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법은 전통에서, 마케팅은 서구에서
- 韓流, 최고 추구해야 ‘日流’ 대체재 면한다
- 단식증류 소주·韓食·도자기의 궁합 방정식
- 최고를 접해봐야 최고를 만들 수 있다
- ‘한 상 차림’과 單品이 아닌 풀코스로 세계화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그가 요즘 모험에 빠져 있다. 잘나가는 광주요를 캐시 카우(cash cow, 돈벌이 되는 사업)로 둔 상태에서, 단식증류 소주 ‘화요’(火堯, ‘소주(燒酒)’의 ‘燒’자를 파자한 것)’를 출시하고, 한국 음식을 세계화하기 위한 한식점 ‘가온’ 운영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화요와 가온은 아직 그가 기대한 것만큼 잘되고 있진 않다. 그러나 그는 광주요와 화요, 가온을 한덩어리로 한 사업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그에겐 ‘새 문화를 만들어보겠다’는 야망이 있다. 물론 이면에는 새로운 사업영역을 구축하겠다는 속셈이 숨어 있다. 야망과 속셈이 교차하는데, 그래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전자(前者)이다. 그가 하는 사업은 문화가 바탕이 되어야 성공한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문화 업그레이드 방안을 내놓고 있다.
문화는 주로 의식주(衣食住)에서 나오는데, 그는 식(食) 분야에서 세계와 통할 수 있는 고급 문화를 만들려고 한다. 식은 의·주와 달리 아직 한국 것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한국인의 옷은 양복으로, 집은 아파트로 바뀌었지만 먹을거리는 여전히 밥이다. 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는 식 분야를, 세계를 상대로 팔아보겠다는 것이 그의 꿈이다.
그러나 ‘방어의 귀재는 공격에 둔재’인 경우가 많다. 한국 식문화가 지켜진 것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세계화하기에 매우 어렵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몇몇 민족은 고유의 식문화를 세계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요리는 세계화된 지 오래이고, 중국과 일본 음식도 세계 진출에 성공했다.
스시 세계화한 일본
인상적인 것이 일본의 성공이다. 민족감정을 접고 일본이 이룩한 식문화의 세계화를 ‘커닝’해보자. 요즘 세계 어느 도시엘 가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스시(壽司, 초밥)’ 집이다. 해외 여행에 나선 한국인들은 마땅한 한식집이 없으면 스시집에 들어가 깔깔해진 입맛을 초밥과 미소시루(일본식 된장국)로 달랜다.
통계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현재 스시는 세계 5대 음식으로 꼽힌다. 나머지 4개는 베트남의 쌀국수, 터키의 케밥, 이탈리아의 피자와 스파케티다. 20∼30년 전만 해도 서구인들은 날생선은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스시 시장이 언제, 어떻게 그토록 커진 것일까.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스시의 세계화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시만 수출한 게 아니다. ‘노렝(暖簾)’이라고 하는 일식집 특유의 치장과 고유의 그릇, 회칼을 비롯한 주방용품, 종업원 복장과 일본식 예절, 그리고 다다미방까지 다양한 일본 문화를 수출했다.
일본에 가서 관광버스를 타보면 모든 비품이 깔끔하고 가지런하게 갖춰져 있고, 운전기사가 친절한 것에 감동하게 된다. 반면 한국의 관광버스에는 컵 걸이가 빠져 있고, 운전기사는 ‘서민적인’ 경우가 많다. 이는 한국 관광버스가 ‘운행’이라는 단품(單品) 서비스 제공에만 주목하는 데 반해, 일본은 제값을 받고 ‘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한 선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닐까?
이런 차이는 음식점에서도 발견된다. 보통의 한국 식당은 그야말로 먹을 것만 판매한다. 그러나 도쿄에서는 뒷골목의 식당도 음식에 친절을 보태 판매하고 비싼 값을 청구한다. 부가가치가 큰 쪽은 어디일까.
판관(判官)은 세계 문화를 주도하는 서구인이 맡아야 할 것 같은데, 이들은 서민풍의 한식당보다는 깔끔한 일식당을 선호한다. 그들에게 한식당은 이국 체험을 해볼 수 있는 1회용 방문처에 불과한 것 같다.
서구인 사이에도 스시 집에서 식사 대접을 받으면 ‘제대로 대접받았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일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는 ‘일류(日流)’가 구축됐다. 사실 ‘일류’를 키운 것은 경단련(經團連)을 중심으로 한 일본 기업인이다.
서구 출장에 나선 이들은 서구 손님을 스시 집으로 초대했다. 그러고는 육고기만 먹어온 서구인들에게 날생선이 건강에 좋다고 강조했는데, 이것이 사실로 입증되면서 스시 집은 날개를 달았다. 일본 제품의 수출 실적은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 뒤로 아기자기한 일본식 정원도 수출되면서 선(善)순환 구조가 생겨나 일본은 세계 일류(一流)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조태권 회장은 우리 음식문화를 세계화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의 양친은 귀국한 재일교포다. 덕분에 그는 경기중을 나와 일본에서 ASIJ라는 미국인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왜색’이란 단어로 비하해버릴 낮은 수준의 일본문화가 아니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화식(和式)’ 문화를 꿰뚫어볼 수 있는 토대를 갖게 된 것이다.
대학은 미국(미주리 주립대 공업경영학 전공)에서 나왔고, 첫 직장은 대우실업의 국제영업 파트였다. 이어 펼친 사업도 무역 분야라 그는 선·후진국을 넘나들며 다양한 것을 먹고, 입고, 놀아볼 수 있었다. 덕분에 일류(日流)가 세계화한 것을 보고 한류(韓流)도 국제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세계를 돌아다닐 때 한국에 정착한 그의 양친은 경기도 광주에서 도자기를 굽고 있었다. 광주는 1883년까지 조선 관요(官窯)가 있던 도자기의 땅이다. 관요의 불이 꺼지자 도공과 그 후예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그야말로 ‘독 짓는 늙은이’가 돼버렸다.
기원전 중앙아시아에는 동아시아에서 생산된 비단을 유럽으로 실어나르는 ‘실크로드’가 있었다. 그리고 중세 때에는 동양에서 제작한 도자기를 배에 실어 중동과 동부 아프리카로 수출하는 ‘세라믹 로드’도 있었다. 조 회장의 양친은 ‘독 짓는 늙은이’의 선배들과 일본 다도(茶道) 사이에 세라믹 로드가 있었음을 간파했다.
일본 茶道와 임진왜란
일본 다도의 틀을 잡은 인물로는 ‘일본의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센노리큐(千利休·1521∼91)가 꼽힌다. 상인이었던 센노리큐는 당시 이미 고급 문화이던 다도를 배운 후 상인 생활을 접고 다도 발전에 전념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는 작은 문을 낸 다실(茶室)을 만들었는데 이 다실은 깨끗하고 청아했지만 매우 좁았다. 이 작은 방에선 최고권력자일지라도 반드시 꿇어앉아 차를 마셔야 했다.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는데, 심미적이고 종교적인 색채의 일본식 다도는 여기에서 시작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심(下心, 겸손)’을 강조하며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은 ‘존경’이라는 이름의 권력을 잡을 수 있다. 센노리큐가 다도로 일가를 이루자 당대 최고실력자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그를 ‘차두(茶頭)’에 임명해 함께 차를 마셨다. 센노리큐와 함께 차를 마심으로써 무력뿐 아니라 문화력에서도 최고임을 과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세를 쥐려 한 것.
오다가 죽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가 권력을 잡았는데, 도요토미 또한 센노리큐를 가까이하며 다도를 일본 전역에 퍼뜨렸다. 그는 다도에 집착했기에 다기(茶器)를 고급화하다 못해 신성화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도요토미와 센노리큐는 결별했다. 전국(戰國)시대를 대표하는 사무라이인 도요토미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센노리큐도 그런 대상 중 한 명이었기에 그는 센노리큐에게 할복을 명령했다. 도요토미로서는 완벽한 복종을 요구한 것인데, 센노리큐는 ‘예술이 정치에 앞선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결심에 기꺼이 배를 그었다(1591년 2월28일). 순교에 가까운 센노리큐의 죽음으로 다도는 더욱 신비화했다.
센노리큐가 죽은 다음해 도요토미는 조선 침공(임진왜란)을 명령했다. 그에 따라 여러 장수가 조선에 상륙했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백자에 청자 빛깔을 넣은 청화백자를 만들고 있었다. 지금도 청화백자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기술로 꼽히니, 이 그릇을 본 일본 장수들은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릇을 송출하다 나중에는 심수관(沈壽官)의 선조인 심당길(沈當吉)을 필두로 한 조선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갔다(1598년).
도요토미가 죽고 임진왜란이 끝나자 최고권력자만 누리던 다도가 각 가문으로 확산돼 엔슈류(遠州流) 등 여러 유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사무라이를 거쳐 서민도 차를 마시게 되면서 일본 다도는 매우 풍성해졌다. 도요토미에 의해 강제적으로 만들어진 해상 세라믹 로드 때문에 일본 다도가 융성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목부용 문양의 분청사기를 박지하는 과정.
도공들은 육감으로 구전(口傳)된 기법을 구현하려 했는데, 가마 속 불길은 그들이 생각하는 데로 타주지 않았다. 이 ‘지랄불’ 때문에 정성껏 만들어진 도자기가 가마 밖으로 나와서는 박살나는 신세가 됐다. 그러다 개중에 진품이 나왔는데 이것이 일본에 수출돼 고가에 팔렸다. 광주요가 성공하자 하나둘 가마터가 늘어났고 위정자들도 관심을 기울여, 실력 있는 도공이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 한국의 도자기 산업이 부흥할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시기에 만들어진 도자기는 한국 고유의 도자기가 아니었다. 일본 다도가 원하는 일본식 도자기였다. 그때까지 한국 고유의 도자기는 박물관에서 긴 낮잠을 자고 있었다. 1988년, 우리 도자기 산업을 부활시킨 조 회장의 부친 조소수(趙小守) 선생이 타계했다. 그러자 어머니 윤규옥(尹圭玉)씨가 ‘일본식’으로 그를 붙잡았다.
“여러 형제 중에서 네가 형편이 좋으니 가업을 이어라.”
조 회장은 “어머니는 내게 ‘평생의 종교’였다. 난관에 부딪혀 무너져내리려고 할 때마다 어머니가 나를 잡아주셨다”고 말한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문화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리고 양친한테서 듣고 배운 도자기 이야기에, 해외 체류 경험으로 체득한 타국 문화를 접목시키며 그만의 문화론을 갖춰 나갔다. 그는 일본식이 아닌 진짜 한국식 도자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도공을 이끌고 박물관 순례에 들어갔다.
박물관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일본과 중국에서는 제작하지 못하는 상감(象嵌) 기법의 도자기였다. 상감이란 도자기의 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그 속에 구리를 비롯한 금속 성분을 넣어 채우는 기술을 말하는데, 이 상감 도자기를 가마에 구워내면 금속이 발라진 곳이 멋진 색채를 발한다. 그런데 열에 아홉, 금속은 강한 불길에 휩쓸려 색깔을 남기지 못하고 날아가버렸다. 역시 ‘지랄불’이 문제였다.
‘지랄불’ 잡아 상감 기술 재현
조 회장은 지랄불을 잡는 방법으로 도공의 육감이 아닌 과학을 동원했다. 여러 차례 실험을 거듭하는 귀납적 방법으로 지랄불이 일어나는 경로 분석에 들어간 끝에, 금속이 날아가지 않는 불길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가마 속에 공기를 많이 넣으면 구리는 산화하면서 푸른빛을 띠지만, 공기 주입을 중단하면 불완전 연소로 붉은색을 띠는 환원 작용이 일어난다. 그런데 산화와 환원을 번갈아 하는 중성(中性) 기법을 쓰면, 한 도자기에서 붉은색과 푸른색을 함께 띠는 상감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러한 성공으로 “광주요 하면 조태권”이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도자기에 일본식이 아닌 한국식 문양을 넣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한국식 문양은 역시 박물관에 있었다. 그는 무궁화과의 낙엽 관목인 목부용(木芙蓉) 문양을 만들게 했다. 상감이 고려청자에 쓰인 기법이라면 조선백자엔 분청(粉靑) 기법이 많이 쓰였다. 분청이란 도자기 위에 유약을 묻히듯 물에 갠 새 흙을 얇게 입히는 것인데, 이렇게 해서 구워낸 자기를 분청사기(粉靑沙器)라고 한다.
이 분청사기에서 얇게 입힌 새 흙(地)을 벗겨내면(剝) 속 색깔이 나오는데, 이를 ‘흙을 벗겨낸다’고 하여 ‘박지(剝地)’ 기법이라고 한다. 그는 분청박지 기법으로 목부용 무늬를 새기고 그 위에 중성기법으로 상감한, 지극히 한국적인 자기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만들어낸 도자기를 보고 즐기는 감상용으로나 판매할 것인가. 그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가 생산된 것은 고려와 조선의 왕족과 귀족들이 이를 그릇으로 썼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일본도 다기 덕분에 도자기 산업이 발전했다.
그는 한국의 부유층을 겨냥해 상감기법으로 만든 분청사기 목부용문 자기 식기와 자기 커피잔을 내놓았다. 부유층을 공략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 무렵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중산층이 3중 유리를 열처리한 ‘코렐(corelle)’ 식기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가온식당에서는 음식을 내열자기를 비롯한 도자기 식기에 담아낸다(오른쪽은 1인용 시루에 쪄낸 떡).
분청사기 목부용문 식기는 손으로 만드는 것이라, 코렐 식기가 구축한 시장을 넘볼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가이고 귀하다는 장점이 있으니 한국 상류층의 문은 두들겨볼 수 있었다. 외국인을 상대하는 상류층은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이것이 적중해 청와대에서 구입해 가고, 삼성을 비롯한 재벌가에서 사가면서 광주요는 일약 고급 한국 식기를 생산하는 회사로 떠올랐다.
單品 아닌 풀코스로 세계화
이 시기 한국도자기(주)와 행남자기 등은 서양 식기인 ‘본차이나’에 가까운 날렵한 형태의 자기를 내놓아 한국의 도자기 식기 시장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광주요는 투박한 그릇만 고집했다. 조 회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식 그릇은 사발이다. 사발은 서민 그릇이던 옹기와도 일맥상통하고 고대로 올라가면 빗살무늬 토기와도 연결된다. 사발을 오므리면 밥그릇이 되고 넓히면 국그릇이 된다. 사발은 사람 손으로 만드는 것이라 똑같은 형태가 나올 수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양이 전부 다른 사발식 식기가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통할 수 있는 한국식 식기라고 생각한다.”
‘음식(飮食)’은 마시는 것과 먹는 것으로 구성되므로, 음식 그릇이 있으면 마시는 그릇도 있어야 한다. 한국적인 마시는 그릇은 무엇일까. 과거 인도에서는 공양을 드리기 위해 깨끗한 물을 담아두는 목이 긴 물병을 사용했는데, 이것을 한국 절에서는 정병(淨甁)이라고 했다. 경주 석굴암에 가보면 정병을 든 범천상을 볼 수 있다. 그는 한국식 마실 그릇으로 정병을 만들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처럼 그릇을 만들고 나자, 여기에 담을 식(食)이 문제로 떠올랐다. 한국과 일본의 관광버스 사례에서 보듯이 단품 위주의 서비스는 세계화에 부적합하다. 당시 한국은 김치와 불고기를 수출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많은 한국인은 ‘한국 식문화가 수출됐다’고 만족해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단품 수출로는 진정한 세계화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봤다. 김치와 불고기뿐 아니라 밥과 국, 찌개 등 모든 것이 세계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떡 벌어지게 차려내는 한국식 ‘한 상’으로는 식문화의 세계화가 어렵다고 봤다. ‘한 상’에는 펄펄 끓는 찌개와 바작바작 굽는 불고기가 있고, 된장이나 김치처럼 냄새를 솔솔 풍기는 발효음식이 한꺼번에 올라오므로 차린 사람 처지에선 보기 좋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세계 문화를 이끄는 사람은,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음식을 먹으므로 이들에게 편리한 차림새로 음식을 내놔야 한다.
“고급 식당은 성장(盛裝)한 신사숙녀가 만나 대화하는 곳이다. 이러한 곳에서는 완성된 음식이 나와야지 완성돼 가는 음식이 나와선 곤란하다. 한껏 차려입은 옷에 냄새가 배기 때문이다. 대화 시간이 긴 만큼 음식도 풀코스로 나와야 한다. 건강에 좋은 발효음식을 전통 옷차림을 하고 고유의 예절을 지키는 종업원이 서빙할 때 이들은 한국 식당을 즐겨 찾게 된다. 이렇게 돼야 한국의 식문화는 세계화에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한식에는 찌개나 불고기처럼 완성해 가면서 먹어야 하는 음식이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 회장은 ‘내열(耐熱)자기’를 만들게 했다. 거의 완성된 음식을 내열자기에 담아 내놓음으로써 냄새를 덜 풍기면서 따뜻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한 것. 이어 ‘떡시루의 개인화’를 시도했다. 1인용 떡시루로 금방 찐 떡을 내놓자 서구인들이 좋아했다. 그는 서울 강남에 내열자기와 1인용 시루 등 도자기 식기에 음식을 담아 내놓는 한식당 ‘가온’의 문을 열었다.
文化는 계급에서 나온다
이와 함께 그는 가온의 세계화를 시도했다. 목표점은 2008년 올림픽을 준비하는 중국의 베이징. 베이징의 최고급 호텔에 최고급 식당 가온을 열어 세계의 문을 두들겨보는 것이다. 이 도전은 초대 (1957년) 미스코리아 출신의 강귀희씨가 프랑스 파리 시내에 연 한식집 ‘르 서울’을 연상시킨다. 르 서울은 강씨가 한국 최고의 주방장을 모셔갈 정도로 열정을 보일 때는 미테랑 당시 대통령이 찾을 만큼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나 강씨가 손을 뗀 다음부턴 명성을 잃었다.
조선 민화 벽지와 단식증류 소주인 ‘화요’를 내놓은 조태권 회장.
돌이켜 보면 이는 맥도날드, 프라이데이 등 세계적 음식 체인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채택한 것인데, 한국 요식업계만 이 부문으로 눈을 돌리지 못했다.
‘비법 전수’는 한국문화를 답보시킨 올가미 줄이었다. 좋은 방법은 감춰두고 혼자 쓰다가 믿을 만한 후배에게만 말로 전해주다 보니, 어머니의 손맛은 딸과 며느리에게도 전달되지 못했다. 일찌감치 과학을 동원해 그 방법을 매뉴얼로 만들어놓았다면 단절되지 않고, 발전했을 것인데….
“주인과 주방장이 바뀌더라도 제 맛만 유지했으면 르 서울은 명성과 명맥을 지켜냈을 것이다. 비법 개발자에게 비법을 매뉴얼화하라는 것은 ‘죽 쒀서 개 주라는’ 형국인지 몰라도, 그러한 노력이 있어야 한국 문화의 저변이 넓어진다. 우리는 체계적으로 우리 문화를 업그레이드 하는 전략을 갖춰야 한다.”
그는 고급 한식이 세계화에 성공해야 대중 한식도 세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도 스시의 국제화가 성공하자 스키야키(鋤燒, 냄비요리)와 덴푸라(튀김요리, 포르투갈어인 tempora에서 나온 말), 라면 같은 서민 요리도 쉽게 세계로 진출할 수 있었다.
“민주사회에서는 계급 구분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지만, 문화는 철저히 계급과 함께한다. 왕족과 귀족이 즐긴 문화가 하위 계급으로 내려가면서 그 나라의 문화는 풍요로워진다. 우리는 왕족과 귀족이 즐긴 문화가 세계화할 수 있는 문화 첨병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문화를 발전시키려면 계급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증류식 소주를 만든 이유
음식이란 말이 있는 걸 보면, 식(食)과 음(飮)은 본래부터 함께하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음이란 술을 뜻한다. 요리를 차려내면서 술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절름발이 차림이 아닐 수 없다. 일본도 스시를 내놓으면서 한국에서는 상표 이름을 따서 보통 ‘정종(正宗)’으로 부르는 ‘일본주(日本酒, 청주)’를 세계화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국의 음(飮) 시장은 식 시장과 달리 외세에 초토화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큰 술 시장은 연 2조7000억원대인 소주이고, 이어 2조5000억원대의 위스키, 2조원대의 맥주, 7000억원대의 와인 순이다. 한국 술인 소주가 1위이긴 하지만 2~4위가 서양에 뿌리를 둔 술이니, 한국 술 시장은 의(衣)와 주(住)만큼 서구화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한국에서는 한식에 메독(와인), 삼겹살에 발렌타인(위스키)을 곁들여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드물다. 한국 식에 어울리는 음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 잠시 잠깐 술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술은 크게 발효주와 증류주로 구분되는데, 증류주는 발효주를 증류해 도수를 높인 것을 말한다. 그런데 술은 만드는 재료에 따라 쌀과 그 유사품(이하 쌀로 표현), 보리와 그 유사품(이하 보리), 포도를 비롯한 과일류(이하 포도) 셋으로 나눠 볼 수도 있다.
쌀을 발효시키면 탁주(濁酒)라고 하는 막걸리가 나온다. 막걸리를 만들면서 위에 뜬 맑은 액체만 걸러낸 것이 청주(淸酒)인데, 일본주가 바로 청주에 해당한다. 보리를 발효시키면 맥주가 나오고, 포도를 발효시키면 와인이 된다. 이 막걸리(청주)와 맥주, 와인을 끓여 증류(蒸溜)시키면 도수가 훨씬 높아진 ‘소주’와 ‘위스키’와 ‘브랜디’가 나온다(브랜디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코냑이다. 샴페인은 샹파뉴 지방에서 나오는 특수 와인이다).
증류주가 발효주보다 건강에 더 좋다는 증거는 없다. 도수가 높기 때문에 과음하면 오히려 해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발효주보다 훨씬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인류는 증류주를 발효주보다 귀한 것으로 여겨왔다(발효주는 오래 보관하면 썩는 경우가 있다).
페르시아에서 나온 증류주
단식증류 소주 ‘화요’는 항아리에서 숙성된다.
그렇다면 아예 쌀을 발효시켜 증류한 소주를 내놓는다면 한국인들은 더욱 좋아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즐기는 작금의 소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었다. 현재 한국 시장을 장악한 소주는 ‘타피오카’란 이름의 태국산 고구마나, 수수, 쌀보리, 밀가루 따위로 만든 것이다. 가끔씩 남아도는 쌀로 만들기도 하지만 대부분 쌀 이외의 것으로 제조한다.
이 원료를 발효시켜 막걸리를 만들고 이를 증류하면 높은 도수의 소주가 나오는데, 이 소주를 여러 차례 더 증류하면(연속증류) 95도 정도의 알코올(에탄올)이 나온다. 이 알코올을 주정(酒精)이라고 하는데, 주정은 순수 알코올에 가깝기 때문에 원 재료의 맛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원재료가 무엇이든 똑같은 주정이 만들어진다.
이 주정에 그 지방 고유의 맛을 가진 지하수를 타서 도수를 낮추고 동시에 적절한 감미료를 섞어 내놓은 것이 한국 소주다. 여러 번 증류해서 주정을 만든 후 물을 타서 희석했기에 ‘연속증류 희석식 소주’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소주는 대량 생산해 싸게 공급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속증류 소주에 대비되는 것이 단 한번 증류해서 알코올 도수 45도 내외로 얻는 단식증류 소주다. 단식증류 소주엔 증류수가 많이 섞여들기 때문에 원재료의 맛이 강하게 남아 있다. 원재료가 고구마면 고구마 맛이 나는 단식증류 소주가 만들어지고, 감자면 감자 맛, 수수 면 수수 맛, 쌀이면 쌀 맛이 나는 45도 내외의 단식증류 소주가 나오는 것이다.
개항 이후 일본에서는 위스키로 대표되는 서양 술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원료로 만든 단식증류 소주의 생산이 장려됐다. 그로 인해 아오모리(靑森)소주나 아키타(秋田)소주 같은 지역 특산 단식증류 소주가 만들어졌다. 이와 별도로 값이 싼 연속증류 희석식 소주도 생산됐는데, 현재 두 소주의 시장 규모는 엇비슷한 상태다. 일본 정부는 단식증류 소주를 ‘일본 소주’로 명명한 후 ‘일본주’와 더불어 전통 국주(國酒)로 지정해 육성해왔다.
청주는 한국에서 먼저 만들어진 것인데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국주가 되었다. 소주도 한국에서 먼저 만든 것인데 일본이 국주로 지정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증류주를 만드는 기술은 페르시아(이란)에서 개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은 이 증류법이 몽골(원나라)에 들어갔다가 중국과 한국, 일본 그리고 유럽에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다.
몽골 기병들은 추위를 이기고 전투력을 향상하기 위한 자극제로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아라키주(酒)’를 가죽 술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마셨다(아라키는 알코올과 같은 단어로 추정된다). 몽골이 고려를 지배하던 시절, 고려의 안동과 개성에서는 막걸리를 증류해 소주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몽골은 여몽연합군을 편성해 일본 정벌을 시도했는데 그 무렵 증류소주 기술이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소주 칵테일 개발
그후 안동과 개성 등지에서는 오랫동안 단식증류 소주 제조술이 전승되었다. 그런데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쌀 부족을 이유로 쌀을 원료로 한 막걸리 제조를 금지하자, 쌀을 원료로 한 단식증류 소주의 명맥이 끊어졌다. 대신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희석식 소주 시장이 급성장했다.
쌀 막걸리 제조는 1988년부터 허가됐는데 그로 인해 안동소주, 문배주, 이강주 같은 단식증류 소주의 생산이 재개됐다. 그러나 값이 비싸기 때문인지 주로 명절 제수주(祭需酒)로 쓰이면서 시장 규모가 커지질 않았다.
반면 희석식 소주는 참이슬·산·처음처럼·시원소주 등 다양한 브랜드를 내놓고 수출까지 하게 됨으로써, 한국은 희석식 소주의 강국이 됐다.
조 회장은 한식에는 연속증류 희석식 소주가 아니라 쌀을 원료로 한 단식증류 소주가 맞다고 생각한다. 이 술을 상위 계급에서 마셔줘야 ‘프랑스 요리 하면 와인’ 하듯이, ‘한식=(단식증류) 소주’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화륜주가’란 이름의 술도가 회사를 만들고 ‘화요’란 이름의 단식증류 소주를 생산케 했다. 그리고 화요를 알리기 위한 적극적인 마케팅전을 펼쳤다.
마케팅 전략의 하나로 그는 소주 칵테일을 들고 나왔다. 그는 ‘술 문화는 마시는 사람이 만들어 마실 수 있는 술이 많아야 발전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위스키와 브랜디 하면 곧 ‘온 더 록스(on the Rocks)’와 칵테일이 떠오른다. 온 더 록스는 술 회사가 아니라 술 마실 사람이 희석하는 것인데, 얼음의 양과 질과 온도와 시간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진다. 한술 더 뜬 것이 칵테일이다. 칵테일은 꿀과 주스에 다른 술까지 온갖 것을 넣고 흔들어줌으로써 탄생한다. 이러한 칵테일에 ‘펀치’ ‘핑크레이디’ ‘선 라이즈’ 같은 현란한 이름이 붙자 서구의 술 문화는 풍성해졌다.
한식을 세계화하기 위해 서구식 식사법인 풀코스를 도입하듯, 술 또한 제조법은 우리 전통에서 찾아도 보편화하기 위한 마케팅 기법은 서구에서 찾아야 한다. 이미 일본도 ‘미주아리(술에 물을 타서 마시는 것)’란 이름으로 그들 식의 온 더 록스를 보편화하지 않았는가. 우리도 단식증류 소주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이름의 칵테일법을 내놓아야 한다. 이런 배경이 있어야 우리의 전통 소주가 부활할 수 있다.”
‘원천 기술은 전통에서 찾고 마케팅은 서구에서 구한다’는 원칙은 화요의 숙성(熟成)에도 적용된다. 영국 주조회사가 오크통에 위스키를 담아 숙성시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그는 오크통 대신 거대한 항아리에 화요를 넣어 숙성케 했다. 항아리는 고어텍스처럼 물 분자는 통과하지 못해도, 공기는 들락거릴 수 있는 숨구멍을 갖고 있다. 그래서 선조들은 된장이나 간장을 항아리어 넣어 숙성시켜온 것인데, 그는 이 아이디어를 차용해 서구식으로 술을 숙성시키게 했다.
탈(脫) 감미료 소주 제조
화요는 대대적인 광고와 함께 40도짜리와 20도짜리 둘로 나눠 출시됐지만, 아직 시장의 반응은 미미한 편이다. 이에 대해 주당들은 ‘맛 문제’를 거론한다. 값이 비싼 만큼 화요는, 희석식 소주에 친숙해진 입맛을 잡아끌 만한 맛을 품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
이에 대해 조 회장은 1970년대 조미료 맛에 현혹됐던 한국인들이 1980년대를 지나면서 ‘탈조미료화’ 했듯이, 소주에서도 탈감미료 현상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탈감미료 현상이 일어나면 단식증류 소주가 주목받게 될 터이니, 그때가 오기 전에 단식증류 소주를 일류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내가 왜 명품을 입고 다니는 줄 아는가? 최고를 만들기 위해서다. 최고를 만들려면 최고를 써봐야 한다. 최고가 되려면 최고의 선생에게 배워야 한다. 명문 대학이란, 쉽게 말해 최고의 선생이 있는 곳이다. 명문 대학에 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최고 선생한테 배워 최고가 되겠다는 의지다.
왜 최고를 찾느냐고? 세계와 ‘통(通)’하기 위해서다. 최고의 한국 식기, 최고의 한국 음식, 최고의 한국 술만이 세계화에 성공할 수 있다. 한국의 최고가 세계를 뚫어줘야 차상의 문화도 대중화란 이름으로 세계화할 수 있다. 그로 인해 한류(韓流)가 형성된다면 한국산 물품의 수출도 덩달아서 잘되는 것이다.”
한류를 일류화하라
전통에서 한국 최고를 찾아내 세계화해보겠다는 그의 노력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최근 그는 조선 민화(民畵)가 갖고 있는 독특한 매력에 주목했다. 그는 한국식당을 치장하는 데는 조선 민화가 제격이라고 판단하고, 조선 민화를 넣은 고급 벽지 제작에 도전했다.
그는 한국문화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같은 사업가는 물론이고 정부와 기업도 함께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태국은 태국류(泰國流)를 일으키기 위해 미국에 태국 식당 1000곳을 개설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 식기에 담긴 일본 음식이 일본 술과 짝 지어 세계로 나갔을 때, 일본 경제가 번영했다. 일본 위정자와 경제인들은 일류(日流)가 국익 진작(振作)에 끼치는 영향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기에 일류 수출에 전념했다. 지금 우리는 운 좋게도 동남아를 무대로 한류(韓流) 열풍을 맞고 있다. 한류 덕분에 수출이 잘된다는 지적이 많은데 우리는 이 한류를 확대 유지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작금의 한류 열풍은 현지인들이 일류를 즐기지 못해서 선택한 대체재적 성격으로 일어난 것 같다. 언젠가 그들도 지갑이 두둑해진다면 더 고급인 일류를 찾을 것이다. 이러한 불행을 피하려면 우리는 빠른 시간 내에 한류의 최고화를 이뤄야 한다. 이것이 조선자기를 부활시킨 선친이 내게 내린 과업인 것 같다.”