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8년 8월 미군정 종식과 더불어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다. 하지만 단정(單政)이라는 한계를 안고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초기부터 안팎의 도전과 위기에 직면했다. 안으로는 친일 청산, 좌우익 갈등 해소, 통일국가 수립 열망으로 인해 효과적인 통치 리더십이 요구됐으며, 밖으로는 불안정한 동북아 정세에서 국가안전 보장책을 마련해야 했다. 이에 이승만은 미국의 군사적 원조를 기대했지만, 한반도의 군사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한 미국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1948년 5월31일 중앙청에서 거행된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 초대의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대통령 이승만은 이날 기념사를 통해 “이날에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돼서 40여 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해온 결실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이 정부가 대한민국의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이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선언했다. 또한 건국의 대장전이 되는 제헌헌법은 다음과 같이 그 전문을 선포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해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해 이제 민주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 제도를 수립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해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해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이 선거된 대표로서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그리고 그 첫 조항과 둘째 조항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적 국민국가가 세워진 것이다.
분단으로 가는 건국의 길
동북아시아에서 냉전 구조가 심화되면서 한반도의 전후 처리를 위한 미국과 소련 사이의 협상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통일정부 수립의 가능성도 사실상 사라지기 시작했다. 불안한 하나를 어렵게 만들어가는 것보다 반쪽만이라도 확실하게 확보하는 것이 당시 미국과 소련의 안보적 요구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1947년 7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9월에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유엔은 그해 10월 한국에 유엔위원단을 파견하기로 가결했고, 11월에는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案),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설치안, 정부수립 후 미소 양군 철퇴안 등을 가결했다. 단정(單政) 수립을 둘러싼 지지와 반대의 대치 정국에서 1948년 1월8일 유엔한국위원단이 남한에 입국했다.
하지만 소련측은 위원단의 북한 진입을 거부했다. 이에 유엔 소총회는 1948년 2월26일 유엔 한국위원단의 임무수행이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 즉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를 의결했다. 사실상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된 것이다.
1948년 3월1일 하지 미군사령관은 남한의 총선 실시를 발표했고, 5월10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5월31일 개원한 제헌국회는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조직했으며 새 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을 선출했다. 정치세력과 정치과정의 분화가 활발하지 못한 탓에 권력구조와 정치의 제반 기능이 비교적 단순했던 당시 상황에서 대부분의 정치적 쟁점은 의회로 결집됐다. 따라서 제헌국회가 차지하는 정치적 비중은 매우 높았다.
특히 제헌국회에서는 국가 형성 수단에 대한 갈등적 쟁점이 다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상대적 진보로부터 보수에 이르는 다양한 노선과 세력 간의 경합이 벌어졌다. 말하자면 제헌국회는 당시 현실적으로 유일한 정치적 경쟁의 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치적 비중에도 제헌국회는 그 형성 배경에서 구조적이고 정황적인 한계를 피할 수 없었다. 우선 제헌국회는 의회정치의 경험과 자생적 기반이 전혀 없는 가운데 외부에서 이식됐다는 점에서 비서구 사회의 의회정치가 지니는 일반적 한계에 직면했다.
이에 더해 분단에서 비롯된 한계도 안고 있었다. 광복 후 정치적 요구는 보수우익과 급진좌익을 양극으로 다양하게 분화하면서 표출됐다. 그러나 단독정부 수립과 이에 따른 정권 창출과정에서 남한 지역에서는 보수우익 이외의 요구나 이를 대표하는 세력은 자연히 배제됐다.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에서도 좌익세력이 원천적으로 배제됐다. 남북 협상파 등 반(反)단정 우익세력과 중도세력도 총선거에 불참했다. 분단국가 형성에 따른 제약이 의회 구성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제헌국회는 정치세력 포용이나 통합된 지도계층 형성이라는 면에서 제약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제헌국회 구성 이전에 이미 국가기구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고,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피선됨으로써 정치적 지배력을 독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이승만은 지배력을 완전히 독점하기 위해 의회 안에 확고한 지지 세력을 구축하려 했다.
의회 장악 실패한 이승만
이승만은 표면적으로 정당무용론, 혹은 시기상조론을 내세우면서 초당적 입장을 강조했지만 내심으로는 집권 초기부터 강력한 집권당을 조직해 의회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윤치영, 장택상 등이 중심인 국회 안의 태백구락부, 한민당(한국민주당) 탈당파, 민족청년단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정통파, 그리고 대통령 무조건 추종파 등을 규합하는 한편, 명제세·배은희·유진산 등에게 민간조직을 구성하라고 비밀리에 지시했다.
정부 수립 직후인 9월7일, 대통령 관저에서 여당 추진운동과 관련해 신석우, 배은희, 백성욱, 신익희, 지청천 등이 회동해 주목을 받았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 올리버에게 보낸 서한에서 “국민회(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가지고 정당을 하나 조직할 계획이고 신익희, 지청천, 그리고 약간의 다른 인물을 영입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에도 제헌국회 회기 내에 집권당 형성은 실패했다. 그런가 하면 당시 최대 정파인 한민당 세력은 이승만 정부의 조각(組閣) 과정에서 소외되면서 상당기간 여(輿)인지 야(野)인지 불분명한 정치노선을 띠었다.
제헌국회의 정당 및 단체별 분포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명, 한민당 29명, 대동청년단 12명, 조선민족청년단 6명, 대한 노동총연맹 1명, 대한독립촉성 농민총연맹 2명, 기타 단체 10명, 무소속 85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속 정당이나 단체의 통제가 전혀 없었고 개인 차원에서 입후보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같은 범(汎)정당적 조직에는 각종 정당과 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선 당시의 소속 분포는 제헌국회의 정파 구성을 설명하는 데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원내 정파 간의 세력 판도가 어느 정도 구체화된 것은 제헌국회가 개원한 이후였다. 개원 이래 복잡한 정파 간의 이합집산에도 제헌국회는 대체로 ▲한민당 세력 ▲이승만 지지 세력 ▲무소속 구락부 결성을 계기로 결집한 세칭 소장파, 3개 세력의 정립(鼎立) 구도를 보였다.
이와 같은 3파 정립 구도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소장파 세력이 붕괴할 때까지 지속됐다. 한민당은 개원 후 독촉국민회와 무소속의 친한민계 인사를 규합해 소속 의원을 60여 명으로 늘렸으며, 독촉국민회와 한민당의 일부가 태백구락부라는 친목단체를 결성했다. 독촉국민회 잔여 의원과 대동청년단 일부는 3·1구락부를 형성했고, 무소속 의원들은 무소속 구락부를 결성해 이 두 구락부가 통합, 통합체 무소속 구락부를 만들었다. 그후 헌법 심의를 계기로 통합체 무소속 구락부 소속의원 중 일부가 이탈해 이정회를 결성하고 이승만 지지 세력의 주축이 됐다.
최대 과제는 국가안전보장책
이러한 한계와 정파 구성의 여건에서 제헌국회는 국회를 단원제로 구성하고 권력구조를 대통령제로 하는 헌법을 제정해 공포하고, 정부조직법 등 정부 구성을 위한 제반 법규를 제정했다. 또한 제헌국회는 헌법에 따라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했고 국무총리 임명을 승인했다. 그리고 광복 3주년이 되는 1948년 8월15일 미군정 종식과 함께 정부수립을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출범했다.
1948년 7월24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출발은 냉전과 분단의 제약구조가 응축된 모순의 시작이기도 했다. 또한 이 출발은 한민족 단일국가를 향한 염원의 좌절이었으며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세우겠다는 전후 구상의 실패를 의미했다. 새 국가, 새 정부는 냉전의 외압과 내부적 진통을 고스란히 떠안은 갈등의 산물이었다. 새 국가의 출발은 악천후 속의 힘겨운 출범이었으며 안과 밖의 도전은 순항에 대한 기대를 어렵게 했다. 어느 하나도 이제 막 출범하는 ‘대한민국’호의 앞날이 순탄하리라는 보장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 정부에는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독립 주권국가의 첫 정부로서 당연히 부담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가 있었다. 이 과제는 일제 식민지배 유산의 청산, 자주적인 국민국가와 통일정부의 수립, 민주주의의 구현으로 표현되는 것들이었다. 또한 이승만 정부는 해방 정국의 갈등과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정리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떠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직면한 가장 현실적인 과제는 안팎에서 조여오는 당장의 급박한 도전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불안정한 정세의 동북아시아에서 국가 안전의 보장책을 찾아야만 했으며, 내부적으로는 분단구조의 제약 속에서 정권 차원의 효과적인 리더십을 창출해야 했다.
분단국가로 출범한 대한민국으로서는 국가의 안전보장 문제가 아킬레스건이었으며 가장 심각한 도전이었다. 따라서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냉전과 분단의 대립을 떠안은 이승만 정부의 가장 급박한 과제였다. 동북아시아 질서의 형성 양상에 따라 체제 존립이 좌우될 수 있었으며 전면적인 무력 충돌의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항존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구애와 미국의 거리 두기
분단 단독정부 수립을 선택함으로써 냉전적 대립 전선의 최전방에 서게 된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신속하고도 확고한 군사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충분히 받고 한반도의 군사적 상황에 미국을 적극 개입시키기 위해 가용한 외교 자원을 모두 동원했다. 확실한 지원 보장을 이끌어내는 것이 대미외교의 핵심이었다.
이승만은 미국도 자국 세력권역의 전초기지에 해당하는 남한의 안보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으며, 아시아에서 소련에 대항하는 근거지를 남한에서 구할 수밖에 없으리라 판단했다. 이승만은 “우리로서는 세계평화와 번창을 추구하는 미국 민주주의 사상에 따라 약소민족을 해방하고 민주화할 의사를 가진 미국 민중에 희망을 걸 뿐이다”라고 해 일찍이 친미정권의 모델을 상정하고 있던 터였다.
이승만 정부의 수립은 이승만의 친미 노선과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 구상이 결합한 합작품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수립에는 분명 미국의 전략적 선택이 작용했다. 냉전(冷戰)의 확대와 강화가 반공우익 정권에 대한 전략적 지원으로 귀결될 수 있었으며, 미국은 한국사회의 보수적이고 비민주적인 엘리트를 남한의 리더십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남한체제의 안정 확보가 미국 정책의 일차적인 목표였으며 결국 ‘안정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세력이라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전략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이 미국의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선택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승만의 확실한 친미 노선에도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확고한 지원 대상으로 설정되지 못했다. 분단에 대한 자국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국 정부는 남한에서 이승만 정부의 출범이 최선이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이승만 정부 출범이 불완전한 선택이었던 만큼 한국 정부에 대한 지원도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미국의 지원은 군사적 성격보다는 정치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미국이 지원하는 한국 군사력의 범위와 기능은 대외적이기보다는 내부 안정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한국의 군사력 강화가 냉전적 이익에 가장 부합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해 미국의 확고한 군사지원과 보장을 요구했지만, 미국 정부는 이승만 정부를 확실한 지원 대상이나 안보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로서는 최악의 상황이 될 ‘남한의 포기’라는 카드도 미국의 전략적 선택의 범주에서 완전히 배제되지 않은 상태였다.
“남한은 미군 주둔에 적절치 않다”
그렇다면 과연 당시 한반도 안보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평가는 어떠했는가? 미국 대외정책의 관점에서 한국은 전통적으로 주변 지역이었다. 1945년 종전 당시에도 미국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선 거의 관심이 없었다. 전후 처리과정과 냉전 확대의 초기 정황에서도 미국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이 시기 미국 정부의 안보적 관심은 유럽에 치중돼 있었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전략적 관심의 주 대상이었던 것이다.
특히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중국을 친미로 유도하고 일본을 대(對)소련 전선의 전방 기지로 삼아야 한다고 판단했으며 이를 위해 미국이 일본의 재건을 도와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애치슨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명확히 해달라는 이승만의 요구에 대해 분명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태평양 방어선에서 남한이 제외된 것도 이러한 배경의 산물이었다. 특히 미국의 군부와 안보 관련 관리들은 이승만 정부의 안보적 효율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도 한국의 안보적 가치에 대한 미국의 평가는 한마디로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대(對)한반도 정책은 군부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맥아더는 미 상원 청문회에서 남한이 군사적으로 취약한 상태에서 철군을 결정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군사전략적으로 남한은 미 지상군이 주둔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지역이라고 답했다. 그는 또한 철군을 결정할 당시 상황에서 한반도 지역에 특별한 안보적 위협이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남한 포기’도 배제하지 않아
미 국방부 관리들도 남한의 전략적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했다. 그들은 전략적으로 ‘남한의 포기’도 고려의 대상에서 배제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7년 5월, 미 전쟁장관 패터슨(Robert P. Patterson)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에 비해 미국의 부담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 미국은 가능한 한 조속히 한국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주한 미군 철수 후 한국의 안보 우려되므로 군사원조를 해달라는 한국의 요구에 대한 미 육군성의 반응은 냉담했다. 한마디로 한국의 안보가 그리 우려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미 육해공군 통합위원회의 극동아시아 소위원회, 합동참모본부, 그리고 합동참모본부의 군사지원 임시특별위원회 등의 보고서는 당시 미국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① 한국에서 미국의 병력과 군 기지를 유지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이익이 되지 않는다. 한국에 배치된 병력은 다른 지역에서 화급히 필요하다. 따라서 한국에서 병력을 철수해 당장 필요한 곳에 활용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할 것이다.
② 다만 남한에서의 미군 철수는 소련의 해당 지역 지배와 직결되기 때문에 미국의 위신에 심각한 손상을 줄 수도 있다. 만일 미군이 철수한다면, 한국은 소련의 지배권 아래 놓이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제한된 가용 재원과 장비로 남한 경찰력을 증강해야 한다. 확대된 경찰력의 존재는 북한군의 공공연한 행위를 일시적으로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미군 철수에 따르는 안보 수단을 새로운 정부에 제공하기 위해 법적으로 부여된 가용 자금과 인적 자원, 장비의 한도 내에서 한국의 경찰력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③ 한국 정부를 위한 군사 원조의 총액은 미국에 전략적으로 더욱 중요한 국가의 원조 요건에 근거해 결정돼야 한다.
④ 군사적 측면에서 전략적 가치가 작은 한국에 추가 상호 군사지원계획 자금을 배당하는 것은 정당화하기 힘들다. 하지만 정치적 고려를 먼저 한다면 합참은 한국에 추가 지원을 제공하는 데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단 그러한 경우에도 지상군과 해안 경비대 장비 품목만이 공급돼야 한다는 점이 고려돼야 한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안보관(觀)은 이처럼 불확실했으며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의 안보협력 관계도 안정되지 못했다. 한국에 대한 지원은 군사 전략적으로는 ‘내키지 않는’ 정치적 성격의 지원이었고 지원 방침도 명확히 제시되지 못했다. 이렇듯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 정형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신생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는 국가의 안전을 보장받을 방도를 힘들게 모색해야 했다.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국민적 열망
이승만은 정부 수립의 의미를 일차적으로 공산진영과의 대립 투쟁에서 찾았으며 정부 수립을 대공(對共) 승리와 동일시했다. 즉 “공산주의 진영과 투쟁해 민주진영을 만들어 독립국가로 출발하게 된 것”이라며, 정부 성립은 민주·공산 양 진영의 대립과 격투 가운데 민주진영의 지지에 힘입어 이뤄졌다는 것이다. 냉전과 분단에 대한 이승만의 기본적인 대응 방향은 냉전과 분단이 유발한 대결의 역학을 활용해 체제와 정권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것이었다. 냉전구도에서 비롯된 외압을 약화하고 분단에 따른 갈등 요소를 완화하는 방향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스스로 인식했던 것처럼, 당시 현실은 대다수 국민 사이에서 좌익에 대한 우호적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고 반공주의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더욱이 분단은 일차적으로 통일된 민족국가 형성을 바라는 민족주의적 요구에 반하는 구조였다. 당시 여론은 단독정부 수립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분단을 잠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여전히 협상을 통한 통일을 바라고 있었다. 단정 수립을 받아들이기에는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강했고, 평화통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이 결렬됐는데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새롭게 시도하려는 생각이 집요하게 남아 있었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는 분단체제의 반공 정권이 그 지배력의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는 리더십을 시급히 창출해야 했다. 이승만은 무엇보다도 분단 구조를 체제존립 구조로 바꿈으로써 정당성의 토대를 더욱 확고히 하고 단정의 약점에서 비롯된 반대와 저항을 효율적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었다. 국제적인 냉전의 대결논리를 내면화해 분단의 제약성을 보상하는 동시에 단정의 권위와 안정을 위협하는 도전 가능성을 봉쇄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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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호는 그 출범과 함께 이처럼 급박한 현실적 도전과 과제에 직면했다. 이승만 정부는 정권 창출의 승리감과 동시에 체제와 정권의 위기감도 함께 맛보아야 했다.
따라서 이 위기에 대처하는 것이 새 정부의 급선무였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이 정부수립 기념사에서 밝힌 민주주의의 실천, 그리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보호 등과 같은 보편적 과제는 자연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2년 뒤 발발한 전쟁에 대한 위기감이 신생 국가의 성격을 미리 규정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