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화여대 법대 학장으로 계시던 이태영 선생님으로부터 여성과 서민을 위한 법을 배우고, 인생의 절반 이상을 선생님이 만드신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활동하고, 지금은 선생님의 뒤를 이어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는 내 일생의 자랑이자 행복이다.
이태영 선생님(오른쪽)은 내게 평생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었을 뿐 아니라 평생 함께할 남편과의 연을 만들어주셨다.
올해로 내가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문을 들어선 지 서른세 해가 되었다. 어느덧 인생의 반 이상을 상담소와 함께한 셈이다. 더구나 선생님의 뒤를 이어 소장을 맡고 있으니 나와 선생님의 인연은 누구보다 깊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17일 선생님의 7주기 추모식을 마친 후 여느 해처럼 국립현충원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을 뵈러 갔다. 벌써 7년이라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며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던 1998년 12월 그날을 생각했다. 연말이 되어 선생님을 찾아뵌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선생님은 당신의 지식과 재능을 불행한 여성을 위해, 사회를 위해 쏟아부으신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참된 지식인이셨다. 그러나 그러한 지성과 열정도 무심한 세월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었던 듯, 말년에 알츠하이머 병으로 고통 받으셨다. 이를 지켜보는 우리들의 마음도 안타깝고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에 입학하던 1965년이었다. 1963년부터 이화여대 법정대학장으로 재직 중이셨던 선생님은 이미 너무 큰 어른이라 처음엔 가까이 뵙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성 최초 고등고시 합격
이화여전 가사과를 졸업하신 선생님은 서울대학교에 여학생 입학이 허용되자 첫 서울대 법대 여학생이 되었고,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최초로 고등고시에 합격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거부로 소원(所願)하셨던 판사 임용이 불가능해지자 변호사가 되어 무료 법률상담을 시작, 여성의 권익 증진을 위해 애쓰셨다. 더구나 그 모든 일을 세 자녀의 어머니가 되신 이후에 해내셨다는 사실에서 선생님은 이미 하나의 전설이었다.
선생님은 당신의 저서 ‘나의 만남 나의 인생’에서 이화여대 법정대학장 시절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날짜도 분명히 기억된다. 1963년 6월1일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이 내 변호사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중략) 법정대학이 존폐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해도 좋으니 얼굴만 내밀고 학교 복도를 왔다갔다해달라는 것이었다. ‘나같이 나이 많은 가정주부도 고등고시에 합격했는데 너희들은 어찌 못 하겠느냐’는 시범 케이스로서… (중략)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8월16일 아침에 4년 임기만 한번 해보기로 약속하고 생각지도 않았던 대학 학장의 길에 들어섰다.”
학장을 맡으신 선생님은 이화여대 법정대학에 일대 쇄신을 일으켰다. 먼저 학생들 스스로 법정대학 학생임에 자부심을 갖도록 배지를 달라고 하셨으며, 법정대학 건물을 권위 있는 본관으로 옮기고 모의법정을 만드셨고, 법정대학 전용 도서실과 고시 준비실도 마련하셨다. 선생님의 열정과 김옥길 당시 총장의 흔쾌한 뒷받침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또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커리큘럼인 법률임상교육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등 여성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할 여성지도자를 키우고, 넓은 의미의 여성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교과목을 개편했다. 법률임상교육이란 법의 평등화, 법의 서민화를 이루기 위해 법을 통한 사회복지 사업에 대한 이론과 실무 교육을 겸하는 법학교육의 새로운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법정대학이 새로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할 때 입학하게 된 것이 내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 그때는 미처 몰랐던 것 같다.
선생님은 너무 크신 분이어서 신입생 시절에는 그저 멀리서 뵙기만 해도 존경의 마음이 우러나곤 했다. 그 넘치는 열정과 에너지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금도 ‘인형의 집’에 대해 열변을 토하시던 선생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듯하다.
3학년이 되어 학회장을 맡으면서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자주 뵐 수 있었는데, 그러면서 선생님의 철학, 가치관, 사회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생님은 내가 걸어가야 할 삶의 한 지표가 되어주셨다. 내 인생의 지표로 삼고 있는 ‘내가 처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 ‘내 운명의 별은 내 가슴에 있다’는 좌우명은 바로 선생님의 그것이었다. 선생님의 좌우명을 그대로 물려받음으로써 선생님의 정신과 가르침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음을 항상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법정대학의 학장실에서 아침기도로 하루를 여시던 일, 강의실과 복도를 활기 넘치는 큰 목소리로 채우시던 일, 제자들에 대한 선생님의 각별했던 사랑이 기억에 가득하다.
가혹한 상사
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 기독교방송국의 사회교양담당 프로듀서로 취직을 했다. 원하던 일이어서 일하는 재미도, 보람도 있었다. 나는 유능한 방송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독교방송에 출연하러 오셨던 선생님께서 나를 보시더니 “네가 왜 여기 있느냐, 상담소에 와야지”하셨다. 그 말을 듣고 고민이 없을 수는 없었지만, 선생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선생님의 부르심 한마디로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더구나 당시 상담소는 그저 작은 민간단체일 뿐이어서 직원들에 대한 처우나 환경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고, 해야 할 일은 언제나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의 부르심을 따랐다. 지금도 선생님의 부르심 한마디에 상담소 행을 택한 것은 자그마한 기적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저 없이 한 선택이었고 힘들고 고단한 적이 더 많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상담소에서 오래 근무한 직원들과 이태영 선생님이 소장으로 계시던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선생님을 직접 뵙지 못한 젊은 직원들은 웃으며 종종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태영 소장님을 존경하지만, 그 시절에 상담소 직원이 아니어서 다행스러워요.”
웃으며 하는 이야기지만, 솔직히 공감한다. 상담소 소장으로서 선생님은 참으로 가혹한 상사였다.
“너희들은 일요일에 집에서도 항상 상담소 일만 생각해야 돼” 하시고는 월요일 아침마다 일요일에 상담소에 관한 어떠한 좋은 생각을 했는지를 발표하라고 채근하시곤 했다.
또한 이면지 한 장이라도 허투루 쓰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려운 이웃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 상담소를 찾는 불행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해서, 또 상담소를 돕는 은인들의 도움을 생각해서 절대 그리해서는 안 된다”고 호통을 치시곤 했다.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은 두 번 세 번 써야 하고, 다 쓴 종이라도 조금의 여백이 있으면 메모지로 만들어 알뜰하게 써야 했다.
경제적으로도 열악하기 짝이 없어 당시 직원들은 교통비 정도만 받고 그 많은 일을 했다. 하루에 몇십 건의 상담을 하고, 그 상담 내용을 정리하고, 무료 대서나 무료 변론이 필요하면 자원봉사자들인 백인 변호사단과 연락해 처리해야 했다. 밀려드는 상담을 처리하기에도 하루가 모자랐지만 가족법 개정운동과 새로운 법안을 마련하고 홍보하는 일, 상담소 운영을 위해 바자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일도 병행해야 했다.
정말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쁜 가운데에서도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거나 비품을 함부로 다루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이렇게 일을 혹독하게 시키면서도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은 나에게 수업료를 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뜻을 그때는 깊이 생각지 못했으나, 이제는 무슨 뜻인지 잘 안다.
상담소 업무와 관련해 한치의 양보도 없고 가혹할 정도로 직원들을 훈련시킨 선생님이셨지만, 필요한 상황에서는 더할 수 없이 자상하고 깊이 배려해주신 분이 또 선생님이셨다.
두 가지 후회 없는 선택
개인적으로 선생님은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후회 없는 선택을 하도록 끌어주신 분이다. 하나는 나를 상담소로 불러주신 것이고, 또 하나는 내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해주신 것이다.
이태영 선생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6년 여성문제와 가정문제에 주목하여 상담소를 운영한 여성운동 선각자였다.
우리가 결혼한다고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곽배희는 내가 쓰려고 키운 사람이라 아무하고나 결혼시킬 수 없다. 그래서 결혼한다길래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가 그 뜻을 높이 사는 동아투위 사람이라니 마음이 놓이고 기쁘다. 평등하게 모범적인 가정을 가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제자 하나 하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그 마음이 짐작되어 더욱 기뻤던 기억이 새롭다.
해직기자였던 남편은 결혼 후에도 반독재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섰고, 그 일로 계속 수배를 당하고 두 번이나 투옥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도 보안사 요원들을 피하느라 일주일간이나 상담소에 출근하지 못했고, 때로는 형사들이 상담소 복도에 진을 치고 있기도 했다. 또한 남편이 투옥 중일 때에는 일주일에 세 번 한나절씩 면회를 다녀오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상담소에 상당한 부담과 염려를 끼치는 것이었지만 선생님은 단 한 번도 이와 관련해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다. 오히려 나를 적극적으로 감싸주고 옹호해주셨다.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 엄혹한 시절을 내가 어찌 겪어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아직도 우리 부부가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있다.
이렇듯 선생님은 업무와 관련해 엄격하기 그지없는 분이셨지만,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을 깊이 살펴 배려하는 분이셨다. 물론 당신 자신도 일찍부터 조국의 통일과 사회 민주화에 앞장섰기에 동지적 입장으로 우리 부부를 믿어주고 지켜주셨던 것이리라.
또한 선생님은 민주당 총재를 지낸 정일형 박사의 아내로 가정생활에서도 우리에게 모범이 되셨다. 정일형 박사에 대한 선생님의 신뢰와 넘치는 애정은 ‘부부는 저래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가르침을 몸소 삶으로 보여주셨다.
시대를 꿰뚫어보는 선각자
2005년 3월2일, 호주제 폐지를 담은 민법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1958년 민법 제정 당시부터 논란이 되어왔던 호주제를 가족법 개정운동 반세기 만에 드디어 역사의 뒤편으로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감격적인 순간에 당연히 선생님이 떠올랐다. ‘이 순간을 선생님이 보셨어야 하는데,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처음으로 가족법 개정운동을 시작하신 선생님은 이와 관련해, 일찍이 “국회의원과 정부 그리고 남성들이여. 민주주의 완성의 정도(正道)는, 또 지름길은 가장 만만하게 여기는 안방에서부터의 평등·평화에 있다는 사실을 더 늦기 전에 분명히 인식하기 바랍니다”고 말씀하셨다.
상담소에서 평생을 보내며 또 선생님의 뒤를 이어 상담소 소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나로서는, 주요한 고비마다 선생님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선생님의 탁월한 선견지명, 놀라운 혜안, 늘 시대를 앞서간 생각들을 존경해마지않는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6년, 그 시대에 선생님은 여성문제와 가정문제에 주목하여 여성법률상담소를 만드셨다. 개인적으로 부와 영예를 누릴 수 있었던 최초의 여성 변호사라는 지위를 팽개치고 가난하고 억울한 여성들을 위해 상담소를 만들어 가정의 민주화와 사회복지를 위한 토대로 삼았다는 점은 지금 보아도 놀라운 일이다.
선생님은 1958년 민법 제정 당시부터 양성평등과 가정의 민주화에 걸림돌이 되는 가족법을 개정하기 위한 가족법 개정운동을 시작했으며, 1963년에 가정법원 설치를 주장하고 이를 위한 가사심판법 제정의 입법 초안에 참여하셨다. 또한 1966년 여성법률상담소를 남녀 모두의 권익을 위한 인권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가정법률상담소로 바꾸셨다. 무엇보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에, 당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하기도 어려운 복지개념의 법률구조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은 시대를 꿰뚫어보는 선각자가 아니고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선생님은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교육원을 설립하고 최초로 사회교육 사업을 시작하셨다. 지금이야 각 대학이나 복지관, 동사무소에서도 시민을 위한 다양한 교양강좌를 열고 있지만, 선생님은 이미 1970년대에 시민공개강좌를 열고 ‘어머니 학교’ ‘며느리 학교’ ‘할머니 할아버지 학교’ 같은 사회교육 사업을 시작하셨다.
선생님의 삶을 보면 뛰어난 한 개인의 헌신이 사회 전체를 얼마나 복되게 하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한국 여성의 표상
이태영 선생님께 바치는 여러 헌사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이 이화여대 법과대학 학장과 총장을 역임한 윤후정 이화여대 이사장의 말씀이다. 윤 이사장은 선생님을 “일관된 지조로 평생을 여성의 인권 신장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시고 ‘하나님과 나라와 남편과 여성’을 사랑하고 섬겼으며, ‘기도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신조로 사회와 가정에서 모두 여성의 최고를 보여주신 한 세기에 한 분 나올까 말까 한 한국 여성의 표상”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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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담소 운영과 관련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선생님을 생각한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그렇게 실마리를 풀다보면 해답이 나온다.
이렇게 크신 분을 당대에 또 뵙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나는 다만 이런 거목이 되어 큰 그늘을 드리워주신 선생님과 같은 시대에 살며, 그분께 배우고 함께 일하고 그 뒤를 잇게 된 것을 내 인생의 큰 자랑이자 행운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