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을 타고 포도밭을 관리하는 아르헨티나 농부.
장면1. 2007년 가을.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포도밭이 유례없는 풍년을 맞았다. 미국의 와인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는 2006년 생산된 보르도 와인이야말로 세기의 빈티지(수확년도)라고 불리는 1982년산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A씨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지난해 자신이 가입한 부동산 펀드가 얼마 전 보르도 지방의 유서 깊은 와인양조장 ‘샤토 마고’를 매입했기 때문이다.
2010년 봄. A씨는 드디어 아르헨티나 와인의 도시 멘도사에서 와인 생산에 성공했다. 2008년 봄 샤토 마고에 투자한 금액 1억원을 빼서 멘도사 지역에 있는 10에이커(1만2242평)가량의 포도밭을 산 후 마침내 결실을 본 것이다. 현지 와인 메이커와 농민을 고용해 3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생산한 250케이스(3만병) 전량을 한국에 수출, 올해 6억원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아내가 와인을 너무 좋아해서…”
비록 가상 시나리오지만 조만간 한국에도 이처럼 해외 유명 포도밭에 직접 투자할 사람이 증가할지 모른다. 법적 제한 조건이 풀린데다, 현재 세계에서 돈 좀 있다는 부자들은 이미 포도농장 갖기 열풍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2001년 5월 AOL 타임워너의 당시 최고경영자(CEO)인 제럴드 레빈이 갑작스레 사임을 발표해 미국 경제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그는 사임을 발표하기 전 이미 친구 아넌 밀찬을 프랑스 보르도 지방으로 보내 유명 샤토(Chateau)를 세심하게 살펴보게 했다. 그는 이어 캘리포니아의 샌타바버라에 600에이커 규모의 포도원을 구입해 여생을 와인과 함께 보내기로 결심했다. 이 ‘프로젝트’를 실행한 아넌 밀찬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프리티 우먼’ 등을 만든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 제작자다. 당시 밀찬이 밝힌 이유 중 하나가 “아내가 요리와 와인을 너무 좋아해 은퇴 후 좋은 취미가 되리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타이어 회사인 파이어스톤(Firestone)의 존 람프 회장과 이탈리아의 패션 거물 페루치오 페라가모도 소문난 와인 애호가다. 이들은 혼자서 음미하는 것을 넘어서 이미 세계적인 와인 생산자 대열에 서 있다.
1990년대말 미국 실리콘밸리에 벼락부자가 양산되자 캘리포니아 포도밭 값이 덩달아 뛰었다는 사실은 이런 경향을 잘 설명해준다. 특히 컬트 와인(Cult Wine·출시하는 양은 적지만 품질이 좋고 가격이 비싼 캘리포니아산 와인)의 가격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경기 지표로도 활용된다.
이처럼 외국에선 단순히 와인을 즐기기보다 노후를 와인과 함께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실제 해외 유명인사들이 포도밭을 사서 경영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일정한 수익을 유지할 수 있고, 자신이 담근 와인을 가족 이름을 새긴 병에 담아 그 명성을 이어간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