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지원 푸르메재단 공동대표·변호사

‘어머니가 시장에서 좌판을 벌이실 때 친구들과 함께 지나다 어머니를 보았어요. 그러나 너무 초라하게 보여 얼른 피하고 말았어요. 이제 생각하니 가슴을 치겠어요. 그때 왜 그랬는지…. 아무리 어린 마음이었다지만, 지금 아이 엄마가 되고 보니 더 가슴을 치게 돼요.’
‘사랑하는 아내여, 당신에게 거짓말하고 지방으로 여행 간 거, 그거 정말 미안했소. 사실대로 말하면 화내고 안 보내줄 것 같아 부득이 거짓말을 했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소. 다시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거짓말이나 하는 그런 남자가 되지 않겠소.’
가족간의 끈끈한 정이 물씬 우러나는 글들이다. 이런 글을 읽고 있으면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리곤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된다. 부끄럽다. ‘찔리는’ 느낌을 받는다. 바로 양심에 찔리는 느낌이다.
이런 고백의 글들이 씌어 있는 곳은 ‘사이버 양심’ 홈페이지다. 어느 포털사이트에서든 ‘사이버 양심운동’이란 단어를 치면 바로 안내문구가 뜨고 그곳을 누르면 홈페이지가 나타난다. 사연도 가지가지다. 부모와 자녀 사이, 부부 사이, 친구 사이, 사제지간 등등. 그동안 대놓고 말하지 못한 사연, 양심에 거리끼던 사연이 수백건 올라와 있다.
지난 4월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동안 이런저런 정치적인 자리엔 일절 발걸음을 하지 않은 터이지만, 그나마 윤리운동을 해온 사람으로서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사이버 공간과 관련한 일이므로 일말의 사명도 느꼈다. 그래서 취임일성으로 내놓은 것이 ‘양심운동’이다.
그래서 사이버 양심 홈페이지를 만들고 매월 사이버 양심포럼을 개최하고 있다. 나는 요즘 이 양심글을 읽을 때마다 행복하다. 이 세상이, 이 나라가 아무리 혼탁하고 답답해도 말이다. 깊은 산속엔 옹달샘이 있고, 볕이 따가운 사막엔 오아시스가 있다. 그런 것처럼 우리네 세상이 아무리 썩었다 해도 그 어느 구석엔가 윤리와 도덕을 모색하는 곳이 있다.
내가 윤리 문제에 눈 돌린 것은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초창기부터다. 청소년들이 비행(非行)에 빠져 법의 울타리를 넘나들 때 그것이 과연 법의 문제인가, 아니면 좀더 넓은 윤리의 문제인가를 생각했다. 그것은 법의 문제이기도 하고, 윤리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 법교육 문제, 윤리교육 문제에 몰입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왠지 공허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법은 명시적이고 그것에 어긋나면 매서운 제재가 따른다. 윤리는 비명시적이긴 하지만 그것에 어긋난 때는 사회적 비난이라는 제재가 따른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공허하게만 느껴졌을까. 그것은 아마도 법과 윤리가 ‘눈에 보이는’ 언행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내면적인 충족감이 모자라 외면적으로 강요받는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떠오른 단어가 ‘양심’이다. 양심은 누군가가 들여다보는 영역이 아니다. 그저 가슴속에 있는지 없는지 잘 느껴지지도 않는 영역이다. 그래서 우선 편안하다. 그런가 하면 무언가 든든하고 꽉 찬 느낌을 준다. 내면적 충족감일 것이다. 아무리 흉악하거나 부패한 인물이라 해도 그 어느 구석엔가 양심은 있다. 그런 인물들이 간혹 ‘사람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과연 그렇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왜 어떤 이는 양심에 좀더 충실하고 어떤 이는 양심과 담을 쌓고 살까. 우리의 양심을 가리고 짓밟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에게 타고난 양심이 있다면 타고난 비양심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양심과 비양심의 끝없는 싸움이다. 아마도 우리네 삶의 참된 가치는 이 같은 싸움의 과정과 결과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진솔한 고백의 글들을 읽으며 참회하고 또 참회하면서 행복감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