하다 11월에 그만 어드벤처호를 잃고 말았다. 어드벤처호와 상당한 거리를 두었던 게 화근이었다.

    그러나 쿡은 남방대륙 발견이란 임무를 저버릴 수 없어 레절루션호를 이끌고 다시 남극해로 들어갔다. 그의 세 번째 남극행이었다. 대원 중 일부가 감기와 고열로 시달렸으나 곧 차도를 보여 희생자는 생기지 않았다. 이번에도 거대한 얼음산이 앞을 가로막았다. 쿡은 단 한걸음도 더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자 눈물을 머금고 다시 북상해 이스터섬에 도착했다. 거기서 뉴질랜드와 남태평양의 섬들을 오가다 희망봉을 경유하여 1775년 6월30일 플리머스항으로 돌아왔다.

    쿡은 만 3년에 걸친 제2차 탐험에서 11만2000km의 거리를 항해했다. 그러고는 “남위 60。 이남에는 대륙이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대륙이 존재한다면 그 대부분은 남극에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그의 탐사가 아주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남태평양의 여러 섬의 존재를 확인하고 새로운 동식물의 표본을 수집했으며, 남극해를 최초로 항해하고 크로노미터를 이용한 경도 측정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는 또 한 사람의 대원도 잃지 않은 성과도 일궈냈다.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포스트 캡틴(해군 대령으로 함장)으로 진급했고 왕립협회의 정회원이 됐으며 왕립협회 최고의 영예인 코플리 메달을 받았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오직 스스로의 노력과 투지, 도전정신으로 수병에서 출발하여 그 같은 지위에 올랐으니 그야말로 입지전적 인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또 초상화를 선물로 받았다. 그리니치 국립해양박물관에 소장된 나다니엘 댄스가 1775년에 그린 쿡의 초상화를 보면 지도를 펴놓고 의자에 앉은 그는 회색 머리칼에 길게 뻗은 콧날, 얇은 입술, 튀어나온 광대뼈, 움푹 들어간 갈색 눈 그리고 긴 얼굴이 매우 위엄 있어 보인다. 180cm가 넘는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쿡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성품으로 전통적인 영웅의 모습은 아니다.

    2차 항해에서 돌아온 지 몇 주일이 지난 뒤인 1775년 8월, 그는 퇴역해군의 본거지인 그리니치 병원장을 지원해 요양생활에 들어갔다.

    해군본부는 여전히 미지의 상태로 있는 영국에서 북아메리카를 관통해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이른바 ‘북서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또다시 태평양 탐사를 계획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쿡은 요양 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 일을 맡겠다며 해군본부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실패로 끝난 북서항로 개척

    북서항로 개척을 위한 쿡의 제3차 태평양 탐사는 1776년 7월12일 시작됐다. 지휘선은 수리를 마친 레절루션호였고 새로 건조한 298t급 디스커버리호가 동행했다. 디스커버리호 선장은 2차 항해 때 쿡을 보좌한 찰스 클러크였다. 이 두 선박에 탑승한 인원은 장교를 포함해 192명.

    레절루션호는 플리머스에서 곧장 남하해 9월18일 희망봉에 상륙했다. 쿡 일행을 맞은 현지 총독은 그를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할 것을 약속했으나 쿡은 그곳에서 합류하기로 한 디스커버리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노심초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디스커버리호는 11월10일에야 나타났다. 다행히 예정보다 늦게 플리머스항을 출발한 것 외에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그들은 호주 남쪽의 태즈메이니아섬과 뉴질랜드, 통가, 타이티, 소사이어티 제도에 잠시 기항한 후 그해 12월 본격적인 탐사를 위해 남태평양에서 북상, 이듬해 1월18일에는 하와이제도에 이르렀다. 영국인으로는 최초의 방문이었다. 당시 영국해군본부는 후원자인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을 따서 샌드위치 제도라고 불렀다.

    폴리네시아 군도의 북방한계선에 위치한 하와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쿡 일행은 다시 북상해 북미대륙 서부해안의 밴쿠버를 거쳐 계속 전진해 베링해협을 통과했다. 말하자면 북극권에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쿡 일행은 그곳에서도 두꺼운 얼음 덩어리에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하고 1779년 1월 중순 하와이로 되돌아와야 했다. 북서항로 개척은 결국 실패하고 만 것.

    하와이는 목가적인 섬이었다. 쿡은 섬에 피어난 꽃을 보고 “그 어느 곳에서 맡아본 것보다 더 향긋하다”고 했고 대원들은 그곳 여인에게 홀려 한눈을 팔곤 했다. 쿡 일행은 원주민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2주일이 지나면서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쿡 일행은 2월초 다시 출항했다가 돛대가 부서져 하와이 서해안의 케알라케쿠아만으로 회항했는데, 얼마 전까지 그렇게 따뜻하게 대해주던 원주민은 180도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그들이 왜 그토록 냉랭하게 변했는지 쿡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오대양 누빈 영원한 도전자, ‘캡틴’ 제임스 쿡
    날이 갈수록 없어지는 것도 늘어났다. 원주민들이 배에 있던 물건과 쇠붙이들에 손을 댔던 것이다. 심지어 배 밑창에 박힌 쇠못까지 빼갔다. 얼마 후에는 디스커버리호의 보트 한 척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쿡은 도난당한 보트를 찾기 위해 대원 10여 명을 이끌고 뭍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한 대원이 수색 과정에 원주민이 신성시하는 제단의 울타리를 훼손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격분한 원주민들이 쿡 일행을 에워싸고 위협하기에 이른 것. 대원들에게는 총이 있었지만 원주민의 반격이 워낙 거세 쿡 일행은 해안선까지 도망치듯 밀리고 말았다. 쿡은 대원들에게 배로 후퇴하라고 명령했지만 정작 자신은 수영을 제대로 하지 못해 제때 배로 돌아가지 못했다.

    결국 쿡은 뒤따라오던 원주민이 휘두른 곤봉에 뒤통수를 맞아 쓰러지고 뒤이어 달려든 원주민의 단검에 어깨뼈를 찔려 숨을 거두고 말았다. 1779년 2월14일 오전의 일이었다. 당시 쿡말고도 4명이 더 희생됐다.

    쿡이 죽자 레절루션호의 나머지 대원들은 곧바로 하와이를 떠났다. 쿡을 대신해 선장을 맡은 클러크는 캄차카 반도에 이르러서야 쿡의 사망 소식을 영국 본부에 알렸다. 그리고 며칠 후 하와이에서의 일로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진 클러크도 숨을 거뒀다. 레절루션호는 선장도 없이 플리머스를 떠난 지 4년 만에 쓸쓸하게 영국으로 돌아왔다.

    전쟁도 비켜간 전 인류의 ‘캡틴’

    쿡은 세 차례에 걸친 대항해를 통해 태평양과 그곳 섬에 사는 원주민과 그들의 문화 그리고 자연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 특히 경도와 위도, 항해 거리와 시간 그리고 그가 본 것을 항해일지에 정확하고도 꼼꼼하게 기록해놓아 후세의 탐험가들에게 큰 도움을 줬다.

    그의 업적은 크다. 그는 미지의 남방대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남태평양 대부분의 섬을 탐사하고 해도를 작성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지도의 윤곽을 그려냈다. 그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대양 항해에 큰 골칫거리였던 괴혈병을 퇴치했으며, 크로노미터를 이용해 경도를 정확하게 계산해냈다.

    그는 최고의 해양탐험가였다. 대양 항해는 악천후와 고독, 영양실조, 질병과 싸워 이겨야 하는, 말 그대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지만 소탈한 성품을 가진 데다 자신에게 엄격했기에 쿡은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가 그동안 항해한 대양은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 남극해, 북극해 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해역을 아우른다. 그의 탐험이 지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은 불문가지다. 해양대국을 이룬 영국인은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 ‘캡틴’이라는 경칭을 붙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쿡이 세 번째 항해를 떠나기 며칠 전 미국은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벤저민 프랭클린 미국 대통령은 미 함대에 쿡과 그의 배를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인류를 위해 가치 있는 발견을 한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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