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호

시상식에서 빛난 스타들의 말, 말, 말

“전도연은 나의 기적, 집사람은 나의 운명”

  • 이승재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sjda@donga.com

    입력2006-04-28 16: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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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각종 시상식 무대에 오른 연예인들의 수상소감이 천편일률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연예인 등 엔터테인먼트업계 종사자들이 수상소감 발표 순간을 파급력이 큰 하나의 이벤트로 인식한 거죠. 짧은 시간에 자신을 더 빛내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최근 국내외 각종 시상식에서 수상자들이 밝힌 소감의 특징을 살펴볼까요.
    “아름다운 밤이에요.”

    이 한마디를 기억하시죠? 1992년 대종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장미희가 수상소감으로 꺼낸 첫마디입니다. 이 멋진 한마디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장미희를 기억하게 하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자기도취적인 듯하면서도 로맨틱한 수상소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미희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수상소감이란 건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말해버리고 마는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나’를 알리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종의 ‘쌍방향 통행’이죠. 결국 멋진 수상소감은 위인들의 어떤 한마디보다 듣는 이의 마음속에 강력한 감동의 자장(磁場)을 형성합니다.

    사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유수의 가요제, 영화제, 연기상 시상식 무대에 오른 연예인이 들려준 수상소감은 천편일률적이었습니다.

    “저를 캐스팅해주신 PD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어깨가 한층 무거워집니다. 더 잘하라는 뜻으로 알고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시대엔 겸손이 최고의 미덕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중은 이런 연예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죠.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은 빠짐없이 엔터테인먼트의 재료가 되고, 대중은 평범한 수상소감에 식상하기 시작했죠. 물론 지금도 스타들의 수상소감 중 ‘감사’ 인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고마움을 표시하는 대상이 감독이나 PD에서 소속 연예기획사 사장으로 옮겨온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가장 짜증나는 수상소감은 아마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일 것입니다. 세상에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분명한 건, 이제 연예인을 비롯한 엔터테인먼트 산업 종사자들이 수상소감을 값비싼 ‘상품’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소감발표를 하나의 완벽한 이벤트로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최근 국내외 각종 시상식에서 나온 인상적인 수상소감들을 분석해보고, 빛나는 수상소감들의 공통점을 살펴보겠습니다.

    # ‘웅변’ 아닌 ‘귓속말’을 하라!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웅변형’ 소감보다는 ‘귓속말형’ 소감이 더 각광받는다는 점입니다. 뭔가 크고 근사한 말을 하려는 듯한 ‘웅변’보다는 수상자 자신의 매우 개인적인 얘기를 살짝 들려주는 ‘귓속말’ 같은 소감이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거죠. 지난해 청룡영화상에서 ‘너는 내 운명’이라는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황정민의 수상소감은 이랬습니다.

    “사람들에게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나를 소개합니다. 60여 명의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에서 나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죠. 나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죄송합니다. 트로피의 여자 발가락 몇 개만 떼어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항상 제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를 설레게 하고, 현장에서 열심히 할 수 있게 해준 전도연씨에게 감사드립니다. (전도연을 바라보며) 너랑 같이 연기하게 된 건 나에게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어. 마지막으로 ‘황정민의 운명’인 집사람에게 이 상을 바칩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간파해야 합니다. 황정민은 무슨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뉘앙스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죠. 이런 수상소감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상대의 말을 몰래 엿듣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마음을 훔쳐버리는 효과가 있죠. 황정민의 이 수상소감은 굉장한 화제를 뿌리며 당장 인터넷 검색순위 1위에 올랐습니다(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최고의 문화권력은 ‘인터넷 검색순위 1위’라는 타이틀입니다).

    남들 같으면 “함께 연기한 전도연씨에게 감사드립니다” 하고 건조하게 한마디 던지고 말 것을, 황정민은 사뭇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를 설레게 하는 전도연” “너랑 같이 연기하게 된 건 나에게 기적 같은 일이었어”…. 뭐랄까요. 무슨 연애편지를 읽어주는 것 같죠.

    같은 겸손의 표현이라도 “사람들에게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나를 소개합니다” 훨씬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배우 나부랭이’라는 다소 과격한 단어 구사가 공적인 자리에서 밝힌 소감을 한 차원 더 개인적으로, 더 진솔하게 들리도록 만들기 때문이죠. 어떻습니까.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저에게 주는 상이 아니라 저와 함께 일한 모든 분께 주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따위의 틀에 박힌 수상소감에 비해 영악할 정도로 창의적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황정민은 기막힌 호흡조절까지 구사합니다. 동료 여배우 때문에 가슴이 설렌다고 하면서, 일단 시상식을 보고 있는 시청자를 약간 긴장하게 만듭니다. 시청자들은 “아니, 저 배우, 유부남이면서 저렇게 말해도 돼?” 하고 내심 걱정하죠(이래서 시청자는 걱정도 사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황정민은 기가 막힌 반전(反轉) 전략을 구사합니다. 곧바로 ‘너는 내 운명’이라는 자신의 출연작 제목을 절묘하게 비틀어 “‘황정민의 운명인 아내에게 이 상을 바친다”고 말함으로써 감동을 두 배로 만듭니다. ‘병 주고 약 주는’ 이런 말하기 방법을 이른바 ‘냉탕-온탕’ 전법이라고도 하죠.

    # ‘망원경’ 아닌 ‘현미경’처럼 하라!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현미경’ 같은 수상소감입니다. ‘망원경’ 같은 소감보다는 ‘현미경’ 같은 소감이 훨씬 경쟁력 있습니다. 저 먼 곳을 바라보는 ‘망원경’처럼 거시적이고 포괄적인 소감보다는, ‘현미경’으로 하나하나 뚫어지게 살펴보듯 아주 구체적인 단어와 표현을 사용한 소감이 빛난다는 것이죠.

    지난해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흑인 가수 레이 찰스의 생애를 그린 영화 ‘레이’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흑인배우 제이미 폭스는 어린 딸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기가 막힌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순수한 사랑 그 자체인 4피트 11인치 키의 제 딸에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요. 제가 여기 이 자리에 오기 전에 딸은 저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죠. ‘아빠, 아빠가 상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그래도 아빤 여전히 훌륭해요’라고요.”

    ‘4피트 11인치’, 제이미 폭스는 딸의 키를 정확히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이 세심하고 가정적인 아버지임을 은연중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린 딸의 말을 직접 인용해서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울컥하게 만들고 있죠. 구체적인 단어나 표현은 이렇게 힘이 강합니다.

    제이미 폭스는 영화 ‘레이’에서 레이 찰스의 실제 모습과 거의 구분이 안 되는 표정과 제스처를 구사하면서 피아노 연주까지 모두 직접 해냈습니다. 그는 물론 배우가 되기 전부터 피아노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부단한 노력과 준비가 따랐습니다. 실제로 그의 할머니는 폭스가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치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지도 못하게 했다고 하죠. 제이미 폭스는 지금의 자신이 있도록 만들어준 할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는데요. 같은 고마움의 표시라도 자신만의 색깔을 담아 감동적으로 표현합니다.

    “제 딸아이는 할머니와 같은 이름을 갖고 있어요. ‘마리’라는 이름인데요. 제 할머니 이름이 에스텔라 마리 탤리입니다. 할머니는 오늘밤 여기 오시지 못했어요. 할머니는 제 최초의 연기스승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제게 말씀하셨죠. ‘똑바로 좀 서 있어.’ ‘어깨 좀 제대로 펴.’ ‘뭔가 사리분별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 과거 저는 불량스러웠어요. 그럴 때 할머니는 말씀하셨죠. ‘그래도 뭔가 잘나가는 사람처럼 행동하거라.’ 그리고 제가 바보같이 행동할 때면 할머니는 저를 때리셨어요. 회초리로 마구 때렸죠. 할머니가 저를 회초리로 때린 건 정말 오스카 수상감이었어요.(웃음) 그리고 할머니는 저를 때린 후에는 저와 이야기를 하시면서 왜 회초리를 들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주셨어요. 할머니는 지금도 저와 이야기하세요. 오늘도 할머니는 저와 이야기를 할 거예요. 제 꿈속에서 말이죠. 그런데 오늘은 할 이야기가 너무도 많아서 잠이 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할머니, 사랑해요.”

    제이미 폭스의 얘기를 듣고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때론 모질게 채찍질하면서 불량한 자신을 어떻게든 성공시키려 했던 할머니에 대한 감사 표시를 구체적인 일화를 들어,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전개했죠. 그의 수상소감 속에는 할머니의 구체적인 캐릭터, 희로애락이 담긴 에피소드, 감동적인 한마디, 그리고 할머니와 자신의 시간을 초월한 교감(交感)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영화인 것입니다.

    폭스는 할머니가 숨을 거두고 지금은 없다는 사실도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다”는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오늘도 꿈속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거예요”라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아름답게 전달합니다. 그는 단 한마디도 “할머니에게 고맙습니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할머니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지 듣는 이들에게 수백배 증폭시켜 전달하는 절묘한 테크닉을 구사합니다.

    # 부드럽지만 강한 힘, 비유와 유머를 날려라!

    지난 3월 열린 한국방송프로듀서상 시상식에서 라디오 진행자 부문상을 받은 진행자 손석희의 수상소감도 구체적인 단어나 숫자를 사용하는 게 얼마나 큰 설득의 힘을 갖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상의 33%는 저의 제작진께 드리겠습니다. 또 33%는 저와 인터뷰하느라 고생했던 인터뷰이들에게, 33%는 청취자들에게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1%는 저와 가족들이 가져가겠습니다.”

    33%나 1%라는 구체적인 수치를 사용하니까, 같은 겸손과 감사의 표시라도 훨씬 신선하고 세련되게 다가옵니다. 구체적인 수치는 그것을 구사하는 사람이 분석적이고 날카롭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쉽습니다. 이러한 그의 소감도 어쩌면 ‘송곳처럼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는 자신에 대한 항간의 평가를 은연중에 확인하고 재생산하는 작업의 일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멋진 수상소감엔 공통적으로 ‘비유’와 ‘유머’의 힘이 있습니다. 비유와 유머는 언뜻 긴장을 풀게 만드는 듯하다가 이내 듣는 이의 마음을 활짝 열어버리는 강력한 소프트 파워입니다.

    3월6일(한국시각) 미국 할리우드 코닥극장에서 열린 제78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81세의 나이로 공로상을 받은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소감은 올해의 백미라고 할 수 있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곧바로 공군에 입대해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한 로버트 알트만은 6·25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매쉬’(1970)로 칸 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줄곧 할리우드의 주류에서 벗어나 활동하면서, 할리우드의 이면을 조명한 ‘플레이어’나 ‘숏컷’ 등의 영화를 연출해 ‘할리우드의 반골’이라는 별명을 얻었죠.

    그는 이번 수상소감에서 절묘한 유머와 비유법을 통해 노장 감독의 철학과 비전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시선마저 감동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영화를 만드는 것은 모래성을 쌓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친구들, 가족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바다로 나가 함께 모래성을 쌓습니다. 하지만 파도가 밀려오면 모래성은 이내 사라지죠. 모래성은 이렇게 없어지지만, 늘 내 마음속에 남아 있어요. 그런 모래성을 제가 평생 40개를 만들었는데요. 항상 새롭고 재밌습니다.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정말 저는 영화 만드는 작업 자체를 사랑하고 이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들을 탐구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뭔가 솔직한 한마디를 남기고 싶은데요. 10년 전인가요? 제가 심장이식수술을 받았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30대 젊은 여성의 심장이었다고 합니다. 그 심장을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너무 일찍 상을 주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직 40년은 더 살아야 되거든요.”

    영화를 모래성에 빗대어, 평생 40편의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감성지수 만점짜리 표현으로 전달하고 있죠. 또 81세에다 심장이식까지 받을 정도로 노쇠한 자신을, 절묘한 유머를 사용해 ‘새파란 청춘’으로 역전시킵니다. 정말 그의 영화만큼이나 엉뚱하고 웃기며 동시에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할리우드 노장 감독들의 수상소감은 어떤 문학작품보다 감동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속에는 나이와 세월을 바라보는 창조적인 시선이 담겨 있죠. 여성 복서와 한물간 늙은 트레이너의 눈물겨운 우정을 그려낸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지난해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배우 겸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연단에 올라 자신의 영화제작진을 ‘노인병 팀’이라고 불러 유쾌한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당시 75세이던 자신은 물론, 복싱 트레이너 역의 모건 프리먼도 68세였으니까 말이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화를 찍은 37일간은 나에게 아주 멋진 모험이었어요. 아직도 제 어머니가 저기(객석)에 앉아 계시지만, 정말로 그 젊은 유전자에 감사드립니다.(웃음) 저는 아직도 그저 어린애일 뿐이에요. 아직 할일이 많습니다.”

    유머와 여유는 심지어 패자도 승자로 만들어버리는 엄청난 마술을 부립니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열리기 전날이면 ‘골든 라스베리’ 시상식이라는 게 열리는데요. 그해 최악의 영화나 최악의 배우를 뽑는, 뽑힌 당사자들로서는 아주 불명예스러운 상이죠. 수상자는 대부분 시상식에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영화 ‘캣 우먼’에 출연해 최악의 여배우로 지명된 흑인 배우 할리 베리는 당당하게 시상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2002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유력한 수상후보였던 ‘물랭루주’의 니콜 키드먼을 제치고 영화 ‘몬스터 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바 있죠. 당시 “모든 유색인종 여성에게 이 상을 바치고 싶다”는 인상적인 소감을 남겼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나를 이런 쓰레기 같은 작품에 캐스팅한 워너 브러더스사에 감사해요”라는 농담을 던진 뒤에 멋진 수상소감으로 판세를 180도 역전시켰습니다.

    “제가 어릴 때 어머니는 말씀하셨어요. ‘네가 만일 훌륭한 패자가 될 수 없다면 훌륭한 승자도 될 수 없다’고 말이죠. 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을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어찌 보면, 뼈 있는 수상소감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에 속한 대중예술인의 입에서 많이 생산됩니다. 그들은 주류를 비판하고 힐난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고 생장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죠. 2003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미국의 총기 문제를 비판한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으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감독 마이클 무어가 수상소감으로 이라크전쟁을 비판하면서 “부시, 부끄러운 줄 아시오!” 하는 돌발발언을 남긴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자기과시형’은 가뭄에 콩 나듯

    이 같은 현상은 국내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3월14일 열린 제3회 한국 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는 그동안 수준 높은 음악을 발표했지만 상업성이 떨어져 지상파 방송들이 외면했던 뮤지션들에게 대거 상이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젊은 뮤지션들이 밝힌 수상소감은 그 어떤 주류 음악인들의 소감보다 재치가 넘치면서도 뼈가 있습니다.

    “앨범 작업을 위해 나와 함께 갇힌 골방의 무수한 영웅들에게 우선 감사한다. 특히 낭만의 특별시 서울특별시민들과 이 영광을 함께 나누겠다.”(최우수 모던록 앨범상 수상 ‘몽구스’)

    “살아가면서 술상은 많이 받아봤지만 이렇게 의미 있는 상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그간 우리 앨범 제작을 하다가 망한 50명의 제작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최우수 록 싱글상 수상 ‘블랙홀’)

    특히 최우수 팝 앨범 등 2개 부문을 수상한 퓨전 일렉트로니카 밴드 ‘W’는 “수천 수만 명의 사람이 한번 듣고 잊어버리는 음악을 만드는 대신 단 한 사람이라도 수천 수만 번 들을 수 있는 앨범을 만들겠습니다”라는 수상소감을 밝혀 듣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했습니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시상식의 수상소감 중 최근 주목할 만한 특징 하나는 자신을 내세우는 내용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약간의 잘난 체를 통해 시상식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1998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무려 11개 부문을 휩쓴 영화 ‘타이타닉’의 감독 제임스 카메론도 영화 속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대사를 빌려 “나는 세상의 왕이다(I’m the king of the world)” 하고 외치며 오스카 트로피를 높이 쳐들어 시상식 분위기를 한껏 돋우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국내에서 ‘자기 과시형’ 수상소감이 ‘가뭄에 콩 나듯’ 하는 건 겸손과 겸양을 중시하는 유교문화의 전통 탓이기도 하겠지만, 알고 보면 초고속통신망이 전국 방방곡곡까지 깔린 인터넷 강국 대한민국의 어두운 이면이기도 합니다. 스타가 말 한마디 잘못하거나, 자신을 내세우면 “건방지다” “잘난 체한다” “싸가지 없다”는 비난성 글들이 인터넷 게시판을 도배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인터넷상에는 해당 연예인을 죽도록 비난하는 누리꾼(네티즌)의 모임인 ‘안티 팬카페’가 생겨나기 일쑤니까 말이죠. 스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사건건 비판하고 떼지어 적대시하는 ‘안티 문화’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스타들의 본 모습을 들여다볼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새로운 뉴스를 담아라!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수상소감에 새로운 뉴스가 담겨야 생명력이 강하다는 겁니다. 관중이 판에 박힌 감사와 각오를 예상하고 있을 때, 귀가 번쩍 뜨이는 뉴스가 담긴 수상소감으로 허를 찌르며 감동을 자아내는 것이죠.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수상소감으로 손꼽히는 1994년 배우 톰 행크스의 소감은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뉴스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성애자의 인권을 다룬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으로 죽어가는 동성애자 역을 열연해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무대에 오른 그는 오스카 트로피를 손에 쥐고 이런 소감을 밝혔습니다.

    “제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했던 이 두 분이 없었더라면 저는 이 자리에 서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은 잠깐도 이야기를 나눌 수 없고, 오로지 꿈에서만 만나는 분들이죠. 제 고등학교 드라마 선생님이셨던 롤리 판스워드씨. 제게 드라마에서 연기를 잘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또 다른 한 분은 판스워드 선생님께 함께 배웠던 동료 존 길커슨씨입니다. 저는 두 분이 가장 멋진 게이(gay) 미국인이었기에, 두 분의 이름을 감히 언급합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 두 분을 만나 영감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제게 정말 큰 행운이었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이 두 분과 같은 선생님과 친구를 만나길 바랍니다.”

    톰 행크스는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인물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그들이 남성 동성애자(게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습니다. 이 자체로 톰 행크스는 자신이 영화에서뿐 아니라 실제 인생에서도 동성애자들에게 어떤 편견도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리면서 소수자인 동성애자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당시 관중은 깜짝 놀랐습니다. 대배우 톰 행크스가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두 인물이 모두 게이라니! 톰 행크스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뉴스를 용감하게 밝힘으로써 사람들의 편견을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이죠.

    이 수상소감은 급기야 1997년에는 ‘인 앤 아웃’이라는 코미디 영화의 모티프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오스카상을 받게 된 한 배우가 수상소감으로 자신의 연기 스승인 하워드가 동성애자라고 밝히면서 하워드에게 벌어지는 웃지 못할 일들을 담았는데요. 톰 행크스의 수상소감이 당시 얼마나 시청자들에게 강력한 쇼크를 줬는지 감지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최고의 수상소감을 들여다보면 마치 ‘연애’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진심이 중요하다고 해도, 자신(수상자)의 얘기만을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순간 상대(관중 혹은 시청자)는 저 멀리 달아나버리니까 말이죠. 결국 연애의 줄다리기를 끝장내는 건, 상대의 마음을 단박에 훔치는 강력한 KO 펀치 한방일 것입니다. 영화 ‘카사블랑카’를 보십시오. 험프리 보가트는 잉그리드 버그만과 결국 안타깝게 헤어집니다. 하지만 이 한마디를 남기며 그녀의 마음을 영원히 빼앗아버리지 않습니까.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더욱 감동적인 수상소감이 마음의 문을 노크할 그날을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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